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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예레미아스 | 한국신학연구소 | 1992년 05월  


요아킴 예레미야스( JOACHIM JEREMIAS)

요아킴 예레미야스는 1900년 9월 20일에 독일 작슨 지방의 수도 드레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루터교회의 파견목사인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修學했다.
이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 언어, 역사와 문화에 해박하였다.
그는 20세에 다시 독일의 경건주의의 본거지인 작슨 지방 헤르후트으로 돌아와서 성경선생으로 일했다.
그후 헤르너 연구소, 베를린, 그라이스발트를 거쳐 1935년 이래 1979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괴팅엔대학교 신학부 신약학 교수로서 강의했으며 수 많은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서로는 [예수의 비유],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예수의 성찬어록],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말씀들], [예수의 기도], [신약성서신학 제 1부] 등이 있다.
그는 신약학자로서 역사적 예수의 말을 찾는데에 노력을 하였다


목차    

1.경제적 상황
2. 수공업
3. 상업
4. 외국인여행
5. 사회적 상황
6. 부자
7. 중간계층
8. 빈자
9. 예수시대 예루살렘 주민의 자산상태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10. 사회적 상층계급
11. 민족적 순수성의 보존


비록 자유주의 신학자이지만
또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것에 몰두하여 이루어낸 책이지만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의 정치 사회적
경제적인 여러상황들에 대한 균형잡힌 자료를 접할 수 있다.


성경을 읽는 다는 것은
2000년 이상의 간극을 두고
이당과 저 땅의 문화와 환경을 넘어서야하는 일이다.
물론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일들을 할 수 있으나
좀 더 깊이 그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하며
나아가 그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으리라.

성경은 너무 이성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않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을 무시하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는것이 쉽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심으로
당신의 말씀을 잘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셨기에...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요하힘 예레미야스



제1부 경제적 상황

I . 수공업

이 시대의 전형적인 산업형태는  수공업이다. "자기 자식에게 수공업을 배워주지 않는 사람은 마치 강도질을 가르치는  사람과도 같다.  이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대부분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1. 예루살렘 사람들의 직업과 직업조합

가. 일반 직업

1)소비재 제조업
(1) 가정용품
우리는 유다에서는 모직물을 ,갈릴리에서는 아마  제품을 여자로부터 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양모 가공업이 유다의  특산물이었다.  양모 가공은 결혼한 여자들이 종사해야하는 노동이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직조업을 경영했다.  직조업은 여자들이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이었는데 남자들이 그것을 경영할 때에는 멸시받는 직업이었다.  철공업은 신시가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2) 사치품
시리아에서는 향유와 수지가 생산되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올리브가 가공되었다.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출품은  기름이었다.  수지와 기름의 제조도  예루살렘의 발전된 수공업이었다.  마르코복음 16장 1절에는 예루살렘에서 향유가 판매되었다고 언급한다. "그 여자들은 그에게 가서 그의 몸에 기름을 바르려고 기름을 샀다" .  대체로 사치와 관련된 수공업은 헤롯 왕궁으로 인해서 번창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생각해 볼것은 공예품이다.  두루마리의 필사자의 작업도 공예품 가운데 하나였다.
  요약하면 시리아 속주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수공업들이 예루살렘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공예와 기름 제조는 중요한 역활을 했다.

2)건축업
(1)건축물
헤롯 가문의 통치자들은  건축을 좋아하는 군주들이었다.  그래서 건축업은 그들의 통치하에서 그리고 후세에 예루살렘의 주된 업종이 되었다.
(2)건축노동자- 대부분의 건물은 사치스러웠기  때문에 공예업의 활동범위는 넓었다.  외부 치장과 내부치장, 재료의 공급과 가공의 풍부한 다양성과 값비싼 공임을 놓고 매우 다양한 공예업이 서로 경쟁하였다.  노동자들과 공예가들 이외에 건축물을 유지하는 노동자들도 필요했다.
수로, 성벽, 성탑 및 예루살렘에 필요했던 모든 시설의 유지는 성전 금고에서 지불되었다.
요약하면 주후 70년 이전에 예루살렘은 많은 건축물들이 세워졌고 화려한 건축물도 건립되었다.  이로 인해 건축업과 공예업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3)식료품업
기름 제조업이 발달했다.  예레미야 37:21 은 옛날부터 빵 제조업체가 조직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강우량이 적은  해에는 물을 판매하는 직업도 있었다.  마가복음 14:3에 언급된 물나르는 사람은 가정 노예가 아니라면 위에서 말한 물 나르는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이다.
  예술산업이나 건축  공예나 건축업이나 직조업이나 기름  제조업은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수공업이었다.
  나.  수공업 길드
수공업의 조직은 우선 수공업자들의 동일한 장소에 모였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렇지만 이를 능가하는 길드적 조직이 있었던 것 같다.

  다.  성전 건축과 제의에 관여한 수공업
성전 건축에  고용된 자들은 누구보다도 석공이나  목수나 공예가들이었다.  사제들은 거룩한 구역을 건축하기 위해서 교육을 받아야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석공 기술을 배운 사제들도 있고 미장 기술을 배운 사제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전이 건축되는 82혹은 84년 동안 제의는 한시간도 중단되지 않았다.  진설병 제조자들과 흠향 제물 제조자들은 제의에 소비되는 물품을 만들었다.
성전의 휘장의 관리도 할당되어  있었다.  제단사는 사제들의 예복을제작하는 데 필요했다.  우물 감독관은 성전용 급수의 책임을 맡았다.  그 밖에 성전 의사도 있었다.  끝으로 성전 이발사가 있었음은 틀림없다.  나지르인  서원의식이나 레위인의 성별의식이나 나병 치유자의 정결의식은 이발사의 존재를 전재한다.

그러므로 성전은 건축기간에 수공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제의를 끊임없이 진행시킴으로써 수공업의 중심을 이루기도  하였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고정 관습들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도급제로 일했다. 한편 임금은 매우 충분하였다 . 성전 제의에 관련된 어떤 수공업들은 몇몇 가문들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이  직업을 세습하였다.  진설병과 흠향제물의 제조가 그런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많은 수공업자들 특히 석수들과  목수들과 공예업자들이 성전 건축에 종사하였다. 그 이외에도 상임 수공업자들이 제의와 관련된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성전 수공업자들은 그들 나름의 노동 조건들과 관습들을 형성하였다.

2. 수공업에 영향을 미친 예루살렘의 특성

가.  수공업에 영향을 미친 예루살렘의 위치

  예루살렘은 수공업의  매우 불리한 지역에 있었다.   대부분 원료는 부족하였다.  무엇보다도 물이 모자랐다. 역사상 예루살렘의 특산품을 생산해 내는 수공업이 그곳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의 지리적  상황이 수공업에 얼마나 부적당했는가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다.

