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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에 비추어본 찬양의 이슈

2006.09.02 21:25

폭우 조회 수:382

찬양의 문제는 아마 포용성의 문제일 것



유승원(미국 훼잇빌한인장로교회 목사), 성서마당 제 65호 글

1. 찬양이 문제?!

   찬양(讚揚)이 교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다. 예배와 경건 표현의 핵심 요소를 이루고 있는 찬양에 대해 왈가왈부(曰可曰否)가 적지 않다는 말이다. 지금도 '내 주를 가까이'나 '하늘가는 밝은 길이'가 아니면 도무지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여전한가 하면 이른바 CCM에만 취해 통일찬송가의 곡조들을 몽땅 장송곡 취급하는 젊은 오빠 어린 언니들도 있다. 소위 복음성가를 타락한 선율과 리듬의 복합체로 보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고급 귀를 가진 클래식음악파 성도들과 감정을 마음껏 넣어 온몸으로 찬송을 불러야 성이 풀리는 은혜파 신자들이 공존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 현실이다. 이렇게 현존하는 찬양에 대한 소신과 취향의 차이는 은근히 교회 내의 갈등과 분열의 한 변인을 구성하기도 하여 목회자들의 고민이 되고 있다. 찬양의 당위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찬양의 방법과 스타일에 분명히 생각과 느낌이 다른 사람들 간에 피차 분노와 짜증을 유발하는 그 무엇이 있다.

2. 찬양의 정의(定義)도 문제

   '찬양'의 이슈는 종종 우리말의 한자어가 갖는 문자적 의미 때문이기도 한다. 기릴 讚(찬) 오를 揚(양)으로 구성된 '찬양'이란 단어는 어의(語義)상 그것이 가리키는 말이나 노래의 가사가 하나님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그 문자적 의미와 실제적 사용 사이에 어색함이 없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좁은 의미에서 찬양의 진정한 뜻이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찬양'이란 용어는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집회에서 경건 생활 및 신앙 행위와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음악 행위 일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어 왔다. 즉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찬양'은 사실상 '기독교 음악' 전체를 대신하는 용어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찬양의 이슈를 다룰 때, 우리는 현실적 의미가 된 포괄적 함의로서의 '기독교 음악'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3. 신약에서 당연시되었던 찬양 행위

   예수를 비롯한 신약의 인물들은 유대적 전통의 경건 양식인 찬양 행위를 일체 문제삼는 일 없이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와 제자들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종료하고 일어나서 찬양하며 감람산으로 간 사실을 복음서가 회상하고 있다(마 26:30, 막 14:26). 물론 이것은 유대적 전통이었다. '애굽 할렐'이라고도 하는 이른바 '할렐 시편'(113-118장) 중 113장과 114장은 식사 전에, 115-118장은 마지막 네 번째 잔을 들고나서 불리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로 기독론적 함의를 시사하는 118편을 노래했을 것이다. 그의 부활은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17절)라는 확신의 연장 끝에 놓여있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22절) 내용은 이미 예수께서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 자신의 역할을 빗대어 인용한 바 있었다(마 21:42, 막 12;10).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찬양은 경건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중략)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여기서 사용된 동사 '아이네오'는 반드시 곡조 있는 음악 행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신이나 인간에게 좋은 언급을 하여 칭찬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바 일반적으로 '찬양'이라는 협의의 의미를 담고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정황을 보건대 이것은 곡조 있는 찬송이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유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은 이들이 한 찬양은 전통적 유대 관행의 연장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죄수들의 귀에 들리게끔 기도하며 찬송을 불렀다(행 16:25).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켜 그 권능을 행사하시게끔 하는 믿음의 행위가 되었다(행 16:26). 그들이 부른 찬송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적시되어있지는 않으나 사용된 동사 '휨네오'를 염두에 둘 때 유대 전통을 따른 시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방패와 산성, 피난처 되신 주님의 대한 여러 시편들이 불려졌을 것이다.

   야고보는 환경의 희노애락에 반응하는 신앙의 정서적 대응으로 찬송을 권면한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희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여기서 사용된 동사 '프살로'는 어원(語原)으로 볼 때 '현을 뜯는다'는 의미를 가진 현악기 연주의 행위를 암시한다. 그러나 그 명사형 '프살모스'(psalm)가 구약의 시편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던 것과 같이(행 13:33), 이것은 악기 반주의 여부와 상관없이 '휨네오'처럼 시편을 노래하는 행위로 보아 무방하다.

