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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7장에 대한 연구

2006.03.09 13:28

폭우 조회 수:3068 추천:28

총신대 신대원의 김정우교수님의 글...

열왕기상 17장을 묵상하다가
교수님의 글을 기억하고 참고하여 읽다...



이스라엘에 비와 이슬이 그쳤을 때
                                                           (왕상 17:1-24)

                                                            김정우


1. 엘리야의 등장과 첫 선포(왕상 17:1)
 

1) 갑작스러운 엘리야의 등장
엘리야의 등장은 마른 하늘에 번개와 천둥이 치는 것처럼 갑작스럽다.
열왕기 저자는 "길르앗에 살고 있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라며 엘리야를 소개한다(1절 상).
그가 그 때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또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소개 없이 엘리야는 돌연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그 흔한 족보와 지파에 관한 언급조차 없이 소개된다. 그가 어디에서 공부하였으며, 누구의 사사를 받았는지, 어떤 학파를 이루고 있는지, 그를 지지하는 사회적-영적 공동체가 어떤 자들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가 그 동안 살고 있었다는 길르앗이란 곳도 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거칠고 험한 시골이다.
그는 단지 이곳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 출신인지 아닌지도 알 길이 없다.
핑크에 따르면, "그곳은 덩쿨이 많은 숲 지역이었다. 그 고적함은 산에 흐르는 냇물 소리로 깨어질 뿐이었다. 그 계곡에는 무서운 맹수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Pink). 그가 태어난 곳인 "디셉"이란 곳도 오늘날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어떤 이는 이곳이 현재 알-이스티브(al-Istib)로서 얍복강에서 북쪽으로 약 8마일의 거리에 있는 성 엘리야 사원 근처로 보지만(Gray 558), 이것도 전설에 불과하다.

엘리야가 등장하는 첫 장에는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사역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소명기사"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어떻게 부름을 받았는지, 그 부름에 어떻게 응답하였는지, 그 후에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는 "선지자"로도 조차 불려지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마치 멜기세덱과 같고, 이사야 53장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종"과 같다(1-2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출신에 대해 질문과 조롱을 받았다(요 6:42; 8:39-41).
그렇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자를 선택하사 지혜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6-28).

 
2) 엘리야의 첫 메시지: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아니하리라"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름없는 선지자가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출신도 성분도 분명하지 않은 자가 왕에게 대담하게 말한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절 하).

(1)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엘리야는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맹세하며 청천벽력 같은 무서운 맹세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내가 섬기다"는 동사는 "서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내가 그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된다((the God of Israel before whom I stand).
이 표현은 모세(신10:10), 엘리사(왕하 3:14 ; 5:16), 천사 가브리엘(눅 1:19)에게 적용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은 윤리적이라기 보다 관계적이다. 즉, 이것은 마치 엘리야가 "왕되신 주님의 친밀한 모사와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주님 앞에 서있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아마 엘리야는 미가야 선지자와 같이 천상에 있는 거룩한 총회에서 장차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고 그곳의 결정을 아합에게 전하고 있는 것 같다(왕상 22:19-20).
즉, 엘리야는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아합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먼저 "주님 만이 살아계신 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선포한다.

(2)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리라"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내가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맹세한다(<표준새번역>).
그의 맹세는 그의 등장 만큼 갑작스럽고 거칠다.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이런 저주를 내렸을까?
물론 우리는 아합 왕이 악한 것을 안다.
바로 앞 장에서 등극과 그의 악함에 대한 평가(16:29-32)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생애 전체에 대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아합은 이 당시에 "바알의 신전을 사마리아에 건축하였다"(32절).
하나님의 백성 북 이스라엘의 수도에 바알을 섬기는 신전이 별다른 저항 없이 세워졌다는 것은 온 나라가 얼마나 심하게 부패하였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이런 점에서 엘리야의 가뭄 선포는 바알과 아세라를 열심히 섬긴 아합과 그것을 묵인하고 동조한 온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었다(33절).

또한 왕상 17:1절 바로 앞에 나오는 16:34절은 엘리야의 가뭄 선언에 대하여 어떤 암시를 던져주고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아합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황금시대를 누리고 있었지만, 영적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즉 아합이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바알과 아세라를 열심히 섬기고 있을 때"(16:30-33절), 바로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한다"(16:34 ).
이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다시 건축하는 자에게 선언한 저주를 의도적으로 거스린 사건이었다.
이리하여 히엘은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다."
장자와 막내를 잃는 것은 단지 둘을 잃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잃은 것이었다.
여리고의 재건은 하나님에 대한 공개적인 반역이요 도전이었으므로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 대로 언약의 저주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당시의 영적인 어둠과 타락상을 예증하는 대표적 사건이었다.

