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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 uwo 에벤에셀에서 -

2006.09.28 16:02

폭우 조회 수:386 추천:14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보서 2장 1절-8절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을 본받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분명히 이 명제 “그리스도를 본받아”사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그 삶에 대해 열심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탁이고 또한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 아는것 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고 맞바꾸어 살게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생을 사는 것이고 그분의 삶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 앞에 우리가 주저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기 쉽지 않다는 것이고 조금 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그렇게까지는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 자신도 없거니와 그렇게 살아가기엔 나의 인생이 아직도 너무 젊다는 것이지요.

그럼 도데체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렇게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의지를 거두고 마치 나의 최고의 선을 이끌어 내어야만 거의 조금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 것 같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완전하고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나의 삶에는 큰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 간극을 메울 길이 없고 그러한 간극을 메우려다 보면 나의 가랑이가 찢어지는 아픔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게합니까?
가랑이가 찢어져도 예수처럼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이유라면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두가지 측면에서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를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여야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사는 우리의 삶이 즐겁고 기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지요.
이 두가지가 서로 이율배반적이라는 사실을 알지요.

예수처럼 사는 것이 기쁨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도 연약하지요. 우리가 가진 성질과 의지가 너무 약하고 죄악을 즐거워하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며 그로인하여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알지요. 너무도 당연하고 분명한 말씀이어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요.
그럼 한번 물어봅시다. 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 있다. 다시말해서 나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을 닮은 구석이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예수를 닮았다”고 말한다고 하는 사람있습니까?
왜 우리는 아는 사실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의지가 약해서?
아니면 우리에게는 아예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서?
이전 예수님을 닮았다는 사람들을 아십니까? 야! 저분은 정말 예수님을 닮았구나, 그래서 그분을 보면 예수님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마도 우리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들은 순교의 삶을 사셨던 분들이나 너무도 헌신적으로 자기의 삶을 헌신했던 분들의 얼굴이며 이름들일 겁니다. 그럼 그 외에는 예수님을 닮는 삶은 없는 것입니까?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닮아 사시는 분들이 없습니까?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좋으려니와 또한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오늘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권면하고 있냐하면 일단 바울은 자기의 형편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인해서 기뻐하며 그 복음의 신실함 가운데 있는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서 기도한다고 1장에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형편이 바로 죽음의 위협과 고난 가운데 처한 자기의 형편이고 감옥 가운데서 운신하지 못하는 지금의 형편임을 이야기 하지만 이로 인하여 괴로워 하지 않고 또 너희도 그리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에 와서 이제 빌립보 교회를 권면하면서 편지하기를 너희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하는 교회 공동체 가운데 어떤 어려움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본문은 바울이 교회를 향하여 서로를 섬기되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나아가 자기일을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협력과 사랑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사도바울을 사랑하고 사도바울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았지만 서로간에는 그와 같은 깊은 사랑과 섬김이 부족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우리가 따를 수 없는 훌륭한 분을 볼 때 우리는 모두 그분을 존경하지만 서로 비슷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있는 교회에서는 혹은 이곳 학교 공동체에서는 서로를 존경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 그것도 월등히 나은 사람을 존경하고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은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일 뿐이고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나와 비슷하거나 나만 못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존중하거나 섬기는 일은 참 우리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 사람의 약점을 알고 그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아는데도 그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존중해 주고 그 사람의 일을 도와 함게 한 마음으로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나의 생각과 나의 주장이 있고 나의 계획이 있을 때에 그 주장과 계획을 겸손히 섬기는 마음으로 내려 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압니다.
그럴 때에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그러하셨던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예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섬기러 이 세상에 오셨는지 아느냐. 그분이 누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는지 아느냐. 그분이 가지고 있던 그 존귀한 것들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아느냐 그렇다면 그 마음을 너희도 품어라!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본체라는 말은 그분의 본질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표현입니다. 그분의 겉이 어떠하든지 본연의 그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마치 어떤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서도 그 사람이 본연의 모습이 있듯이 예수님이 그 본연의 하나님이라는 본체를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의 형체 여기의 형체도 역시 본체와 같은 표현이거든요. 그러니까 종의 본연의 모습을 입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이지만 인간으로 분장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보다 연약한 존재 아니 당신의 지으신 인간을 위하여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떠나 언약을 어긴 그 죄 많은 지체를 위하여 그들의 모습을 입으신 마음, 그들을 살리기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철저히 복종하신 예수님의 모습, 그 마음을 우리에게 본받으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그러한 인간의 육체를 입지 않으셔도 되는데 육체를 입으시고 33년여를 사신것은 그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고 우리의 삶의 모범을 주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 삶을 본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사는 것이며 성화의 삶을 사는 길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에 주시는 선물이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이후에 우리의 삶은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까지의 목적을 가지고 살도록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구원까지라고 하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너무도 단순 할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삶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제공할 수 없는 삶인것을 단순히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기대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 그 이후의 삶을 부탁하셨고 성화되어져 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그분의 삶의 본을 따라 이 세상에서 당신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 처럼 닮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노력은 우리의 삶의 목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분명한 것은 그런 우리의 성화는 단 한순간 이루어 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 힘들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구원을 경험했다면 그 순간 바로 예수님의 삶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거지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해도 우리의 삶이 바로 왕의 신분에 맞는 자세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말투는 경박하고 군것질 거리가 궁금하며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임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얻은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삶의 껍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힘쓰고 애쓰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출석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인이고 싶습니까?
그리스도인이고자 하신다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쓰는 여러분들이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기쁨이 충만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거듭하여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의례적으로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가 바로 “기쁨”의 편지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 스스로의 상황도 그러하고 빌립보교회의 상황도 그렇게 기뻐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삶 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뻐하라고 말함으로 우리의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쁘십니까?
예수를 닮는것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하루 하루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 하고 있습니까?

