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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ings 18장에 대한 연구자료

2006.03.14 13:21

폭우 조회 수:893 추천:16

이스라엘에 비와 이슬이 다시 내리던 날

                                                                                              (왕상 18:1-46)
                                                                                                 김정우


1. 들어가는 말

열왕기상 18장은 두 개의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이야기는 기근이 끝나 갈 때 "오바댜를 중간에 두고"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 대결하는 이야기이며(왕상 18:1-20),
두 번째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간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바알을 대표하는 바알 선지자 450명이 갈멜산에서 대결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왕상 18:21-46).
엘리야 이야기의 흐름에서 보면, 17장에서 엘리야는 "내 말이 없으면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였고, 18장 끝에서 엘리야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어려운 자세로 "비가 다시 오도록" 기도하며 3년 간의 긴 가뭄이 끝나게 한다.

본 장에 제시된 두 이야기는 대결의 주제와 등장인물에 있어서 큰 차이를 나타내지만, 첫 이야기에서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이세벨의 핍박으로 떼죽음을 당한 이야기"가 두 번이나 등장하며(4, 13절),
두 번째 이야기에서 "백성들이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이는 이야기"가 등장하여 서로 짝을 이루어준다. 그렇지만 두 죽음의 질은 다르다.
즉,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핍박을 받아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바알 선지자들은 목숨을 건 전쟁에서 패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죽음을 당하고 있다.
우리가 볼 때, 백성들이 바알 선지자를 죽인 것은 "야만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 이전에 더 억울한 희생이 있었다.


2. 막간의 이야기: 가뭄이 끝나갈 때(왕상 18:1-20)

고대 세계의 이야기들을 보면, 대부분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리하여 가인과 아벨, 아브라함과 롯, 에서와 야곱, 레위와 시므온 등의 이야기들을 구약성서에서 자주 보게 된다.
열왕기상 18장에도 "아합"과 "오바댜"(2 하-6절), "오바댜와 엘리야"(7-16절) 그리고 "엘리야와 아합"(17-20절)이 등장하며, 주인공들의 대화와 대결을 통해 그들의 성격과 이야기의 중심 관심을 드러내어 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여기의 세 이야기에서 "오바댜와 엘리야"의 만남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 세 개의 만남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1) 서론: 휴식의 끝(18:1-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시자 말자"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된다.
바로 앞 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임할 때 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17:2, 8).
그 무덥고 메마르고 괴로운 "아합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

(1) "너는 가서 아합을 만나라"(1절)

열왕기의 저자는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 말한다.
이 긴 세월 동안 엘리야가 한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엘리야는 스스로 "허송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자탄했을 수 있다.
그는 부름받자 말자, 역사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말씀(왕상 17:1)을 전한 후, 이방 땅으로 도망치고 몇년 간 숨어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 동안 그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며 자신의 부름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사렙다 과부 집에서 그녀의 죽은 아들을 위해 열렬한 중보 기도를 드렸으며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인을 받았다(17:24).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공적인 사역을 떠난 긴 세월은 그에게 믿음의 단련 기간이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 올 더 큰 싸움을 위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말로 "제 삼 년에"(<개역>)는 원어에서 문자 그대로 꼭 만 삼 년을 말하지는 않는다.
제 삼 년은 첫해와 마지막 해를 포함한다면 좀 더 짧을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삼 년이었으면 고대 농경사회에서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야고보서에서 "엘리야는 간절히 기도한 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었다"(5:17-18)고 하는데 이 "삼년 육개월"의 전통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찾기 어렵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고 명하신다. 이전에 주님은 엘리야에게 "숨으라"고 명하셨으나(17:2) 이제 "아합에게 너를 보이라"(18:1)고 명하신다. 이리하여 엘리야는 다시 공적인 사역의 현장으로 돌아온다. 아마 안식년을 보낸 후처럼 그는 새로운 정열과 사명감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는 잠깐 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현실을 잠깐동안 피하는 것은 목숨을 건지거나 영적인 휴식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완전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세상을 등지고 소위 속세를 떠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악에서 보전되도록 구하였다(요 17:15).
우리도 엘리야처럼 휴식과 연단을 위해 잠깐 현장을 떠날 수 있지만 그러나 현장으로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엘리야를 보내시는 목적을 말씀하신다.
"내가 비를 땅 위에 내리리라".
오랫동안 이스라엘에는 "비도 이슬도 그쳤다." 헬몬산에서 시온산까지 내리던 이슬도 그쳤다"(시 133:3). 그러나 이제 "은총의 비"와 "축복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한발로 인한 기근도 이제 곧 끝날 것이다. 또한 엘리야의 등장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던 영적인 기근과 가뭄도 끝날 것이다.


(2) 아합을 만나러 가는 엘리야(2절)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셨고, 엘리야는 "아합에게 보이려고 갔다"(2절).
여기에 가벼운 변화가 있다.
저자는 "엘리야가 가서 자신을 보였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을 보이기 위하여 갔다"라고 말한다.
즉,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나간 "목적"은 자신을 아합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엘리야가 자신을 아합에게 보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아합은 엘리야를 찾기 위해 뒤지지 않은 "족속과 나라가 없었다"(18:10).
아합에게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엘리야는 순종한다.
그는 사자 같이 담대하다(잠 28:1).
그는 너무나 위험한 사마리아로 돌아간다. 마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또한 루터가 보름스 회의에 소집을 당하고 "보름스의 모든 기왓장이 마귀가 된다 하더라도 나는 가리라"고 말한 것과 같다.
믿음의 사람 엘리야는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엘리야의 대조와 철저하게 불순종하는 아합의 대조가 강하다.
이 둘은 결국 오바댜의 중재로 이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만나게 된다(16-19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라는 말로서 저자는 아합의 관점에서 기근의 영향력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동안 한발이 3년째 임했기 때문에, 무서운 기근의 영향력을 우리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합이 바알을 가장 열심히 섬기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다(16:32). 이곳은 왕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며, 그의 모든 정열을 다 쏟아 돌보는 곳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조차 기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기근은 단순한 보리 고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 기근과 한발이 올 것을 예언하였다(신 28:48; 32:24).

