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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와 시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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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편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하나님의 사람이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

예전에는 시편 1편이 본받기 위한 어떤 조건으로서의 말씀으로 들려져서 '세상이 말하는 잘되는 복을 받으려면 이렇게 살아야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씀이 주는 부담과 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복을 받기 위한 의무와 조건이 아니라 이미 그 복이 있는 사람들의 자연스럽고 마땅한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할 다른 복은 이 땅에 없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이 말씀은 당연하고도 분명한 선포이자 약속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함께하는 자는 ......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좌정하시면 나는 결단코 죄의 자리를 기뻐할 수 없고 오히려 율법이 가르치시는 의를 이루기 위한 순종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들의 모습은 결국 이렇게 완성되어질 것이지만 아직 우리는 그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그 길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흔들릴만한 상황을 만날 것이며 그 때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 하나님은 한없이 인자한 모습으로 가르치시고 계시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자 임에도 불구하고 악의 자리인 것을 알면서도 그 모임에 그 관계에 소속되어 있으려 하려고 한다. 영어 성경을 보면 1절 말씀 속에 악인을 따라 걷고 또 그 길에 서 있고, 자리에 앉는 walk, stand, sit이라는 동사가 나온다. 어쩌면 죄는 단순히 호기심에 따라가는 것을 시작으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급기야 자리에 앉아 그 시간을 함께하는 것으로 진행되어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가 간절한가 열심을 가지고 속해야할 곳이 아니다. 우리의 소속은 우리에게 생명의 복을 주신 하나님인 것이다. 우리의 소속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바로 율법...말씀인 것이다.이 죄의 진행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율법 즉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그 때마다 인자하게 하나님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말씀해주실 것이다.

결국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그
날에는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4절-6절) 악인들은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 - 오히려 우리의 모임에 소속되고 싶어하지만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갈망하여 그 곳에 속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하기 보다 그들이 복 받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말씀 앞에 바로 서야함을 느낀다. 결국 복 받은 자 된 이유는 죄인을 의인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함이리라.

복 받은 자임을 매일 감사하자.

내 소속이 하나님 나라인 것에 감사하자.

결국에 완성하실 구원에 감사하자.

그리고 복 받은 자로 복을 전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