한때 성경에서 나는 예수님의 웃음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에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고민과 힘겨움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왔고 예수를 닮는 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향하여 걸어가는 헌신과 고통을 감내하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에 즐거움과 행복은 단지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서에서도 그러하고 성경의 곳곳에서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음을 봅니다.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기쁨의 삶을 누리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찬 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동안 만나는 것은 고통과 힘겨운 길이며 유혹의 길일 수 밖에 없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워왔는데 정작 성경은 우리의 구원의 삶이 기쁨의 삶이며 평안의 삶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음성이 바로 우리에게 평안을 부탁하신 말씀이었음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구원받은 삶이 기쁨이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연약한 모습은 남을 섬기며 헌신하고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 기쁨만은 아니라고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나의 육체의 필요가 아니라 영적인 필요를 따라 사는 것이 또한 얼마나 힘겨운지요. 그 가운데 나는 기쁘다고 고백하는 것이 때로는 가식적이기 까지 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기쁨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고난이었을까요?
예수님이 목수일을 하시는 동안 그 목수의 일이 과연 괴로움이었을까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기간동안 예수님이 사람들을 측은히 보시기는 하셨지만 때로 그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기쁨이지는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식사를 나누시면서 그 음식을 기쁨으로 즐기시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비록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그 삶이 기쁨의 삶이셨을 것입니다. 비록 당신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알지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대 가슴 아프시고 괴로우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슴과 연민 사랑을 인한 가슴 아픔을 제하고 예수님의 삶은 기쁨의 삶이셨을 것입니다. 항상 아무것도 없으셨던 예수님의 삶을 떠올리면서 지금 우리의 현재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기뻐하지 못한다고 하면 과연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내가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삶에 있는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타인을 향한 긍휼함 때문인지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우리의 기뻐하지 못함이 나로 인한 것은 아닌지요.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함이든지 아니면 나의 형편을 인함은 아닌지요.
내가 당하는 환경과 형편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기쁨을 앗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일들은 결코 우리의 구원의 감격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목표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들의 기쁨과 우리의 기쁨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좋은 직장과 삶의 윤택함, 그리고 좋은 집과 직장에 즐거워 한다면 우리는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교제함을 인하여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그들과 같지 않고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비젼을 세워갈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나의 죽음의 문제에서도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가 죽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의 삶과 죽음을 인하여 존귀히 되는 가였고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하나님과 동행 하는 가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도 나의 삶이 지금 예수님의 본을 따라 가고 있다고 하면 나의 현재의 상황과 형편에 관계없이 우리는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셨습니다. 옷이나 집이 없이 온 땅을 더돌면서 누군가의 공궤를 받아야 먹을 수 있었으며 누군가의 영접을 받아야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항상 도전하는 사람들과 죽이려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고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 말슴 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예수님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러한 환경의 기쁨과 평안을 원하셨다면 애초 하나님의 모습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것을 즐거워 하셨기 때문이십니다.
우리를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예수님을 본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목수의 일을 하시면서 기뻐하시고 그 일을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일들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십시오.
나의 삶을 좀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현재의 기쁨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삶 역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만 한다면,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동행하심만을 확신한다면,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정한다면 여러분이 구원받은 지체임을 기억한다면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비단 선교사의 삶이나 전임 사역자의 삶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의 삶의 순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기쁨으로 공부하십시오. 기쁨으로 밥을 먹으며 또한 청소를 하십시오. 운동을 하거나 친구와 만날 때에 기쁨으로 그 삶을 누리십시오.