4. 에베소서 5장 19절에 대하여

   초대교회의 음악의 종류를 연상시켜 많은 논의를 불러온 에베소서 5:19는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이 19절은, 18절에서 시작하여 21절에서 일단락 되는 한 문장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 문장의 주 동사는 18절의 (성령으로) "충만하라"(플레루스쎄)이고 화답, 노래, 찬송(이상 19절), 감사(20절), 복종(21절)의 다섯 가지 행위가 분사형태로 병렬되어 있다. 편의상 몇 개의 문장으로 나누어 번역을 하면 이런 의미를 전달한다.

18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방탕하게 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19[성령으로 충만하여]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고, 20항상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21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서로 복종하십시오.

   주 동사와 분사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연관시키면 18절 하반절과 19-21절을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엮어 읽어도 무방하다. 이 경우 우리 한글 성경의 절 구분이 뒤섞여질 수밖에 없다.

18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방탕하게 됩니다. 오직, 19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고, 20항상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21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서로 복종함으로써 성령에 충만하십시오.

   우리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본문을 살펴볼 때 주목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19절에서 열거된 찬양 행위들이 성령충만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찬양을 할 것이 요구되거나 찬양을 함으로써 성령충만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둘째, 본문은 교회 내의 찬양 행위가 수직과 수평 양 방향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시와 찬미와 노래는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말하는'(랄룬테스 < 랄레오 = 말하다) 내용과 형식이다. 즉 교회 음악으로서의 찬양의 한 축은 분명히 서로간의 영적인 교제 차원을 구성하고 있다. 또 한 축은 하나님께로 향해지는 바 '협의의 찬양'이다.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하도' = 노래하다) '찬송'(< '프살로' = 노래하다)할 것이 독려된다. 주님께로 향하는 '하도'와 '프살로'는 두 가지 별개의 행위라기보다는 강조를 위한 동의어 반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장의 구성과 내용을 감안할 때 사실상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찬양과 성도들을 향한 교제의 노래를 굳이 엄격하게 구분하려는 의도도 전혀 읽히지 않는다. 그저 당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찬양의 행위를 여러 표현 방식으로 열거한 것일 뿐이다.

   셋째, 시(프살모스), 찬미(휨노스), 노래(오데)를 세 종류의 찬양으로 구분하는 해석은 자의적이고 실효성도 없다(골 3:16 참고). 칼뱅은 어원을 살려 시는 악기 반주의 노래, 찬미는 협의의 찬송, 신령한 노래는 권면과 기타 주제를 포함하는 노래들로 구분했다. 반면 루터는 시편의 헬라어 타이틀에 충실하게 시를 구약의 시편, 찬미를 성서 내에 있는 시편 이외의 찬송(출 15:1-18, 삿 5:1-31, 사 26:1-10, 눅 1:68-79 등), 신령한 노래를 성경에 없는 후대의 창작으로 보았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이러한 구분이 그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세 용어는 헬라어 구약 시편의 제목에서 서로 호환되어 사용되면서 자주 등장한다. 당대의 유대 사가 요세푸스도 '휨노스'를 '프살모스'와 연결시키는가 하면(「유대고대사」12.7.7) 어떤 때는 '오데'로 보기도 했다(「유대고대사」7.12.3). 이 세 용어의 병렬은 영적 찬양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동의어 반복 효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어지는 분사에서 '하도'와 '프살로'가 별 의미의 차이 없이 병행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처럼 이 구절에서 강조된 것은 성령충만한 '영성의 찬양'이지 찬양의 정확한 정의나 구분이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5. 찬양의 가사는 신학적 이슈

