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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신 하나님

2007.12.23 10:39

폭우 조회 수:457 추천:23


마태복음 1장 18절~23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샬롬!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인카네이션을 축하합니다.
우리 서로에게 인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비록 연약한 아기로 오셨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경험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을 이 시간 성도님도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


매년 성탄이 다가오면 늘 떠오르는 연극이 있습니다.
오늘 주보에도 실었지만 1977년 미국의 리더스 다이제스트지에 실렸던 기사를 근거로 만든 연극인 “빈 방 있습니까?”라는 연극입니다.
성도님들의 마음에 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아기로 오셨음을 감사하며 그 은혜를 만끽하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한 연약한 소년의 입으로 고백되어지는 예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의 고백이 지금 여러분의 입을 통해서 우리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연극의 대사를 그대로 해내지 못해서 실패한 연극이 되고 말았지만
진정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인해서 예수님은 사라지고 산타나 쾌락만이 판을 치는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이 고백이 지금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늘 읽으면서 “낳고”라는 단어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알고 있는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족보와 이와는 전혀 다른 누가복음 3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 그리고, 요한복음1장 1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묵상해 보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왜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면서 각기 다른 모양으로 기록하고 그 족보와 시작을 이렇게 다르게 전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결코 이스라엘만의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이방인들을 위한 것만도 아닌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었음과 그 긍휼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임을 절실히 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요즘 수요예배 때에 에베소서를 강해하면서 함께 나누었던 것 처럼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완성하시고자 하는 속성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니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극명하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고백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이 지금도 나에게와 우리 교회위에 함께 하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우리의 소망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으시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은 헛것이요 우리가 가지는 소망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신실하심으로 우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믿음에 이를 수 있고 알 수 없는 가운데 소망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즘 힘들고 불확실한 삶의 한 가운데 서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성탄이 위로요 소망이고 우리의 격려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그 시작을 아브라함으로부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을 “낳았다”고 기록함으로 그 씨가 이미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전달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그 마지막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있으면서 그 예수님의 성육신의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먼저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조상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언약을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본토 친적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의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면서 언약하시기를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축복은 15장에서 다시 확실한 가운데 축복하시면서 갱신됩니다.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이 축복의 증거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쪼갠고기로 제사할 때에 그 사이를 지나시면서 다시 확인 시켜주고 계십니다.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 땅에 대한 축복이 바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그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은 애굽을 거처 광야의 긴 시간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움을 입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가나안에서 나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그 열조들과 언약하신 하나님이 드디어 예수님을 통하여 그 언약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마태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기다리는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흔들리지 않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아직도 구원자 메시야를 기다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과 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고 이로서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그 복음을 증거하려는 대상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고 구체적으로는 데오빌로라고 하는 사람에게 편지하는 것이었으므로 유대인의 언약을 설명하고자 하지 않고 그 언약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구원의 족보를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언약하시면서 만국의 아버지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이 이미 이방인인 우리에게로가지 이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구우너의 계획이 하나님의 창조시로부터 이루어지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이방인도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 바깥의 사람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자기들만이 구원의 백성이라는 자고함을 가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구원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언약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셨거나 혹은 아담을 통하여 하셨거나 상관없이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시작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는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고 충만케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고 변함이 없는 것이어서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오염된 것을 아시고 그를 바로 잡고 또한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실 계획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하심의 목적과 그 이루시고자 하는 주권의 완전함을 이루시는 방편이신 예수님의 성육신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셨고 이루셨습니다. 그 구원의 계획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신바 되었고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이 예수님을 통하여 분명하게 우리에게 계시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고 설명해 주시지 않으면 결코 인간이 도달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설명을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있습니까?
불확실한 세대 가운데 알 수 없는 미래와 죄와 악으로 관영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분명한 것은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를 향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한 미래를 보장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의 형편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계획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를 향하여 여전히 신실하게 주권을 행사하고 계신데 우리가 염려함으로 우리의 키를 한자나 늘일 수 있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미래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미래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으로 완성된 상태에서 우리가 소망하고 바라는 것이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다른 것을 바라 볼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태초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혼란하고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과 어려움은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시험에 불과합니다.

시험을 이기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시험은 그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오늘을 기쁨으로 누리고 내일을 소망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그 소망 가운데 서로를 돌아보아 승리하고 섬김으로 예수님의 구원받은 제자자의 삶을 살아가시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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