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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풍경일 때
이를 찍을 수 있는 사진 작가가 있다면...


가난한 이들을 찍으면서
그들을 동정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사랑하며
그들의 행복속에서 진실을 발견한 작가 최민식


그의 글과 사진들을 보면서
손 부끄러움을 다시 경험한다.
나도 사람을 찍고 싶고 그들을 담고 싶었는데
그들의 영혼과 삶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리라.


"난소공"을 지은 조세희씨가 쓴 작가 최민식에대한 글이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이다.
그 표현 처럼
그의 평가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아래는 조세희씨의 글을 원문 그대로 옮겨보았다.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조 세 희(소설가)

사진을 보는 것과 글을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일에 속한다.
말과 사진은 똑같이 대상을 표현하고 똑같이 분위기를 갖지만,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소설을 쓰는 나의 경험에 의하면, 나에게 감동을 주는 사진은 예외없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담고 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내가 써야 한 말의 숫자는 갑자기 늘어난다.
최민식의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과 지금도 겪고 있는 일, 그리고 그것이 크고 깊어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상처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최민식은 1957년에 사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민족 단위의 수난과 상처를 더듬어 볼 때 나는 자꾸 좀더 먼 과거, 한 세기 전으로 올라갈 필요를 느끼고는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보게 되는 것은 영상으로 기록된 재난들이다. 물론 우리 민족이 피사체가 되어 처음으로 사진이 앞에 섰던 해는 1871년이다.
정확히 말해 백열여섯 해 전에 있었던 일로서, 미국의 극동함대가 강화(江華) 해협을 침입한 그 해의 사건을 우리는 신미양요(辛未洋擾)라고 배웠다. 살색이 흰 저들은 총칼로 무장을 한 병사와 철제 대포에다 옛날 사람들이 처음 보는 또 한가지를 전함에 싣고 왔었다. 그것은 사진기였다.
우리 땅에서는. 무명에 솜을 넣어 지은 바지와 저고리를 방탄용 군복으로 입고 눈 파란 군대와 목숨 건 싸움을 하다 포로로 잡혔던 강화 수비대의 병사들이 처음 보는 기계 앞에 참을성 있게 서서 사진 찍힌 첫 번째 조선인이 되었다. 그 전쟁에서 조선군은 삼백오십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내침군 가운데서 죽은 자는 단 세 명밖에 안 되었다.

사진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첫 모습은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그때 역사를 보면 강력한 군대를 가졌던, 이른바 백인 문명국들은 세계 도처로 나가 참 많은 것을 저희 본국으로 끌어갔다.
군대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역시 일정 기간 훈련을 받은 선교사들도 이교도들이 밀집해 사는 지역으로 가 큰 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군대와 경찰처럼 총기나 진압 무기로 무엇을 파괴하든가 억압하지 않고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을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런데, 현지 주민들이 바꾼 것은 신(神)뿐이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성경과 십자가에다 문물이라는 것을 끼어 갖고 황색인, 흑색인의 나라로 파견되어 가 개종자들이 그들 자신의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일종의 문화적 세례까지 아울러 주었던 것이다. 물론 지역에 따라 군대와 선교사의 도착 시기에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어디서나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간 것은 백인 자본가 단체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그대로, 식민지와 식민지 영유국 사이에는 각기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역사나 경제학 관계의 책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영토로부터 달콤한 것들을 끌어가게 된 이 시기의 일을 표현한 매우 간략한 문장 하나, 즉 "세계는 비로소 분할을 끝냈다"를 대하게 된다. 이 제국주의 체제가 단단한 자리를 굳힌 착취의 전시기를 통해 큰 발전을 보인 것 중의 하나가 사진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놀라운 힘을 갖고 세계 곳곳의 일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군대가 찍었든, 아니면 선교사나 다국적 기업이 찍었든, 또는 세계 재분할기에 등장해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힌 일본이 찍었든, 그들이 남겨 놓은 사진 속의 우리 모습은 모두 1871년의 그것을 닮았다.
나는 그 사진들을 볼 때마다 심한 통증을 느낀다.
"보라." 사진이 하는 말이다.
"이때만 해도 너희는 한 민족으로 서 있었다." 그 끔찍한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단일 민족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와 전통이 다른 종족, 부족까지 또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유색의 소수 민족으로 숱한 고통을 당해 온 다른 땅 구성원들이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며 서둘러 민족을 형성해 새 국민국가로 설 때, 우리는 그들과 반대되는 길을 걸었다.

우리는 부서지고, 깨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에서 또 고통받는 불쌍한 '반쪽'으로 서서 불쌍한 또 다른 반쪽을 정말 눈물나게도 서로 뿔 달린 마귀로 몰고, 그것도 모자라 남이 주는 총으로 서로를 불구대천의 적으로 쏘고, 결국은 반신불수에 반쪽은 사람이고 나머지 반쪽은 마귀인 흉측한 괴물로 존재하게 되었다.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지금 세계에 이런 민족은 우리말고 또 없다.