단 그 모든 순간에 나의 삶이 하나님의 동행하는 삶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연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쁨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여러분의 고난의 때에도 기뻐하십시오.
그 고난이 만약 이 세상의 환경 가운데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거나 나의 육체의 욕시 때문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그것으로 인하여 기쁨을 빼앗길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의 한 저자가 쓴 글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레이니어산에 올랐을 때 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산 정상에 섰을 때에 아주 굉장한 광경을 볼 것이라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산은 이틀 내내 구름에 덮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대신, 엽서 몇 장을 샀습니다.
우리의 휴가여행은 나로 하여금 나의 믿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 자문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우편엽서”와 같은 기독교 신앙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삶이 항상 햇살이 가득하게 밝기만 하다는, 즉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시계(視界)가 항상 맑다는 그릇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다윗은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13편의 열정에 가득 찬 시에서 그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자인했습니다 (1절). 그러나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그는, 이전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돌보심 가운데 그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5-6절).
그리스도인들은 레이니어산 기슭에 사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전에 산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구름이 산을 덮고 있을지라도 산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고난이나 혼란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계를 흐리게 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의심에 대해 솔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경험했던 때를 상기하면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거기 계신다는 우리의 확신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편엽서 신앙보다 낫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주는 어떠함으로 인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의 삶의 기쁨을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 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풍성한 기쁨을 빼앗길 따름입니다.
여러분의 현재는 하나님과 동행함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기쁨 없음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마음을 돌이켜 기버하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기뻐하십시오. 나의 연약함은 결코 하나님의 구원을 변개할 수 없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를 기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죄와 육체의 유혹이라면 그곳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않으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것은 거짓이기 대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연약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막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은 당신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은혜와 감사의 나날들이다. 왜냐하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죄악 가운데 실패하거나 실수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훈련시키시고 연단시키실 뿐이지 나를 버리시지는 않는다.
박영선목사님은 그 구원의 확실함에 대하여
"어떻게 구원은 받았는데, 어쩌면 나는 팬티도 못입고 천국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습니다. 몇 년을 믿어도 그게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오늘은 내가 개판 친 은혜의 날, 오늘은 내가 주의 품 안에서 몹시 보챈 은혜의 날, 오늘은 내가 하나님의 가슴을 몹시 상케 한 감사의 날, 오늘은 감히 주의 얼굴을 뵙기 낯간지러운 감사한 날"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황의 삶을 살아야 할것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받고 한꺼번에 이러한 은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는 지독한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씩 변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경험하면 단순간 우리의 삶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우리의 결단을 통해 얻어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우리가 구원을 경험하여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호감 이외에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이후에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는 것은 결단과 노력, 그리고 헌신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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