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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와 시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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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막1:35-45)

 

성경을 읽으면서 궁금했습니다. 기도가 나보다 초월한 힘을 가지신 분에게 도움을 구하고 의지하는 행위라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기도하실까... 다만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늘 예수님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간절하셨고 기도가 사역보다 우선이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시며 일하시는지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는 설명하는 것을 통해 그저 머리 속에서 그려볼 뿐 다 알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렇게 관계하시는 분으로 존재하시는 분이고 또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고 연합되어야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 선택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내 본질 속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갈망이 충족되는 시간인 것입니다.

"아주 이른 새벽"에 모두를 피해서 한 분을 만나야하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필요를 위해 그리고 나의 필요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사용합니다.   

아마도 내가 가진 필요와 또 나와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합쳐 펼쳐놓는다면 그것이 주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엄청날 것입니다. 그 중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있겠지만 극히 작은 부분일 것이고,아마 대부분은 무시와 외면과 회피라는 마음의 창고에  쌓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넘쳐나고 있고 그것을 짧은 기사로 넘겨받지만 도리 없이 마음의 창고에 던져둡니다.

오늘 말씀 속의 나병환자처럼 세상의 요구에 추방되어 단절되고 답이 없는 곳에서 당연한 결말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존재로 살아가는 삶이 이땅의 삶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불완전하며 오염된 필요들로 가득차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삶을 살아내야하는 존재들입니다. 

어쩌면 기도는 죄로 인해 오염되고 불완전한 필요들로 가득찬 삶 속에서

유일한 완전함 속으로 들어가 누리는 평안일 것입니다. 완전함이 주는 안식..그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거룩하심의 성품이 세상의 죄와 만났을 때의 고통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들과는 비교하실 수 없을 그런 고통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 기도는 당연하고도 우선적인 필요였을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모든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에 응하느라 고립된 삶 속에서 나오지 않고 머물렀다면 그는 병에서 놓임을 받지 못했겠지요.

성경은 "나병이 떠나갔다"라로 표현합니다.

마치 병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와 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로 그 사람에게서 살았던 것으로 말입니다. 병이든 삶의 문제든 그 어떤 것이든 인격이 되어 내 속에 자리를 펴고 머무르며 삶을 살아가나 봅니다. 그리하여 원래의 나는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그 문제가 내 삶을 완전히 지배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하는 존재입니다.  

그분을 만나면 그 완전하심으로 내 속에 있는 수많은 질문과 갈망들을 그저 떠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모두의 예수님이시길 군중들은 바랬지만, 늘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만의 예수님이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