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남의 편지를 몰래 읽다가 결심한 낙관의 버릇

2004.07.02 04:42

폭우 조회 수:650 추천:41

이 글은 유승원목사님의 글입니다.


남의 편지를 몰래 읽다가 결심한 낙관의 버릇
                                                                      (고린도전서 1:1-9)

1. 남의 편지 뜯어보면서 은혜 받기
실상 현재 우리가 바울의 편지를 읽는 일은 인간적으로 따져 볼 때 남의 비밀스러운 편지를 몰래 뜯어보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듀크 대학의 리처드 헤이스(Richard Hays) 교수는 그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이 점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의 고린도전서를 읽을 때 사실상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보낸 남의 편지를 읽는 것이다.
이 편지는 원래, 고대 지중해 연안의 고린도 시에 살던 소수의 무리들로 막 시작한 개척교회에 보냈던 것이었다. 바울 당시의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편지가 이어지는 후대에 널리 전파되는 것을 좋아했을 리 없다.
편지를 통해 그들의 생활 모습이 가감 없이 노출되었고, 뒷궁리의 지혜를 따르자면 적당히 사생활보호 차원에서 숨겨두면 좋았을 여러 가지 사건들을 그대로 누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이 편지가 잘 보전이 되어 널리 유포되다가 결국 신약성서로 정경화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운동의 첫 세대의 삶 속에서 긴장 가득했던 한 특정 순간을 간파할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비록 직접 우리에게 전달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 편지를 통해 우리는 한참 진행 중에 있는 멋진 논쟁을 엿듣는 허락을 받은 셈이다.1)


바울은 유승원에게 이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의 편지가 당대의 세네카나 키케로의 서신들처럼 편지 형식을 빌어 대중에게 할 말을 하던 공개적 저술을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긴히 해야 할 말이 있었을 뿐이다.2)
더구나 그 내용이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생면부지의 21세기 인간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우리가 그네들의 낯을 직접 대할 일은 없으니 피차간의 어색함과 겸연쩍음은 피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렇다. 바울의 편지를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이렇게 남의 통화를 엿듣는 도청과 비슷한 일이다. 그것도 어느 한쪽의 이야기만 도청하면서 그때의 상황이 어찌되었는지를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도청하면서 은혜를 받는다. 이왕 도청을 하려면 잘 들어야 한다. 남의 얘기 잘못 듣고 오해하여 헛소문을 내면 안 될 것이다! 좋은 소문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 우리에게 고린도전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


2. 다시 들여다보는 고린도 시
2.1. 소문내기 좋은 고린도의 위치
그리스-로마시대의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 BC 63 - AD 21)는 고린도의 위치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고린도는 그 교역 때문에 "부촌"으로 불리었다. 해협에 위치하여 두 항구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시아로 향했고 또 하나는 이탈리아로 향해 놓여있었다. 이로 인해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는 두 나라 사이의 상품 교환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아시아 양쪽의 상인들이 여기서 짐을 내려놓는 것이 환영을 받는 선택이었다. 또한 육로를 통해 펠로폰네소스로부터 나가는 수출품과 들어오는 수입품에 대한 관세도 열쇠를 쥐고 있는 저들에게 주어졌다. 후대에도 이점은 마찬가지였다.3)


교역도시가 갖는 정보의 유통성(流通性)! 이것이 선교사 바울이 노린 지정학적 특성이 아니었을까. 인터넷도 전화도 없었고 모든 움직임이 현재와 비교해 볼 때 현저하게 느리던 당시로서는 소식을 확산시키기에 적합한 곳을 찾아야 했다.
아가야(그리스)의 고린도는 이 점에 있어서 적격의 선교 거점이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 땅 끝까지 발 없는 말의 '좋은 소식'이 번지고 넘어가고 퍼지게 해야 되었다. 그래서 아덴에서 이미 '말쟁이'로 정평이 나 있던 바울은 이곳 고린도에 머물며 최소한 1년 6개월을 마구 떠들어댔다(행 18:9).4)

