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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와 함께 이야기하는 오늘의 한국

2006.04.16 16:47

폭우 조회 수:583

"나는 오늘도 난장이가 거인이 되는 꿈을 꾼다" 블로거 기자단 뉴스에 기사로 보낸 글 | Portraits
2006.04.15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 200쇄 발간 - 작가 조세희

 

 

                                                                                             <글/이문영  사진/나눔>

 

  30년 전, 조세희는 서울의 한 철거촌에 있었다. 철거촌을 찾아가 고기를 굽고 국을 끓였다. 한 세입자 가정의 마지막 식사 자리, 허물어질 집을 걱정하며 가장은 국에 밥을 말았다. 목이 메인 가장은 밥을 잘 넘기지 못했다. 마지막 식사 자리를 지켜주기에 벽은 너무 얇았다. 뚫려버린 담벼락 밑에서 조세희는 철거반원들에 맞서 주민들 속에 섞였다.

 

 

 

 

그날, 난쟁이는 잉태됐다. 작은 노트에 모나미 볼펜으로 쓰며, 그는 여유가 없었다.


30년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은 200번째 태어났다. 2002년 6월 150쇄가 나온 이래 3년 5개월만이고, 단행본 출간 27년만이다. 지형(紙型)이 닳아 수차례 조판을 다시 했다.


그간 난쏘공과 난쟁이는 다른 삶을 살았다. 난쏘공은 87만부를 찍어내며 좀더 활짝 세상에 알려졌으나, 난쟁이는 여전히 117센티미터에 32킬로그램이다. 난쟁이 아빠의 아들딸은 여전히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고, 난쟁이의 부인은 아이들에게 무엇 하나라도 잘해줄 능력이 없다.


조세희 역시 여전히 ‘제3세계 작가’고, 여전히 여유가 없다.


1일, 난쏘공 200쇄 기념 한정본이 나왔다. 짙은 흑색에 몇 글자 새겨진, 치장이라곤 흑색뿐이다. 판화가 이철수씨가 제목을 팠고, 북디자이너 최만수씨가 표지틀을 잡았다.


인터뷰 요청에도, 잡글 청탁에도 응하지 않던 그가 기자들과 만났다. “우스운 짓”이라며 “200쇄가 무슨 의미가 있냐”며 망설이고 망설이는 그를 두고, 후배들이 나서 판을 벌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자랑하러 여러분 만난 게 아니다.”


그는 200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볼펜 내려놓고 카메라 끄고 5분만 내게 자유를 달라”고 했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5분은 10분이 됐고, 10분은 15분이 됐다. 펜과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그는 조금만, 조금만 더 자유롭고자 했다.


“오늘은 난쟁이의 날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며, 조세희는 30년이란 세월도 자라게 하지 못한 난쟁이, ‘2005년 12월의 난쟁이’ 이야길 꺼냈다.


“벼랑 끝에 세운 위험 표지판”


“난쏘공을 쓸 때 그대로 가면 우리 사회가 벼랑 끝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난 공포스러웠다. 할 줄 아는 게 글쓰는 것밖에 없던 나는 글을 썼다. 난쏘공은 ‘벼랑 끝에 세운 위험 표지판’이었다. 그것마저 넘어가면 떨어진다는 경고였다.”


조세희에게 70년대는 ‘달이 태양을 가린 까만 일식’과도 같았다. ‘땅 속에 폭탄을 감춘 지뢰밭’이었다. 눈이 멀었고, 발이 묶였다. 한발 내딛으려 수십 번 쓰려져야 했고, 잘못 밟으면 터져 버렸던 때, 그때 난쏘공은 쓰여졌다. 그 시절이 조세희에겐 과거가 아니다. 아직도 태양은 제 빛을 못찾았고, 도처가 DMZ다.


“난쏘공이 출간된 지 27년이 지났지만, 우리 시대는 여전히 어둡다. 죽어가는 농민들을 봐라. 비정규직들을 봐라. 하루의 삶이 불안하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수많은 농민이 피를 흘리던 11월15일, 농민대회에서 그는 물대포를 맞았다. 쌀개방에 반대하며 농약을 마신 여성농민 오추옥씨가 사망한 17일, 그는 잠을 자지 못했다. 몸의 곳곳이 안 좋아 생활리듬이 조금이라도 깨지면 몹시 힘들어하는 그는, 그래서 다음날 또 아팠다.


“요즘 어느 정권 못지 않게 희생자가 많이 나온다. 어느 정권 못지 않게 신음소리가 크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850만에 농민이 350만이다. 한국에서 1천200만 인구는 일이 가장 필요하고 돈이 절실한 가장들이다. 얼마나 슬픈 시대인가. 그들에겐 희망이 없다.”