나.  수공업에 영향을 미친 예루살렘의 문화적 중요성

1)경제적 중요성
예루살렘은 원방 무역보다는 근방  교역에 더 종사하였다.  예루살렘이 이러한 교역의 대가로 지불한 수입원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전의 막대한 수입을 들  수 있다.  둘째로, 이방지역 유대인의 왕래를 통해 수입이 예루살렘으로 수입되었다. 세째로, 최소한  자주적인 통치자들이 유다를 다스렸던 시대에는 세금 수입이 위에 말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넷째, 무역에 불리한 위치에 있음에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관통하는 도로들이 있었던  까닭은 예루살렘의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중요성 때문이다. 끝으로, 옛부터 예루살렘은 자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유인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2)정치적 중요성
궁정과 예루살렘이 거주했던 국가  지도자들은 큰 문화적 요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치품을 생산하는 수공업을 장려하였다.  의료행위도 이러한 요구들 가운데 하나였다.

3)종교적 중요성
예루살렘은 성전도시이다.  성전이 수공업의 제공한 잇점들은 비할 바 없이 많았다.
성전의 돈으로 예루살렘의 건축물들이 유지되었고, 예루살렘이 청소되었고 도로가 포장되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경건하게 헌금을 하였으므로 성전 수공업자들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순례자들은 기념품 산업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많은 순례자들은 예루살렘 특산물을 집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전은 수공업의 중심지였다. 일군의 수공업자들이 성전 건축에 종사하고 또 다른  수공업자들은  항상 제의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였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비록  예루살렘의 위치가 수공업의 발달에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화적 중요성 때문에 예루살렘 안에서는 수공업이 개화하였다.

  II.  상업

1) 예루살렘의 상업에 관한 정보들

가.  개관: 예루살렘의 상품 수입 및 거래 경로

상인이라는 직업은 매우 존중받은  직업이었다. 사제들조차도 상업에 종사하였다.  대사제 가문도 유망한 상업에  종사하였다. 예루살렘의 상품 수입 및  거래 경로를 살펴보자.  긴 대열을 이루곤 하는 낙타대상들은 먼 지역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상품을 가져왔다.  인근 교역의 경우에는 운송용 짐승으로 나귀가  이용되기도 하였다.  상업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도로의 안전이었다.  헤로데는 도둑의 횡행을  막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다행스럽게도 예루살렘 시장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시장세를 징수했던 세금청부업자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세금을 납부할 경우에만 사람들은 저자에 나가 그들의 상품을 거래 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곡물시장, 과일시장, 가축시장, 목재시장, 살진짐승을 파는 시장이 있었고 심지어 노예들을 전시하고 판매했던  특별한 경매석도 있었다.  대도시 예루살렘은 물가가 비쌌다.
예루살렘 주변 지역의 마을에서  생산된 물품들은 생산자의 손에서부터 직접 소비자의 손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심지어 물물교환은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 널리 통용되었던 것이다.

나.  원방무역

여러 자료들에 비추어 볼때  원방무역은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원방무역에 갖은 중요한 영향을 끼친것은 성전이었다.  그 밖에 원방무역의 상품은 식료품, 귀금속, 사치품, 옷감이었다.

다.  근방교역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옛날에도 근방교역의 중요한 역할은 대도시에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예루살렘에 수입된 주요  식료품은 밀과 올리브와 가축이었다.  기름이나 올리브는 유다로부터 공급되었고 곡물은 팔레스틴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공급되었다.

1) 농산물 수입
(1) 곡물수입
기근이 닥칠 때에는 무엇보다도 곡물이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는 곡물이 식료품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가정을 해야한다.  곡물은 예루살렘 인근지역에서 재배되었다.
예루살렘에 대한 곡물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이례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곡물이대단히 먼 곳에서 수송되었기 때문인것 같다.  예루살렘 인근지역의 생산품을 개별적으로 시장에 내다 팔았으나  보다 먼 지역으로부터 곡물을  수송하는 것은 대상들의일이었다.  예루살렘시장의 곡물거래는  매우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성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뒷거래가 이루어졌다.

(2) 과일과 야채수입
곡물은 주로 유다인이 살지 않았던 팔레스틴 지역으로부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요르단 지방으로 부터, 부차적으로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부터 공급되었다. 과일과 야채는 주로 올리브와 포도주,  무화과와 야채가 재배된 예루살렘  인근지역으로 부터, 예루살렘지역으로부터 공급되었고, 올리브와 포도열매가 재배된 유다로 부터, 부차적으로 공급되었다.

2) 가축수입
예루살렘 가축 수입에 관한  행정명령을 안티오쿠스대왕은 그의 왕국 전역에 걸처 반포했다.
"말이나 노새나 야생나귀나  길들인 나귀나 표범이나 여우나  토끼의 고기와 유다인들이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모든 짐승들의 고기는 예루살렘의 수입되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 이런 짐승의 가죽을 수입해서도 안되며,  끝으로 이런 종류의 짐승을 예루살렘에서 길러서는 아니된다.  단, 옛부터 하나님과 화해하는 제물로 쓰여졌던 동물들은 수입해도 무방하다".

3)원료와 상품의 수입
원료와 "상품"곧  목재,석재,양모,도자기는 팔레스틴으로 부터  공급되었으며 , 그것도 성전수요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유다로부터 공급되었다.

근방무역은 주로 예루살렘의  생활필수품을 공급하였고 부차적으로 예루살렘의 수공업자들에게 원료를 공급하였다.

2. 상업에 끼친 예루살렘의 특성

가. 상업에 끼친 예루살렘의 지리적 위치

1)유리한 점- 예루살렘은 유다 전지역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의 중앙이며 온 땅의 중심지이다.

2)실상 - 이러한  사실들로 부터 상업에 유리한  도로가 있었다고 추론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예루살렘이 산악지대에 외따로 떨어진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어떻게 해서 교역이 활발하고 해상 교통로가 유리하게 전개된 한 속주의 중심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예루살렘의 실상이다.  예루살렘에서 봉기가  발발하여 예루살렘 당국이 치안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팔레스틴 지역은 강도의 불법행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그러나 강도의 위협 보다 더욱 더 괴로운 것은 예루살렘과 연결된 도로망이 부족했던 것이다.

나. 상업에 영향을 끼친 예루살렘의 문화적 중요성

1) 예루살렘의 경제적 중요성
예루살렘의 주변지역이 곡물재배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비옥하지 않았고 또한 예루살렘 주변 지역에서 소가 거의 사육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량 사정은 더욱 더 나빠졌다.  지리적 상황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는 가장 중요한 생활 필수품도 생산되지 않았고 다른 생활 자료 곧 가장 중요한 원료들도 생산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경제적 상황이 수입과 수출을 요구 했으므로 사람들은 상업에 불리한 지리적 위치라는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정치적 중요성
직접적인 영향- 왕들의 높은 문화적 욕구 (비싼 건축 자재 조달)
간접적인 영향- 민족 자본은 예루살렘을 상업의 중심지로 만듦.
예루살렘의 정치적 중요성은 무역에 활력을 불어 일으킴.

