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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강금희
                                                                

종이가 아닌 돌판, 그것도 두 돌판으로 된 최초의 책의 저자는
세상world을 말씀word으로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내어 밤낮 40일 금식 머물게 하면서
처음엔 말씀으로 사람이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들을 조목조목 일러주고
십계명을 구름이 덮힌 캄캄한 산 위 불 가운데 큰 목소리로 불러주고 그대로 두 돌판에 손수 새겨서 그에게 주었다(신 4:13).

초판인 이 돌책은 열려진 책으로 그냥 펼쳐둔 채 읽기만 하면 되고 앞 뒷장 페이지를 넘겨 볼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도 통 털어 열 항목의 명령형 단문으로 된 아주 간단한 책 이 돌판을 가지고 내려온 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에게 들려줄 뉴스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좋은 뉴스고 하나는 나쁜 뉴스라고 말하자
모두들 이왕이면 먼저 좋은 뉴스를 듣자고 했다.
좋은 뉴스는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열 계명밖에 안 된다는 것이고 나쁜 뉴스는 그 중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을 빼지 못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말귀를 못 알아듣는 귀를 갖고 있고 눈이 있으나 읽을 줄 모르며 게다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도
오해 곡해하는 버릇은 으뜸이며 건망증이 장난 아닌 걸 너무도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 수준에 딱 맞는 책을 써주신 것이다.

두 돌판 중 왼쪽은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오른쪽은 사람에 관한 계명인데
나중에 쪽집게 과외 선생으로 소문난 그의 아들 예수는 10계명을 2계명으로 요약,
그것도 모자라 한 자로 <사랑>이라 압축해주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으뜸가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7-39).
그런데 이 두 언약의 돌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내려온 날 모세는
자기가 자릴 비우고 없는 동안 형 아론의 선동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지적받았으나 속으론 믿기지 않아 하다 사실임을 알고는
하나님의 책을 들고 있던 두 손을 번쩍 들어 감히 내던져 깨뜨려 버렸다(신 9:11).

하나님의 처음 책을 여지 없이 파기해 버린 모세,
그는 그들이 만든 우상 금송아지를 불에 넣어 녹여서 산산이 부수고 먼지 같은 가루로 만들어서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물에 띄워 보내고 난 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밤낮 사십 일을 다시 금식 기도하여 겨우 용서받고
<먼저 번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서 산으로 가지고 나에게로 올라 오너라 또 나무궤도 하나 만들어라
네가 깨뜨린 먼저 번 판에 새긴 말을 내가 그 판에 다시 새길 터이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어두라>(신 10:1-2)셔서
모세는 번거롭게 석수쟁이가 되어 두 돌판을 깎지 않아도 될 수고를 더해야 했다.
하나님의 책의 재판이 나왔으나 이번엔  파손되지 않도록 아예 나무궤에 집어 넣어두어야 했다.

그 후 천 육백년 동안 40여 명의 기자들이 하나님의 영감(벧후 1:21)으로 다시 종이에 쓴 39+27=66 성경이
모두 가죽으로 장정되는 까닭은 아마도 에덴에서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아담과 이브가 추방되었을 때
하나님이 지어 입혀준 옷도 바로 가죽옷이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이 돌책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마 4:4)임을 일깨워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면서도 아직 에덴동쪽엔 빙빙 도는 화염검sword을 두고
생명나무에 이르는 것을 금하시는 하나님의 속셈은 말씀이 육신되신 예수님의 현현(요 1:14)으로 드러나면서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은 사람의 몫이고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출 19:5-6)임을
이 성문계약으로 알게 되었다.