(3) 언약의 저주로서의 가뭄과 기근

그러나 왜 하필이면 가뭄과 기근인가?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선택하도록 하셨다(신 32:47).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복을 누릴 것인지 혹은 징계와 나아가 심판을 받을 것인지는 그들의 전인적인 선택에 달려 있었다.
물론 그들이 스스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하여 그들은 마음과 뜻을 다하여 늘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반역적인 백성이 되어 심판을 받든지 날마다 생활에서 선택하여야 했다.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과 모압 언약에서 순종에 뒤따르는 형통함(신 28:1-6)과 불순종에 뒤따르는 저주를 선포하셨다(신 28:22-23).

고대 이스라엘은 농경 사회여서 백성들에게 내려지는 복과 저주가 대부분 농사와 비와 관련이 있다.
비는 주로 초가을과 초봄에 내린다.
긴 여름의 더위와 가뭄이 끝나고 가을에 "이른 비"가 내리면 메마르고 갈라진 땅이 부드러워진다(신 11:14; 시 84:6; 욜 2:23).
이 때 비가 오지 않으면, 땅은 철과 반석처럼 단단하게 되어 갈 수가 없다.
이른 봄에 내리는 "늦은 비"는 겨울 철에 말랐던 대지를 부드럽게 하고, 새로운 농사를 시작하게 한다(약 5:7). 따라서 비가 그친다는 것은 농경사회에 치명적이다.
비가 내리지 않는 기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슬을 의지하고 산다.
엘리야 기사의 대부분은 이스르엘 평원에서 이루어진다.
이곳은 가을부터 봄까지 헬몬 산으로부터 매일 아침 엄청난 이슬이 내려, 마치 비가 온 것 같다. 이곳에는 이슬이 많이 내리므로 비가 오지 않아도, 농사가 가능하다. 이곳은 바로 기드온이 "이슬로" 양털 시험을 한 곳이다(삿 6:36-40).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이슬"(tal)과 "비"(matar)를 거두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3) 바알 종교에 대한 거룩한 전쟁의 선포
엘리야는 언약의 저주로서 가뭄을 선포하지만, 이 배경에는 종교적인 논쟁이 있다.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 바알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가나안 신화의 배경에서 보면, 바알은 폭풍의 신이다.
고대 우가릿의 한 토판에 의하면 바알은 물을 정복하는 자이다.
바알의 한 비문을 보면, 비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해 "7년 간 바알이 실패하고, 구름 타는 자가 8년을, 이슬도 비도 없으리라. 두 깊음이 솟는 일도, 바알의 소리의 아름다움도(없으리라)"고 한다.

우가릿의 왕이었던 케렛은 환상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하늘은 기름을 비처럼 내리고, 와디(Wadi)는 꿀을 흘리니, 능한 자 바알이 살아 계시거니와 보라, 땅의 왕이시며 주가 계시도다."
바로 마지막 줄은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할 때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시거니와"라는 형식과 동일하다.

따라서 엘리야가 이슬과 비를 금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의 큰 싸움을 예고해 준다. 따라서 어느 신이 참으로 살아 계신지 곧 드러날 것이다.
아합과 이세벨과 그들의 앞잡이들은 비옥한 땅과 풍년을 누리기 위해 바알을 섬긴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풍년을 주시는 분이라고 한다.
누가 비를 줄 것인가? 따라서 한판 싸움이 불가피하였다.

 

4) 명상
아합 시대의 이스라엘은 참 하나님을 떠나 거짓 신인 바알을 섬기고 있었다.
바알은 그들의 맘몬(Mammon)이었다.
그들은 상업주의와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에 빠져 언약의 참된 정신을 잃고 살았다.
그들은 근본을 잃었고, 잊었다.
"빵 한 줄과 성경을 옆에 두고 기도하는 할아버지"의 경건한 삶의 모습을 잊고 "좀 더 빨리 부자되어" 허세부리는 인생을 갈망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슬과 비를 거두어 가신다(렘 5:24-25).
이제 엘리야는 바알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결국 아합과 이세벨의 왕국이 시들고 망할 것을 예언적으로 말한다.
엘리야와 아합의 최후의 승부는 장차 갈멜산에서 이루어질 것이다(18장).

 

2. 그릿 시냇가에서(왕상 17:2-7)
"내 말이 없으면 앞으로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리라"는 엘리야의 맹세(1절)에 이어, 세 가지 이야기가 서로 이어지며 펼쳐지고 있다.
첫 이야기는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로 시작하며(2절), 엘리야가 그 말씀을 따라 그릿 시냇가에서 숨어 사는 모습을 그려준다(2-7절).
두 번째 이야기도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로 시작하며(8절), 엘리야가 그 말씀을 따라 사르밧으로 가서 숨어 사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8-16절).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는 "이 일 후에"라는 새로운 시간대로 시작하여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갑자기 죽음으로 야기된 위기와 생명의 회복 이야기를 담고 있다(17-24절).

