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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30

2008.05.15 10:06

폭우 조회 수:391 추천: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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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장 14절~19절

3: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3: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의 기도를 배우기를 원하고 또 나아가서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풍성함을 누리는데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풍성함을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기를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궁극적으로 에베소 교인들에게 있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국입니다.

바울은 그 결국의 풍성함에 이르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림으로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가지신 풍성함을 우리도 가지기 위해서 앞에서 기도하는 이러한 것들을 먼저 얻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기도의 순서이며 제목들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의 기도는 그 처음부터 끝까지 성도들의 영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의 육체의 고난을 위한 기도도 아니었고 교회의 물질적인 필요를 위한 것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따라 기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전부임을 바울은 이미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첫 기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전부를 살펴보지도 못하였습니다만 오늘은 그 뒤의 기도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의 대강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먼저 성령으로 인한 영적인 축복을 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특징은 성령의 임재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말로 성령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중생이라는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성령으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하시는 영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못하심을 아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4장 이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의 일들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당부와 기도 그리고 권면을 적어놓고 있습니다. 그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은혜를 알게 하십니다. 그 중심에 바로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계신 것입니다.

사도는 그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축복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기도합니다. 우리이 속사람은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육체의 강건함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좌소인 속사람이 강건하여 짐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든든히 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속사람이 자라야 할 필요가 있고 강건해져야 할 필요가 잇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해하려는 사단의 세력이 있고 그 안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속사람이 강건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들의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앞으로 닥칠 환란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더욱 절실한 기도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바울은 두 번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는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입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살펴보기 전에 전제해야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먼저는 이 기도를 하는 바울이 그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먼저도 살펴보았지만 이 기도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하고 있으며 그들은 이미 구원에 참여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영생의 비밀을 깨달아 안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결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기도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 교회의 특성에 맞추어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 하고 있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그 원문을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기를 원한다는 것인데 이 계시다는 단어가 바로 “집으로 삼고 그 안에 산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는 것은 단순히 왔다 갔다 하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 안에 완전히 거처를 정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함께 쓰인 전치사 “아래로”라는 단어와 함께 쓰이면 조금 더 강력하게 표현되어져서 그 안에 “정착하여 집에서 산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되 집을 지으시고 영원히 정착하셔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살기를 원한다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되짚어 본다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시고 그 안에 거주하시면서 우리 안에 영원한 가정을 이루시고 사신다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ㅇ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고 고백하지만 정작 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누리는 성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저 역시 이 부분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물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그 사실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앞에 우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시기를 기도한 다음에 나온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사람이 강건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강건하도록 훈련되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누리며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그저 구원 받았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도 말씀드렸듯이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이 불신자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를 향하여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미지근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첫사랑을 버렸고 스스로가 부자인줄 알았습니다. 그들의 속사람은 강건하지 못했음에도 그들은 부자이며 건강한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과 삶에 만족하고 있어서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에 대한 간구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상태가 이와 같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나 가난한 사람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요.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함과 그 은혜의 부요함을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이 육체에 주어지는 축복만을 바라는 가난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기도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영적인 부요함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우리의 육체의 부요만을 위해서 기도할 뿐이지는 않은지요.

참 알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은혜여서 그 크고 비밀한 은혜를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주 우리는 불가지론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이 세상의 환경이며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우리가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누리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그를 위해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내주하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만났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을 누렸던 바울이 그 충만하고 풍요로우신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다는 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바울은 그의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속에서 나를 주장하시면서 살아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라고 말하고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슴하는 것입니다.

그 머리가 시키는 삶을 사는 것이 교회의 삶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자리에 서기까지 우리는 자라야하고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는 있지만 예수님이 내 속에서 사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속사람이 강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점 우리 속사람이 성령으로 강건해지면 이제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거하시는 것이며 이는 우리의 감정의 처소이고 우리 인경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누리는 구원의 충만한 은혜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이처럼 충만하고 풍요롭다고 말하고 그것을 너희도 알고 누리기를 바란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감정이 예수님 손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겠습니까?

우리는 자주 감정이 흔들립니다. 나의 마음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때로 너무도 사소한 것들입니다. 날씨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우리 주변에서 외치는 작은 말 한마디가 우리의 감정을 흔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태도나 그들의 언행, 혹은 그저 오해에 불과한 것들에도 우리의 감정을 흔들리지만 그 감정의 좌소에 예수님이 내주하심으로 우리가 그분이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가 누리는 풍요라는 것입니다.

설명을 가능한데 제 삶에서 저의 감정에서 이 모든 것을 보여 드릴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저의 수준이 이 바울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아니 바울이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은 14장 이하에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의 영인 보혜사를 우리 가운데 보내시겠다는 것이고 그분이 우리 속에서 우리를 주관하신 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너희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지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비로소 그 말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깨달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성령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그 말씀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영인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주 구원 받은 것과 이것이 혼동됩니다.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 가운데 성령의 인치심이 있다는 것이고 이로써 우리가 중생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후에 우리속에 지속적이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이 변개되지 않지만 예수님과의 교제가 우리속에 풍성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구원의 은혜를 다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구원의 시작 그곳에서 주는 기쁨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사는 것은 정말 멋진 곳을 여행하는 사람이 그 초입에서 멈추어 서서 그 경치를 감탄하고 마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설악산을 자주 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설악산 대청봉까지 올라가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한 겨울에 눈이 가득 쌓인 산에 올라가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곳에 올라보지 않고서 아니 적어도 소청까지라도 올라보고 그곳에서 비로소 환하게 트이는 시야에 온 설악과 동해를 보는 감동을 맛보지 않고서 설악동이나 오색에서 그저 설악산을 보고 멋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가난한 것입니까? 이왕에 산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지리산은 또 어떻습니까?

요즘은 지리산에 도로가 나서 노고단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 가서 지리산을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적어도 노고단으로 해서 저기 천왕봉까지 한 2~3일은 산등성이를 타고 연하천에서 하루밤을 묵고 세석산장을 지나면서 또 피아골을 내려다 보아야 지리산이 이렇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은 그 처음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를 알고 길이와 높이를 알아서 그 풍성함을 알아가면서 느끼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것으로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 은혜의 풍성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내가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릴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내주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이성과 감정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 바로 풍성한 하나님의 동행을 알게 되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분을 모시는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그리스도의 내주는 그저 말함으로 알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그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알 수 있도록 또 누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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