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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계시록에서 배우는 경배/ 유진 피터슨

2008.05.30 14:14

폭우 조회 수:471

요한의 계시록에서 배우는 경배/ 유진 피터슨



시대마다 성경의 특정한 책이 다른 책들보다 선두에 나설 때가 있다. 무너지고 퇴락한 로마 제국의 잔해 위에 하나님의 도성이 형태를 갖추며 등장할 것을 바라본 어거스틴은 창세기를 그의 본문으로 삼았다.
12세기의 농밀한 에로티시즘의 영향을 받은 버나드(Bernard)는 기도와 성숙한 사랑을 위한 도구로 아가서에 자신의 눈을 고정시켰다. 바로크 종교의 난잡한 시장과 같은 혼란스러움 속에서 간단 명료한 복음의 본질을 찾고자 애쓰던 루터는 로마서와 마주친 후 이를 개혁의 책으로 삼았다.
나는 이제 20세기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이 시점에서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우리 시대를 위한 성경상의 책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계시록은 이전에도 한때 유행을 탄 적이 있었지만 현 시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계시록을 더욱 필요로 한다. 그것이 건전한 방법으로 주류를 형성 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나는 역사의 이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책이 교회의 생명을 위한 포괄적인 본문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사실은 깊이 확신하고 있다.
이같은 확신은 목회자로서의 내 생의 혹독한 시련기에 형성된 것이다. 목회자로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칠 책임이 있다. 그 설교와 가르침에서 나는 신 구약이라는 기독교의 성경을 본문으로 삼고 있으며 그 본문에 신실할 것을 서원한 몸이다. 나는 일반적인 선의를 조장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마음대로 꾸며내서는 안된다. 교회는 나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다른 어떤 본문도 안 되며, 오직 이 본문만으로 정확하게, 인내하며, 고집스럽게 사역하라는 것이 바로 그 임무이다.

잡담하는 여자들
내가 이 사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우고, 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러한 성경이 왜, 언제, 어디서 기록되었는가를 가르쳐 주는 내용을 학습하고, 나보다 앞선 목회자들이 이 임무를 어떻게 수행했는가를 참고하여, 나도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그리스도를 긴박하고 명확하게 설교하며 겁없이 덤벼들기만 하면 다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일이 그처럼 간단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이사야의 히브리 시나 바울의 헬라어 구문을 해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비록 이 거장들은 나로 하여금 너무나 자주 책방과 골방을 찾는 시간을 갖도록 만들었지만 말이다).정작 어려움은 텔레비전에 중독된 남자들의 망상을 치유하며 잡담하기 좋아하는 여자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말씀으로 감동시키는 일에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대상들은 내가 그들에게 그처럼 간절히 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지적이었고 확실히 예의바른 사람들이었지만, 문제는, 가슴으로 말씀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 땅에서 살아온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보다 교육 수준이 높은 회중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하는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말은 그들이 내가 하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전하는 말이, 모든 일상적인 말과 행동이 영광으로 승화되는 새로운 질서와 하나님 왕국의 도래를 선포하는 적실한 "복음"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논평하였으며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 모두를 다과회의 잡담 정도로 치부해버렸다.
나는 지금까지 이 땅에서 살아온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생활 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교제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멋진 집과 가구가 있으며, 시설 좋은 병원과 쇼핑 센터가 있다. 하지만 모든 불편함. 전쟁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모든 뉴스 보도, 그리고 모든 질병과 죽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불신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 같은 어려움을 당한 순간에는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이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하나님께서 이 같은 어려움을 이 땅에 허락하시는지 혹은 보내시는지를 알기 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락함을 방해하도록 허용하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계신지를 알기 원했다.
나의 최초의 반응은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잡담하는 자와 수군거리는 자가 됨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영광과 빛나는 주권에 참예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점차 그들에게는 비난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들이 잡담하는 자와 수군거리는 자가 된 것은 잡담하고 수군거리는 문화에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은 어머니의 젖을 빨면서 그것을 배워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사야와 바울과 같은 단단한 식물을 먹기 전에 나는 그들이 그와 같은 문화의 젖을 떼도록 해주어야만 했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나는 요한계시록에서 천군만마와 같은 지원군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이유는 계시록이 바로 이 같은 문화적 환경에 노출된 회중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제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이 사소한 잡담거리로 취급받고, 성가신 것으로 왜곡당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이 같은 잡담을 잠잠케 하고 성가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는 이것을 가장 단순하고도 경제적인 방법으로 실시하였다. 그 방법은 바로 사람들에게 경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영광스러운 것이 하찮은 것으로 변할 때
요한이 살던 세상에서의 하찮게 여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지주의라고 알려지게 되는, 정도를 벗어난 사람들의 잡담으로 인하여 발생하고 있었다. 잡담의 본질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이다. 잡담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 가진 모든 독특하고 영광스러운 것들을 무시해버리고 다만 그를 이야깃거리나 진부한 사람 혹은 판에 박은 사람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이런 잡담에는 결코 경외함이 없다. 또한 결코 사랑이 없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잡담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으나(영지주의라는 말은 "지식을 가진 자"라는 의미이다).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 전부였다. 영지주의자들은 기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경배하지도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바에 관하여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고 끊임없이 글을 썼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은 이야깃거리로 전락되거나 몽상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요한이 그의 회중에게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해 노력한 1세기의 마지막 10년은 다음 세기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될 영지주의의 선구자들이 들끓던 시기였다. 우리는 신약의 다른 곳에서 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직접 혹은 간접적인 증거와 그들이 복음에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던가를 보게 된다. 목회자로서 요한은 그가 섬기는 사람들이 이같은 잡담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었다. 발람과 이세벨. 그리고 니골라당에 대한 계시록의 언급은 영지주의적 경향을 띤 지도자와 종파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로 사람들을 이끈다는 가면을 쓰고, 사실상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문화라는 조건에 끼워 맞춤으로써 그들의 이상과 기호에 맞도록 그분을 전락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 문화의 지평과 너무나 일치하고 있다. 교회 생활의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잡담거리와 소비자에 의한 가격 매김으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소비자들의 다양한 기호에 맞추어 십자가를 마케팅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을 유명인사 정도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심각하게 받아들이기가 점점 어렵게 되었다.

