my nest

by 김경민 posted Sep 1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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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은 다만 낯선 곳이라는 사실로도 충분히 나를 어렵게 한다.

그 어려움은 또 다른 배움을 만들고, 배움이 익숙해질 때쯤에는 감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제는 아이들을 차로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시간에

좋아하는 클레식을 틀어놓고 흥얼거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을 보니

지금이 운전을 배울 수 있는 낯설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시간인가보다.


캐나다에 있던 4개월 동안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떤 말로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엄마를 잃어버리고 분비는 놀이공원에 홀로 서있는 아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었다.


이제 나 스스로 엄마를 찾아가고 있나 보다.

시간이라는 엄마는 그냥 서 있으면 나와 더 멀어진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시간이라는 엄마를 찾아나서면 오히려 엄마와 더 멀어질 수도 있지만,

나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길을 잃은 아이가 아니라 엄마를 찾아다니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이제야 글을 쓰는 여유가 생긴 것을 보면 하나둘 감사할 수 있는 여유거리가 생긴 것은 아닐까.


시내와 시현이가 학교엘 다닌다.

유난히 까만 머리를 한 나의 두 딸들이

내가 느끼는 멍한 느낌을 가지고 노랗고 빨간 머리들 틈에서 서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메어와 학교를 데려다 주며 울컥거리기 일수였다.


학교에서 혼자 낯선 점심을 먹을 시내를 생각해 점심시간에 아이를 보러 학교엘 갔다.(학교는 3시30분에 파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10분만에 밥을 먹고 내가 오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라는 느낌이 들면 냉큼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모양이 낯선 시간들을 혼자 이겨내기 힘들었나 보다.

그렇게 점심 시간을 조금씩 늘여주었다.

처음에는 12시 10분에 학교엘 갔고,

두번째는 12시 15분에 학교엘 갔고,

세번째는 12시 20분에 할교엘 갔고....


몇일이 지나고 12시 35분에 학교엘 간날...

아이는 내가 오는 길목에 서 있지 않았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틈에서 흙을 파고 또 풀들을 뜯어 뭔가를 열심히 만드느라

나의 가까이 있음도 알지 못했다.


"무얼 만드니 시내야..?"

뒤늦게 날 알아보고는 함박 웃음을 웃어주었다.

"음... nest야  친구들이랑 함께 만들어.."

그러고 보니 모양이 새 둥지였다.

세명의 여자 아이들이 얼마 남지 않은 점심 휴식시간을 둥지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다.



둥지라...

미술치료에서 보면 둥지는 안정감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는 아이들의 그림에 나타나곤 한다.

낯선 나라가 주는 불안정감을 채워줄 둥지가 필요한 시내

새 학년을 시작해야하는 불안정감을 채워줄 둥지가 필요한 친구들..

그들은 함께 자신의 둥지를 만들고 있었다.

손톱에 까만 흙이 박히고 여러번 토닥이고 잔디를 깔아주는 살뜰한 작업뒤에는

그들의 안정감을 채워줄 둥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서로의 마음이 둥지로 모아진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내의 모습이 즐거워보였다.

시내의 마음 속을 날아다니던 낯선 느낌들이

이제 이 둥지에서 잠을 자고 따뜻함을 받고 알을 낳았음 좋겠다.



그래도 참 이상하지.

나를 향해 팔을 뻗으며 달려오던 아이가

친구들 틈에서 나를 잊어버리고 둥지에 매달리는 모습이 흐뭇하면서도

씁쓸한 것은 왜일까...


이런 ..


50대가 된 주부가 자식을 시집, 장가 보내고 나면

그들이 채워준 존재의 풍성함히 사라지고 나면

사랑을 주었던 둥지에서 아이들이 날개를 펴 날아가고 나면

적적함과 공허함으로 '빈둥지 증후군'을 앓는다지.


나도 나만의 둥지가 있다.

시내와 시현이라는 새들을 품을 수 있는 둥지가 있다.

아직은 아이들에게 미치는 나의 사랑의 범위가 너무나도 넓기에

언젠가는 날개를 펴 세상을 향해 날아가야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더 이상 이런 둥지가 필요하지 않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깨닫는다.

조막손으로 만든 내 아이의 둥지를 보면서

내 아이도 자신이 품을 둥지를 만들고 있다는 경의로운 사실을 보면서

좁은 사랑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이제 내 둥지를 살피고 사랑하는 일은

곧 아이들의 날개를 더 강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일임을 깨닫는다.

아이들아 독수리 날개치듯 올라가렴...

세상을 향해 두려움 없이 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