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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훼퍼 -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2008.05.23 10:46

폭우 조회 수:432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물음은 오늘을 사는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이지 만, 불의와 싸우며 양심과 말씀에 따라 산 20세가 진정한 독일의 개혁가 디트리히 본훼퍼가 일생동안 고민했던 물음이었다. 이러한 크리스천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디크리히 본훼퍼는 예수님께 서 요구한 "나를 따르라"라는 제자의 삶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그 해답을 제시한다. 본훼퍼가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한 시 대적 사명인 제자의 삶은 기독교가 현실에 도피적인 자세를 갖지 말고 현실에 관심을 가질 것과, 세상을 세속 공동체로 분리해서 보 는 이원론적 사고를 버릴 것과, 종교적 행위보다는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사는 실천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뜻한다.
본훼퍼는 1906년 2월 4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 카알 본훼퍼는 의사이며 대학 교수였다. 8남매 중 7번째인 본훼퍼는 아버지와 어머니 집안 모두 명문 출신의 전통 있는 가문에서 성장해서인지 그의 신앙과 학문은 어릴 적부터 탁월했었다. 어느 날 본훼퍼는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인 아버지 에게 "병든 사람들에게 돈을 받지 마십시오"라고 설교 아닌 설교를 했는데, 이것을 통해 우 리는 동정적인 그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다.

17세기가 되던 1923년에 그는 튜빙겐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그 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목사 견습생으로 목회활동을 시작하다가 베를린대학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했다. 그의 초기 생애라 할 수 있는 신학 수업 과정에서부터 이미 그의 재능과 학문 적 능력은 교수들로부터 천재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는 1930년 9월 5일부터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1년간 신학을 연구했으며, 귀국한 후에는 베를린대학의 강사로 취임하여 베를린에 있는 공과대학의 교목이 되었다.

그의 생애에 제2기라 할 수 있는 1933년 1월 3일은 히틀러가 독일의 지도자가 된 날이었다. 히틀러가 정권 을 잡은 후 그가 표방하는 정책은 교회의 권위를 침해 하지 않는다는 베일에 싸인 가식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포섭하고 나섰다. 그러나 본훼퍼는 이미 히틀러의 의도 를 간파하여 "지도자 개념의 변천"이라는 제목의 라디 오 강연을 통해 히틀러 정책의 가식과 위선을 폭로하며 독일 교회의 세속화를 우려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방 송이 끝나기도 전에 이 강연은 중단되었다.

히틀러의 의도가 이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 다. 히틀러는 교회를 자신의 정치에 이용하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하며 교회를 정략화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독일 복음주의 교회와 유태인이 저해 요인이었으 므로 먼저 그는 유태인과 복음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본훼퍼는 [교회와 유태 인의 문제]라는 책을 출판하여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에 시행되는 사실이기는 하지 만 유태인을 탄압하는 뉴렘베르그법은 모든 독일 유태인과 아리안 사이의 결혼을 금하고 있 다. 이후 히틀러의 독일 제국은 600개의 유태 교회를 폐쇄하고 7,500개의 유태인 상점을 약탈하며, 35,000명의 유태인을 체포하는 등 유태인 박해를 더욱 강화시켜나갔다. 한 신학 자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생각토록 하며 대담하게 행동하도록 자극시킨 것은 바로 히틀러 와 그의 제국이었다.

본훼퍼의 생애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결정에 주목하게 된다. 첫째는 그가 고백 교 회를 택한 사실이다. "고백 교회와 나를 분리하는 것은 나를 구원으로부터 멀리하는 것 같 다."고 언급할 정도로 고백 교회에 대한 그의 사명은 대단했다. 그는 교회가 영원한 진리나 원칙들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사람 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하면서 바람직한 교회상 정립을 원했다. 이 고백 교회는 히틀러의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의와 양심을 따르는 신앙 공동체였다.

본훼퍼의 두 번째 결정은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과 혁명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평화를 위해 저항했다. 본훼퍼에게 저항은 교회를 구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련 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는, 억압받은 사람들을 구조하는 행위였다. 그는 나찌 체제를 전복시 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바람직한 국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히틀러와 그의 정권에 투 쟁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저항으로 1936년 본훼퍼에게 가해진 법 적 구속은 그에게 고통의 시작이었다. 본훼퍼는 이제 더 이상 대학에서 강의할 수 없게 되었으며, 어떤 장소 에서도 강연을 할 수 없었으며, 자신의 저서를 출판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한편 본훼퍼가 설립한 핀켄발테의 비밀 목사 연수소 학생이 체포되고 이듬해 독일 비밀경 찰에 의해서 이 연수소는 폐쇄되었다. 게다가 27명의 학생들이 투옥당하는 시련이 닥쳤다.