3) 종교적 중요성
성전제의를 위해서도 가장  질이 좋은 목재와 포도주와  기름과 곡물과 훈향제품이 필요하였다.  사람들은 희생 짐승을  많이 수입하였다.  축제 순례자들은 제 2의 십일조를 예루살렘에서 소비해야 했다.  예루살렘의 상업이 중요하게 된 까닭은 바로 성전 때문이었다.  유다인은 매년성전 금고에 헌금을 바쳐야했는데, 바로 이러한 우회로를 통해 전 세계의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의 상업이 기여한 셈이다.

II. 외국인 여행

1. 예루살렘의 외국인 여행에 관한 정보들

가. 원거리 여행
예루살렘의 외국인 내왕은 게르마니아로  부터 바르티아 왕국을 거쳐 에디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그 당시에 알려진 거의 전 세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예루살렘의 외국인  여행은 우선 종교적인 동기에  의해서 다음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바빌론과 에집트와 시리아와 소아시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예루살렘에 여행하였다.

나.  근거리 여행
팔레스틴의 나머지 지역 사람들은 거래 때문이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의무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였다.  제의가 그리짐산에 집중되어있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경우는 예외였다.  팔레스틴으로부터 온 축제 대상들이 때때로  크게 증가하게 된 또다른 이유는 예루살렘이 모든 메시야운동의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근거리 여행은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을 예루살렘과 결합시켰던 종교적 의무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유다에  있어서는 예루살렘과의 경제적 정치적  관계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외국인 여행에 영향을 미친 예루살렘의 특성

가. 여행에 영향을 미친 예루살렘의 문화적 중요성

1)정치적 중요성
예루살렘은 유다사회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예루살렘에는 산헤드린이 있었다. 산헤드린의 영향은 유다에 가장 강력하게 미쳤다. 세 번의 순례 축제들은 성전에서 거행되었다.
축제 집회의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에 격동기에는 축제 대상이 엄청나게 증가되었다.

2)종교적 중요성
예루살렘은 바리새파  사람의 중심지였고 오랫동안  세계 그리스도교 중심지였다. 예루살렘은 종교적 대망의  목표였다. 무엇보다도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다.  사제들이나 레위인들이나 교대로 직무했던 순례 성소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직무를 교대하기 위해 성전으로 갔다. 전세계의 유다인들은 일년에 세 번 성전으로 몰려들었다.

제 2부 사회적 상황

A. 부자와 빈자

I . 부자

1. 궁전
화려한 궁정 생활을 하는  통치자들의 부요함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인지되었다.  왕에게는 일부다처제가 율법에  따라 허용되었다.  미쉬나가 허용한 최고의 부인은 18명이었다.
요세푸스는 통치자들의 방대한 지출을 충당한 수입에 관하여 몇가지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는 헤로데의 영토를 분활받은  상속자들의 수입을 계산하였다.  그 계산에 따르면 헤로데의 전 영토에서 거의  960달란트가 세금으로 징수되었다.  헤로데는  1000달란트로 그의 모든 지출을 충당할 수 없었고, 아그립바 1세는  1200달란트로 그의 지출을 충당할 수 없었다.  끝으로 선심 공세나 뇌물도 항상 통치자의 수지계산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였을 것이다.

2. 자산 계층

1)사 치
부자들의 잔치는 중요한 비증을 차지하였다.  사치비용의 두번째 중요 부분은 여인들의 지출비용이었다.  그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여러 부인을 두고 가계를 꾸려 가는  것은 엄청난 금전 부담을  초래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부자만이 일부다처제를 누렸다.  귀족 가문들은 딸들이 결혼할 때 많은 액수의 지참금을 주었다. 여기는 시아버지를 위한 배당금도 있었다.  숙녀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사치품 수요- 향수와 화장품, 장신구와 금실이나 은실로 고정시킨 의치 등  -만을 위해서도 지참금의 10%를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2)자산 계층의 대표자들

예루살렘은 예전부터 팔레스틴의 민족자본을 유인하였다. 대상인 ,토지소유자, 세금 청부업자, 대금업자들이 그것이다.  사제 귀족은  자산가 계층에 속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대사제 가문들의 집에서는 사치가 극심하였다고  한다.  대사제들의 정규 수입은 어느 고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요세푸스는 주후 66년 유다-로마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 격동기에 "대사제들이 파렴치해져서 그의 종들을 타작마당으로 보내 사제들에게 돌아갈 십일조를 강탈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그래서 이제까지 십일조를 생계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영양부족으로 죽게 되었다"고 보도한다.
평사제들의 가난한 상황과  대조되는 사제 귀족 부유함이  우선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다음 우리는 사제 귀족이 성전 금고에 매우깊이 관여했고 , 그의 후손들을 성전금고 관리인의 지위에 임명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II. 중간계층

먼 곳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하여  큰 창고에 그것들을 보관하는 대상인들 이외에 시장에 소규모 점포를 가지고 있는  소상인들도 있었다.  또한 자기의 작업장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서 임금을 받고 일할 필요가 없는 수공업자들은 예외없이 중간계층에 속하였다.
사제들도 중간계층에 속하였다.  예루살렘에  거주한 사제들은 재산이 많았고 교육 수준이 높았던 것 같다.

II.  빈 자

1. 노예들과 날품팔이꾼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에서 노예가 매매되었다는 사실은 노예 경매석에 의해 밝혀진다.
노예 소유는 농업 경제에서  중요한 역활을 수행하지 않는다.  날품팔이꾼은 노예보다 훨씬 많았다.  날품팔이꾼은 먹여주는 것 이외에 평균 1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다.

2. 구호금으로 생활하는 주민들
타인의 구호금에 크게 혹은  전적으로 의존하는 주민들이 많았다는것이 예루살렘의 특징이었다.  이들 가운데 먼저언  급해야 할 사람들은 율법학자들이다.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무엇으로생활하였을까? 탈무드에 의하면 수백명의 랍비들은 수공업자들이었다고  한다.  만일 사도바울이 선교활동 기간에 수공업에 종사하였다면 그는 분명히 예루살렘의  랍비처럼 생활비를 스스로 버는 방식을 후대에까지 유지한셈이다.