이제 북쪽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모세의 저주를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2) 아합과 오바댜(3-6절)

열왕기 저자는 엘리야와 아합의 대결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예비적인 싸움을 먼저 보여준다.
마치 챔피언의 대결 전에 예비 게임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저자는 이런 예비 싸움을 통해 이야기의 흐름을 조절하여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며 아합과 엘리야가 몇 년 만에 다시 만나 어떤 한판을 벌일지 우리가 궁금하게 여기게 한다. 또한 여기에서 '오바댜'의 등장은 여러 모로 놀랍다. 그는 엘리야와 아합의 길고 긴 대결에서(왕상 17-20장), 오직 여기에만 등장하고 무대 뒤로 사라지지만 아합과 엘리야의 갈멜산 대결의 무대를 완벽하게 준비해 주고 있다. 또한 그는 아합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지만 하나님의 가장 신실한 종으로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 같이 지혜로운" 이중적 성격을 절묘하게 갖고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


(1) "여호와의 종 오바댜"(3절)

"오바댜"란 이름은 "여호와의 종"이란 뜻이며, 그의 이름에 걸맞게 "크게 경외하는 자"로 소개된다.
그는 아합이 가장 총애하며 신임하는 "아합의 종"이었지만, 그의 근본적인 신분은 "여호와의 종"이었다.
아합 시대에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것"은 마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큰 위험을 초래하였을 것이다.

"오바댜"는 아합의 "궁내 대신"이었다. 이 칭호는 왕궁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가리키는 전문 술어이다.
이 직책을 가지는 자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왕궁과 왕실 재산을 돌보는 일을 했지만 점점 높아져서 이후에는 왕 다음 가는 총리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사 22:15-24; 36:3; 왕하 15:5; 18:18).
오바댜는 왕궁에서 큰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늘 아합의 측근에서 일하고 있다.

(2) 오바댜의 쉰들러 리스트(4절)

오바댜의 사람됨을 소개하기 위해 저자는 "거의 불가능한 헌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전에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자자들"을 "멸하였다"(killing off)고 한다. 여기에서 "멸하였다"는 단어는 "학살하였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우리 말 느낌에 가깝다(<표준>, <공동>).
이세벨은 주의 종들을 완전히 죽였으며 집단적으로 없애 버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선지자들을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박해하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이세벨은 선지자들의 박해에 물꼬를 튼 여인이다. 그녀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은 선지자를 죽이는 데 점점 담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는 선지자들의 피로 점철되기 시작하였다.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거부감과 적대감으로 대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 오히려 전하는 자를 공격한다.
주님의 증인들은 감금과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였다(대하 16:10; 18:25-26).
엘리야 시대에 많은 선지자들이 죽었고, 도망치고, 위기 가운데 있었다. 가장 위대한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선지자로 왔을 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마 21:33-41).

"이세벨이 여호와의 종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 오바댜는 10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을 동굴에 감추고 살렸다. 이 때 이세벨은 백성의 피땀 어린 혈세를 빼앗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넘치게 공급하였다. 그녀의 상에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삼시 세끼로 포식하고 있었다(19절을 보라). 그러나 오바댜는 왕실의 뜻을 거스리며 주의 선지자들의 목숨을 건져줄 뿐 아니라 그들을 돌보고 있다. 이런 일은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참으로 '오묘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합의 충신이면서 하나님의 진정한 충신이었다.
이 양면성이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이 어두운 아합의 시대에 오바댜는 아합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여호와를 마음으로만 경외하지 않고 온 몸을 던져 섬기고 있다.
오바댜는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시저 집에 있는 사람들"과 같다(빌 4:22). 그는 평신도 신자의 모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를 경외하는 자였고"(12절) 큰 위험과 유혹 속에서 자신을 지킬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 최고의 봉사를 드린다.
그는 분리주의자도 분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중요한 위치에서 원리를 희생하지 않고 주님과 나라를 위해 값진 봉사를 드린다.

(3) 참된 목자 왕 아합?(5-6절)

등장인물과 배경에 대한 모든 설명을 마친 후 아합이 오바댜에게 "가자"라고 한 말과 함께 드라마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아합이 화려한 왕복을 걸치고, 위엄 있게 그의 궁내 대신을 향하여 "가자"라고 말하며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물론 지금 엘리야는 이 아합을 만나기 위해 어디에선가 오고 있을 것이다.

아합은 오바댜에게 "샘의 근원과 모든 시내를 샅샅이 찾아보자"라고 말한다. 3년 기근이 왔으니 마르지 않은 샘과 시내가 없을 것이며 풀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합은 무엇을 위해 "물"과 "꼴"을 찾고 있는가? 흥미롭게도 아합은 자신의 백성과 신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과 노새를 위해 절망적으로 물과 건초를 구하고 있다(18:5).
그의 백성은 굶주려도 그들은 그의 사유 재산은 아니다. 아무리 백성이 어려워도 그는 자기 재산을 잃을 수 없다. 아합은 자신의 말과 나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며, 백성 보다도 자신의 가축을 더 열심히 돌보고 있다. 아합은 참으로 "목자 왕"(shepherd king)이다.