 

1) "너는 숨으라"(17:2-3)
하나님은 갑자기 엘리야에게 숨으라고 명하신다(왕상 17:3; 18:1과 대조됨).
젊고 패기만만한 엘리야는 숨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그는 주님을 위해 "각별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 소리는 천둥 소리 같았을 것이며, 그의 설교는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이 없으면 수 년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리라"는 단 한 마디를 던지고 도망쳐야 하는 수모(?)를 경험한다.
엘리야는 장차 더 큰 싸움을 해야 했기 때문에, 더 큰 주님의 연단이 필요하였고 사회생활이 없는 곳에서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삶을 배워야 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그릿 시내가에 숨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릿 시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며, 엘리야가 그곳에 얼마나 오랫동안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가뭄이 팔레스타인의 넓은 지역으로 널리 확대되어 심각해질 때까지 있었을 것 같다(왕상 17:7-12).
엘리야는 그릿 시내 말고 다른 장소로 피하고 싶었을 수 있다.
그곳은 문화도 없고 사회생활도 없는 지극히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곳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그릿 시냇가"로만 가라고 하시며 엘리야는 별 불평이 없이 순종하고 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어버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점에서 볼 때, 양식과 물의 기근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기근을 경험하는 것이 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 8:11-13).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 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이 없다(시74:9).

 

2)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4-7절)
엘리야가 그릿 시내로 피하여 숨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명령"과 "선지자의 순종"을 서로 잘 잇고 있다.


명령: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2 상)

순종: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갔다"(5절)

명령: "너는 여기를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3절)

순종: "그가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렀다"(5절 하).


위의 패턴을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순종은 거의 문자적이며, 절대적이고 완전하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백성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바알에게 무릎 꿇고 입맞추는 자들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4절). 그렇지만 왜 하필이면 까마귀인가?
매튜 헨리는 여기에서 "까마귀"에 대해 멋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1) 까마귀는 먹을 것을 보면 게걸스럽게 잡아 먹는 맹금류이다(잠 30:17).

(2) 까마귀는 부정한 짐승이며(레 11:15),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까마귀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신 14:14).

(3) 까마귀는 곤충과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새이다.

(4) 까마귀는 조금 밖에 먹을 것을 가져올 수 없다.

(5) 까마귀는 자기 새끼조차도 잘 돌보지 않는다.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비록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져준다 하더라도 엘리야는 본능적으로 먹고 싶어 하지 않았겠지만,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까마귀를 선택하셔서 엘리야를 돌보게 하신다(시 135:6).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과 너무나 다르다.
하나님은 바로의 딸로 하여금 모세를 나일 강에서 건지게 하여 바로의 아들로 자라게 하시며, 발람을 통해 메시야의 예언을 하게 하시고, 나귀의 턱뼈를 삼손의 손에 주어 블렛셋 군사들을 죽이게 하시며, 다윗의 물맷돌 하나로 블렛셋의 괴물 골리앗을 처치하게 하신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아시는 주님이 까마귀를 명하여,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오게 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의 "까마귀"('rbm)가 "아랍인" 즉, "사막에 거하는 베두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하지만(Skinner), 본문은 새들도 창조주의 뜻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은 "독수리"처럼 그들을 돌보셨다(신 32:11).
주님은 엘리야를 자신의 날개 그늘 아래에 두신다.

 

3) 명상

엘리야는 참 이스라엘의 모델로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오직 주님께만 충성을 바치고 그만 섬긴다.
따라서 주님께서도 자신의 선지자를 버리지 않으시며, 주께 순종하는 나라에 복의 징표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도 아래에서 백성들에게 음식과 물을 광야에서 주신 것 같이(출 17:1-7; 민 11:4-9; 20:1-13), 이제 그의 신실한 종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하여 먹을 것을 주신다.

넓은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는 엘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예수께서도 참된 이스라엘을 구현하신다.
그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원형으로서, 장차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나라를 이루려고 하셨다. 그러나 그는 먼저 순종하지 않는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다.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엘리야도 그를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마 27:47-49).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로 피한 엘리야에게 양식을 주신 것처럼, 우리가 메마르고 거친 세상에 살아갈 때 우리 앞에 식탁을 베풀어주신다(시 23:5).
우리는 메말라 가는 그릿 시내를 엘리야와 함께 바라보면서, 영원히 메마르지 않는 시내를 사모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신이 결코 마르지 않는 생수의 샘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 4:14; 7:37-39).



3. 다함이 없는 밀가루와 기름(왕상 17:8-16)
 
