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어리석은 사람 - 마틴 루터 킹

2004.07.13 01:13

폭우 조회 수:615 추천:52

어리석은 사람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시니"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에게 깊고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현대의 모든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크게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중심 인물은 어떤 부자였습니다.
그 사람의 농장에서는 풍성한 농작물을 수확했습니다.
부자는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하면서 넓은 새 곡간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 밤에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부요하던 때에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오늘날 우리의 공동체에 그가 살았다면 그는 "큰 사람"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회적인 명망을 가지고 있었고 공동체에서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경제 분야에서 몇 안 되는 고위직에 근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시골뜨기인 예수는 대담하게 그를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는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부자를 바보라고 부른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부를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는 부의 오용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전기와 마찬가지로 돈은 도덕과는 별개로 선하거나 악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모든 것을 팔라"고 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조지 에이 버트릭(George A. Buttrick) 박사가 이야기 한 것처럼 예수는 전신 진단이 아니라 국부적인 수술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원래 부자로 태어나서 나쁠 것은 없고 가난하게 태어나서 좋을 것은 없습니다.
부자가 부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예수가 이 사람을 비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힘들게 일해서 돈을 모았고 좋은 사업가의 자질로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요?


   부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살아가는 목적과 살아가는 삶의 수단을 혼동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에서 차지하는 경제적인 비중이 그의 운명을 삼켜버렸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면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의 두 가지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내면적인 것은 예술, 문학, 도덕, 종교와 같은 것으로 표현되는 영적인 것을 말합니다.
외부적인 것은 복잡한 장치들과 기술들, 기계들같은, 우리가 삶의 수단으로 쓰고 있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집, 몰고 다니는 차, 입고 있는 옷, 우리가 부를 획득하는 경제적 수단,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인 것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수단인 돈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목적과 바꾸어 버리는 위험이 존재합니다.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 내면적인 것이 사라져버립니다.

   부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단과 목적, 구조와 운명의 엄밀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풍랑이 이는 그의 삶에서 침몰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의 외부적인 요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기본인 물질적 욕구를 추구할 의무와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종교는 사람의 경제적인 부유함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육체가 배고픔의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피난처를 찾고 싶은 소망 때문에 가슴 절이도록 아픈 한, 영혼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종교는 최선을 다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음식과 옷과 피난처와 경제적 번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분명하고 간결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러나 예수는 사람은 한 마리 개보다 값 싼 몇 개의 타악기에 더 만족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는 사람의 삶의 내면적인 면이 외부적인 면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부자의 비극은 그가 먼저 수단을 추구했고 돈을 좇다가 수단 속으로 빠져버린 점입니다.
부자는 물질적으로 점점 부해지고 있었지만 지식적, 영적으로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행복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어쩌면 그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내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선물을 주었지만 아내가 가장 필요한 사랑과 애정은 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있었을 지도 모르고 그들에게 감사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서재에 말쑥하게 정리된 수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전혀 읽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위대한 음악을 들을 기회가 있었지만 음악을 듣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늘의 웅장한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귀는 하늘의 달콤한 음악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시인과 예언자들과 철학자들의 통찰력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는 다음의 말에 꼭 맞았습니다. " 당신, 어리석은 사람이야 !"