율법학자들은 주로  구호금으로 생활하였다. 프란쯔  델리취는 "율법학자들이나 지혜교사들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사례비에 의존하거나  .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의 할당금에 의존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성전 금고에서 출연한 구호금으로 의존하였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제들처럼 고정된 수입을 받았던 일련의 율법학자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또한 성전에 고용되어 해마다 바치는 성전세에서 급료를 지불받은 율법학자들도 고정 수입을 가지고 있었다.  끝으로 위에서 언급한 바를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가난을 언급하고자 한다. 예수는 가난한 가문 출신이었다.   예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둘 곳 조차  없었다.  결코 돈을 휴대하지  않았고 보조금에 의존하였다.  그러므로 전반적으로 보아 랍비들은 가난한 주민들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IV.  예수시대 예루살렘 주민의 자산상태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들

1. 정치적 상황

1)세금
국가는 주로 세금을 높임으로써 세력을 강화하였다.  세금은 헤로데 대왕의 통치 하에서 무자비하게 징수되었다.  헤로데와 그의 친척들 및 친구들 그리고 세금 징수자들 내지 세금 청부업자들과 그 부하들에게 바치는 뇌물들과 현물 징수와 특별 과세는 민중에게 훨씬 더 큰 부담을 안겨주었음은 틀림없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옥외 설교에서  군인들에게 "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너희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고 권면한다.  벨릭스는 뇌물을 받기 위해 바울을 가이샤랴에 억류했다.

2)전투와 약탈
정치적 혼란기에 예루살렘은 유다의  수도로서 그리고 성전 도시로서 극심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예루살렘이  헤로데 치하에서 평정을 되찾았다  할지라도 헤로데가 죽은 후 주로 로마의 통치하에서 전쟁의 환란이 새로 나타났다.

2. 종교와 제의

1)사회 사업
자선은 유다인의 신심에 큰역활을 하였다.  우리는 예수의 설교에서 자선이 차지하는 역활을 과소 평가 해서는 안된다. "너희의 재산을 팔아 자선을 베풀라. " 그러므로 예수의 견해에 따르면 자선을 위해 재산을  사용하는 것은 계명을 철저히 이행하는 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경건한 축제 순례자는 순례할 때 자선을 베풀었다. 자선이 예루살렘에서 행해질 경우 그 행위는 특별히 보상을 받을 만한 일로 간주되었음에 틀림없다.
사적인 사회사업과 공적인 사회사업 중간에는 종교 공동체의 사회사업이 있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모든 도시에 교단 요원을  상주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의복과 기타 생활용품을 공급하게 하였던 에쎄네파와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러한 사업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시 공동체  안에는 토지 소유를 포함한 자발적인 재산 공동체가 있었으며 , 이 재산 공동체는 사회사업을 할 수 있었다.

이제 공적인 사회사업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채무가 면제되는 안식년 규정      2)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 규정
3) 수확기에 가난한 자들이 주장할 수 있는 법률적 요구 등

2)수입원으로서의 순례자 내왕
순례자들의 제 2십일조는 7년을 주기로 한 기간의 처음 6년 동안 납부되었다고 한다.
필로는 제 2의 십일조는  사제들에게 납부해야할 세금으로 파악했고, 반면에 제 1의 십일조는 레위인들에게 납부되어야 할 세금으로 파악하였다.

3)예루살렘의 주요수입원은 제의를 매개로 한 수입이었다.
제의는 사제귀족이나 사제 계급이나  성전 고용원들의 생계를 해결해 주었다.  성전 금고로부터의 방대한 지출과 경건한 사람들의 제의 행위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예루살렘의 수공업과 상업에 소득원을 제공해 주었다.

  요약해 보면 예루살렘 주민들의  자산상태와 관련되는 예루살렘의 특성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엿볼 수있다.
1) 자선에 의존하는 주민들이 많다는점.
2) 한편으로는 이런 점으로 인해, 또다른 한편으로는 궁전과 사제귀족의 존재로 인해 야기된 사회적 고립의 긴장상태 .
3) 예루살렘의 복지가 그곳의 종교적 중요성에서 기인했다는 점.
B.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I 사회적 상층계급

  1. 사제 계급
  1)대사제
   대사제가 지도자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이 대사제직의 제의적인 성격, 즉"영원한 거룩함"때문이다.  대사제는 이 직무의 제의적인 성격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자로서 공동체를 속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대사제는 서품식을 통해 이러한 성격의 직책을 부여받았으며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대사제복을 받았다.
이 대사제복은 속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대사제직의 제의적인 성격을 특정짓는 것은 그의 죽음이 속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사가 죽으면 바로 그 날에 피의 복수를 면하기위해 도피성읍 들에 도망가 있었던 살인자들도 자유의 몸이되어 고향에 갈 수 있었다.

이러한 대사제는 그에게만 허용되었던 특권을 누렸으며 그에게만 부여된 위무를 수행했다. 첫째, 그가 누렸던 가장 중요한  특권은 일년에 단 하루 , 죽음을 면치 못하는 피조물로서는 유일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제의에서 대사제가 누리는 특권은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제물을 바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대사제는 상을 당한 경우에도 제사를 봉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네번째로 대사제는 "성전의 성물들"이 직무를 수행한 사제들에게 분배될 때 제일 먼저 선택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밖의 다른 특권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사제가 유다인의 최고 행정기관이며 최고 재판소인 산헤드린의 의장이라는 점이다.   대사제들의 또 다른 직위상의 의무들은 그의 제의 능력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사제의 정결규정들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대사제가 자기 지위에 합당한 예식을 치루는 것도 대사제가 직책상 수행해야  할 의무들에 속했다.  헤로데가 대사제직을  제거하기 위해 대사제를 자의적으로임명하고 또한 대사제 귀족들이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특권들을 무시하면서  평범한 사제 가문 출신의 사제들 가운데 아무나 대사제로 임명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사제의 권위를 뿌리채 흔들어 버리는 조치였음에 틀림없다.  헤로데 이후  로마인의 통치시대에도 대사제직은 더이상 평생직도 세습직도 아니었다.
2)고위 사제들과 고위 레위인들

서열표: 대사제 - 대사제의 대리인 - 12인의 고위 사제 - 주간 당직 사제들의 통솔자
         - 12인의 고위 레위인들 - 주간 당직 레위인의 통솔자.

성전 경비 대장이나 성전 감독이나 창고 책임자는 성전 제의와 결부되어 있는 직책이었고 이들은 항상 예루살렘에 거주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전국에 퍼져 살고 있었던 24개조의 주간당직 사제들 가운데 지도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제들은 각각 일주일간씩 24주간과 그 밖에도 세 가지 순례 축제때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했다.

성전 경비 대장직은 성전 경비 대장을 지내지 않았던 사람은 대사제로 임명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서열상으로 볼 때에 성전 경비대장 아래에는 주간 당직 사제들의 통솔자 24명과 일직사제들의 통솔자가 있었다.
제의 거행과 성전 재정 관리와 성전 감독은 고위 사제들과 고위 레위인들이 관장했던 세가지 직무였다.  신약성서에는 고위사제들이 성전에서  독립된 지위를 갖고 있었던 재판관이나 행정관으로 언급되어 있다.