1) 엘리야를 바알의 본토로 보내시는 주님(8-9절)
하나님께서는 그릿 시내가 영원히 흐르도록 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 시내가 마르도록 허락하신다(7절).
이제 주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한번 친숙했던 환경을 떠나라고 명하신다(8절).
그리고 이번에는 엘리야에게 사렙다로 가라고 명하신다.
그레이(Gray)는 사렙다가 시돈에서 남쪽으로 약 7마일 거리에 있는 오늘날의 라스 사라판드(Ras Sarafand)라고 한다.
이곳은 두로와 시돈 사이에 있는 지중해의 해변 도시로 알려져 있다.
주님은 엘리야를 바알 숭배의 본산지인 페니키아 땅으로 보내신다.
하필이면 페니키아의 사렙다로 보내실까?
표면적으로 볼 때, 지금 아합은 엘리야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기 때문에 마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모든 상식을 뒤엎고 엘리야를 두로 왕의 도시에 숨기고 있다. 그렇지만, 더 깊은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곳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보여주기 위하여 엘리야를 이곳으로 보내신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안방 장군이 아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문제는 페니키아의 바알을 숭배하는 것 때문에 생겼으므로(왕상 16:31-32), 이곳에서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실 필요가 있었다.
주님은 자신의 능력이 이스라엘 지역 안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는 "언덕과 들판의 신"에 불과한 신이 아니시다(왕상 20:23 참조).

페니키아의 바알은 비와 풍년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기근과 가뭄을 선언하실 때(17:1), 그 영향력은 이스라엘 땅 경계를 훨씬 넘어가며 바알의 본토에까지 미친다.
주님의 권세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한 땅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알의 무능을 바알의 본토에서 보여주시길 원하신다.
이리하여 열국의 신들은 단지 환영임을 드러내시고자 하신다.

페니키아는 원래 해양국이었지만, 이 나라도 스스로 먹고 살 힘이 없었다.
성경의 여러 기사를 보면, 페니키아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양식을 수입하여 먹고 살았다(대하 2:10; 겔 27:17; 행 12:20).
이스라엘이 페니키아의 바알을 풍년의 원천으로 예배하는 시험을 받는 것은 역설적이다.
자기 백성도 먹여 살리지 못하는 페니키아의 바알에 대해 왜 이스라엘은 유혹을 받았을까? 그렇지만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비극과 무지가 있지 않는가?
그들은 자신의 영혼의 갈망을 채울 수 없는 존재에 모든 마음을 다 빼앗기고 살고 있다.
우리들도 우리의 빈 마음을 부, 교육, 지위, 명예로 채우기 위해 우리의 정신을 모두 빼앗기며 살고 있지 않는가?

 

2) 사르밧 과부의 믿음(10-16절)
하나님은 이제 자신의 선지자를 두로의 한 과부에게 보내신다.
이 과부는 그 당시의 사회적 계층으로 볼 때, 가장 소외되고 낮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방인이요, 과부요, 자신의 마지막 식사를 먹고 죽기를 기다리는 절대적인 궁핍과 위기 가운데 있는 여인이었다.
이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자신의 은혜를 이방 나라의 가난한 과부에게 나타내실 뿐 아니라, 그녀를 통하여 자신의 선지자를 돌보신다.

 

(1) 엘리야의 부탁과 여인의 은근한 거절(10-12절)

그릿 시냇가에서의 첫 장면(2-7절)에 이어 사르밧에서의 둘째 장면(8-16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임하시고 이어 선지자는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둘째 장면에서는 이외의 변수가 생겨 이야기의 복선을 더욱 깊게 깔아준다.


(1) 하나님의 명령: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9절 상)

(2) 하나님의 약속: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9절 하)

(3) 엘리야의 순종: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10절 상)

(4) 정황: "마침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10절 중)

(5) 엘리야의 청원: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10절 하-11절)

(6) 여인의 응답: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12절)


앞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내 말이 없으면 가뭄이 오리라"는 저주를 선언하였다(17:1). 그러나 그릿 시내가 마를 때 그는 자기 말의 씨를 스스로 거둔다. 그는 선지자로서 자기 선포의 희생자가 된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전할 때, 그도 심판의 영향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엘리야는 새로운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더 이상 까마귀를 통해 양식이 오지 않았다.
그는 양식을 얻는 데 동참해야 했다.
물론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존심을 접고 이방 과부에게 요청해야 했으며, 또한 은근한 거절까지 각오해야 했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10절)는 엘리야의 눈에 비친 과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의 한 과부"에게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이렇게 가난한 과부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앞으로 긴 세월동안 의지하고 살아야 할 과부는 나뭇가지를 줍고 있다. 그녀는 충분한 연료조차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엘리야는 그녀에게 공손하게 부탁한다.
고대 사회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걸고, 그것도 "먹는 문제"로 부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여인에게 "물 한 모금"과 "떡 한 조각"을 부탁한다.
그는 소량을 부탁한다. "한 조각"은 "부스러기"이다(시 147:17에서는 '우박'에 대한 은유로 나타난다).
과부는 물 한 모금은 즉시 주겠다고 하나 떡은 거절한다.
여인의 대답은 의외였다.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는 대답은 단지 그녀의 형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은근한 거절이었다. 이것은 엘리야의 담대한 부탁과 대조를 이룬다.

누가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양식을 내어 놓을 수 있겠는가?
과부의 관점에서 보면 생면 부지의 이방인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과 자기 아들이 먹으려는 최후의 식사를 달라고 한다.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절)는 그녀의 말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이 말은 엘리야에게 한 그녀의 맹세와 강한 대조를 이룬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12절 상), 그녀는 "생명"(여호와께서 살아계시거니와)에서 "죽음"(우리가 죽으리라)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그녀가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운명이었다.