아합의 "말과 노새"에 대한 관심은 역사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오론테스 강에 있는 칼칼(Qarqar)에서 앗시리아의 대왕 샬만에셀 3세와 싸울 때 이천 대의 전차를 몰고 간다.
이 시대에 조그만 이스라엘에 이천 대의 전차가 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엄청난 군비를 전차부대 유지에 쏟고 있다. 그러나 나라에 시련이 닥쳤을 때, 그는 다윗과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윗은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나이다. 이 양의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삼하 24:17)며 회개하고 애통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양을 구하기 위해 친히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린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선한 목자"이시다. 이스라엘과 고대 근동아시아에서 왕권은 주로 목자의 영상으로 그려진다.
좋은 왕은 선한 목자이다. 그들은 백성을 양처럼 보호하고 돌보며 필요를 채우고 복지를 도모한다.
아합은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와 대조를 이룰 뿐 아니라 그의 신하 오바댜와도 대조를 이룬다. 이것이 열왕기 저자의 중심 관심이다.
오바댜는 그 이름대로 "여호와의 종"이며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요 사마리아에 양식과 물이 없어지면서 생필품 가격을 예측할 수 없을 때 매점매석하여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과 왕후의 살인적인 분노 속에서 수 백 명의 선지자들을 숨기며 먹이고 돌본다. 그러나 왕 아합은 모든 백성이 굶주리고 있을 때 자기 말과 노새의 꼴을 구하고 있다.

아합이 자신의 말과 노새를 위해 꼴을 찾는 모습은 일면 심각하면서도 또한 우스꽝스럽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왕이 자신의 짐승을 위해 "꼴"을 찾고 있는가?
그는 왜 하나님을 찾지 않고 "혹시 재수가 좋으면, 꼴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말하는가?
아합은 하나님의 진노를 걱정해야 할 때 말과 노새의 건초에 대해 걱정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이 지으신 환경은 날마다 파괴되며 난 개발과 홍수로 고통 가운데 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더욱 부를 쌓고 그 결과로 자의적인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찾지 않고 물을 저축할 수 없는 웅덩이나 파고 있기 때문이다(렘 2:13).

3) 오바댜와 엘리야(18:7-20)

앞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묘한 여운을 우리에게 남긴다.
"이리하여 그들은 전국토를 둘로 나누고 한쪽은 아합 자신이, 다른 한쪽은 오바댜가 담당하여, 제각기 길을 나섰다"(6절, <표준>).
오바댜는 아합의 충복이지만 그들은 "각기 자신의 길을 간다." 이것은 꼴을 찾기 위해 서로 헤어지는 장면이지만 그들의 운명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1) 오바댜와 엘리야의 첫 대화(7-8절)

"내 주 엘리야여 당신입니까?"(7절)

이 절은 오바댜의 관점에서 엘리야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비추어 주고 있다.
오바댜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엘리야가 그에게 나타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적이었을까?
주님께서는 엘리야와 아합을 바로 대면시키지 않고, 서로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오바댜를 통하여 둘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오바댜는 엘리야를 보자말자 그를 바로 알아 보았다. 그는 서둘러 얼굴을 땅에 대고, "내 주 엘리야여 당신 입니까?"라고 묻는다.
이것은 "정말 당신이 엘리야 입니까?"라는 정체 확인을 위한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엘리야 선생님, 정말 그동안 평안하였습니까?"라는 가슴 깊은 문안이다.
그는 엘리야를 위해 염려하였고, 이제 그의 얼굴을 보고 바로 엎드려 문안 드린다(선지자가 이렇게 대접받는 좋은 시대도 있었다...)

"나다, 가서 너의 주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라"(8절)

오바댜의 겸손과 사랑이 넘치는 문안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엘리야는(경상도 남자처럼) "나다"라고 거칠게 한 마디로 대답한다. 그리고 여덟 마디를 덧붙인다.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원어는 다섯 단어임). 그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왜 다시 나타났는지, 아합에게 무엇을 하려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너는 가서 내 말을 전하라"고만 한다. 오바댜가 엘리야를 처음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 보면 엘리야는 상당히 교만하고 무례하다. 우리는 왜 엘리야가 이런 고자세를 취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시점에서 엘리야는 오바댜의 믿음과 선행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는 분명히 오바댜를 알고 있다. 그러나 좋은 믿음의 동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는 오바댜를 아합의 종으로 생각하며 오바댜가 자신의 믿음의 정체성을 더욱 뚜렷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엘리야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오바댜로부터 멀리 하고 있다.

(2) 오바댜와 엘리야의 두 번째 대화(9-16절)

오바댜는 엘리야의 대답을 듣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는 엘리야가 그에게 준 명령, "가서 아합에게 엘리야가 여기 있다"를 두 번이나 인용하며(11, 14절), 그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십니까?"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9, 12, 14절). 그의 첫 마디,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그는 엘리야가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고 강하게 항의한다. 그는 엘리야가 그에게 맡긴 일을 결코 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다는 점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아합은 "병 안에 갇힌 지니"처럼, 만약 엘리야를 잡으면, "분노의 병 안에서 벗어나" 그를 능지처참 하리라고 이를 갈고 있었다. 그는 엘리야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온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인근 나라를 뒤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10절). 아마 이세벨이 아합을 부추겼기 때문에 그로서는 모든 정보부원을 동원해도 엘리야를 찾지 못했을 때 자존심이 깊이 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오바댜가 전해주어야 한다. 그가 이 사실을 전할 때 아합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결코 오바댜에게 상을 줄 것 같지 않다. 그는 엘리야에게 뺨 맞고 오바댜에게 갚을 수 있었다.

둘째, 엘리야는 마치 '바람의 아들'처럼, 언제 어디로 사라질 지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오바댜가 아합에게 보고하러 간 사이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버린다면," 아합은 대노할 것이고, 그것은 오바댜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12절).