   그렇다면 오늘날 다소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찬양의 이슈들에 대해 신약성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우선 신약성서는 찬양을 당연시하며 찬양할 것을 권하지만 찬양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해 일체의 논쟁을 하지 않는다. 신약성서의 상당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시대가 열리면서 구 시대와의 긴장을 초래했기 때문에 생겨난 논쟁 문헌의 성격을 갖는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메시아관, 안식일과 성전, 정결례(淨潔禮) 등의 율법 문제, 의(義)의 개념 등을 놓고 당시의 유대적 통념(通念)과 끊임없는 갈등을 기록했다. 바울서신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할례와 율법의 준수 의무를 놓고 유대주의자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으며, 또 한편 그들을 얽어매고 있었던 과거 문화인 그리스-로마 세계의 잘못된 세속적 가치관과 도덕 및 우상숭배적인 관행들과 매사에 전면전을 치르는 것 같은 글모음이었다. 이렇게 혹자에게 싸움꾼의 문서처럼 보일 수 있는 신약성서가 찬양에 대해서는 유대적 특성이든 그리스-로마적 영향이든 일체의 왈가왈부 없이 기존의 관행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물론 오늘날 이슈가 되는 잘못된 찬양에 대한 논의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잘못된 찬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신약성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올바른 찬양과 그릇된 찬양의 논란은 결국 무엇에 기준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찬양의 언어적 측면은 성서의 신학적 정오(正誤) 판단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신학과 교리의 문제이다. 찬양의 가사가 복음의 원리를 위배하고 그릇된 신관(神觀)이나 기독론적 오류를 담고 있다면 그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 것이고 마땅히 그 내용의 수정을 요청해야될 것이다. 또한 찬양의 가사가 성서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 어구(語句)를 변형 없이 그대로 따와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으며 효과적 메시지 전달의 시성(詩性)을 담고 있다면 시대와 문화적 적용성을 가진 창조적 표현을 오히려 장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성 어거스틴이 시편 148편을 주해하면서 '찬송'을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로 정의한 것을 잘못 원용(援用)하여 기독교 음악 일반을 좁은 의미의 '경배 찬양'에 한정시키려는 시도는 결코 성서적이지 않다. 우리의 성서에 그 내용이 남겨져 있는 찬양의 가사들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주 내용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탄원과 간구, 마음의 기쁨과 감사를 표현한 주관적 시구, 신앙을 독려하는 권면의 노래 등을 넓게 포괄하고 있다. 또한 에베소서 5:19의 주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성도들간의 수평적 교제를 형식으로 하여 간접적으로 또는 그 전제(前提)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별 구분 없이 동일선상에서 당연시되고 있음도 확인되었다.

6. 찬양의 음악적 요소는 문화의 이슈

   문제는 순수하게 음악적 차원의 논의들이다. 분명히 신약성서는 찬양의 음악 요소에 대해 가치판단의 발언을 하지 않아 침묵하고 있다. 우리는 이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잘 생각해야 된다. 그래서 교회 음악의 선율, 화성, 리듬에 대한 적합성 주장과 교정의 노력은 그 근거를 살펴보면 기실 기성의 음악 철학과 문화적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 찬양의 음악적 요소에 대해서는 신약성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오(正誤)의 판단은 성서외적 역사와 문화의 논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정서와 배경 문화에 부합하지 않는 선율이나 비트가 교회 음악에 진입해 들어오면 마귀적, 또는 세속적인 것으로 단정하고 그에 끼워 맞출 논리를 개발해내는 경향이 있다. 현대기독교음악(CCM)을 정죄하는 논리를 살펴보면 사실상 진정하게 설득력을 지닌 성서적인 근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선율과 화음과 리듬을 각기 영과 정서와 육체에 연결시켜 리듬이 강조되는 록음악은 관능성만 더한다고 주장하는 논리가 어떤 심리학, 생리학적 기초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나 성서적 근거는 전무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필자는 록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헤비 메탈의 경우 몇 분을 견디기 힘들만큼 적응하기 힘들다. 그러나 록음악에 관능적 자극을 받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분위기 있는 선율의 클래식 뮤직에서 더 관능의 자극을 받지 않는가? 이것은 개별적 성격과 배경 문화의 이슈이다). 오히려 성경은 춤추고 손뼉치며 소고를 치면서 찬양하라고 호소를 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보수적인 교회음악가들이 선호하는 고전음악이, 등장했던 초창기에는 당대의 문화 속에서 세속적이고 관능적이며 천박하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던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런 음악을 만들어냈던 대가(大家)들의 사생활과 도덕성은 그 음악 자체의 악마성을 주장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비신앙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국내 대형교회에서 10년간 경배와 찬양을 인도했던 목사님 한 분의 날카로운 지적을 들었다. 찬양을 만드는 사람의 동기와 자세가 어떤 스타일의 음악인지 보다 하나님께는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랩 음악을 하면서 도덕적으로 순수한 젊은이들의 찬양을 사생활이 문란했고 동기도 아름답지 못했던 고전 음악가들의 찬양보다 더 기뻐 받으실 것이다.

   찬양의 음악적 요소는 신학적이기보다는 좀더 문화적이다. 오늘날 고전적 음악만이 교회의 순결에 적합하다고 주장하게 된 것을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관점에서 볼 때는 아이러니까지 느끼게 된다. "역사란 이상한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지만, 가톨릭 궁정에서 여흥으로 시작된 프랑스 운율 시편가가 프랑스 개신교회의 가장 엄격하고 독점적인 찬송이 된 것보다 더 이상한 것은 없을 것이다"(R. R. Terry,「칼뱅의 첫 시편가」, 111). 음악적 선호와 거기에 수반되는 경건 감각의 상당 정도가 사실은 학습된 문화적 특질이란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인 것처럼 오해하는 자문화중심(自文化中心) 율법주의는 불식되지 않을 것이다.