 

2) 엘리야의 약속과 과부의 순종(13-16절)

그러나 엘리야는 당황하지 않고 다시 여인에게 명령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전한다.

(1) 엘리야의 명령: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라"(13절)

(2) 엘리야의 약속: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4절)

(3) 여인의 순종: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라"(15절)

선지자는 단지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동적으로 양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어야 했다.
여인이 엘리야를 위해 양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녀에게 밀가루와 기름을 공급하여야 했다.
선지자는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로부터 양식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했으나, 여기에서 그는 자신과 과부의 집을 위한 양식을 얻기 위해 능동적으로 간청하고, 또 양식을 공급해 주어야 했다.

엘리야 편에서 볼 때 "나를 먼저 먹여라"는 말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왕상 17:13).
여기에서 "먼저"와 "뒤"가 중요하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어려운 헌신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요청에는 주님의 약속이 있다.
"나를 우선하고 내 능력을 시험해 보라. 내 말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때 사르밧의 과부가 가난한 거지 같은 외국인을 믿을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약속은 늘 우리에게 어리석어 보인다. 따라서 주님의 약속은 항상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약속은 능력이 된다(고전 1:18).

여인은 의외로 선지자의 약속을 잘 믿었다.
칼빈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 여인에게 믿음을 주신 것이다. 그녀에게 선지자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주셨다.
이 여인이 가진 믿음도 기적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누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선지자의 말씀을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믿은 것이다.
문을 열 때는 내가 원해서 열고 들어 온 것 같은 데, 들어와 보면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과 같다.

이 여인은 단지 옛 성서의 인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과부와 같은 정황에 던져질 때가 있다.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촉망 받던 한 여성이 선교에 헌신한 후, 이 기사를 읽고 이런 기도를 썼다.
"나는 힘도 시간도 사랑도 인내도 정서적인 여유도 돈도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가진 가장 보잘 것 없는 것도 요구받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 뿐입니다. 내게 남은 가장 작은 것도 사용하시고, 가장 약한 노력에도 복 주시길 기도할 뿐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16절)는 말씀으로 끝난다.
이리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8절)와 수미일치를 이룬다. 열왕기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주님은 "메마르지 않는 기름통"의 기적을 이 여인에게 선물로 주신다.
"엘리야와 그녀와 그 아들"이 흉년이 다 지나갈 때 까지 하나님의 공급을 받는다.

 

3) 명상
우리는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에서 먼저 약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
그는 여자요, 과부요, 외아들을 가진 자요, 이방인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세계관에서 보면, 세계의 변경에 있는 자요, 가장 소외된 계층의 사람이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이 세상의 과부와 아버지 없는 아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그는 세상의 약하고 낮은 자를 선택하사 은혜를 먼저 베푸신다.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고, 보호자도 없는 자들을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돌보신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하고 어려운 자를 돌보도록 명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이 성품이기 때문이다(사 10:1-4; 잠 14:31).

여기에서 이 여인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방 땅에 보내셨다. 여기에 선교적인 차원이 있다. 원래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독점물이 아니셨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부터, 그의 복은 이스라엘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땅의 족속들"을 향한 것이었다(창 12:3; 18:18; 22:18).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복을 "온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전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열국에게 하나님의 증인으로 부름 받아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북왕국에서 바알 숭배가 국가 종교가 되어,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비록 자신의 사명을 이루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좌절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를 통해 친히 이방 선교의 모델을 보여주신다.

사르밧의 과부에게 찾아가는 엘리야의 경험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델이 된다.
예수께서 "이방의 갈릴리" 지역을 여행하시면서, 복음을 이방나라들에 전하실 때,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방에서 베푼 것과 같은 기적을 그들에게도 요구하였다. 이 때 예수는 엘리야의 경험을 암시하셨다(눅 4:24).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그는 이방 과부에게 보냄 받은 것 같이, 자신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눅 4:28-30).
그들은 "원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싶어 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엘리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사도 하나님께서 원수 나라의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줄 때, 같은 문제로 고심하였다(왕하 5).

사르밧 과부의 믿음은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소위 "주의 종을 잘 대접하여 복을 받았다"는 공식이 아니다.
그녀는 선지자의 말씀을 믿었고, 자신과 아들의 최후의 양식을 드렸다.
그녀는 기근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온 몸을 드린다.
다시 한번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기에 쓰여졌음을 기억해 볼 때, 저자는 주전 6세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는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우리는 이방 땅에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어디를 향해 손을 펴고 기도할 것인가?"

사르밧 과부의 다함이 없는 기름과 밀가루의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성경에 있는 기적의 성격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의 진실성을 증거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신의 진실성을 보증해 준다(히 1:1; 2:4).
기적은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주술이 아니다.