셋째, 아합의 변덕과 엘리야의 종잡을 수 없는 변화를 언급한 후 오바댜는 비로소 자신을 변호한다. 그는 엘리야에게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라고 말한다(12절 하). 우리는 앞에서 저자가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소개한 말을 들었다. 저자가 오바댜를 칭찬할 때 우리는 감동을 받지만 오바댜 자신이 그의 믿음을 은근히 자랑하는 듯한 암시를 할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약간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어려서부터"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바댜는 모태신앙이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어려서부터" 주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믿어왔다. 그의 믿음은 "냄비처럼" 확 달아오고 식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쇠 솥처럼" 평생동안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삶이었다. 따라서 어떤 배도와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주님을 신실하게 믿어왔다고 엘리야에게 말하고 있다.

넷째, 오바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의 선행을 다시 반복한다(13절). 우리가 볼 때에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를 100명이나 살려준 이야기를 다시 그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불필요한 반복같다. 이 훌륭한 그의 헌신은 그가 "어려서부터 주님을 믿어온 삶"의 열매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바댜는 그의 헌신과 그의 죽음의 가능성을 연결시키고 있다(14절). 오바댜가 엘리야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아합에게 전할 때 어쩌면 아합은 '오바댜가 그동안 엘리야를 몰래 숨겨주지 않았을까?'라고 의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오바댜를 몰래 조사하는 중에 그가 100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이 드러난다면, 아마 아합은 오바댜의 칠족을 처형하려고 했을 것이다.

엘리야는 오바댜의 긴 항의와 설득과 변명(?)을 들으면서 한 마디로 간단히 대답한다.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날 아합에게 보이리라"(15절). 엘리야는 그의 첫 메시지처럼(17:1), 다시 맹세하며, 자신이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의 "명령"을 신실하게 수행하며(18:1), 어떤 위기가 있더라도 "참으로 아합을 만날 것"을 확신시켜 준다. 엘리야는 분명히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오바댜가 아합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한다(16절 상). 그리고 오바댜는 다시는 엘리야나 아합의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여호와의 선지자를 100명이나 살린 위대한 헌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엘리야를 찾았다"는 위험한 메시지를 아합에게 증거하는 마지막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분명히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이었다(마 6:33).


4) 엘리야와 아합(18:17-20)

(1) 아합의 비난(17절)

앞에서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났을 때 그는 "내 주 엘리야여 당신입니까?"라고 물었다(7절). 이제는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자 말자, 그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라고 묻는다(17절). 이 두 사람의 질문 형식은 동일하다. 그렇지만 어조는 정반대이다. 저자는 두 만남을 소개할 때 앞에서는 오바댜의 관점에서 엘리야를 소개하였고, 여기에서는 아합의 관점에서 엘리야를 비추고 있다. 오바댜는 엘리야 앞에 엎드리며, "내 주 엘리야여"라고 부르지만 아합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라고 비난한다.

우리 입술의 말은 우리 마음의 상태를 말해준다. 아합은 현재 이스라엘의 모든 고통이 엘리야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괴롭게 하는 자"('oker)라는 말은 "망치는 장본인"(<표준>)이라기 보다 "재앙을 가져오다, 혼란스럽게 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직접적인 책임" 보다는 "간접적인 책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마치 아간은 개인적으로 가져서는 안 되는 전리품을 이스라엘 진 안으로 가져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된 것 같다. 아간은 이스라엘에 오염 물질을 가지고 들어와 온 공동체를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수 7:25-16). 즉, 아합이 볼 때 엘리야는 뭔가 잘못하여, 이스라엘에 고통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아합이 볼 때 엘리야는 '비의 신' 바알을 분노하도록 자극하여, 바알이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혹은 이스라엘에 기근과 한발은 "엘리야의 맹세"로 시작되기 때문에 마치 엘리야가 사울(삼상 14)이나 입다(삿 11:30-40)처럼 성급한 맹세를 하여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점을 비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Roberts 1996:91). 아합이 모든 책임을 엘리야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소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죄인의 참된 모습이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보라(암 7:10-13).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는 비방을 받고 매를 맞는다(행 16:20-21).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라는 비방을 받는다(행 17:6). 예수께서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 7:7). 예수님 자신도 이런 비난을 받았다.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눅 23:5).


(2) 엘리야의 대답(18절)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고 대답한다(18절). 먼저 엘리야는 아합이 그에게 전가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되돌린다. 아합과 모든 오므리 집이 이 기근을 책임져야 한다. 오므리의 범죄는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것이며(왕상 16:25-26), 아합은 한 술 더 떠서 "바알을 본격적으로 섬기기 시작하였다"(16:31-33). 즉, 아합의 죄가 더욱 심각하다. 여기에서 "바알들"(원어)이란 복수형은 "가나안의 풍년신인 바알이 다양한 지역적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the various local manifestations)"(G. H. Jones, 1 and 2 Kings, NCBC II:315).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여섯 나라들(시리아, 두로, 블렛셋, 모압, 암몬, 에돔)은 모두 "바알"의 다양한 모습들을 섬겼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바알들"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삿 2:11; 3:7; 8:33; 10:6, 10; 삼상 7:4; 12:10; 대하 34:4; 렘 2:23; 9:13; 호 2:15, 19; 총 13회, habe'alim).

(3) 엘리야의 제안(19-20절)

첫번째 대답에 이어 엘리야는 두 번째로 아합에게 명령한다. 대부분 성경에서 "명령"과 "순종"은 말을 문자 그대로 두 번 반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라고 아합에게 명한다(19절). 그러나 아합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았다"(20절). 아합은 엘리야가 말한 "모든" 선지자들을 데려오지 않는다. 즉, 아합은 엘리야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 전투에 참여한다. 이제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과 바알 선지자들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전환이 이루어 진다.


3. 갈멜산 전투(왕상 18:21-40)

1) 엘리야와 백성들(21-24절)

이 이야기는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로 시작된다. "가까이 가다"는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중심 주제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아가며," 뒤에 그는 "내게로 가까이 오라"고 명한다(30절). 그들은 처음에는 엘리야에게 "가까이 나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두 의견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엘리야에게 가까이 나아 왔다"(30절하).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두 번 말한다.