오늘날 1천200만 난쟁이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 했다. 당대의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는 “이 시대, 한국이라는 감옥에 갇혀 산다” 했고, “좀더 넓은 세상을 보고 좀더 다양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했지만, 이 사회가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고 했다.


기자들 앞에서 책을 펼친 그는 한자 한자 또박또박 읽었다. 200쇄 기념판을 받아들고 펼쳤을 때 첫 눈에 들어온 문장이라고 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난쏘공 초판의 그때’와, ‘난쏘공 200쇄의 오늘’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농민과 비정규직 노동자, 이 시대의 난쟁이들은 여전히 지옥같은 세상에서 전쟁 같은 생활과 싸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입은 또다른 문장을 읽었다. “우는 마음으로 쓴 문장”이라 했다.


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울음이 느리게 나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울지 마, 영희야.” 큰오빠가 말했었다. “제발 울지 마. 누가 듣겠어.”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큰오빠는 화도 안 나?” “그치라니까.”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그래, 죽여버릴게.” “꼭 죽여.” “그래, 꼭.” “꼭.”


카메라로 난쟁이들의 신음소릴 듣다

 

 

 

 

“제일 어려운 일은 좋은 글을 쓰는 것, 두 번째로 어려운 일은 안 쓰는 것, 세 번째로 어려운 일은 침묵이다.”


언젠가 그는 그렇게 말했다. “분노와 증오가 내 가슴을 꽉 채워, 이 상태론 조금만 더 써넣으면 될 글마저 끝내기가 어렵다”는 말도 했었다.


그의 분노는 식지 않았고, 때문에 세상과 자신에게 끊임없이 엄격했다. 엄격했기에, 그는 어떤 경우에도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말해야 할 자리 자체를 피했다. 난쏘공이 200쇄란 대기록을 세웠다는 것보다, 그가 기자간담회 자리에 나온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던 건 그런 까닭이었다.


침묵하던 그의 입을 연 건 ‘역시’ 난쟁이, 책이 아닌 현실 속 난쟁이들이었다. 그랬기에 기자들과 만나면서도 그의 관심은 내내 ‘밖’에 있었다. ‘밖’, 전용철씨 사망 및 쌀개방 조치에 항의하는 농민들과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는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밖’이었다.


그의 옆엔 카메라 가방이 놓여 있었다. 글을 쓰지 않는 요즘, 조세희가 ‘밖’과 만나는 방식은 사진이었다. 1980년 사북항쟁을 기록하려 독학으로 배웠던 사진은 그가 난쟁이의 신음소릴 듣는 귀였다. “글을 쓸 땐 숱한 이야기를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는, 자신이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사진 속에 채워 넣고 있었다.


“산문으로 묘사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에 광각렌즈를 끼고 현장의 1~2미터 안까지 들어가야 한다. 그 호흡소리, 신음소리를 듣는 거다. 15일 농민대회 때 내 앞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쓰러졌다. 그 순간 난 부들부들 떨었다. 오추옥 영정사진을 찍으며 속으로 아파 혼났다. 내가 기록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이 후세에 알려졌으면 좋겠다. 행복해야 할 사람들이 아파하는 모습, 그래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면 답답해 견딜 수 없다.”


이야기 도중 그는 종종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진료 때마다 “끊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의사의 나무람을 듣지만, 하루 세 갑 피우던 담배를 한 갑 반으로 줄이는 것으로 그는 ‘최선’을 다했다. 얼마 전부터 그는 담배를 사면 담뱃갑 귀퉁이에 구입 날짜를 써두곤 했다. 담배를 줄이기 위한 나름의 고뇌다. “15일 여의도 농민대회 때, 3년 전엔 뛰어올랐던 곳을 그새 더 늙어버렸는지 못뛰어넘겠더라”며, 그는 웃었다.


난쏘공 150쇄가 나오던 3년전, 그는 말했었다.


“문제는 우리 시대의 일들이란 것이 작가가 다룰 수 있도록 좀처럼 축소되어 주지 않는다는 거다. 축소는커녕 머리가 몇 개나 달린 괴물처럼 아주 거대해서, 작가가 달려들다 오히려 잡아먹힌다. 물론 작가에게는 여러 가지 길이 있고, 선택할 수 있다. 나도 선택했다.”


기자들과 헤어진 그는 집회 중인 농민들 속으로 섞여 들었다. 그가 선택한 삶이었다.



2006/04/15/서울/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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