고위사제들은 성전 행정을 맡은 집단으로서 유다가 성전에 되돌려준 "배반자의 삯"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였다. 결국 이들은  "피의 삯"을 성전 금고에 넣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성전경찰의 고위 관리로서 이미 산헤드린에서 결정된 예수의 체포를 상의하기도 했으며 , 성전 광장에서 사도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하기도 했으며, 예수 부활을 조작하지 못하도록 무덤 경비를 명하기도  하였으며 , 사도들이 성전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옥 경비를 명하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고위 사제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이러한 사실의 중요성은 고위 사제들이  사제귀족에 속했다는 사도행전 4장 6절의 진술에 의해 증대된다.
그러므로 사제들이 전부 고위 사제직에  오를 수 있는것은 아니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제들간의 사회적인 격차는 다른 진술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탈무드와 요세푸스의 일치된 보도에  따르면 성전이 파괴되기 직전에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그밖의 다른 사제들  사이에는 날카로운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탈무드는 고위사제의 횡포에 대해 개탄한다.  탈무드는 고위사제들의 권력정책과 친척등용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3)사제 귀족
예수 시대에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관에 따르면 사독 대사제 가문은 아론 이후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대사제직을 세습했다고한다. 역대상 5장 29-41절은 아론으로부터 포로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느헤미야  12장 10-11절은 주전 4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사독 가문이 한번도 빠짐없이 대사제직을 맡은 것으로 나와있다.
아론으로부터 셀류커스왕조의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이르기까지 사독 가문이 한번도 빠짐없이 대사제직을 세습했다고 보는 주후 1세기 유다인들의 역사관 만큼은 확인할 수 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대사제의 임명에 관여하고 종교적안 박해를 가함으로써 사독 가문의 대 사제직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독가문의 합법적인  세습에 의한 마지막 합법적인  대사제는 오니아스 2세였다. 주전 175년 안티오쿠스 4세의 명령으로 그의 동생 예수 (야손)가 그의 뒤를 이었다.  야손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안티오쿠스 4세에게 많은  돈을 바치고 예루살렘에 그리스 관습을 도입할 것을 약속하였다.  야손이 불법적으로  대사제에 임명됨으로써 대사제직의 계승에 혼란이야기되었다.  안티오쿠스4세는 그이 재임 3년째 되던해인 주전 172년에 그를 해임하고 그대신 비사독 가문 출신인 메넬라우스를 대사제로 임명했다.   메넬라우스는 사제계급인 빌가 가문 출신이었으며 그는 안티오쿠스 4세에게 보다  더 많은 세금을 바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백성들이 아직도 살아있는 오니아스 2세를 합법적인  대사제로 간주한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오니아스 2세는 메넬라우스의 위계에 위해 주전 172년 말 내지 171년 초에 암살되었다.

주후 1세기에는 두부류의 대사제  가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비합법적인 가문이요 다른 하나는 합법적인 대사제 가문이었다. 합법적인 대사제 가문은 레온토폴리스의 오니아스 성전에서 재직하고 있는 사독 가문과 이 가문의 직계가문들뿐이었다.  비합리적인 대사제가문들은 주전 37년이래 우연과 정치의  파도를 타고 가장 높은정신적 직위로 부상한  인물을 한 명 이상 배출한 사제가문들을 말한다.  평범한 사제가문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백년 이상 대사제직을 차지했던 하스몬가문은 비합법적인 대사제가문으로서  헤로데에 의해 멸절되었기 때문에 주후 1세기의 대사제가문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독가문이 비록정치적으로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백성들의 의식 속에는 영향력있는 비합법적인 대사제가문들 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있다.
신약성서는 잘못해석되는 경우가 많은 사도행전4장 5-6절을 통해 새로운 계급의 친척등용제도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이 신흥계급은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계급은 자신들에게 결여된 합법성을 부와 권력에 의해 보완할 수는 없었다.

4) "일반 "사제들

이 사제들은 유다민족 내부에서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혈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혈통공동체의 계보는 아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사제직은 이 혈통공동체에 의해 세습되었다.
예수시대에는 사제들이 보통24개의  사제혈통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 사제혈통들은 안식일에서 다음 안식일까지 순서에따라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에서 직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이 혈통들은 "______ 조"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다.
우리는 일직조에 속했던 사제들이 대체로 30명 이상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제들이 안식일과 속죄일에는 평일보다 더 많은 직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조석으로 바치는 번제 이외에도 또 다른 공동체 제물들이 봉헌 되어야 했기때문이다.

사제가 제의기능을  수행했던 기간은  세가지 순례  축제기간과 연2  주간 정도였다.  나머지 10-11개월동안 사제들은 고향에 살면서 매우 드문일이지만 사제로서의 직무도 수행했다.  가령 완치된 나병환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율법에 규정되어 잇는 정결제물을 바치고 나서 최종적인 정결 선포를 받기 전에  그 지역의 사제에게 정결 선포를 받기 위해 찾아온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데 십일조나 그 밖의   다른 세금으로부터 주어진 사제들의 수입은 이들이 일년 내내 아무 일을 하지않고도 살 수 있을 만큼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제들은 고향에서  직업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헤로데는  천 명의 사제들에게 목수일과 석수일을 가르쳐 사제의 뜰 안에 있는 성전을 개축할 때나 성전이 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비느하스가 사제로서  석수였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제요 사독의 아들인 랍비 엘르아잘도 예루살렘에서 장사를 했는데  아마도 기름과 관련이 있는 장사였던 것 간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가 있는 즈가리야의 아버지는 예루살렘의 사제였는데 그도 예루살렘에서 고기장사를 했다.  아자르야의 아들 사제 엘르아잘은 많은 짐승들을 사유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제들 가운데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율법학자들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사제들은 지방재판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들을 지방재판관으로 삼은 이유는  사제직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요.   율법에 정통한 사제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율법에 대한 학식 때문이며,또한 성서의 규정을 준수하기 위함이었다.
시골에 사는 사제들 가운데에는 필로가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회당예배 때 율법을 낭독하고 해석하는 일을 기꺼이 맡길  정도로 율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제들이 있었는가 하면 전혀  학식이 없는 사제들도 있었다.   우리는 많은사제들과 대부분 사제귀족에 속하는 고위사제들 간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언급한바 있다.  그러므로 주후66년 로마에 대한  봉기가 발발했을 때 많은  사제들이 무분별한 젊은 귀족과는 결탁하면서도 다른 고위 대사제들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민중의 편에 섰던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5)레위인들 (하급 성직자들)
신명기사에 의해 레위인으로 격하된 사제들의 후손인 레위인들은 하급 성직자들이었다. 사제들은 레위인이었던 아론의 후손으로서 레위의 후손들 가운데에서 높은 계급에 속했지만 아론의 가문의 사람이었던 사독의 후손들인  합법적인 대사제들은 대사제들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은 사제들  가운데 하급 성직자에 속했으며 제의 자체에는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이들은 성전의 음악을 담당하였으며 성전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이들의 지위를 엿보게 해주는 특정적인 사실은  무엇보다도 성전 건물에 발을 들여 놓거나 제단에 들어가는 것은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사형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레위인들은 음악가와 성전일꾼으로 나뉘었다. 이들의 수효는 거의 비슷했다.  가수들과 음악가들은 레위인들 가운데 상층계급을 이루고있다.  이러한 직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흠없는 가문의 출신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만 하면 되었다.
레위인 음악가들은 성전건물이 있고  사제들만 출입할 수 있는 사제들의 앞뜰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들은 평민과 마찬가지로 제물을 바칠때에만 사제의 앞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전일꾼들은 여러가지  허드렛일을 했다. 첫째 이들은 제의와  관련된 온갖 직무를 수행하였다.  두번째로 , 성전일꾼들은 성전 청소도 했다. 그렇지만 레위인들은 제물을 바칠 경우를제외하고는 사제의 앞뜰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사제의 앞뜰에 는 청소를 할 수 없었다.  사제 앞뜰에는 사제들이 했다.  끝으로 레위인들은 성전 경찰 직무를 수행하였다.

