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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4 / 1장3-6절

2007.06.01 15:35

폭우 조회 수:422 추천:14

에베소서 강해4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우리의 그리스도인됨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인함임을 분명히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축복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리적인 축복을 넘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도데체 바울이 찬송을 금할 수 없는 이 축복은 무엇인가? 바울은 그 축복을 4절에서 14절까지 진술하면서 세세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먼저 오늘은 그 축복의 소재가 하늘에 속한 것임을 생각해보기를 원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의 근원과 소재가 바로 하늘임을 밝히는데 그 첫 줄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가 이 진술에서 분명히 하고자 하는 의도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이 인식은 이미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되었다고 스스로를 표현하면서 밝혔던 하나님의 나라 백성됨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존재와 소속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 하늘에 속하였다는 인식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인식이기에 바울은 다시한번 우리의 받은 복을 진술하면서 “하늘에 속한”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드렇다면 이 하늘은 어디인가? 바로 하나님의 거처이며 하나님의 나라일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축복이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 출처는 하늘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는데 그 축복의 근원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ㅇ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고 이는 우리가 바로 예수님의 거처에 거하며 그 거하시는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자리에 앉을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로 설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18절 이하에서 이렇게 간구한다.
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하늘에 속하였음을 아는 것은 바로 이런 인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소망과 풍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만약 아직도 우리가 하늘에 속하였음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리라.

적어도 우리는 세상과 다른 눈을 가지고 사는 존재들이다. 하늘에 속하였음이 결코 이 세상에서 발을 디디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과 어울려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종종 이 긴장과 의미를 잘 못 이해한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 세상에서 멀어지려고 하고 또 때로는 세상 속에서 이 세상과 동일하게 살아가려고 하기도 한다.
우리는 하늘에 속하였으나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야하며 이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보다 더욱 선하고 온전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만 우리의 존재가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결코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 애냐하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주신 소망을 바라보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 이 신령한 복 하늘에 속한 복을 누리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 시작을 우리로부터 시작하시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신령한 복을 받은 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믿어 하나님의 사람 되었기 때문이기 이전에 먼저 우리를 창세전에 부르신 그 부르심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부르심이 전혀 우리의 반응에는 관계 없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않된다. 물론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부르심과 구원에 우리의 반응과 힘이 일정부분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로라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창세전이라고 해서 그 부르심이 우리의 응답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시간위에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하루가 처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신 분이시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반응과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은 우리의 삼차원적 사고에 의한 것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응답하는 그 순간에 이미 계획을 하고 계시고 부르신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이 이미 창세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응답을 인하여 선택하시는 제한적 선택이시다. 하나님은 결코 강제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능력과 사랑을 제한적으로 표현하심으로 그 사랑의 풍성과 온전함을 드러내신다. 때로는 그 하나님의 드러내심을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알 수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제한하심과 가리우심을 인하여 우리가 비밀 가운데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안에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으시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진술 방식은 이미 우리의 인식과 관계없으신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표현한다.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은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에 따라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복주시기 위함이라고 선언하지 결코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지 않으며 나아가 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거나 논쟁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GP와 축복을 인해 구원을 받았으며 그 풍성하심을 누리는 사람들이지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에 대하여 논쟁하는 사람들이 아닌 까닭이다. 많은 이야기로 우리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의로우심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자유를 사용하심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드러내지 않으심은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인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우리가 과연 무엇을 경험할 것인가?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축복을 얻었는데 그 부르심의 이유가 우리를 그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우리를 부르신 것이 바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비로소 그렇게 되었을 때 가림 없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아직도 우리의 거룩함과 흠 없음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광대하심을 본다면 우리는 기쁨과 평안보다는 두려움과 초라함 만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쟁변할 때에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우리의 선진들이 이 일들을 해보지 않았는가?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다시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향해 질문하는 것이 가하는가 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 질문에 하나님이 대답하실 의무가 있느냐고 말한다.
또 욥기에서 욥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31:35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대답은 이러하다.
40: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40:2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40: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40:4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40:5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42: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42: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2: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쟁변함으로 우리의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회개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이며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거룩을 잃어버리고 죄악 가운데 거하는 우리의 현재는 바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는 자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받을 수 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묻고도 그 대답을 통해 우리의 죄를 발견할 뿐인 것이 바로 타락한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며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여지고 흠이 없어지면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반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래서 우리를 흠이 없고 거룩하게 만드셔서 당신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시는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바라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의 죄악 가운데 거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흠없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 가운데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남겨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을 힘입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다는 것은 결코 우리의 삶의 도덕적인 부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거룩을 회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는가?
그것은 성화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신분이 변화됨으로 우리가 거룩하여지지 않습니다. 거룩은 우리의 의무이며 나아가야할 목표입니다. 그 거룩은 이루는 것이 바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우리의 성화를 향한 걸음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거룩함을 이루는 것은 온전히 사랑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으로 우리는 거룩하게 되어집니다. 우리는 거룩을 사랑하는 존재들입니다. 그저 거룩함을 바라보는 것이나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들이며 거룩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우리의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우리의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거룩을 이루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마음의 목표점이 하나님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마음을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며 그 말씀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고백하면서 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 고백하는 것이 바로 나의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겁니다. 나의 목숨조차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가진 다른 어떠한 것들을 아까와 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우리는 물질에서 뿐만 아니라 나의 자존심이나 체면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지 못한 것을 보면서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에 이르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의 이웃을 사랑함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라 시던 예수님의 말씀을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 주변에 주어진 많은 관계들 속에서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윈저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 이 사랑이 풍성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라고 주신 부부관계 부모 자식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로 하나 된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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