또한 기적은 구속적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기적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고 회복하신다.
기적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한 저주를 풀어준다.
우리는 성경의 기적을 보면서, 죄와 그 영향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다.
사르밧 과부가 체험한 기적은 하나님께서 장차 창조하실 종말론적인 신천 신지의 그림자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풍년 영상으로 미래에 임할 축복을 그린다(암 9:13-15; 욜 3:18; 겔 47:12; 슥 3:10).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주신 에덴 동산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장차 올 새 예루살렘에서는 죽음과 애곡과 슬픔과 고통이 없을 것이다(계 21:4-5; 22:1-5).
사르밧 과부와 그녀의 아들은 바로 이 미래의 축복을 맛배기처럼 조금 미리 맛본 것이다.

 

4. 사르밧 과부의 아들의 죽음과 엘리야의 중보기도(왕상 17:17-24)

1) 사르밧 과부의 시련(17-18절)
"폭풍 전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폭풍 직전의 평온하고, 고요한 밤에서 나온 말이다.
폭풍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밤이다. 어떻게 그 고요한 밤 다음에 온 세상을 뒤 흔드는 폭풍이 올까?라며 격언을 만든 것 같다.
사실 기상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일년 중 가장 좋은 날씨는 태풍이 오기 직전이라고 한다.
거대한 폭풍의 강렬한 회전과 저기압이 주위 날씨를 맑게 하기 때문이다.

폭풍 전야와 같이 사르밧의 과부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
그녀는 흉년에도 쉬임 없이 흘러내리는 기름병과 끊어지지 않는 밀가루를 공급 받고 있다.
그녀의 믿음은 훌륭하였다.
마지막 양식을 선지자에게 바친 여인의 믿음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러나 이제 무서운 시험을 받는다.
이제는 기근의 도전이 아니라, 죽음의 도전을 받고 있다.
죽음은 인간이 만나는 최후의 원수이다(고전 15:20).

죽음이 다가올 때 우리의 평화는 얼마나 쉽게 깨어지는가.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7-18절).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람이여"는 선지자에 대한 또 다른 칭호이다.
여기에 풍자가 있다.
엘리야 선지자는 앞에서 흉년 중에도 양식을 공급해주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으나, 과부도 이야기꾼도 엘리야를 이런 칭호로 부르지 않았다.
아들이 죽자마자, 과부는 엘리야의 신분과 직무가 자기 집안의 비극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엘리야가 자기 아들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가져온 것으로 여기고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자기 집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필요하게 자기 집에 관심을 가지신 것이며 자신의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고 심판하신 것이다.

과부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가 당하는 시험이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이다.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의 시험을 자주 받는다.
큰 구원 후에 큰 절망의 시험을 받는다.
아브라함도 한평생 기다린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을 받는다(창 22).
욥은 의인이었지만, 그는 가족과 소유를 다 잃고, 자기 몸까지 썩어가는 시험을 받는다.
엘리야는 갈멜의 승리(왕상 18) 직후에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친다(왕상 19).
이런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믿음의 길을 떠나게 된다.
하나님의 신실성과 능력을 불신하는 시험에도 너무 쉽게 빠진다.
믿음은 단 번에 이루는 것이 아니며 시험과 시련을 통해 다져가고 성숙해 가는 것이다.

가나안 신화의 배경에서 이 기사를 보면 여기에도 바알과 여호와의 대결이 나타난다.
가나안 신화에서 바알은 단지 폭풍과 비의 신이 아니다.
그는 모든 생명에 비를 주는 자로서, 생명의 제공자이며 유지자로 나타난다.
그가 비를 주면 온 땅은 열매를 맺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생기를 얻는다.
그가 비를 그치면, 사람과 식물과 동물들이 시들고 죽으며 기근과 질병이 넘치게 된다.
가나안 신화에서 바알은 해마다 여름철에 죽어 음부에 내려가며, 가을이 되면,
자기 아내인 아나트의 도움을 입어 다시 죽음과 싸워 승리하고 다시 살아나 비를 내려준다.
이리하여 바알은 해마다 무덤에서 살아나며 생명의 원천이 된다.
이제 바알이 이 불쌍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정말 죽음이 찾아왔을 때, 바알은 자신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한 사람이 죽어 맥박과 호홉이 끊어질 때 바알이 해결할 수 있을까?(왕상 17:17).
바알 자신도 남의 도움 없이는 지하에 있는 음부에서 살아 나올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릴 수 있겠는가?

 

2) 엘리야의 기도: "주께서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19-20절)
엘리야는 처음에 등장할 때부터 "여호와는 살아계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생명의 하나님을 전하는 자였다.
바알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죽은 아들조차 살리시는 분임을 믿고 있다.
그는 사렙다 과부의 지독한 도전을 받으며 그녀와 그녀의 죽은 아들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간구한다.

