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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회복

2008.03.23 01:38

폭우 조회 수:389 추천:16

요한복음 20장 19~23절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샬롬!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행복하세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아니 나를 위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고 나의 생명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으심을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많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죄인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나는 한 인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가 공히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함으로 끝을 맺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복음서는 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을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구원의 삶이 이 당에서 지속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절차는 끝이 났습니다. 그것으로 성경이 마감 되었다면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그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끝이 나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고 여전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은 계획은 예수님의 부활로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으며 영향을 미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명하는 사건으로만 기억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셨기 때문에 죽음으로 그 인생이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것이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소망을 줌으로 우리도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 처럼 부활의 육체를 입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 정도에서 끝나서는 안 될 사건이며 우리에게 더 큰 의미와 회복을 주시는 사건임을 오늘 본문의 요한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서들 가운데 유독 요한만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 이전의 사건에 대하여 지루할 만큼 길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13장에서 출발하여 17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변화와 회복에 대해서 말하기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그저 예수님의 죽으심에 고정되어 기적적으로 행하신 이적과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공동체로 살아 갈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의 모인 곳을 찾아오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두 번이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오셨습니다.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모습을 드러내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격려하시며 용기를 북돋우시고 계십니다.
선생님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죽으시자 제자들을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그토록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비탄에 빠져 또 두려움에 빠져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방 안으로 들어오셨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면서 “샬롬”의 평강을 전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우리를 둘러싼 죄와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됨을 누리며 하나님과 동행하믕로 참 평강을 얻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은 두려웠고 예수님의 부활을 잠간 목격한 것으로 그들의 삶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삶으로 전환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덮고 있는 무기력과 절망의 그림자는 너무 컸고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예수님과 같은 선생님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들이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을 때에는 이 세상의 어느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이나 로마의 군사력도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죽음이나 병약함의 아픔도 또 사단의 권세나 귀신들의 공격도 그들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아가서 담대하게 귀시능ㄹ 내어쫒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시고 그들의 곁을 떠나간 지금 그들에게 아무런 힘도 없음을 그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기도를 사용할 줄 몰랐고 그로 인하여 심약한 어린 아이의 심정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셨을 때 그들은 잠시 기운을 차렸지만 또 다시 예수님이 살지고 난 후 그들은 옛 생업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제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고백에 제자들은 함께 일어나서 옛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겐 예수님의 동행 이상의 무엇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토록 길게 설명하시고 또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거기까지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떠난 이후에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좋은 소식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 담대하게 외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그들을 부르셨고 또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유약함은 예수님의 당부만으로 제자의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목자 잃은 양과 같은 심정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제자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이 땅에서 승리하며 담대하게 살고 있습니까?
왜 그렇지 못할까요? 왜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의 다른 이들의 삶과 다르지 않은 삶에 여전히 메어 달려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늘 이점이 불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구언하셨으며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 일꾼으로 그 제자로 살도록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어떠한 노력도 자주 실패로 끝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좌절하면서 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아니 나도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이 땅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도 초대교회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그 안에서 승리하며 살고 싶은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늘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요한은 그 비밀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샬롬”의 평강을 전하신 이후에 한 가지 사실을 더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부터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평강이 있으라 말씀하시고 나서 숨을 내쉬시면서 한마디 더 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떠나가지만 여전히 내가 너희와 함께 잇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이 사실에 대하여서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3장에서 17장에 이르는 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은 당신은 이제 하나님께로 갈 것을 말슴하시면서 너희도 나와 같은 삶을 살 것을 부탁하시고 또 그 일을 함에 있어써 성열의 도우심을 받을 것을 아니 성령을 인하여 그 일을 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예수님은 가시지만 그냥 가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로 오시냐하면 성령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시던 예수님은 가시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성령으로 오셔서 그들이 이전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유월절 만찬을 드시는 중에 한 행동을 하심으로 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을 살 것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13장에 보면 나가셔서 물을 그릇에 담아 오십니다. 그리고 차례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팔에 수건을 두르시고 흙먼지가 묻은 제자들의 발을 물로 조용히 씻어주십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그들의 더러운 발에 손을 대시며 그들을 겸손히 섬기심으로 본을 보이십니다. 비록 베드로가 완강하게 저항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제지하시고 그의 발을 씻으십니다. 그리고 긴 말씀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심과 성령의 오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무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씀을 열다섯번이나 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반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명확히 알게 하시기 위해서 거듭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가시고 보내실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러저러한 표현을 따라 무려 스믈 여섯 번이나 성령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나는 떠날 것이고 .. 나는 보낼 것이다”는 말씀이 이 본문의 주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실 것이고 또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시고 아버지께로 가실 것입니다. 아니 가셨습니다. 그리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다시 우리에게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떠나가시지만 제자들을 아니 우리들을 목자 없는 양떼와 같이 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시기를 원하십니다.
13:14 내가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5: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14:12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19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14:20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15:18~20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26~27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16:7 내가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러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가르치심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시작하여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심을 맺으셨습니다.
우리도 이 가르침을 따라 서로의 발을 씻기는 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여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이 일을 마무리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서로의 발을 씻는 것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우리의 성정이 서로의 발을 씻는 것에 신실하게 순종할 수 없음을 압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아시기에 성령을 보내시겠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겸손이 이 일을 하거나 나의 도덕적인 잘남이 겸손을 가장하여 서로를 섬기는 일에 헌신 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도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해 자발적으로 두손을 들고 항복할 수 없는 존재임을 우리는 압니다.
어느 누가 스스로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겸손히 무릎을 꿇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겸손의 영을 부으시고 회개의 영을 부으실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성령이 오시는 것도 우리의 의지를 따라 성령을 맞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그들이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그들에게 성령을 부으시고 그 성령을 힘입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 사실을 바로 목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성령의 사역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그 성령이 나의 마음을 주관하시도록 우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회지에 실은 글을 통해 한 사건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고기잡이 하러 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조반을 먹이시는 장면에 대한 기록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을 식탁에서 경험하는 것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찾아 오시는 것이고 찾아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내어 주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장면을 기록하면서 네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취하시고, 축사하시며, 떼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가진 것을 취하십니다. 그리고 축복하신 후에 나누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축복의 원리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성령이 오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전부를 성령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내어 드릴 때에 그것을 취하시고 축복하셔서 나누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덧입어 비로소 하나님의 제자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령의 오심을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성령님께서 오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취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고기 잡으러 가는 제자들의 심정으로 살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변화 없이 그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니 다시 말해서 성령님께 우리를 내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 만드시도록 소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를 위로하시고 그를 격려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그 성령의 인도를 따라 힘 있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더 이상 이 땅에서의 무엇에 우리의 인생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성령님께서 나를 강력하게 주장하셔서 당신의 원하시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 해 주시기를 구하시지 않겠습니까? 괜스레 성령이 임하며 나도 모르는 오지로 내어 몰릴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삶은 놀라운 기쁨의 삶일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기대하지 않으시렵니까?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능력의 힘을 사모하지 않으시렵니까?
주저하기 전에 성령의 인도를 갈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이성적인 인도가 아니라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시고 우리의 형편을 따라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그 놀라운 은혜를 사모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곳 윈저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사모하십시다.
하나님의 뜻이 지금 윈저 사랑의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십시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회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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