2.2 고린도 시의 특성
2.2.1. 아가야 동맹의 지도적 위치에서 로마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해서 기원전 146년 로마에 의해 파괴되면서 고린도는 고대의 상업적 번영을 일단 중단해야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줄리어스 씨이저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어 그 발전의 기틀을 다시 잡는다.
이때 식민지를 건설했던 주 인구는 한 때 노예였다가 자유인이 되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바울의 고린도 사람들은 약 1세기 동안에 사회, 경제적으로 상승이동을 한 사람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의 과거 신분을 언급하는 1:26은 이러한 사정을 암시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주후 2세기 후반의 한 헬라 저자가 고린도에 대해 이런 평가를 했다.
"나는 얼마 되지 않아 구역질나는 부자들의 행태와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한꺼번에 감지할 수 있었다."5)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부(富)와 빈(貧)의 전형적인 공존 현상이었을 것이다.

2.2.2. 한 때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가 '코린티아조마이'(= 고린도화 하다. 고린도처럼 되다)라는 말을 만들어 '문란하다'라는 뜻으로 쓸 정도로 고린도 시는 성도덕이 문란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스트라보의 기록에 따르면 고린도 광장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약 1000명 가량의 신전 매춘부들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이것은 로마의 식민지 이전 고대의 희랍 도시로 있을 때의 일이고 또한 상당 정도 과장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교역이 활발한 항구도시들이 그렇듯이 고린도 시는, 미풍양속을 인정받아 생활이 단정한 장소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2.2.3. 당시 그레코-로마 세계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랬듯이(행 17:16) 많은 이방 신전들이 있었다(고전 8:5). 특히 광장 한 가운데에는 큰 아테나의 동상이 서 있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모시는 이스트무스 축제가 2년에 한 번씩 고린도 시의 주관으로 열려 주변의 도시 국가의 주민들이 몰려들고는 했다.6)
당연히 고린도의 교인들은 이러한 이교도적 풍속의 영향 아래 그리스도교 신앙을 정립해 나가는 혼란의 과정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3. 애초에 고린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7)

3.1. 동역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서
고린도 교회의 시작은 로마에서 추방을 당해 이 지역으로 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같이 장막 만드는 일을 하는데서 시작되었다(행 18:3).
바울이 이들에게 전도하여 회심을 시켰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을 만났을 때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8)
고린도전서에서 바울 자신의 언급에 따르면, 아가야에서의 첫 열매는 스데바나였지(고전 16:15)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로 언급되는 이들 부부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들은, 성경에 능통했던 아볼로에게 영적인 지도를 베풀 만큼 신앙에 있어 성숙한 사람들이었다(행 18:26). 분명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로서 바울을 만났다.
낯선 곳에 온 외로운 바울이, 로마에서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린도까지 오게된 그리스도인들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관해 들었을 때 얼마나 반가웠을까? 바울 쪽에서 소문을 듣고 그들을 찾아갔다고 했다(행 18:2 후반).
로마의 교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행 19:21, 23:11).
이들로 인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로마의 교회에 대해 적지 않은 지식을 얻게 되었고 그래서 후에 주옥과 같으면서도 꽤나 긴 로마서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제 2의 고향이었던 로마로 돌아가 있었다. 바울은 그들을 '동역자'라고 부르면서 문안을 하고 있다(롬 16:3).
그렇다. 이들은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로서 고린도에서 만났고 의기투합하여 공동 생활을 했다. 더구나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동업자처럼 붙어서 함께 노동을 했다(18:3).
얼마나 많은 대화가 오고가며 얼마나 원대한 복음의 비전이 밤새워 공유되었을까! 먼저 이들을 만나 힘을 얻고 난 바울은 회당에서 말씀을 강론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여러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을 격려하고 인도했다.
가죽 장막을 만드는 일은 결코 한가한 신선놀음이 아니었다. 집중된 노동이 요구되는 고된 직업이었다. 동역자가 된 이들은 마다 않고 힘들게 노동하면서 그 노동의 와중에, 그리고 일하지 않는 안식일에 복음 사역에 힘썼다.
데살로니가에서의 모습이지만 이곳 고린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고전 4:12, 살전 2:9-10 참고).
그들은 바르게 살며 제대로 사역하기 위해 낮과 밤 없이 고된 노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세속 직업의 고단함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역과 봉사의 부담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우리라면 이런 장면 앞에 숙연해야 한다.