A. 엘리야가 백성에게 말함(21 상)

B. 백성이 대답하지 않음(21 하)

A'. 엘리야가 백성에게 말함(22-24 상)

B'. 백성들이 응답함(24 하)

(1) 엘리야의 첫번째 연설(21절)

먼저 엘리야는 백성들을 고발하고 도전한다. 엘리야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공동역>은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로 번역한다. 여기에서 "머뭇거리다"는 히브리어 동사(pasach)가 흥미롭다. 이 동사는 "절뚝거리다"는 뜻으로서 다리를 다치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NRSV, 'limping'). 이 단어가 제사를 드리는 자와 연관될 때,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수 없다.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pisseach)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레 21:17-18). 만약 백성들이 계속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절뚝거린다면, 그들은 여호와를 예배하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제외될 것이다. 엘리야는 케에르케고르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라고 한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엘리야는 "바알 종교"와 "여호와 종교"의 두 종교에 있어서 배타성과 포괄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배타적이지만 바알은 포괄적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 엘리야의 두 번째 연설: 대결의 법칙(22-24절)

엘리야의 두 번째 연설은 첫 번째 것 보다 훨씬 더 길다.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이 적수라는 것을 모르며 또한 적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은 조상의 종교를 바알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아브라함과 모세의 믿음은 가나안 땅에서 완전히 통속신앙으로 변질되었다. 따라서 엘리야는 두 종교의 대결을 제안한다.

먼저 엘리야는 백성들 앞에서 대결의 법칙을 세운다. (1) 백성들은 송아지 두 마리를 준비하게 한다(23 상). (2) 엘리야는 양편에서 준비할 것을 상세하게 말하며 둘 다 불을 붙여서는 안 된다(23 하). (3) 양편은 각자 자기 신을 부른다(24 상). 이 때 엘리야는 아주 독특한 인칭 변화를 가져온다.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엘리야는 "그들이 그들 신의 이름을 부르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택을 요구하므로,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말한다. (4) 최종적으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신으로 판정될 것"을 제시하며 백성들은 "그 말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2)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싸움(25-29절)

(1) 모든 우선권을 바알 선지들에게 넘기는 엘리야

그렇지만 이것은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세속사 속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 전투에서 모든 우선권을 바알 선지자들에게 주고 있다.

첫째, 바알 선지자들은 제물의 선택권에서 우선권을 갖는다(25절). 백성들이 가져온 두 마리의 송아지 중에서 "그들은 먼저 택한다." 제물은 제사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바알 선지자들은 더 좋은 제물을 먼저 선택하며 고지를 차지한다.

둘째, 바알 선지자들은 장소의 우선권을 갖는다. 그들이 싸움을 벌릴 갈멜산은 바알 숭배가 강한 곳이었다. 갈멜산은 이스르엘 골짜기 남부를 형성하는 언덕 길에 위치해 있다. 해발 550미터의 정상은 이웃 평원들 위에 우뚝 서있다. 남쪽에서 보면 왼쪽에는 지중해를 끼고 있으며 하이파 위에 자리잡고 있다. 주전 9세기 갈멜은 페니키아 남쪽에 자리 잡았다. 이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으므로 아주 좋은 예배처였다. 이곳에는 바알 사당이 있었으며 마치 바알의 본토와 같은 곳이었다. 이 산은 마치 바알의 계룡산과 같은 곳이었다. 바알의 효험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었다. 셋째, 바알 선지자들은 시간의 우선권을 가진다. 그들은 "아침부터 낮까지"(26절), "오정에 이르러는"(27절),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29절) 쉬지 않고 기도한다. 저녁 소제는 오후 3시 경에 드리며 매일 제사 중 가장 중요한 제사이다(요세푸스). 왕하 16:15에 따르면, 아하스는 "아침 번제와 저녁 소제"를 드린다. 엘리야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너무나 오랫동안 참는다.

넷째, 바알 선지자들은 싸움의 방법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 엘리야가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24절)라고 제안했을 때 백성들은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바알은 번개의 신이기 때문이다. 불은 바알의 18번이요 그의 주무기이다. 바알은 오른 손에 번개창을 잡고 있다. 그는 번개불로 예배자가 바친 제물을 태우는 자로 믿어졌다.

이런 불공평한 싸움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엘리야는 모든 우선권을 바알 선지자들에게 줄 뿐 아니라, 군사의 수에 있어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엘리야는 홀로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싸우고 있다. 바알 선지자들은 절대적인 숫적 우세를 갖고 있으며, 왕과 대신들과 백성들도 그들의 편이다.


(2)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춤(25-26절)

먼저 바알 선지자들은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하며 단지 요청만 한다. 이런 기도는 너무나 거칠고 야만적이다. 그들은 기도의 기본적인 형식을 이루는 서론이나 간청의 이유나 송영도 없이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라고만 외친다. 이 기도는 너무나 원시적이며 또한 야만적이다. 그들은 그동안 바알을 잘 먹였기 때문에, 이제 바알이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의 기도는 뒤 따르는 엘리야의 기도와 너무나 대조적이다(36-37절).

이어서 그들이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는 모습은 너무나 독특하다. 앞에서 엘리야는 백성들이 둘 사이에 "절뚝거린다"(limping)라고 말했다. 이제 바알 선지자들은 제단 주위를 절뚝거리며 뛰논다. 이리하여 그들은 바알의 시선을 끌고자 한다. 이들은 유명한 "바알 춤"을 춘다. 절뚝 거리며 제단 주위를 돌아가는 춤이다. 이들의 춤은 너무나 아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마치 병신춤과 같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알의 시선을 끌기 위해 미친듯이 뛰고 있다.

(3) 엘리야의 조롱(27절)

"정오가 되자 엘리야는 그들을 조롱한다"(hatal; 욥17:2참조).

