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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43일 동안 억류됐던 한국인 인질 23명 중 생존자 21명이 모두 풀려나 귀환을 앞두고 있다. 이들의 귀국을 바라보는 국내 여론은 엇갈린다. 무사 생환에 대해서는 온 국민이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일부에서는 생존자들이 귀국 후에도 비난 여론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부 역시 구상권을 행사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1년 반 전 영국에서는 현재 한국의 상황과 매우 흡사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사태의 전개 과정도 비슷했고 인질들이 무사생환한 뒤 벌어진 논쟁의 구도도 비슷했다. 2005년 11월 이라크 내 무장 세력에 의해 납치됐다가 무려 4개월 만에 생환한 기독교 평화운동가 노먼 켐버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노먼 켐버는 크리스천 평화봉사단(Christian Peacemakers Team)이라는 국제 네트워크 소속으로 캐나다인 2명, 미국인 1명과 함께 이라크 평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인권운동가 4명은 '정의의 투사들'이라고 자칭하는 이라크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 억류됐다.

무장세력에 납치된 기독교 평화운동가... 특수부대, 4개월 만에 구출

납치세력은 이들이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며 미국과 이라크에 수감돼 있는 이라크 포로들을 석방하지 않을 경우 인질들을 살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아프간에서 한국인들을 납치했던 탈레반 세력과 협상 수법도 비슷했다. 이들은 납치된 4명의 평화운동가를 차례로 TV화면에 내보내 심리전을 펼쳤고 노먼 켐버의 부인 역시 알 자지라 텔레비전에 출연해 "내 남편은 이라크인들을 돕기 위해 전쟁터에 뛰어들었을 뿐"이라며 석방을 호소했다.

납치 세력들은 협상 시한을 몇 차례 연장해가며 인질들의 생명을 담보로 미국을 필두로 한 다국적군과 협상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 인질 한 명이 살해됐고 이 사실은 곧바로 아랍 측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납치 117일 만인 2006년 3월, 노먼 켐버를 비롯한 생존자 3인은 영국, 캐나다, 미국 등의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테러 진압 특수부대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됐다. 진압부대가 현장에 들이닥쳤을 때 현장에는 생존인질 3명만이 억류돼 있었고 다국적군은 아무런 무력충돌 없이 이들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데일리 텔레그라프>는 서방 측에서 납치세력의 우두머리 중 한 명을 진압작전 바로 전날 생포해 납치세력과 맞교환 협상을 벌인 것이 구출작전을 성공리에 이끈 원인이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목숨 걸고 구했는데 감사하는 기색도 없고"... 살아온 평화운동가 두고 논란

그러나 구출작전 성공에 환호하는 영국 국민들의 함성이 채 그치기도 전에 문제가 불거졌다. 영국군 최고사령관이 <채널4> 뉴스에 출연해 "다국적군 특수부대가 목숨을 건 구출작전을 벌였음에도 인질들이 별로 감사해하지 않는 것 같다"며 "슬프다"는 말로 섭섭함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영국군 사령관의 이런 발언이 보도된 것은 노먼 켐버를 비롯한 생존 인질들이 각자 귀국을 앞두고 중간 기착지인 쿠웨이트에 머물고 있던 시각이었다.

영국 내에서는 노먼 켐버 일행이 귀국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이들 인권운동가들의 태도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이들을 이라크에 파견한 기독교 단체는 "생존인질들은 이미 여러 차례 다국적군 측에 감사를 표했다"면서 파문 진화를 시도했지만 비난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많은 언론들은 노먼 켐버가 영국 도착 직전 영국 대사관을 통해 발표한 성명을 통해 "이라크 주둔 다국적군은 결코 이라크 국민들을 위한 평화를 달성하지 못한다"고 언급한 사실을 연신 문제 삼았다.

시중의 여론은 더 뜨거웠다. 이라크에 파병한 영국 정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정예특수부대를 지닌) 영국에 태어난 걸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충고부터 (철없는) 기독교인들이 전쟁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비난도 잇달았다.

하지만 이들을 옹호하는 여론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기독교 평화운동가와 이라크전에 돈 벌려고 뛰어든 장사꾼들이 뭐가 다르냐는 논리로 반론을 펼쳤다. 정부와 군대가 전쟁터에 뛰어든 자국 국민 중 사업가들은 보호하면서 인질로 잡힌 평화운동가는 방치해도 좋다는 말이냐면서 이들의 행동을 옹호했다.




빗발치는 악담에도 납치 용의자 관련 증언 거부한 켐버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이 구출된 지 수개월 뒤 납치 용의자들이 붙잡혔다. 당연히 영국 정부는 이들에게 증언을 요청했으나 노먼 켐버를 비롯한 생존 인질들은 이를 거부했다. 자신들은 사형제도에 반대하기 때문에 이들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라크 법률에 따르면 납치 및 인질 감금 등의 범죄는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이들의 증언 거부가 영국 정부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당혹스럽게 한 것은 물론이다.

노먼 켐버는 자신의 증언이 납치범들의 형기를 경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법정에 서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영국 정부를 위해 증언에 나설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보복이 아니라 비폭력 정신과 용서만이 피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더 선> 같은 신문은 노골적으로 "바보 같은 늙은이"라는 악담을 퍼부었고 노먼 켐버의 집에는 그를 비난하는 편지들이 빗발쳤지만, 그는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계의 모든 언론이 주목했던 자신의 인질 경험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생각도 없었다. 노먼 켐버는 그저 "전쟁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는 이라크 국민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기 때문"이라는 말로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이유를 설명했을 뿐이다.

이라크에서 구출된 지 1년쯤 지나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관심이 식어갈 무렵 노먼 켐버는 <이라크의 인질>이라는 평범한 제목의 책을 한 권 펴냈다. 그것도 그의 책으로 돈벌이를 노려왔던 대형 출판사가 아닌 기독교 계열의 조그만 출판사에서였다.

"비폭력만이 전쟁 종식시킬 수 있다"... 뻔뻔한 노인? 진정한 평화운동가?

  


그 무렵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노먼 켐버와 그의 부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평화운동가들은 늘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요. 기독교 정신이라는 것은 신앙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것이거든요. 인질 구출작전에만 수십억원의 돈이 들었다구요? 물론 저도 거기에는 잘못을 느끼지요. 하지만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이느라고 퍼붓는 데 낭비한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가 아닐까요?"

노먼 켐버의 나이는 74세. 그는 은퇴한 물리학 교수 출신이다. 이라크를 방문한 것도, 안전지대로 알려진 '그린 존' 바깥에 있는 대다수의 이라크인이 어떻게 폭력에 희생되고 있는지를 바깥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뿐이라고 주장한다. 노먼 켐버가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단 하나. 비폭력과 평화만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노먼 켐버는 과연 뻔뻔스런 노인네인가, 아니면 묵묵히 신앙을 실천한 평화운동가인가. 죽음의 계곡 저쪽을 떠나 초췌한 모습으로 걸어 돌아올 인질들을 마중해야 할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어떤 답변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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