환난이 고개를 들다
요한이 목회자로 있던 시절에 하찮게 여김이 이처럼 좋지 않았던 것만큼이나, 로마제국의 박해로 발생한 환난 역시 복음을 왜곡시켰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불법이 되었고, 투옥과 순교가 일어났다. 경제적 차별과 사회적 따돌림이 있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재현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하늘에서 복이 쏟아질 때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련이 닥치고 사회가 가치를 두는 모든 것이 당신의 삶의 방식과 모순되고 심지어 그것을 정죄할 때, 당신의 눈 앞에 시련이 닥치고 있다고 외치며 날마다 다가오는 증거에 굴복하지 않기란 힘든일이다. 복음의 은혜보다는 로마 제국의 잔학성이 훨씬 더 실감나게 다가왔다. 감각을 자극하는 축제이자 세상적인 안전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 황제 숭배는, 추종자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믿음,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십자가에 달린 구세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믿음보다 훨씬 더 인상깊은 것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서구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더 이상 범죄 행위가 아니지만 환난의 정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폴란드의 시인 체슬로우 밀로즈(Czeslaw Milosz)는 최근의 연설에서 우려 시대를 묘사하는 단어로 "잔인한"(cruel)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 시대는 실로 잔인하다. 우리는 지구의 정치를 돌이킬 수 없이 변화시켜버린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었으며, 현계도 만약 핵 전쟁일 경우 모든 것을 끝장내버릴 수도 있는 제3차 세계대전의 위협 하에 살고 있다.
공산주의의 도래와 몰락은 수많은 국가들을 혼돈으로 몰아넣었으며 이러한 혼돈 가운데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어지러운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제3세계 국가들도 이 싸움터에 뛰어들어 자신의 몫을 챙기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미처 보고서를 작성하지 못할 정도로 재앙들(정치적. 도덕적. 환경적)이 신속히 증가하고 있다. 공의롭고, 평화를 가져오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 뉴스 보도가 전해질 때마다 또 다른 한두 명의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을 돌린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는 선포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장을 던지는 세상적인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전달하는 정보의 함성에 묻혀버리고 만다.
우리가 만약 복음이 고상하다는 사실에 신경이라도 쓰고 있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슴을 치며 애통해할 것인가? 가슴을 치는 것이 전략이 될 수 없다. 요한은 애통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경배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촉구했다. 단지 경배했을 따름이다. 그는 교회 갱신을 위한 새로운 계획을 제안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일곱 교회의 연합 집회를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경배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촉구했다.