엘리야처럼 말 수가 적은 사람도 바알 선지자들의 광신적인 행동을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알에 대해 세 개(혹은 네 개)의 조롱을 하고 있다.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에서 마소라 사본의 독법(ki siach weki sig lo)은 번역하기 까다롭다. 첫 단어(siach)는 일반적으로 "묵상하다"(<개역>), "깊은 사색에 빠지다"(<공동>)로 번역된다. 이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크고 열정적인 소리를 지르다"와 "묵상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70인역에서는 "대화하다"로 번역하였으며(루시안, 벌게이트, 탈굼에서도), 현대 영어 번역에서도 "묵상하다"(RSV, JPSV), 혹은 "대화 중이다"(NJV)로 제시된다.

두번째 단어(shig)는 "바쁘다"(NIV), "멀리 갔다"(RSV), "방랑길을 떠났다"(NRSV), "잠깐 나갔다"(<개역개정>), "외출 중인지"(<공동>) 등으로 제시된다. 만약에 이 단어가 이런 뜻이라면, 엘리야는 바알이 <바알 사이클>을 따라 "분주하다"고 조롱한다. 바알은 사실 바쁜 신이다. 그는 여러가지 일을 한다. 궁궐도 짓고, 그의 대적도 패배시키고, 유별난 성적 욕망을 만족시키느라고 늘 빠쁘다.

그렇지만 "묵상 중이다"와 "외출 중이다"는 별로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이 두 단어(siach와 sig)는 중언법으로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아 보인다. 왜냐하면 두 번째 단어(sig)는 "떠나다, 곁으로 가다, 혹은 축출하다, 배변을 보다"는 뜻을 가지며, 탈굼 요나단에서는 "용변하다"로 사용된다(eased himself). 또한 첫 번째 단어도 "싸는 것"과 연관되며(아랍어에서 shh, '오줌 누다') 바알의 배설활동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알 비문에는 바알은 무엇이든지 잘 싸는 자로 등장한다. <표준새번역>에서는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로 제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엘리야는 바알이 지금 화장실에 들어 갔기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조롱한다.

"혹 길을 행하는지"

엘리야는 바알이 "멀리 여행을 떠났다"(<표준>)고 조롱한다. 우가릿 본문에서 바알의 자매요 정부인 여신 아낫은 온 동네를 다 뒤지면서 바알을 찾으며 그의 종들에게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바알은 먼 사막의 가장자리에까지 가서 사냥을 즐기고 있다.

"바알은 그의 궁궐에 없다.... 보라 그는(자기) 활을 손에 쥐고,

그의 오른 손에 활을 들고, 그는 야생소들이 넘치는 사막의 언저리로 나아갔다".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엘리야는 바알이 깊은 잠이 들었을지 모른다고 빈정댄다. 만약 선지자들이 더욱 소리를 크게 지르면 깰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단지 통렬한 조롱이 아니다. 고대 근동 아시아의 신화들을 보면, 큰 신일 수록 잠을 잔다. 즉, 만신전의 큰 신은 작은 신들과 달리 잠을 잘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가나안 신화의 주인인 엘은 잠을 자면서 꿈을 꾼다.

"[승리자 바알이 죽었다...

그리고 보라 승리자 바알이 살아났다."

바알도 지치기도 하며 죽기도 한다. 바알은 자연의 순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자고 깨는 신이 아니다. 엘리야는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살아계시거니와"로 맹세하며 말한다. 이것은 단지 선지자의 경건한 구호가 아니다. 그는 살아계신 주님과 무능한 바알을 대조한다.


(4) 바알 선지자들의 자해 의식(28절)

앞 절에서 엘리야가 "큰 소리로 부르라"고 명령했다(27절). 이제 그들은 "큰 소리로 부른다"(28절 상). 그들은 엘리야의 말을 문자 그대로 순종하고 있다. 나아가 그들은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였다"고 한다(28절). 이것은 음부에 있는 바알을 살리기 위한 바알 종교의 정통 의식이었다. 그렇지만 갈멜산 싸움의 큰 맥락을 보면, 이들의 자해하는 모습은 조금 후에 다가올 그들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40절).

이제는 서서히 바알의 세력이 무너지고 있다. 3년 동안의 한발과 기근은 바알의 몰락에 대한 첫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바알의 무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알이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바알 선지자들은 자신의 몸에 피를 흘리면서 바알이 부활하도록 도우려고 한다. 그들의 행동은 바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엘이 절망적으로 애곡하는 것을 연상시켜준다. 가나안 만신전의 큰 신인 엘은 바알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자기 보좌에서 내려와 땅에 엎드려 애곡한다(KTU 1.5. VI.17-23).

"(그의) 피부는 돌로서 상처를 내며(그의) 두... 면도날로 베고

뺨과 수염을 갈퀴며(그의) 팔 뼈를 갈으며

동산처럼(그의) 가슴을 계곡처럼 그는(그의) 등을 갈며

그는 자기 소리를 높이고 외치기를 '바알이 죽었도다.'"


이와 유사한 본문이 또한 있다. 엘신은 바알이 모트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듣고 자신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낸다.

"이리하여 루판은 그의 보좌에서 내려와, 발판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애곡의 짚을 뿌렸다.

사람이 자신의 정수를 때리듯이 흙을 뿌렸다.

그는 자신의 허리에 두른 접친 옷을 찢었다.

그는 돌에 피묻은 기둥을 세웠다. 두개의 기둥을 숲에 세웠다.

그는 그의(두) 뺨과 턱에 상처를 입히고,

그이 팔 윗부분에 세번 써래질을 하였다

그의 가슴을 정원처럼 갈고, 그의 배를 계곡처럼 갈았다."

여신 아낫도 엘 신과 같은 행동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표현한다. "바알이 죽었다. 다곤의 아들의 백성들은 어떻게 될까? 바알에게 속한 수많은 자들은 어떻게 될까?"