나는 이 지점에서 최민식을 만나게 된다. 유럽인이 만든 작은 사진기에 미국 이스트만 코닥사의 흑백 필름을 넣어 들고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조국을 찍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작가의 모습을 나는 상상할 수 있다.
사진기라는 도구를 들어 눈에 댔을 때, 그의 망막을 아프게 찌른 것은 상처 입은 동족의 슬픈 얼굴이었다.
민족주의는 박살이 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통과 억압이 아주 넓게 퍼져 있는 땅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희생자들이 직면한 악몽과 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재난 겹쳐지는 땅의 제2세대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강의 첫 모습을 기억하는 제 1세대는 장기간 계속된 식민 치하에서도 내내 언어에만 매달려 있었다.
누구나 보기만 하면 알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서의 사진을 그들을 잘 몰랐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이 누구보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이고, 또 누구보다 사회적인 것으로 사람들의 눈에 비쳐진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떠올릴 그러한 미의 추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거리 모퉁이에서 호옥 숨 한 번 쉬고 국수발을 빨아올리는 어린 여자아이, 단지 살아남기 위해 이중 삼중 뼈 휘는 노동을 해야 하는 여인, 조국의 번영을 말하는 선거 벽보 밑에서 이제 막 잠이 든 가난뱅이,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당장 먹을 것도 없어 골목 어귀에 쪼그리고 앉아 그대로 죽고 싶을 뿐인 가장, 하루 종일 일 나간 부모를 기다리다 해질녘에 기어코 슬픔을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자선을 바라는 눈 먼 걸인, 거리에 던져진 아버지와 아들, 더러운 집, 물 안 나오는 동네, 부족한 일자리, 조악한 식사, 굵은 주름이 이마를 덮은 지친 노동자 ― 이러한 사진을 보는 것은 우리가 생각도 하기 싫어하는 악몽을 다시 꾸는 것과 같다.

최민식은 바로 이 악몽과 같은 우리 땅 현실과 맞서며 사진가가 된 사람이다.  
물론 이것이 아주 특수한 경우는 아니다. 개인이 자기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여러 억압과 그것에 대한 자기 몫의 책임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여 말 그대로 '고집 불통의' 작업을 계속한 작가들의 예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파푸아뉴기니아인의 표현을 빌면, 장기간에 걸친 압제와 고통이 이 예술가들을 태어나게 했다.
어느 곳에서나 조국의 현실을 깨닫고 민족을 재발견하는 지점이 그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남이 주는 고통을 언제까지 가만히 앉아 받을 생각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들은 대륙과 대양, 또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거기다 종교·언어·피부·전통 등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이질적인 요소를 잔뜩 갖고 있었지만 어디서나 민중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폭로하고 그 현실에 저항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따라서 그들의 작업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바로 알도록 하는 수단이 되었는데, 우리 땅에서는 최민식의 외롭게 이 작업을 해 왔다.
불같은 아프리카의 한 흑인이 "모두 똑같은 몸짓으로 신음하며 달라붙은 뱃가죽으로 빈곤의 지도를 그렸다"고 표현한 이른바 어두운 제 3세계쪽 예술가나 그들에 관한 자료를 구해 보기 어려웠던 때에, 빛이 가득한 세계만 찍기를 바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자와 사진은 무엇보다도 예술적이기 때문에 먼저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미주의자들에 둘러싸여 이 어려운 작업을, 그것도 삼십 년 동안이나 계속해 온 유일한 작가로 나는 최민식을 이해해 왔다.

문학·미술·음악·연극 등의 분야와는 달리 민족적 현실 인식 또는 민중적 내용-형식과 연결지어 말할 작업이나 운동이 우리 사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소설을 쓰는 내가 사진에 관심을 가지며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이지만, 내가 취재를 나가기 위해 사진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이는 우리가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도덕적인 것들을 끌어내기 위해 사진의 힘을 빌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표현을 달리했을 뿐이지, 없는 도덕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사진이라는 지나친 믿음을 그는 갖고 있었다. 그것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진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우리시대의 텔레비전이나 신문, 그리고 대중 인쇄매체들을 통해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사진들을 찍어 들여다보며 혼자 중얼거리고는 했다.
정부는 어디 있나? 우리 정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물론 이 물음은 해방된 조국, 그리고 해방된 조국의 학교에서 점령국의 언어가 아닌 훌륭한 우리 국어로 조국의 교사에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지금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야 나는 사진이 갖는 기능 가운데서 우리가 힘 빌어야 할 한 가지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기본 과제 해결에 그렇게 열등할 수 없는 민족인 우리가 버려두고 돌보지 않는 것, 학대하는 것, 막 두드려 버리는 것, 그리고 지난 시절의 불행이 떠올라 몸서리치며 생각도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즉 재소유시키는 기능이었다.
이 문맥에서 볼 때, 장기간에 걸친 최민식의 작업을 쉽사리 뛰어넘을 것은 없다. 그의 사진은 보다 '예술적'인 작업을 꿈꾸는 사람, 또는 사진을 회화처럼 '미학적으로 소비'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사진의 사회성을 높이 사려는 사람들에 의해 평가받고 또 더없이 값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무엇에 점령당하지 않은, 이 말이 모호하다면 남의 사진에 휘말리지 않은, 그리고 출발이 늦었던 후진 세계에 도착해 힘이 센 괴물처럼 행패를 부린 서양 사진에게도 결코 유린당하지 않은 모습을 최민식의 작업에서 보고는 했다.