왜 경배인가?
하찮게 여김과 환난이라는 요한의 시대와 우리 시대의 유사성, 그리고 사람들에게 경배를 촉구하는 그의 놀랄 만큼 집중되고 절제된 반응 등을 볼 때, 우리는 계시록이 좋지 않은 시기에 복음의 고상함을 회복시켜주는 본문으로서 적합함을 알 수 있다.
다른 이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만드는 경배 행위, 본질적으로 계시록은 바로 그런 책이다. 첫 번째 장에서 우리는 경배하는 요한을 본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1:10).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천사로 인해 잠시 마음이 산만해진 요한이 다시 중심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는 것을 본다. 그는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말을 듣는다(22:9). 첫 번째 장과 마지막 장 사이에는 굳건한 경배의 장면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것은 하늘과 땅. 창조와 십자가, 역사와 구원 등의 모든 것을 한데 묶어 우리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만드는 장면과 소리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산만해지기 쉽다. 하찮게 여김뿐만 아니라 환난에 의해서도 쉽게 산만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요한의 메시지에 복종시킬 때, 비로소 그의 메시지는 우리의 주의를 끌고 우리를 행동의 중심축, 즉 "하나님 중심"으로 다시 돌려놓을 수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련된 우리의 몸과 마음과 감정을 경배로 이끌기에 충분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가진 성경이 계시록, 다시 말해 경배에로의 부름으로 마감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우리가 66권으로 구성된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 도달할 무렵에는 우리의 마음은 지식으로 충만하고 우리의 가슴은 열정으로 불타오르게 된다. 그 모든 지식과 그 모든 열정으로 인해 우리는 무작정 달려 나가서 우리가 아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우리의 대의를 위해 모든 이들을 끌어들이는, 즉 의사 소통과 동기 부여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그것을 좋은 용도로 사용하고자 시도할지도 모르는 커다란 위험을 안고 있다.
사실 그것이 바로 우리 미국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해온 방법이다. 밖으로 나가서 의사소통을 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말이다. 그들 사이에서 의사 소통과 동기 부여는 작금의 기독교 현안을 주도해봤다. 의사소통은 많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며 동기부여는 선한 목표에 많은 이들을 동참시켰다. 그렇다면 왜 모든 것이 더 나아지지 않는가? 왜 진리는 널리 알려지지 않는가? 왜 공의가 흘러넘치지 않는가? 왜 미국 교회가 그처럼 당황하고 있는가? 왜 교회의 목회자들이 윤리적으로 그처럼 타락했는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이 마지막 책을 진득하게 앉아서 읽고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경배로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경배 행위에 깊이 잠기게 함으로써, 제아무리 성경적이고 긴급한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 마음대로 달려나가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데 실패했다.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스리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상황의 실제는 우리가 다스리고 구원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고자 시도할 때마다 온통 망쳐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리 스스로 다스리고 우리 스스로 구원하기 원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다스리고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 원한다.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되든지, 우리의 의도가 얼마나 선하든지 간에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창세기부터 유다서까지를 꿰뚫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그리스도안에서 다스리고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스리고 구원하는 일에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역할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스리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에 둔감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경배 행위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진실에 가까운 그 무엇인가를 말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다소라도 의로운 그 무엇인가를 행하도록 위임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이 떼이고, 복음이 선명하고 강하게 남독되는 보좌 주위에서 장로들과 생물들과 함께 말씀을 듣고 또 믿는 가운데 반복적 이고도 신실한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길뿐이다.
우리가 경배를 소홀히 하거나, 의사소통과 동기 부여라는 우리의 현안에 비추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한다면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감정, 사고, 꿈, 사랑, 소망, 성격,목표,믿음 등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것의 대부분은 우리의 오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 분자와 원자, 중성자와 양자,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우리의 뿌리가 되는 조상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들 등 심지어 물질적 존재의 근간을 구성하는 것의 대부분도 인간의 감각 너머에 있다. 우리는 이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실체들에 잠긴 채로 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본래 본 사람이 없는"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보이지 않는 세계, 즉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드는 원초적이고도 가장 손쉬운 방법이 경배이다. 그리고 계시록은 시편과 함께 우리가 행하는 경배의 가장 종합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환상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 즉 보좌와 어린 양에 뿌리를 두고 형성되지 않은 기독교 공동체는 의사 소통자들과 동기 부여자들의 통제하에서 신속하게 몰락한다.

나는 계시록이 우리에게 신실한 집단적 경배를 보여주고 또 우리에게 그것을 촉구한다는 나의 주장으로 인해 계시록을 달리 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의 광대하고도 신학적인 시에는 다른 많은 요소들이 들어 있다. 거기에는 예언과 위로, 아름다움과 확신, 경고와 축복, 수수께끼와 신비가 있다. 그러나 나는 계시록의 모든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경배 행위의 장소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 모두가 우리를 경배 행위로 이끌기 위해 기획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고, 십자가에 달린 구세주를 우회하여 스스로 굴러가는, 다시 말하자면 경배를 무시하는 종교보다 더 고약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다. 의사소통과 동기 부여의 종교가 바로 그것들이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너무나 많은 예배 의식이 목회자의 자아나 회중의 요구, 아니면 그 양자를 충족시키기 위한 겉치레에 지나지 않고 있다. 요한이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았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좇아 성령으로 새롭게 된 요한은 그들을 열정적으로, 그리고 장엄하게 경배의 장, 하나님의 존전으로 이끔으로써 이에 반응했다. 그들이 알고 있거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이 설교 형식으로 전달된 환상에 따르면 경배 행위에 휩싸여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여전히 그러하다.
요한의 계시록은 이 점에서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우리가 일단 이 풍성한 소리와 색채에 푹 잠기기만 한다면 잡담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깨끗이 사라질 것이며. 우리가 일단이 넘치는 은혜와 죄악의 허망함을 인식하게 된다면 더 이상 “정사와 권세"의 위협에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를 경배로 자리로 이끄는 요한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면, 우리는 이제 결단코 “예배보러 가자”라고 말하거나 스스로 예배 행위를 멀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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