계약이란 본래 두 계약 당사자 사이에 져야 하는 것이고
부담이 설사 불공평하다고 할지라도 쌍방적이기에 파약한다고 할 때 무조건적인 명령이나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도 없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람이 지켜야할 것들에 대한 일방적인 선포형식을 이 십계명이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엔 사람의 하나님으로서 참여와 약속이 숨어 있다.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는 말은 그 참여와 약속의 상징인 것이다.
계명의 준수가 사람의 몫으로 주어졌지만 구원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의 몫으로 정해져 있다.
따라서 십계명의 주제는 <나는 너를 애굽땅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고
십계명 서언에서 묘사된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지켜야만 하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요구들이라고
크뤼제만은 사회사적 해석을 하지만 키에슬로프스키의 연작영화 <데칼로그>는 존재론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럼 십계명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이란 무엇인가?
출 3:14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Eheyeh asher Eheyeh"라고 자신을 밝힌다
이 말은 이름이라기보다 하나의 문장인데 번역하면
“나는 있는 자이다”라는 야훼Yhwh
즉,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한 마디로 신은 존재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키에슬로프스키(1941~1996)의 관점은
이미 자신이 처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깊은 회의와 의문을 갖고
1987년 3월부터 1988년 4월까지 14개월에 걸쳐 텔레비전용 10부작 연작영화 <데칼로그>를 만들었다.
대본은 변호사 피시비치Piesiewicz와 공동으로 썼다.
이들은 십계명을 그대로 영화에 옮겨놓지 않고 그것의 본질을 그들이 처한 상황에 적용시켜 나가
그들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했다.
따라서 단순히 해당된 계명을 따르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도덕적 교훈식으로 전개되지 않고
키에슬로프스키가 파악한 십계명 전체의 본질적 의도와 연결되어 있다:
<도덕화란 내겐 없다...명령과 금령하고도 아무 상관없다 오히려 조심하라
너희 곁에 다른 사람들도 산다
너희가 행한 바는 너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 가까이 있거나 좀더 멀리 있어
그들이 있는 것조차도 모르는 이들에게까지 적중하는 것이다>.

그의 데칼로그 중에서도 유독 십계 1은
문득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는 파스칼의 팡세를 떠올리게 한다.
무표정하지만 때론 몹시 불안함을 드러내는 한 사내가 눈 덮인 겨울 호숫가에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있고
뛰어 다니는 아이들 모습에서 한 아이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한 중년여인이 슬픈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이 세 사람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복선의 주인공들이다.
컴퓨터 언어학 교수인 아버지 크르지스토프와 열 살배기 아들 파웰은 단둘이 현대식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이 부자는 사이좋게 아침에 팔굽혀 펴기를 하고 아버지가 내준 물리 문제를 아들은 쉽게 풀어 보기도 한다.
아이는 모든 궁금한 것들은 죄다 척척박사 아버지에게 물어보는데
아침 빵을 사러가다 길에 얼어 죽은 개를 보고
그날 따라 사람은 왜 죽는지 죽은 다음에 남는 것은 무엇이며 그리고 영혼이라는 것은 있는지 질문공세를 퍼붓는다.
그날 파웰의 학교에서 우유급식에 대한 TV 취재가 있었는데
이때 찍힌 파웰의 모습이 클로즈-업 화면에 나타난다.
이 장면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영화 시작과 끝날 때 모두 보여준다.
방과 후 파웰의 고모 이레네가 그를 데리러 온다.
엄마가 없는 파웰이기에 데려다 저녁을 먹이는데 파웰은 최근 그가 만들 컴퓨터 프로그램을 고모에게 자랑한다.
저녁을 먹고난 뒤 고모는 교황사진을 보여주며 파웰과 대화를 나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가 되야지 삶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이 있음을 말하는 고모에게
파웰은 하나님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를 묻는다.
이레네는 어린 조카를 끌어안으면서 무엇을 느끼는지 되묻고는
‘네가 지금 느끼는 사랑 바로 그곳에 하나님은 계심’을 일러준다.
아버지는 합리주의자로 이성을 고모는 종교적 인간으로서 신앙을 중시하며
아버지의 합리주의 세계와 고모의 종교 세계에 모두 호기심을 발동 총명하고 감수성이 많은 어린 아들을 두고
이 작품의 주제인 과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의 대립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인 철학과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Believing is seeing인 신앙은 자칫하면 끝간 데 없는 양극을 휘어서
그 아스라한 만남의 칼 날 위에 올라서는 일처럼 어렵지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이성을 인정하되 신앙 아래 무릎을 꿇게 했다.