성전 음악가들과 성전 일꾼들 사이에는 사회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격차는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에스라 시대에만  해도 "가수들과 문지기들"은 레위인 집단에 속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레위인  가문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레위인 집단에 먼저 편입한 사람은  가수들이었다. 그후 이들은 레위인 집단 내부에서 문지기보다 더 높은 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음악가들은 사제들과  동등한 지위를 추구하였으며  문지기들은 음악가들과의 동등한 지위를 간절히 원했다.

6)사제직의 세습제도

사제와 레위인의 지위는 세습되었으며  세습 이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이 직위를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문의 순수성을 보존하는일은 사제와 레위인에게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이를 위해 이들은 족보를  소중하게 보관하였으며 혼안법을 엄격하게 제정하였다. 자신의 가문이 합법적인 가문임을 입증하지 못하는 사제의  경우에는 그 자신은 물론 그의 후손 들도 사제직의 권리와 사제직의 수행 관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불법적인 결혼을 할 경우 이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사제직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조건을 구비해야만 제의행위를  수행하는 데 흠이 없는 합법적인 가문 출신의 사제와 레위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는가? 그가 사제나 레위인인 아버지와 이와 동일 혈통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을 경우에만 합법적인 가문의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2. 평민 귀족

사제 귀족 이외에도 평민 귀족이 있었다.   산헤드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고위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그것이다. 원로의 집단에 속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평민적인 귀족"을 대표하고 지도하는 비사제 가문의 수장들이 사제귀족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포로기 이후의 유다사회의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이 생겨났다.
예루살렘의 최고법정은 레위인과 사제들과 가문의 수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최고법정은  평민귀족들과 사제귀족들의 대변자들로 구성된 귀족원로원들이었다. 신약성서는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제 3의 집단으로서 "원로"란 말 대신에 "백성의 지도자들"이란 말을 단 합번 사용하는데 이것은 '원로'들과  동의어로서 매우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부유한 대토지 소유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은 이 집단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부유한 귀족가문들은 유력한 사제귀족들과  제휴함으로서 백성들의 생활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하스몬 왕가의  시대부터 알렉산드라 여왕의 즉위  이전까지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위 사제들과 함께  산헤드린을 구성하였으며 통치자를 보좌하면서 정부와 사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 여왕때부터 그들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의 치하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산헤드린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대다수의 민중들은 점점 더 바리새파 사람들을 추종하게 되었다.
사두개파사람들이 헤로데 대왕과 투쟁하는  가운데 , 특히 보에뚜스의 아들인 대사제 시므온이 오랫동안 재직하고 있었던 기간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내적인 결속력도 증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세력을 저지할 수 없었다. 주후 1세기 처음 50년동안에 대사제의 정치적인 위세가 약화되자 그 결과 평민 귀족도 몰락하였다.

국가의 몰락은 일반귀족의 몰락을 의미했으며 또한 사제귀족과 평민귀족의 동맹에 기초한 사두개파의 몰락을 의미했다. 가문의 특권에  기초한 과거의 상층계급인 사제 귀족과 일반귀족은 강력한 신흥 상층계급인 율법학자들에 의해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3. 율법학자
종교적인 세습귀족과 세속적인 귀족으로 구성된 옛날 상층계급 이외에 주전 1-2세기 동안 율법학자들이 새로운  상층계급으로 부상하였다.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의 출신은 매우 다양했다. 가난한 율법학자들이 중요한 역활을  했던 것은 가문 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비천한 출신이고 가난뱅이이며 소시민적인 직업을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역활을 했던 것이다.
오직 지식만이 율법학자들의 힘이었다. 서품을 받아 율법학자단에 가입하고자 했던 사람은 수년동안의 정규적인 연구과정을 마쳐야했다.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들만이 토라에서 유래한 전승들의 전달자요 창조자였다.
율법학자들은 교육 활동과 그들의 생업이외에도 이러한 "제도 교육에 기반을 둔 직업 "에 종사하게 되었다. 율법학자들은 고위 사제들과  세속 귀족 가문사람들을 제외하고 최고의 기관인 산헤드린에 들어갈 수 이는 자격이 주어진 유일한 집단이었다.
율법학자들이 민중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종교법에 관한 전승 자료 자체에  정통했기 때문이거나 이러한 지식 덕분에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비의적인 전승,즉 비의적인 지식의  담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비의론은 분산 고립된 신학적인 가르침들이 아니라 강력한 신학적인 체계요 ,체계화된 가르침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영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성직자와 동일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율법자들이 율법학자 직위를 얻을수 있었던 것은 사제들처럼 가문을 입증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주변에도 그의 가르침을 전수받으려고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율법 학자들이 율법학자 직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 그것을 가르침과 재판과 설교를 통해 선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로가 된  사울은 가물리엘 1세에게 배우기  위해 길리기아의 다르소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이주했다.  그것은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이 유다교 신학과 법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거룩한 비의적 지식의  전달자이며 교사인 율법학자들을 옛날 예언자들을 존경하듯이 한량없는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공경했던 것은 당연했다.
율법학자들의 말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바리사이파 공동체를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 무조건 순종하였다.  사두가이파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이 전승에 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 까닭은 주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역할이 약화되고 주후 2세기 이래 문서화된 현존하는 전승들이 전적으로 그들의 적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서만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에 무지한 사람의딸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율법학자의 결혼대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4.  부록 : 바리사이파 사람들
상층계급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며 대다수는 성서적인 지식이 없는 민중 출신이었다.  율법학자들의 세력상승이  곧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세력상승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적극 강조되어야 할  점은 이 공동체가 폐쇄적인 공동체였다는 사실이다.  주전 2세기부터 바라사이파  사람들의 단체는 폐쇄적인 동맹체를  이루고 있엇다.  에쎄네파도 출현하였다.
바리사이파 공동체에 속했던 구성원들의 수효는 헤로데시대와 왕국확장시대에 그 수효는 "6천명이상"이었다고 한다.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의 비난은 다음과 같다.
1) 이들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종교법적인 짐을 지워놓고 스스로는 그 짐을 회피한다.
2) 이들은 하느님이  보낸 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려고  하면서도 예언자들의 무덤을 세운다.
3) 이들은 그들의 지식을  활용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지식을 비밀로 함으로서 대중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는 길을 차단해 버린다.
4) 이들은 의복과  인사받기와 자리배정을 통해 자신의  명예욕을 만족시키며 특히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요구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비난은 다음과 같다.
1) 자기 자신의 내면은 불결하면서도 겉으로만 정결규정을 준수하는 이들의 위선
2) 율법의 종교적 도덕적인  규정들은 무시하면서도 율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채소들과 소채의 십일조를 내는 위선  우리는 이러한 비난들이 신학적인 학식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과 도리어 이러한 비난은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의 종교법적 규정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태5장 21-48절은 "옛전승"을 전달하고  해석하는 율법학자들에 대한 비난만을 언급하고 있으며 "6장 1-8절" 에도 "위선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몇개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위선자 "는  바라사이파 사람을 말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신약성서 시대에 산헤드린 의회원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회의 석상에서 한  발언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갈릴래아의 사분봉왕인 헤로데 안티파스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II.  민족적 순수성의 보존