이러한 격동기에 1937년 본훼퍼는 그 유명한 [나를 따르라]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이 저서에서 그는 나찌즘 체제하에서 말씀을 따라 사는 그리 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말하는 제자의 삶이란 불의에 도전 하며 저항하는 양심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하며,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는 삶이다. 요컨데 예수의 제자가 되는 부름은 자신의 고통과 멍에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 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 9:62)

요컨대 제자가 되는 부름에 기다림이 있어서는 알 될 것이며 그 자리를 떠나, 따라 나서 는 적극적인 순종의 행위가 있어야 할 것이며 더욱이 조건부적인 은혜를 기다리며 따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제자의 길일 것이다. 히틀러의 탄압이 극심한 시기에도 본훼퍼는 그 리스도의 진실한 제자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안의 시기에 본훼퍼는 미국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 초청을 받고 출국했으나 즉 시 귀국하게 된다. 1939년 본훼퍼는 니이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미국에 온 것이 결 국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고통받는 독일 민족을 생각하며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 그는 그 편지에서 자신이 "어려운 시기에 독일의 크리스천과 더불어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만약 독일 국민들의 시련을 내가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내가 독일의 개혁운동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고 자책감을 표현하고 있다.

본훼퍼가 귀국한 후 정세는 급변하여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히틀러의 정권을 반대하는 반나찌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비밀이 누설되어 결국 이 저항운동은 실패하 게 되었다. 반나찌 지하조직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그는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까지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본훼퍼의 옥중에서의 서신이나 글들을 통해 우리는 바울의 심정을 연상할 수 있다. 본훼퍼는 자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여기 옥중에서의 나의 생활은 다른 곳과 크게 차이가 없이 나는 독서하며 명상하며 저술하며 시 간을 보낸다"고 하면서 옥중 생활을 자신은 고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그는 "형무소의 창문을 통해 교회 십자가 탑을 보는 것이 너무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전하고 있 다. 본훼퍼는 옥중에 있는 동료들을 위해 1943년 크리스마스날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 오 하나님, 이른 아름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저에게는 어두움이 있지만 당신에게는 빛 이 있고, 저는 고독하지만 당신은 결코 고독한 저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저는 당신의 방법 을 이해 못하지만 당신은 저를 위한 최상의 길을 알고 계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 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잘 알고 계십니다. 제가 당신을 알고 당신께 돌아가는 것이 당신의 뜻입니다. 주여, 제가 당신의 부르심을 듣고 따르겠사오니 저를 도와주옵소서."

다른 한편, 옥중에서 본훼퍼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그의 개혁 사상을 전하고 있다. "오 늘날 성숙된 세계는 복음에 무관심하며 더 이상 복음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는 비종교적인 세계로 변모했다. 따라서 이제 교회는 교회 자체만을 위해 발전시키는 일과 광적인 신앙을 멈추어야만 하며 그리스도가 행한 것처럼 남을 위해서 이 세상에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고통을 받아야 만 한다."고 본훼퍼는 자신의 교회관을 전하고 있다.

또한 테겔 형무소에서 본훼퍼는 복음을 순종할 때 보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레위기26:6을 묵상하고 있었다.

37세가 되던 1943년 4월 5일 마리엔부르거 알레에 있는 본훼 퍼의 자택이 수색을 당했는데 그는 그곳에서 비밀경찰에 의해 체 포당하여 베를린에 있는 테겔 형무소로 이송되어 18개월 동안 투 옥되었다. 히틀러의 암살 시도가 1944년 7월 20일 실패로 돌아가 고 그해 10월 8일 본훼퍼는 프린쯔 알브레히트 거리에 있는 감옥 으로 이송되고, 이후 독일군의 참패로 여러 지역으로 이감되다가, 1945년 플로센부르크 포로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그의 생애 는 39세로 마감되었다.

본훼퍼의 단두대 처형을 지켜본 피셔 훌슈츠룽 박사는 "본훼퍼 가 죄수복을 벗기 전에 열정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단두대 에 오르는 그의 모습은 매우 대담했고 침착해 보였다"고 당시를 회고하면서 "내 50평생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본훼퍼 같은 사람을 결코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출처 권태경 (총신대 교수) / 생명의 삶 - 199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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