7. 음악을 구원하는 찬양

   찬양이 의미 있는 것은 형식보다도 내용 때문이다. 어떤 형식의 음악도 그 기원을 따져보면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역사를 거치면서 각종 순결치 못한 관행이나 사고와 결탁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음악은 질그릇이다. 그러나 그 질그릇이 안에 보배를 담기 때문에 귀해진다(고후 4:7). 특정 형식의 음악이 가치를 지닌 것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믿음을 독려하며 순결을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음악'의 구속(救贖)이라 명하고 싶다.

   신약성서는 많은 세속적 언어와 개념들을 원용하여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죄악과 우상숭배에 갇혀있던 그 언어들을 구속(救贖)해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세계에서 죄악의 영향을 벗어나 있는 백퍼센트 순도의 문화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위해 그것을 원용(援用)할 때 그 문화는 구속을 받는 영광의 자리에 오른다고 볼 수 있다. 음악도 그렇게 구속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병과 더러움은 전염이 된다. 그러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중증의 여인이 예수를 만졌을 때는 역의 전염이 발생했다(막 5:25-34). 예수의 거룩함과 깨끗함이 병과 불결로 고생하던 여인에게 전염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음악도 구속을 받을 수 있다.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을 정리해 본다.

8. 결론: 자유와 순결과 포용

   첫째, 신약성서가 찬양의 음악적 요소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점을 존중하라. 그것은 상당한 정도 우리 그리스도인 쪽의 자유재량을 뜻한다. 창조성이 중요시되는 예술적 성격을 지닌 찬양의 영역을 지나치게 전통적 인위의 규격 안에 짜 맞추려하는 것은 신앙적이지도 성서적이지도 않다. 역동적 창의성이 질식되지 않도록 표현과 감성의 심화를 위해 충분한 자유를 허락해야 할 것이다. 특정 문화, 특정 스타일의 음악을 우상화하지 말고 창조적 새 음악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

   둘째, 자유와 창의성을 강조한다 해서 현재 특정 음악에 결합되어 있는 죄악된 문화를 그대로 들여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된다(롬 12:2). 현재 상태에서 도저히 죄악적 요소와 분리시킬 수 없는 음악을 고의적으로 찬양에 도입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죄악이 된다. 아무리 음악이 중립적이라고 해도 뚜렷하게 무당춤을 동반하는 굿거리장단을 굳이 교회의 찬양으로 도입할 경우 현재로서는 많은 사람을 시험 들게 할 것이다. 이것은, 고기를 먹는 것이 죄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를 연상하여 스스로 시험에 들게 만들 때는 약한 자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 권했던 바울의 가르침의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고전 8:1-13). 무당굿의 리듬이 들리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손상당한다. 이것은 현재의 평균적 정서와 관련된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정서가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 리듬 또한 하나님을 찬미하는 통로가 되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아닌 것이 현실이며 진실이다.

   셋째, 이러한 문화적 가치 분별을 위한 기준이 무엇일까? 아마 에베소서 5:19에서 '노래'(오데)를 수식하는 형용사 '프뉴마티코스'(성령의, 신령한)에 답이 있을 것이다. 앞절 18절의 성령충만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된다. 모호한 듯 하지만, 찬양을 올리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가져오는 음악이라면 그 형식이 무엇이든지 크게 탓할 이유가 없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고전적인 찬송으로 도무지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데 CCM을 통해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삶이 바뀌며 사명자로 빚어져 가는데 굳이 나서서 찬물을 끼얹으며 그것이 성령충만도 아니고 마귀적이며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일은 성서적이지 않고 신앙적이지도 못하다. 뒤집어놓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무리 고전음악 스타일의 찬양이 기성세대에 진정 기독교적인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이 우리 십대들의 성령의 충만을 질식시킨다면 오히려 세속적이며 마귀적이며 영혼을 죽이는 살인적 도구가 될 수 있다.

   포용과 이해의 자세를 체득해야 한다. 찬양 스타일의 용납과 새 노래에의 동참은 이론과 원리의 문제이기보다는 신앙 인격의 성숙과 도량의 문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제기되는 찬양의 이슈는 신학적 정통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랑의 능력과 그 깊이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아주 자주 우리의 불쾌감이나 증오를 신학적 정통성의 용어로 포장하는 위선을 저질러왔다. 찬양에 있어서도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롬 15:1). 우리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말씀도 명심하라(갈 5:13). 오늘 우리가 중요하게 살펴보았던 에베소서 본문도 결국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는 권면으로 마무리되었다. 나의 것과 스타일이 다른 음악의 찬양으로 은혜 받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으로 용납하여 받아 주라. 아마 이것이 성서적인 찬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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