그는 신앙은 지식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한 안젤무스Anselmus도 믿어야 안다고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종 대신 시계를 달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사람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한다.
데카르트Descartes도 ‘내게 연장과 운동만 주어진다면 우주를 만들어 보이겠다’며 만용을 부리면서
8년동안 성찰 자신이 획득한 명제 ‘모든 명제는 다 의심할 수 있으나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명제’를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cogito ergo sum'이다.
이 말은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으나 전능한 악마라도 내가 존재해야만 나를 속일 수 있으므로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명제에서 데카르트는 하나님의 존재를 연역, 완전무결한 존재자가 하나님임을 보았다.
자신의 존재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연역해 내는 새로운 그의 사유는
이제 확실성이 더 이상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사람에게 근거하게 되었다는 도발적 신호 덕분에
이성으로 백과 사전을 만들고 계몽주의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도성 대신 사람의 이성에 의해 만든
유토피아의 창조에 나섰고
자유-평등-박애liberte-egalite-fraternite를 내세워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며
하나님보다는 이성 신앙보다는 과학을 더 많이 의지 확실성을 찾았고
삶의 불안감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하며 오늘에 이르지만
늘 뭔가 예측이 빗나가기 일수라  오히려 불완전한 불안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이튿날 학교가 파한 후 컴퓨터의 자동번역에 대한 아버지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교수 아버지는 머지 않아 컴퓨터가 지능뿐만 아니라
선택적 결정을 할 수 있는 의지와 미학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개성까지 갖추게 될 것이라고 단언,
그는 컴퓨터가 계산할 수 있는 것만을 믿는 이성적 인간임을 드러내 보인다.

집에 돌아온 부자는 최근 기상자료를 컴퓨터에 입력, 집 앞 호수에 언 얼음의 두께와 하중을 계산한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을 스케이트를 아들 파웰이 타고 싶어해서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 잡혀 호수에 나가 얼음 위에서 발을 굴러 얼음의 지탱력을 직접 시험해본다.
얼음 두께를 컴퓨터로 계산, 그 확실성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존하는 그도
자신의 내면에 깔린 실존의 불안만은 어쩌지 못하고 얼음을 발로 굴러본 것이다.
이 불안은 곧 현실로 나타난다.