따라서 바알 선지자들의 자해사건은 신들의 광란적인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런 관습은 이스라엘 사회에도 깊이 뿌리를 내린 것 같다. 후에 호세아 선지자는 북쪽 이스라엘 백성이 곡식과 포도 수확이 적어졌을 때 바알의 부재를 애곡하며 자해한다고 정죄한다. "내가 저희를 구속하려 하나 저희가 나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고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7:13 하-14).

구약에서 몸을 난자하는 것은 금지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식을 행했던 것 같다. 이것은 원래 장례의식과 연관되어 있었다(레 19:28; 21:5; 신 14:1-2; 렘 16:6; 41:5; 47:5; 48:37). 스가랴 13:6에서는 선지자들의 예언 행동과 연관된다.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 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우리가 볼 때 이들의 행동은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지만 바알을 믿는 사람들이 볼 때 이것은 숭고한 의식이었다. 마치 일본의 천조대신을 위해 가미가재를 타고 적군에게 뛰어드는 것 같다. 바알 신화가 이런 행동을 만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진언하였다"(<개역>)고 한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선지자로 행동하다"는 뜻이며, 선지자들의 통제불가능한 행동을 말한다(삼상 10:1-13; 19:18-24). 우리말 새번역에서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표준>) 혹은 "신접한 모습으로 날뛰었다"(<공동>)로 제시된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형태는 보다 이성적이고 통제된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신탁을 전할 때 사용되지만 재귀형이 될 때 "광란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바알 선지자들은 점점 더 거칠어져 가며, 어떤 응답을 끌어내기 위해 절망적으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26절과 29절을 보라. 이 단락은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26 상)로 시작하며 "아무 소리,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로 마친다(29 상). 바알 선지자들에게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바알이 응답하지 않았다"가 아니다. "없다". 즉, 바알이 없다.


3) 엘리야의 제사와 기도(30-40절)


엘리야의 제사는 (1) 준비(30-35)와 (2) 제사(36-39)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각 부분은 "가까이 오라"는 말로 시작된다(30절, 36절에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아간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내게로 가까이 오라"고 말하고 "백성들은 모두 그에게 가까이 나아온다." 이리하여 그들은 곧 하나님께 돌아올 준비를 한다.


(1) 허물어진 여호와의 단을 고쳐 쌓는 엘리야(30절)

엘리야는 바알의 무능을 조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남의 종교를 조롱한다고 그들이 회개하고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민족의 영적 갱신에 더욱 깊이 관심을 갖는다. 옛날에 갈멜산에는 주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 있었다. 그러나 아합의 철저한 박해로 그것이 무너졌다. 이제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새롭게 쌓는다. 영적 갱신의 시작은 제단을 쌓는 데서 시작된다. 남의 종교를 조롱한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심령이 변해야 한다. 참된 부흥은 하나님 백성들의 영적 갱신에서부터 시작된다.

(2) 12돌을 세우는 엘리야(31-32절 상)

엘리야가 12 돌을 모으며 그것으로 제단을 쌓는다. 여기의 12돌은 12지파를 상징한다(창35:5-7). 옛날 야곱은 세겜에서 벧엘로 갈 때, 모든 이방신들을 다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한다. 그리고 벧엘에서 제단을 쌓는다. 후에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넌 후 12돌을 길갈에 세운다(수 4:20). 그 후 그는 세겜으로 백성들을 데리고 올라가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 신들 둘 중 한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명했다. 이제 엘리야는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왕상 18:31). 엘리야가 야곱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북 왕조의 조상인 야곱의 언약 전통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새 이름이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명이 있었다.

(3) 하나님을 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엘리야(32 하-35절)

엘리야는 하나님을 더욱 어렵게 하는 위치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물을 제단에 가득 부으라고 명하며, 12통의 물을 제단과 제물에 붓게 한다. 이것은 많은 양이었다. 백성들은 엘리야에게 순종한다. 물이 제단을 완전히 적셨으며, 제물과 그것을 태울 장작도 물에 흠뻑 젖었다. 주님의 불은 젖은 제물을 태우기에 충분해야 한다. 우리는 젖은 물건들에 불을 붙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안다.


(4) 기도하는 엘리야(36-37절)

이어서 엘리야는 기도한다. 그의 기도의 구조를 보라

A.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B.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을 알게 하소서

A'. 내게 응답하소서, 여호와여

B'. 주가 하나님이심을 이 백성으로 오늘날 알게 하소서


여기에서 네 가지 사항이 독특하다.

(1) 엘리야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꾼다. 그는 북쪽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2)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는 독특하다.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다. 오직 주님 만이 이들을 돌이킬 수 있다.

(3) 엘리야는 "오늘"을 강조한다. 주님은 오늘 "불로 응답하셔야 한다."

(4) 엘리야의 기도의 초점은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에 있다. 그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참된 종인 것을 백성들이 알도록 구한다. 그의 기도는 앞에 있었던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비교해 볼 때, 얼마나 간명한가.

(5) 하늘에서 내린 여호와의 불(38절)

전투의 핵은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에 있었으며 백성들도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라고 하였다(24절). 그동안 바알은 높은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점이 높을 수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커질 것이다. 바알 선지자들이 애를 많이 쓸 수록(18:26-29), 그들의 실패는 클 것이다.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할 수록 그들의 좌절감은 커질 것이다. 드디어 불은 "엘리야의 제물"에 임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38절). 주님은 자신의 살아계심을 불로 친히 증거하셨다. 그는 강력한 불로서 모든 젖은 것을 다 태웠고 제단까지 태워버렸다.