물론 초기의 그는 몇몇 미국 사진가들의 작업과 그것이 거둔 성과에 주목했을 수도 있다.
저희 사진의 역사를 말하는 미국인들은 흔히 사회 개혁 의지가 강했던 사진가로 도로디어
랭을 필두로 한 경제 공황기의 다큐멘터리 작가들을 꼽고 이들의 사진이 훌륭한 것은 '사실을 보도하는 힘'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움직이는 힘'에 있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뷰먼트 뉴홀 같은 이는 랭의 사진을 '정확한 기록인 동시에 감동적인 해설'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랭은 그들, 즉 그녀가 찍은, 경제적으로 핍박받는 인물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과 동정심'을 가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다큐멘터리에 '미'는 해로운 존재가 된다 굳게 믿었던 이 시기의 이른바 미국식 휴머니스트들은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위해 사진 작업을 계속했다. 누구보다 반 심미적이고, 그것이 사회가 되든 정치가 되든 제도가 되든, 자기가 사는 세상에 이바지 할 것을 생각하며 작업한다는 점만 따지면 최민식은 '이미 끝나버린 주제에 매달리는 이해할 수 없는 작가'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끝나버렸다니! 최민식의 현실이 그의 동시대 작가들에게 과거가 되는 것은 그들이 남의 땅 작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저쪽을 기준 삼았다.
최민식이 현대 사진 문법과는 이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암흑기의 다큐멘터리 작가들을 아는 데 비해 자기들은 우아한 에드워드 웨스턴도 알고, 세계 사진가를 무릎 꿇게 한 앙리 까르띠에-브레쏭도 알고, 리차드 아베든도 알고, 젊은 로버트 프랭크―그러나 실제로는 얼마나 늙었는가―와 이상한 듀안 마이클, 섬뜩한 다이안 아버스, 최근에는 집시들을 따라다닌 요제프 쿠델카에다, 사진에 관한 고상한 에세이를 쓴 롤랑 바르트, 수전 손타그 그리고 발터 벤야민까지, 그들은 정말 아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서양 사진에 대한 잡다한 상식, 기술, 재료들로 자신을 무장한, 그리고 현대 미술 사진에 마약처럼 묻어 있는 향락의 정신까지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바로 그들 "자신의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예술'만 생각하고, 민족이 당하는 고통에는 등을 돌렸다. 그러나 최민식은 달랐다.

초기의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랭의 고전적 작품에 <하얀 천사의 행렬>이라는 것이었다.
뉴홀에 의하면 랭은 '그녀가 깊이 느꼈던 동정심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도록 '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는 빈민들을 사진 찍었다.그때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사진가가 기계에다 필름과 동정심을 함께 넣어 들고 다가간 바로 그 현장 소식을 접하고 「임시 야간 숙소」라는 시를 썼다. 그는 사진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사진이 갖는 비판적인 힘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잠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쪽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사명감을 갖고 따라다녔던 일터 잃은 노동자, 처량한 농민, 더러운 골목안 빈민, 거리를 배회하던 무숙자들은 얼마 안 가 사라졌다.
그들은 흡사 몸집 큰 자선가가 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장으로 들어가 화력 막강한 무기를 만들며 지겨운 가난과 작별했다. 인류에게 전쟁처럼 나쁜 것은 없다.
도처에 흘러 넘쳤던 표적이 사라지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그 예술가들의 얼마는 기계를 놓았고, 얼마는 전쟁을 치르며 공룡처럼 더욱 거대해진 저희 조국을 선전하는 사진을 찍었다.
최민식의 사진을 볼 때마다 이것이 그들과 우리의 다른 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끝이 있었지만 최민식에게는 끝이 없었다. 이것이 최민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최민식의 사진을 동정심 발라놓은 랭의 사진이 아니라 깡마른 브레히트의 말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했다.
이상하게도 이 백인의 시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감상자로 하여금 조용히 감상만 하도록 놓아두지는 않는다. 그것은 최민식의 사진이 우리에게 시간과 상관없이 유효한 것과 마찬가지다.

최민식은 1957년에 사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사진집 「인간」여섯 권에서 뽑아본 작품 대부분은 1961년부터 작업한 것들이었다.
1961년이라면 우리가 잊을 수 없는 해이다. 그 해에 군부가 등장했다.
이번에 그의 작품을 가려 보며 그 동안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 새삼스럽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 우리와 같은 민족은 또 없다.
바로 이 생각 때문이었는지, 신채호가 우리 역사를 읽다 떠올렸다는 가슴 아픈 시 네 구가 최민식의 사진을 보는 지금의 나에게도 떠올랐다.
그 시는 이러하다.

콩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이 가마솥 속에서 우는구나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데
서로 지짐은 어찌 이리 각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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