3.2. 실라와 디모데의 가세(加勢)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핍박이 거세지면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고 아덴으로 떠나야 했다(행 17:14).
바울은 자신을 인도하던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며 그들에게 속히 아덴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17:15).
바울이 이들을 아덴에서 만났다는 기록은 사도행전에 없다. 하지만 17:15의 전갈을 기록한 것을 보면 그에 따라 이들이 아덴에서 다시 만났을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그렇지만 데살로니가전서 3:1-5에 따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일이 염려가 되어 디모데를 다시 그곳으로 보냈다. 아마 실라도 같이 같을 것이다. 이렇게 홀로 남은 상태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왔고 외롭게 노동하면서 고군분투를 했다(행 18:1-4).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그리워하며 소식을 기다렸다.
드디어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했다. 얼마나 좋았을까!
마게도니아의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온 이들은 바울에게 저들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살전 3:6). 이것이 바울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그 기쁨과 안도를 이렇게 고백한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7-8).
바울은 궁핍했다. 그래서 열심히 노동을 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실라와 디모데가 가져온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살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동안 죽을 맛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동역자들이 돌아왔고 또한 좋은 소식을 전해주니 이제는 살맛이 난다는 말이다.
비슷한 현상은 고린도후서 7:13에서도 읽힌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바울이 '궁핍'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과(살전 3:7)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뿐 아니라 '사랑'을 치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살전 3:6) 실라와 디모데가 그들로부터 전달된 재정적 도움을 가져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재정적 도움은 빌립보서 4:15와 고린도후서 11:8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동역자들과의 재회, 그들이 가져온 마게도니아의 좋은 소식, 그리고 사랑의 선교비 등은 바울로 하여금 힘이 넘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전력을 다해 과감하게 복음을 전했다(행 18:5). 이것을 사도행전의 누가는 '말씀에 붙잡혔다'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말씀이 바울을 아예 포로로 사로잡아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3.3. 하나님의 특별한 격려까지 받았으니
이러한 열정은 저항을 가져왔다. 유대인들의 반대가 심해졌다(18:6). 그래도 바울은 중단하지 않았다. 바울은 전파의 사명을 다했다. 그것을 받지 못하여 복음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이제 들었으나 믿지 않은 사람들의 책임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 바울의 실패가 아니었다.
바울은 이제 회당을 나와 경건한 이방인 디도의 집으로 거점을 옮겼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회당 사람들은 그에게 저항했으나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 가족이 회심을 했다. 바울은 이 그리스보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편지에서 기록하고 있다(고전 1:14).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 성중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행 18:10 후반).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환상 중에 나타나 바울에게 확실한 권면을 하신다.
"두려워 말라. 잠잠하지 말고 계속 복음을 전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너를 해롭게 할 수 없고 대적할 수도 없다. 고린도에는 내 백성이 될 사람들이 많이 예비되어 있다"(행 18:9-10).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약속과 권면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수 1:5-6).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가나안이 정복되었던 것처럼 고린도도 정복될 것이다.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1년 6개월을 그곳에 머물면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는 탄생했다.

4. 고린도전서를 쓰게 되기까지
4.1. 사도행전 18:12-17에 따르면 저 유명한 세네카의 조카인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있던 주후 51년 경 유대인들의 소요가 있어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동반하여 고린도를 떠나야 했다(18:18).