가나안 종교에서 바알은 번개의 신이지만, 그는 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침묵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전에 하나님은 호렙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출 3:2).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임하셨다(출 13:21). 그는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에 불과 연기로 임하였다(출 19:18).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 임직을 받고 첫 제물을 드릴 때 첫 불이 임했다(레 9:24).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 중에 제물을 바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의 제물을 받으시는 체험을 하였다(대상 21:26). 이 모든 불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행2:3). 하나님께서는 악에 치명상을 입히시며 자기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물로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고전 15:24-27; 히 10). 갈멜산 사건의 목표는 바알의 패배나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은총에 있었으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다.


(6) 백성들의 반응(39절)

주님의 계시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39절). 그들은 그동안 두 주인을 섬기며 살아왔다. 그들은 엘리야에게도 "우리는 바알과 야웨를 동시에 섬길 수 없나요?"라고 물었다. 엘리야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주로 야웨를 섬기고, 가끔 바알을 섬기면 안되나요?" 엘리야는 다시 "안된다"고 말한다. 십계의 제 1 계명은 오직 하나님 만을 섬기게 한다(출 20:3). 주님을 섬기는 데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흔들리거나 의심하는 것은 안 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 6:24).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약 1:8).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우상들은 나무와 돌로 만든 것들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욕망과 돈, 권력, 지위, 안전, 관계들이다. 우리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우리의 우상이 무엇인지 쉽게 알 것이다. 우상들은 하나님 대신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돈", "믿음 생활과 성공"을 늘 동시에 추구한다. 그러나 "만약 주가 하나님이시면 그를 따르고 바알(돈, 권세, 안전)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는 엘리야의 도전은 여전히 유효하다(18:21).

(7) 바알 선지자들의 죽음(40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40절).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며" 그들을 잡아 기손 계곡까지 끌고가서 죽인다(18:40). 기손은 이스르엘 골짜기 서쪽 끝에 있다. 갈멜산을 거쳐 골짜기 아래로 내려간다. 옛날 그곳에서 시스라의 전차가 진흙탕에 빠져 드보라와 바락에게 참패를 당했다(삿 4:15; 5:4-5, 19-22).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능력이 이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4. 이스라엘에 비가 다시 내리던 날(41-46절)

1) 엘리야의 기도(42-44절)

여기에는 "올라가다"가 계속 반복된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올라가라"고 말하며, 그도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그의 시종에게 "산으로 올라가라"고 여러 번 명령하고 있다('오르다'는 동사는 41-44절에 모두 여섯 번 나타난다). 여기에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는 엘리야의 모습은 너무나 독특하다. 그는 극도의 집중을 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는 짧은 기도를 드린다. 그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43절)는 보고를 듣고 또 듣지만, 인내하며 일곱 번까지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너무나 간절하다(약 5:17). 선지자로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제물을 태우고 이방 제사장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비를 주시는 약속이 이루어진다(18:1, 41). 엘리야는 이제 쉴 때가 되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끝내시길 구한다(18:41-44). 엘리야는 지평선에 구름이 올 때까지 일곱 번 기도한다. 그는 너무나 작은 "손만한 구름"이 올 때, 이미 하나님의 응답은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그는 곧 폭우가 쏟아질 것을 믿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비가 내린다. 이리하여 엘리야의 맹세(17:1)가 완전히 이루어진다. 긴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리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였을 뿐 아니라,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돌아오시는 모습의 전조로 비춰지고 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엘리야를 본받으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길 권하면서(1:2-8) 엘리야의 효과적이며 강력한 기도를 상기시킨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5:17-18).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2) 아합의 전차 앞에서 달리는 엘리야(44-46절)

갈멜산 전투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허리에 띠를 띠고, 아합의 전차 앞에서 이스르엘까지 달려가는 마라톤 선수 엘리야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기이한 장면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일차적으로 엘리야는 마치 그가 아합 왕의 전령처럼 왕의 앞에서 달리고 있다. 아합은 악한 왕이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을 대표하므로 엘리야는 왕의 수행원을 대표하여 앞에서 달리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엘리야가 아합 보다 먼저 이스르엘에 도착하는 모습도 흥미롭다. 아합은 전차로 달리지만 엘리야는 달려서 그 보다 앞서 간다. 그는 장장 27.2 킬로미터를 아합보다 빨리 달려 이스르엘에 가서 여호와께서 주신 은총의 비소식을 먼저 전하고 있다.


5. 명 상

영국의 구약학자인 로울리에 따르면, "모세 없이 구약에 묘사된 야웨 종교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야가 없었다면, 그것은 죽었을 것이다. 모두 다 한 뿌리에서 나온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종교는 두로의 종교에 침몰했을 것이다. 세계의 정치사도 얼마나 달라졌는지 상상하는 것조차 헛된 듯 하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와 그들의 발자국을 따른 사람들이 인류에 미친 영적인 영향력은 멜카트의 종교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H. H. Rowley, "Elijah on Mount Carmel," BJRL 43 [1960] 219).

갈멜산에서 이루어진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싸움은 보다 더 큰 싸움의 축소판이며 예고편이다. 갈멜산 전투는 최후 전쟁의 그림자이다. 갈멜산은 이스르엘 골짜기를 내려다 보며, 고대의 므깃도에 아주 가깝다. 세계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은 이 골짜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의 세 대륙을 잇는 고속도로가 갈멜산 가까이에 있는 평원을 관통하며 세계를 정복하려던 모든 제왕들이 이곳을 지나간다. 고대 이집트의 투트모스 III세로부터, 라암세스 II세와 성서의 드보라,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요시아 뿐 아니라, 블레셋,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의 대왕들과, 알렉산더, 로마 연대들, 이슬람 군대들, 십자군들, 나폴레옹, 1-2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군, 영국군, 이스라엘인들이 모두 이스르엘 골짜기를 관통하는 전략적 고속도로를 지배하기 위해 싸웠다. 사도 요한은 아마겟돈 전쟁이 여기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한다. 이 무서운 최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