예수시대의 유다사회 전체의 계급문화는  민족의 순수한 혈통보존이라는 기본사상에 의해 좌우되었다.   순수한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것은 오로지  합법적인 가문출신의 이스라엘 사람들뿐 이었다.  혈통상에 흠이  있는 모든 가문들은 순수한 민족 공동체의 핵심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이렇게 배제된 것은 사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즉 이 민족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민족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순수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마지막 때의 약속들도 순수한 혈통을 보존한 민족의 핵심 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5.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

1) 혈통의 합법성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직자들 과 함께 순수한 이스라엘을 형성하고 있었다.  모두 자신의 족보를 샅샅이 알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도 그의 바로 윗 세대에 속하는 선조들이 누구인가를 알았으며 자신이 12 부족 가운데 어느 부족의 출신인가를 말할 수 있었다.
외국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제와 혼인관계를 맺고자 할 경우 위로 5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족보를 심사 받아야 했으며 공적인 직책을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도 가문의 합법성을 심사받아야 했다.
사적인 성격과 공적인 성격을 띤 평민가문들의 구전족보전승과 문서족보전승이 있었다는 것이확실하게 밝혀졌다.

2).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민적인 권리들
가장 중요한 특권은 "딸을  사제와 결혼시킬수 있는 "합법적인 이스라엘 사람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중요한 명예직들과 고위공직들은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차지였다 최고의 사법기관인 산헤드린과 23인으로 구성된 형사법원  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사람은 순수한 혈통임을 입증해야 했다.  샴마이파는 힐렐파와는  달리 훌륭한 집안의 아들들에게만 입학을 혀용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에쎄네파가  새로 가입한 회원들의 명단을 혈통에 따라 작성하고 혈통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는 것도 언급해야할 것이다.  매우 중요한 시민적인 특권들은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차지였다.  가장  중요한 특권은 종교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가문들은 순수한 혈통 덕분에 그들의 조상들이 이룩했던 공로를 세습적으로 상속받게 된다.

(1) 사람들이 흔히 가리키는 것처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로를 물려 받았다.
(2) 더 나아가 자기 선조  가운에 의인이 있다면 그 이스라엘 사람은 이 선조의 공로를 이어받고 그의 중보를 받는다.
순수한 이스라엘 가문들만 메시야의 구원에 동참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의 순수한 이스라엘 가문들이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자녀들을 결혼시키기 앞서 장차 자기의 사위나 며느리가 될 사람의 족보들을 조사했던 가장 큰 이유이다.

6. 천대받은 직업들과 유다인 "노예"

1)천대받는 직업들
@ 당나귀몰이꾼, 낙타 몰이꾼, 뱃사공, 마부, 목동, 소매상인, 의사, 푸주간 주인 : 이들은 대부분 파렴치하고 도벽이 심했다.
@ 개똥 수거자, 구리 대장장이, 무두장이 : 직업과 관련된 악취때문에 혐오감을 일으키는 직업들이었다.
@ 금세공, 아마빗제조자, 절구석공, 행상인, 이발사, 무두장이: 자기의 직업으로 인해 훨씬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수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 일을 여인들과 함께 해야 때문에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의 의장직도 맡을 수 없었다.
@ 투전꾼, 고리대금업자, 비둘기, 경주자 ,세리 :속임수를 쓰는 직업들이며 법률적인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직업들로 간주되었다.  투전꾼, 고리대금업자, 비둘기경주자, 휴경년의 과일장수는 사실상 유명한 사기꾼들이다.   세금징수업와 세금을 높게 사정하는 세리들 과 그의 부하직원들도 자신의 직위를 부당한  부를 증식하는 데에만 남용하였다.
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공적으로도 법률에의해 권리를 박탈당하고 천대를 받았다. 그들은 재판관이 될수 없었으며 이방인 노예와 마찬가지로 증인으로서 진술할 수 없었다.

  2).  유다인"노예들 "
노예 상태로 전락하는 경우는 다음 세가지 경우이다.
  (1)가장 흔했던  것은 도둑질로 인한 경우였다.  이것은 도둑이 자기가 훔친것에  대해 배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2) 자신의 의사에따라 곧 자발적으로  자기를 판매함으로써 노예가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성인인 이스라엘 사람만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극빈자에게만 허용되었다.
  (3) 지금까지는 성인 이스라엘  남자들이 노예로 팔리는 경우에 대해서만 언급했지만  이스라엘 여자들도 노예로  팔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12세 미만의 미성년 여자아이 에게만 한정되엇다.  아버지는 출애굽기21장 7절에  근거하여 미성년자인 딸을 유다인에게 팔 수 있는 가부장권을 가지고 있었다.  유다인 주인 아래 예속되어 있는 노예들의 예속기간은 만 6년이었다.