4.2. 그 이후 사도행전에서는 바울과 고린도와의 관계가 더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과 바울이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관계를 계속 이어갔을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상호간에 연락을 하던 중 바울은 최소한 한 번은 고린도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이전에 그가 쓴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언급했음을 상기시킨다(고전 5:9). 이 말이 오해를 가져왔던지 아니면 오해의 소지가 많기 때문인지 자신이 이전 편지에서 썼던 내용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해야 되었다(고전 5:10-13).

4.3. 그러던 중 바울에게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들에 대한 전갈이 있었다. 그와 가깝게 연락을 취하는 사람들이 항시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많은 식솔을 거느리고 있던 가구장(家口長)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글로에'의 권속(眷屬) 중의 어떤 이들로부터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전 1:11, 11:8).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써야 했던 가장 긴급한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점잖은 인사말(고전 1:1-9)을 마치기 무섭게, 열정에 가득한 그답게 단도직입으로 주 이슈에 태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만큼 이 문제가 바울에게 경급(警急)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9)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정보원들은 교회 분열 외에도 그와 연계되었던 교인 일부의 성적인 부도덕(5:1-8, 6:12-20), 교인들 간의 소송 문제(6:1-11), 성찬식 때의 혼란(11:17-34),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논란(15:1-58) 등에 대해 바울에게 귀뜸을 해 주었다.

4.4. 고린도 교인들도 바울에게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직접 문의하는 편지를 보냈다(7:1). 이에 대한 답변을 시작할 때 바울은 전치사 '페리'(∼에 관하여)를 붙여 모든 이슈를 성의를 다해 다루었다.
기혼자들의 성관계(7:1-40), 우상의 제물(8:1-11:1), 영적인 은사 활용(12:1-14:40),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16:1-4) 등에 대한 질문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5.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써서 디모데 편에 보냈다(고전 16:5-11). 물론 고린도전서가 그 복잡한 문제를 다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이후 바울은 고린도를 직접 방문했으나 서러움을 겪었고 이어서 또 다른 편지들이 오고가게 된다. 하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나중에 고린도후서를 읽을 때 다루는 것이 지나친 혼란과 복잡을 피하는 길이 될 듯 싶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사용하여 죄송하지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오늘의 괴로움은 고린도전서가 쓰여지기까지의 복잡한 현실로 족하게 하자.

5. 무슨 말로 시작을 할까?(1:1-9)
우리가 데살로니가에서 살펴본 바울은 종말론자였다. 그는 철저하게 종말론자였다. 그렇다고 그가 현실을 보는 눈이 비관적일 것이라고 미리 예단할 필요는 없다.
바울은 낙관적이며 긍정적이다. 비전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비전에 따라 목표를 설정하면 모든 에너지가 그쪽으로 향하게 하는 타고난 열정을 소유하고 있다. 그 열정은 크게 부정적인 현실조차 가장 긍정적인 방향으로 보게 만드는 고백적 믿음의 환타지를 펼친다.
고린도전서의 서론을 구성하는 인사말은 그런 적극적 긍정화(肯定化)로 가득 차 있다.
우리 대부분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는 "교회 맞아?"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세속적 추함 이상의 사건들을 저지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우리 목사님들 중에서 고린도 교회 같은 곳에서 목회를 하라고 하면 반가워할 분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고린도 교회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쓰고 있는가?