여기에서 엘리야의 행동 몇 가지가 특이하다.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 가서 자기 침대에 뉘였다"(19절).
먼저 엘리야는 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취하여 "그의 팔"로 안는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쉽게 내어줄 수 없었겠지만, 엘리야의 팔에 맡긴다.
엘리야는 자연인 어머니의 품에서 죽은 아들을 취하여 자신의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간다.
이리하여 어머니의 공간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공간으로 옮겨진다.
어머니의 애정이 가득찬 자리에서 엘리야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장소로 옮겨간다.
그리고 엘리야는 아이를 자신의 침대 위에 눕이고 기도한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두 번 기도하며, 주님께 "부르짖고"(qara') 또한 "간청한다"('amar).
엘리야의 두 기도는 그가 아이 위에 몸을 엎드리는 행동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A. 주님을 부름: "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20 상)

B. 간구(20 하)

X. 아이 위에 몸을 엎드림(21 상)

A'. 주님을 부름: "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21 중)

B'. 간구(21하).


엘리야의 첫 기도는 원망조이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집의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엘리야는 아이가 죽게 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부가 자신에게 베풀어 준 사랑을 하나님께 상기시킨다.
마치 엘리야가 "왜 그녀의 순종을 심판의 기회로 삼았습니까? 이것은 불공평한 처사입니다"라며 하나님께 따지는 것 같다.

엘리야의 관점에서 볼 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라는 과부의 질문은 통렬하다.
엘리야는 많은 시련과 위험과 실망을 거쳐 여기까지 왔지만, 이런 상황에 자신이 던져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는 갑작스럽게 죽었고,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고발은 지독하다.
모든 쓴 물이 울컥 올라오는 것 같다.
엘리야 자신도 충격을 받으며, 어떤 대답도 위로도 확신도 줄 수 없었다.
아마 엘리야 역시 이 여인처럼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기도하기 위해 이렇게 먼 이방 땅까지 와서 숨어 사는데, 이곳에서 조차도 환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 황당해 한다.

이런 정황 속에서 엘리야는 먼저 과부의 말을 하나님에게 그대로 가져간다.
과부가 한 쓴 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절)는 엘리야의 기도,
"주께서 또 내가 머물고 있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와 동일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엘리야가 중보자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에서 엘리야는 주의 말씀을 여인에게 전했고, 과부에게 명령하였다.
이제는 과부의 말을 그대로 주님께 전한다.
선지자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두 방향을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한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여인의 운명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
그는 그녀의 상황에 대해 아주 동정적이다.
엘리야는 여인을 "과부"로 부른다(9, 10절).
이 호칭은 아주 독특하다.
17절에서는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으로 불렀다.
그녀가 엘리야가 사는 집의 주인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이야기꾼은 아이의 죽음이 엘리야가 그 집에 거주하는 사건과 별개의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나아가 엘리야는 자신을 "나그네"로 부른다(20절).
나그네는 과부와 함께 하나님에게 우선적으로 보호받는 계층이다(신 10:18).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을 따라 여기에 있는 세 부류의 약자들인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신속히 도와 주셔야 한다고 호소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점을 잘 알며,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며 기도한다.

 

3)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엘리야(21절)
첫 번째 기도 직후에 엘리야는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린다."
이런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주석가들은 다양한 견해를 피력한다.
어떤 이는 엘리야가 아이의 몸을 따뜻하게 하여 아이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보기도 하며(Rabbi David Qimchi),
또 어떤 이는 인공호흡을 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LXX, enepusesen, "breathed upon";
"엘리야는 아이에게 세 번 깊이 숨을 불어 넣고...").
그러나 현대의 대부분 학자들은 엘리야가 능력을 전수하기 위해 죽은 아이와 접촉하는 유감주술 의식을 행하고 있다고 본다(Montgomery).
이들은 과부의 죽은 아들이 선지자를 통해 생명을 새롭게 얻는 것은 열왕기서의 독자들에게 생명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함이라고 본다.