다음 날 파웰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고 크르지스토프의 컴퓨터가 꺼지고 잉크병이 깨지고
이때 소방차 소리가 들리고 이웃 아낙네가 얼음이 깨져 사고 났다며 동네방네 외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버지,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잠수부가 파웰 시체를 찾는 동안 그는 전원이 나갔던 컴퓨터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I am ready' 문자를 띄우는 화면을 노려보다 결국 성당으로 달려간다.
그는 이 처참한 순간에서조차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하고 그만 제단을 엎어버린다.
이성 곧 자신의 신앙이 아니 우상이 무너진 그 분노 때문에.
이때 학교에선 녹화된 아들 파웰의 생기 발랄한 모습이 방영되는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연작영화 10부를 집중분석한 김용규에 의하면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관점은 명료하다는 것이다.
그는 크르지스토프 교수를 포함해 합리주의자인 현대인의 모습이 보기엔 현명한 것 같지만
실은 우매하며 자신만만한 것 같지만 늘 두려움에 떨고 겉으로 보기엔 행복한 것 같지만 내면으론 비참한
늘 2%로 모자라는 것으로 그려낸 감독의 의도를 읽어내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안전을 위해 빙판의 두께를 컴퓨터로 계산할 만큼 현명했지만
그의 확신이 어이없게 무너졌을 때 아들의 실종에 속수무책 하나님에게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황폐함을 보여준다.
돌책처럼 확실한 하나님의 반석이 아닌 사람의 컴퓨터 과학과 이성이란 반석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보여줌과 동시에 두 가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 이성은 믿을만 한 것인가?
그리고 과학 지식은 확실한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지식의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을 앎으로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안 최초의 바벨탑의 비극을 만회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온 사람들은
이성과 과학을 통해 지상의 낙원을 만들고 수많은 신종 바벨탑 마천루들을 날마다 하늘 높이 치솟게 하고 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의 테러에 의해 WTC가 붕괴된 사건은 근본적인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다.
오늘 지적 유행의 첨단을 달리고 관능과 쾌락을 탐닉하는 향락주의 소비와 소유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얄팍한 상대주의와
저속한 대중문화라는 새로운 우상들에게 사로잡혀 놀아나는 현대인들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하나님을 잊고 금송아지를 찾았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고
이젠 깊이 반성할 필요를 이 영화는 느끼게 한다.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임을 알기 위해 먼저 하나님이 누구이고 무엇임을 알아야 한다는 점은
현대인들이 외면하기 쉬운 종교의 중요한 힘이다.
하나님은 유일자로 존재 그 자체이기에 사람을 포함한 그밖의 모든 것은 존재물임을 인정하고
그 인격적 관계에서 사람은 모든 존재물의 근원이자 그것들을 창조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는 존재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인 동시에 축복을 누리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모세가 받은 하나님의 내적 언어 말씀의 책은 우리가 믿고 따를 만한 확실한 반석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 살아간다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시 1:3)>을 약속받는다.
하나님이 이 십계 1을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존재와 존재가 아닌 것 간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에 있고
질투를 불사하고라도 이 명을 주장하는 데는 존재자가 아닌 또 다른 존재물일 뿐인 우상을 섬겨
그 종이 되는 것을 막고 참 진리 앞에서 자유함을 주고자 하는데 그 의도가 있음을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데칼로그-십계1>을 통해 보여주려 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섬겨야 하며 무엇을 믿고 섬기면 안 되는 것을,
우리가 무엇을 믿고 섬기면 존재의 자유를 얻고 무엇을 믿고 섬기면 구속과 억압을 그리고 파멸을 얻는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요즘 자연의 재앙 그리고 인위의 재앙 앞에서 속수무책인 <타이타닉>과 <볼캐이노>영화에서
사람의 무력함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지만 다행히 궁여지책은 분명 있다.
십계 1만을 철저히 알고 지킨다면 즉 우리의 마지막 최초이자 마지막 보루 도피성 산성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리라!: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높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시 118:8-9).
그러나 하나님God을 아예 모르는 개Dog와는 달리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도 때론 갈대처럼 흔들리거나 그런 갈대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더욱 문제이다.
두려움 때문에 현실과 사람과 타협할 경우에도 갈대를 의지하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한다>(사 7:9).

갈대를 전혀 의지하지 않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젠 날마다 내가 똑바로 서지 못하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철썩같이 의지하고 있는 갈대는 누구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물으며
<나의 하나님 내 영혼을 툭하면 뚫고 들어오는 두려움을 바탕으로 하는 약속을 하지 않게 도와주시고
당신 안에 굳게 서게 하소서 나보다 나은 다른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게 하소서
오직 나의 두 다리로만 서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은 나의 하나님 나의 생명의 샘물 나의 힘 나의 바위임을 늘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이 기도로 하루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
툭하면 책상에 쌓이는 잡동사니 우상 때문에 성경의 자리가 좁아질 때마다
내게 엄습하는 알 수 없는 Je ne sais quoi두려움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는 싹 쓸어준다.
마치 땅처럼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을 때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바뀌듯
내 마음도 비로소 카오스 이론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오스는 뜻 그대로는 혼돈을 뜻하지만 결코 영원한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데
이 <데칼로그 1>영화에서 도저히 깨어질 것 같지 않던 얼음이 깨지듯
처음엔 정연한 질서를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겉잡을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즉 카오스는 결정론적 체계에서 나타나는 불확정한 현상 즉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전환되는 것을 일컫고
연속적으로 변화하던 현상이 어느 순간 돌연히 비연속적인 파국을 맞는 것 재앙의 이론 너머
무한자 완전자 초월자가 있어 우린 알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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