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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8

2007.12.19 17:13

폭우 조회 수:392 추천:18

에베소서 2장 11절~13절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하면서 분명한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구원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우리가 과연 어떤 상태에서 구원을 얻었으며 또 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확실성을 증명하는데 까지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원래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말하고 그 죽음의 상태에서 건져내어서 구원하였음을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8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의 가장 분명한 사실은 첫 번째 이것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독자적인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한분의 독자적인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어떤 방법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그 방법은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믿음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은 또 긴 이야기로 변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방법을 하나님은 믿음이라고 하는 방법으로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를 구주로 고백하여 믿음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말입니다.
세 번째는 이를 통하여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구원을 얻는 데에 우리의 행위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이유를 누구도 이를 통하여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겸손하고 믿음으로 살아서 구원이라는 높이에 이르게 되면 성취감을 느끼고 그로인해서 자부심을 가지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그러한 자부심 한조각도 있을 곳도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만큼 완전할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타락 뒤에 주어진 새로운 계획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인간들을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이미 완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완성된 사건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말씀하셨으므로 이는 이미 이룬 것보다 더 확실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11절에는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라고 하는 접속사도 분명히 앞에 있는 이야기를 전제로 시작하는 진술입니다. 그것도 앞에 이렇게 이야기했으니까 그것을 인정한다면 한번 더 생각해 보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사도는 우리가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너희는’ 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일 것입니다. 나아가서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일 것입니다. 즉 우리는 그때에 이방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언제 이방인이었습니까? 바로 앞에 이야기하던 구원의 때에 우리가 이방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할례당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언약에 대해서는 관계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아무런 몫도 지분도 없는 존재들이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왜 이렇게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었다고 하는 우리의 원래 상태에 대한 진술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그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들에게 주어졌는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얼마나 구원을 얻을 만한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존재들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굳이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비교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 교회의 가장 분명한 구분이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늘 말하지만 개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즉 아무리 해도 개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방인은 아무리 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 1절 이하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3: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의 삶이 하나님보시기에 그럴듯했기 때문에 많은 민족들 중에서 가장 괜찮은 민족을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신 후에 그의 후손들로 통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 약속하시고 그 이루게 하신 민족을 지키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신 민족을 하나님은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시고 그들을 지키시고 축복하셨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때로는 훈련시키고 징계하시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원히 하나님의 땅에 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선택하시고 우리는 이방인으로 남겨두셨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스라엘과 우리의 역할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이나 우리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구원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알리시기 위하여 한 민족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봄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앞에 이야기한 구원에 대한 사도의 진술을 이해 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맡기셨고 그 은혜를 지속적으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조차 구원을 이룰 수 없었다면 하물며 너희들이야 어떻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구원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있습니다. 즉 구약의 모든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따라 그들이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아무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구원을 스스로 이룰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야 말로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이 되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얻기 전에 우리의 상태는 도무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상태라고 하는 것을 더 깊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맡기시고 지속적으로 간섭하신 백성들 조차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곁을 떠날 뿐이었다면 그 이스라엘을 깊이 주목해 바라본 것도 아니고 그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만 살았던 우리야 말로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겠는가하고 사도는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우리를 구원하셔서 최초의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으로 우리를 회복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최초에 이미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떠난 후로부터 도무지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지경까지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을 읽으면서 아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이룰 어떤 건덕지도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들도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나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대로 놓아 두었으면 우리가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듣고 스스로 하나님의 말슴에 순종하는 민족이 되어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바로 그런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부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구약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렇게 지독하게 악하냐! 이만하면 알아들을만 할텐데..”
만약 우리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도 역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났다면 우리의 자리는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유대인의 그룹에 있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만심을 가지고 나는 선민이라고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자리 말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인데”라고 말하는 자리입니다.
그들의 자리가 우리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매일같이 먹을 것을 하늘에서 내려 주셔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자기의 길로 갔다고 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 우리 마음대로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코 자랑치 못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에레미야 31장 31절이하입니다.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뭐라고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내로 삼고 그들의 곤을 잡고 애굽에서 끌어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손을 놓고 언약을 파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신 수많은 은혜와 이적을 보시면 하나님이 하실만한 모든 것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그들의 실패를 보시고 할 수 없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패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구약을 주셨습니까? 바로 신약으로 오시면 되었을텐데 그래서 예수님을 미리 주시고 모든 이들을 구원해 주셨다면 좋았을 것인데 왜 신약에 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짜피 구원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시는 것이라면 모든 이들에게 주시면 될 것이고 그것은 이런 우리의 상태에 대한 고백 없이도 주실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반대하지 않는 존재로 창조하시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존재로 지으셨지만 그들의 자유의지를 따라 스스로 하나님을 기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실패를 하나님은 싫어하셨음에도 허락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다시 우리에게 주셨고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셨지만 당신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한 믿음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노력함으로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결과를 인해서 이를 수 있습니다.

아 어렵습니다.
무슨 말을하는지...
구원의 양면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두면을 우리가 다 말하지 않으면 성경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비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우리의 협력을 요청하시는 것이고 나아가 그 일을 하나님이 완전히 이루시되 우리가 거쳐야 할 것들을 다 거침으로 이를 수 있도록 하십니다.
구약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알아가는 중간 지점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 중간 지점을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에 이르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도무지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창조하신 원래의 목적에 맡게 살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이 우리에게 충만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방법이 될 것이고 이것이 바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이루시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개를 하나님께 돌리게 강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고개를 강제로 다 꺾어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의 은혜를 계시해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부복하도록 그 풍성하심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나만 그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전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가장 완전한 방법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해 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알고 고백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우리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면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우리 속에 아직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풍성하게 고백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해되지도 않고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죽을 때가 되어서 그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리에 나아갈 것입니다.
지금 나의 자리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리에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꼐호기은 바로
하나님과 멀어졌던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 가깝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삶의 여정도 만약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일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한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삶의 여정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우리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것이 징계이든 아니면 축복이든지 또는 고난이든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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