즉, 그들은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을 상징해 준다.
이들은 이제 선지자의 말씀을 새롭게 듣고 순종함으로써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들은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이며, 선지자를 통하여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것 같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심으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22절)라는 말씀을 보면, 아이가 살아난 것은 주님의 자비와 능력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엘리야의 행동은 고도의 주술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으로 그 아이를 살아나게 하도록 감동시켰을 뿐이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이 아이 위에 엎드리는 행동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보다 넓은 문맥을 보자.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는 계속 죽음과 싸우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 죽음과 연관된 것과 접촉하여 왔다.
먼저 그는 까마귀가 주는 양식을 먹었다.
까마귀는 부정한 동물이다(레 11:15; 신 14:14).
이 새는 죽음과 연관된다. 아마 시체를 먹는 새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까마귀를 먹지 않았지만, 그는 부정한 새가 주는 것으로 생존해야 했다.
둘째 이야기에서(7-16절), 사르밧 과부는 죽음에 직면해 있었다.
그녀는 엘리야의 약속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살았다.
셋째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아이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몸을 던져 소년과 일치하게 되는 행동은 구약의 관점에서 볼 때, 단지 소년과 동일시 하는 것이 아니라, 시체와의 접촉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즉, 엘리야는 지금 시체와 직접 접촉하고 있다.
죽음과 부정의 문제는 오경에서 까다로운 문제이다.
율법은 성별된 사람이 죽은 자와 접촉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한다(레 21:1-4, 민6:6-8; 신 21:22-23).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일단 죽은 자와 접촉한 후에는 정결 의식을 거쳐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민 19:11-13).
그렇지 아니하면 그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게다가 엘리야는 지금 시체와 접촉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간이며 이 때 기도자는 의식적으로 정결해야 한다.
엘리야는 시체 위에 엎드렸으므로, 의도적으로 자신을 더럽힌 것이다.
따라서. 금송아지에 대한 주님의 분노 앞에서, 모세도 엘리야처럼 자신의 목숨을 걸고 기도한다(출 32:32).
두 선지자 모두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 위해 자신을 저주한다.
모세는 백성을 위해, 엘리야는 과부의 죽은 자식을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바로 여기에 열쇠가 있다.
즉 엘리야는 소년을 위한 제물로 자신을 드린 것이다.
죽은 희생 제물이 예배자를 대속하듯이, 엘리야도 죽은 아이를 위한 대속 제물을 드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면, 엘리야는 정결법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결 법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사법에서는 부정해진 자를 위해 동물 제사를 드려 그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한다.
이와 같이 엘리야는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으시고 아들을 살리시기를 구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리지 않으시면, 차라리 죽고자 한다.
이리하여 엘리야는 그 어떤 동물 제사로서도 불가능한 인간적 차원을 만들고 있다.

 

4)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엘리야의 두 번째 기도는 첫 번째 기도 보다 더욱 공손하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21 하).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아이를 살려 달라고 간청하지 않고, 단지 그는 아이가 살아나기를 소원하고 있다(May this child's life please come into him again).
이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감동을 받았다.
이리하여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로 이야기의 갈등은 해소되고 있다(22절 하).

사르밧 과부 아들의 죽음과 소생 이야기는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압니다"라는 고백으로 마친다(24절).
이 고백이 이야기 끝에 나온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왕상 17:24).
과부는 기름과 밀가루의 항아리가 늘 넘치는 축복을 받았을 때,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말씀은 진실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탄성은 시련을 넘어서 체험적으로 나오고 있다.
우리도 심각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주의 말씀은 진실합니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5. 명상

열왕기상 17장은 가뭄으로 말미암은 기근의 문제를 다룬다.
이것은 농경 사회에서 생사가 걸린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 때에도 잘 산다.
처음에 그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까마귀가 특급우편으로 가져온 떡과 고기를 먹는다.
그 당시에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정도가 아니라, 사치스러울 정도로 넘치는 대접을 하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신 기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처럼, 순종하는 자신의 종을 특별하게 돌보신다.

이 장에는 주님의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되어 중심 사상을 이루고 있다(2, 5, 8, 13, 15, 16절).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할 때 마다 철저하게 순종한다.
그는 주님의 종이지만, 순종을 통하여 진정한 종으로 인정 받는다.
따라서 엘리야와 하나님 사이에는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야는 기도했고 주님께서는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셨다"(22절)고 한다.
여기에서 "듣다"는 표현은 주로 "순종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수 10:14).
마치 주님께서 엘리야의 말에 순종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주님과 그의 종 사이에 있는 특별한 관계는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신약의 빛으로 열왕기 상 17장을 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엘리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선지자로서 엘리야처럼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린다.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순종하는 백성들로 이루어진다.

(2) 엘리야가 이방 땅에 가서 주님의 은혜를 전한 것처럼, 예수께서도 "이방" 지역을 다니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가고 있다.

(3)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기도로 살린 것 같이,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다(눅 7:11-17).
   또한 예수도 두로 지경을 다니실 때, 시리아 - 페니키아 태생의 헬라 여인을 만나며 그 딸도 고치신다(막 7:24-30).

(4) 엘리야가 자신의 다락방에서 죽은 아이를 살리며 하나님과 과부 사이에 중보자가 된 것 같이 예수께서도 임박한 죽음 앞에서 다락방으로 올라 가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그는 엘리야 보다 더욱 완전한 중보자이시다.

(5) 엘리야는 자신의 몸을 죽은 아이 위에 세 번 펴서 엎드려 기도한다(왕상 17:21).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도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팔을 뻗으셨다.
   그렇지만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다.
   엘리야는 기도로 죽은 아이를 살렸지만, 예수께서는 친히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
   그는 무덤에까지 내려가시며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셨다.
   그는 무덤에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음을 정복하시며 생명의 주가 되셨다.

 

사르밧의 과부는 그 아들의 죽음을 보고 자기 죄를 기억하였다는 점이 역설적이다(왕상 17:8).
그녀의 아들이 그녀의 죄의 댓가로 죽을 수는 없다.
또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녀가 대신 죽을 수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줄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