8.  비합법적인 이스라엘 사람들
1)사소한 결합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공통점은 이 집단들이 레위인이나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과 결혼한 경우 그 결혼은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었지만 사제가문들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은 이들에게 금지되었다.   이들은 특정한 관직을  차지할 수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명예직들도 차지할 수 없었다.
(1)비합법적인 사제의 후손들
어떤 사제가 자기와 혈통이 다르거나그 밖의 다른 이유로 결혼이 금지되어 있는 여인과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을 말한다.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근본적으로는 비 합법적인 사제의후손들을 사제계급에서 제외시키는 것에 찬동했다.
비합법적인 사제가문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2) 개종자들
이들은 할례와 침례를 받고  제물을 바침으로써 유다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일컫는다.  마태복음 23 장 15 절  에서 추측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세대에 디아스포라에서도 완전 개종자를 한사람 얻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그러나 이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 로마 세계엔는 유다적인 사조가 확산되어 있었지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개종자들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바와 같이 거룩한 도시에서 명망이 높았던 율법학자들 가운데 개종자들의 후예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종자들의 법률적 지위는 어떠했는가? 개종한 이방인들이 모든 점에서이스라엘 사람과 똑같은 자로 취급되어야 한다.  는 규정은 개종자들이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과 똑같은 권리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종자들도 모든 유다인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유다교인들이 개종자에 대해 갈수록 더 부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개종자들은 이스라엘에서 나병환자만큼이나 나쁜 평을 받았다.  개종자들이 공직에 임명될 수 있는 권한에 대해 살펴보면 개종자들은 산헤드린 과 중죄인 판결을 내리는 23인 법정 의 일원으로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일 개종자가 이 재판의 판결에 가담했을 경우 그  판결은 무효가 되었다.  개종자들에게 합법적인 족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법률적인 손해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손해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3) 이방인 해방노예
유다인의 노예로 일하다가 나중에  방면된 이방인 여자들과 남자들이며 유다인 주인의  소유로 넘겨질때 할례와 침례를 받은 자들이었다.  이들이 방면될 수 있었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소유자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방면되는  경우 .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해 속전을 지불하고 방면되는 경우 .  증인이 있는 데서 주인이 노예의 눈이나 이빨을 하나라도 빠지게 하거나 "24개의 골절" 가운에 하나라도 손상시켰을   경우 .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종자 주인이 개종후 낳은 자식이  없어 상속자를 남기지 않은 채 죽었을 때 방면되는 경우.  "노예다 되었음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베풀어지는 침례" 를 받지 않음으로써 아직 주인의 소유로 완전히 넘겨지지 않은 노예는 "자유인임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베풀어지는 침례"를 받음으로써 스스로 자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이방인 노예들이 해방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2) 큰 결함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1)사생아
사생아는 무엇인가?  "결혼해서는 안된다  "라고  금지되어 있는 관계로부터 태어난 모든 후손들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멸망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모든 후손이라고 한다.  사생아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법률적인 지위는 "사생아는 야훼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정도이다.   이들이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개종자와 해방노예들과 큰 결함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뿐 이었다.
사생아란 단어가 가장 나쁜 욕설이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즉 사생아라고 욕한 사람은 39대의 태형을 선고받았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큰 결함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생아와 환관들이었다.  신명기 23장2-3절에 근거한 랍비  의 율법은 이 사람들의 권리가 없는 계급으로 낙인찍음으로써 공동체와 특히 사제들로 부터 이들을 격리시키려고 애를 썼다.
9. 이방인 노예들
이들은 유다인 공동체와 매우  밀접한 생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유다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노예들의  사회적 지위는 어떠한 재산도 소유할수 없었다  즉 그의 노동의 소득은  주인에게 귀속되었으며 습득하거나 선물받은 것이다.
유다인의 소유로 넘어간 이방인 여자 노예들과 남자노예들은 "노예임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거행되는 침례"를  받아야 했다.  여자노예에게는 이  침례가 유다교로의 개종을 의미했다.
이방인 남자노예는 한편으로는 노예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할례를 받은 자였기 때문에 독특한 중간적인 위치에 놓일수 밖에  없었다.  즉 그는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계약의 아들 "이긴 했지만 이스라엘공동체의 구성원은 아니었다.
노예는 주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유다교의 종교법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첫째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똑같이 안식일에 휴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과월절  식사를 포함하여 과월절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주인은 그를 이방인에게 팔 권리를 가지고있지 않았다.

10. 사마리아 사람들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공동체로부터 배척당한 후 그리짐산위에  그들의 성전을 세우자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심각한 긴장이 조성되었다.   주후 1세기는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첨예한 대립관계를 맺고 있었던 시대였다.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증오한 예수살렘 성전에 간다는 이유 때문에 사마리아를 지나면서 숙소를 제공받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마실물조차 얻어먹지 못했다 .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인에 대해 배우 엄청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이방인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았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종교적 모임을 함께 갖는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구약 중간기에 유다인이 사마리아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한경우는 헤로데 대왕의 경우 뿐이다.  헤로데는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사마리아 여인 과 결혼을 하였다.
주후 70년 이전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유다인의 태도와 이방인들에 대한 유다인의 태도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

11.  부록:여성의 사회적 지위
동방의 여성들은 공적인  생활에 참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사회에서 존중을 받지못했다.  비천한 계층의 여인들은 종들로 둘러 쌓인 귀족부인들처럼 완전한 유폐생활 을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약혼운 처녀가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처녀가 결혼을 하게되면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결혼은 보통 약혼식 이후 1년 안에 거행되었다.
부인이 여자 노예와 법률적으로 다른 점은  첫째, 결혼때 가지고 온 지참금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둘째, 남편과 이혼하거나 사별할  때 그녀에게 지불되는 금액이 기록된 증서를 담보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인의 첫번째 의무는 가계를 돌보는  것이다.  남편의 술을 주조하고 남편의 얼굴과 손과 발을 씻겨주는 것도 부인의 의무에  속했다.  부인의 순종은 종교적인 의무에 속했다.  생명이 위태로울 때 제일 먼저 구출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남편들이 었다.  그것은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인은 자기 이외에 첩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부인의 지위는 이러한 한계 안에서 각각 달랐다.
첬째 부인은 부인의 혈연들 특히 부인의 형제들에게 의존 했는데 이것은 가정에서 부인의 지위에 매우 중요했다.
둘째, 자녀들의 소유 특히 아들의 소유는 부인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부인들의 종교적이 권리들도 종교적인 의무들과 마찬가지로 제약되어 있었다.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유례없을 정도로 새로운 것이었다.  그는 일부일처제를 찬성했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이혼을 철저히 금지했다.
예수는 이처럼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결혼을 높이  평가하고 성화시킴으로써 결혼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선언한 성서의 말씀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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