5.1. 성도와 은혜
우선 이런 모든 문제들 가운데서도 바울은 이들을 '성도'(聖徒, 하기오이 = 거룩한 사람들)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오늘날이야 '성도'라는 말이 직분이 없어 이름 뒤에 붙일 말이 없을 때 넣어서 부르는 접미어처럼 격하되고 말았지만 당시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뜻의 말이었다.
카톨릭에서 이미 유명을 달리한 훌륭한 신자나 사역자 중에 특별한 경우 여러 가지 검증 과정을 거쳐서 서품을 받아야 붙여지는 칭호가 '성인'(聖人) 아니던가.
바울이 당시에 고린도 교인들을 '하기오이'라 칭했을 때, 그 의미는 상당히 강력하다. 그들은 감히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주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로서의 '거룩함을 가진 사람들'로 불린 것이다(고전 1:2).
바울은 이 문제아들을 '하기오이'라 부르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긍정적인 낙관이 만들어졌을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때문이었다(1:3). 은혜의 능력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바울이, 당시 서신의 인사말의 관례였던 '카이레인'(greetings)을 '카리스'(은혜)로 바꾸어 그의 편지를 시작하는 것을 새로운 관행으로 만들었을까. 은혜의 긍정은 조악한 고린도인들을 성도로 보게 마음을 열어준다.

5.2. 그래도 감사
또한 이렇게 문제투성이들을 놓고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했다(4절). 그것도 '항상' 감사한다고 했다.
그가 감사한 이유로 들고 있는 구변(口辯)과 지식(5절)은 사실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며 바울을 곤란하게 만든 요인들이었다.
이들은 능변의 능력이 진리 획득과 전달의 정수(精髓)라고 생각했고(고전 1:18-2:5) 그런 차원에서 달변가였던 아볼로를 지지하며 분파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바울이 구변이 신통치 않아 힘이 없다고 비난했다(고후 10:1, 10, 11:6).
이들에게 있어서 구호는 '지혜'(소피아) 또는 '지식'(그노시스)이었다.
고린도전서 1:18-2:16은 온통 '지혜'에 대한 논쟁으로 가득 차 있다. 바울에게는 골치를 썩이는 문제거리가 바로 '구변'과 '지식'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저들의 그 구변과 지식에의 열망을 뻔히 알면서도 이에 대해 감사를 하고 있다.
무엇을 바라기 때문인가?
그 문제의 구변과 지식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있어 은사가 되어 풍족하기를 소원하는 비전의 표출이었다(1:6-7).
바울은 비전이 문제를 압도하게 만드는 낙관을 지닌 사람이었다.
중압감을 주는 문제에 매달리기 이전에 그 문제를 사소하게 만드는 '소명'과 '비전'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물론 이것을 세상에서는 열정(passion)이라 부른다.
문제는 문제이기에 나중에 적나라하게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비전을 먼저 이야기하자는 말이다. 문제가 먼저가 아니다. 문제를 야기시켰다 하지만 그런 선물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먼저 긍정하기 때문에 낙관이 지배하게 사안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5.3.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이제 문제의 이슈에 들어가 야단도 치고 논쟁도 벌이고 분노하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수사학적인 야유도 퍼부을 바울이 전개될 장면의 무대를 먼저 이렇게 긍정적 채색으로 도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아무리 현재가 부정적으로 보이고 답답해도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본다.
바울의 은혜로운 낙관을 읽으면서 애가서 기자의 '신앙의 오기'를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을 다 잃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지경에 놓인 그였다. 그런데 그가 아름다운 찬미로 방향을 전환한다.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이었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가 3:19-24).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낙관주의자들이다.
이 세상을 신뢰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 세계에 무슨 대단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에스카톤'을 바라보는 종말론적 대망을 품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실을 볼 때 믿음의 눈으로 본다.
어둠과 그림자로 한숨쉬지 않는다.
만일 한숨부터 쉬는 것이 습관이었다면 이제 고쳐야 할 것이다.
문제와 장애가 없지는 않다. 아니, 주변을 돌아보면 장애와 문제와 답답함으로만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역자는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본다.
혹자의 눈에는 그것이 허황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광대함은 가장 현실적인 허황이다.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문제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자.
많이 고쳐야 그렇게 되겠지만,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도 바울처럼 순진한 낙관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해 본다.
학자적 습관인 비관을 버리자.
열정을 지닌 사명자의 습관인 낙관을 가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