   부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부자가 다른 것들에도 의존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의 독백은 대략 60단어로 표현됩니다.
"나"와 "나의"는 20번 나타납니다.
그는 "나"와 "나의"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와 "우리의"라는 말을 할만한 재량이 없었습니다.
이기주의라는 암적인 병의 희생자인 그는 재산이 항상 사회의 산물인 것을 깨닫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혼자서 밭을 갈고 혼자서 곳간을 짓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제공한 생각들과 노동력의 광대한 보물을 자신이 상속받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때 우리는 엄청나게 어리석어집니다.
   우리는 현대사회의 위기에 대한 이 비유의 의미를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생산기술은 꾸준하게 좋아져서 곡물이 풍부해졌습니다.
우리는 좀 더 넓은 창고를 지어야 하고 우리의 잉여생산물을 비축하기 위해 날마다 수백만 달러 이상을 써야 합니다.
해가 지날수록 "내 과일들을 더 이상 쌓아 놓을 공간이 없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우리는 묻습니다.
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가난에 지쳐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저는 미시시피 델타 지역에 있는 끔찍한 가난과 북부지역의 넓은 산업도시에 사는 실업자들의 비참하고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해답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벌거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우리의 상품들을 저장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 대답은 단순합니다.
밤마다 배고픔에 지쳐 쪼그라든 위를 움켜잡고 잠자리에 드는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남아도는 음식을 무상으로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막대한 부를 지구 상에 퍼져 있는 빈곤을 닦아내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과 국가들이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있든 그렇지 않든 우리들 각자는 영원히 "빚진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남자들과 여자들, 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히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아침 식사를 할 때 마다 우리는 지구의 반 이상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어떤 태평양 섬에서 만든 스폰지가 있는 욕실로 가서 스폰지에 손을 뻗습니다.
우리는 프랑스 사람이 만든 비누에 손을 뻗습니다. 타올은 터키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목욕을 끝낸 후 식탁에서 마시는 커피는 남아프리카에서, 차는 중국에서, 코코아는 서부 아프리카에서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일터로 나갈 때도 지구의 반 이상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습니다. 실제로 모든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피할 수 없는 그물로 얽혀 있고 운명이라는 한 가지 옷으로 묶여져 있습니다.
어떤 영향이든지 사람은 직접, 간접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서로 서로 관련되어 있는 현실의 구조입니다.

당신이 존재해야 할 존재로 살아가지 못할 때 내가 존재해야 할 존재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존재해야 할 존재로 살아가지 못할 때 당신도 존재해야 할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극적이게도 부자는 이것을 깨닫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기적이지 않게 살아왔고 성장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개인주의자로 점점 황폐해졌습니다.
정말 그는 영원히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부자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자신이 계절마다 꽃을 피우고 땅을 비옥하게 하고 해가 지고 뜨는 것을 조정하고 자연법칙을 조절하고 비와 이슬을 만드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부자는 자신이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자기 중심의 이 어리석은 생각은 긴 시간동안 자주 인류를 끔찍하게 통치해왔습니다. 이것은 자주 유물론의 원리를 기초로 한 이론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 이론은 "인생은 생리학적인 의미를 가진 생리학적인 과정"이라고 합니다.
이 이론은 현실을 분자들의 운동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고 사람은 원자와 전자가 운동하는 중에 부딛쳐서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이며 생각은 회색 원자의 우연한 생산물이고 역사의 사건들은 필요의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원자와 운동의 상호작용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나 영원한 사상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은 신론과 이상론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이 유물론적 철학은 불가피하게 지식적인 감각이 없는 세상 속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인류 개인이 원자들과 전자들의 우연한 상호반응의 결과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원숭이가 마구잡이로 자판을 두들겼는데 그것이 나중에 세익스피어의 작품같은 명작이 나왔다고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습니다.
그것은 정말 속임수입니다.
"세계는 거대한 기계보다는 거대한 사상에 오히려 더 가깝다."고 이야기한 물리학자인 제임스 진스(James Jeans)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훨씬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우리는 지금 유물론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철학자 아더 팔폴(Arthur Balfour)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습니다.
유물론은 약간의 통찰력 있는 사고가 한 번 불기만 해도 깨지기 쉬운 틀입니다.
하나님을 부적절하게 설명하는 또 다른 시도는 무신론적 휴머니즘입니다.
이 철학은 사람은 하나님이라고 확신하면서 사람을 신성한 존재로 만듭니다.
사람은 만물의 척도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루소가 그랬던 것처럼 이 철학을 인간본성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하는 데 사용합니다.
   악은 오로지 제도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빈곤과 무지가 없어진다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는 이런 점진적 낙천주의에 열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문명의 발전이 천국의 도래를 앞당겨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다윈의 진화론을 교묘하게 적용해서 자동 진화라는 자극적인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사회학적 진화법칙이 중력의 법칙만큼 타당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 낙관주의에 사로 잡혀서 현대인들은 자연이라는 창고를 부수고 과학적 통찰이 지구를 완벽하게 발전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의 성과는 놀라왔고 분명했고 구체적이었습니다. 과학의 놀라운 발전을 목격하면서 현대인들은 외쳤습니다.


   "과학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과학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과학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람들의 찬양은 더 이상 하나님과 천국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생각은 사람과 세상 속에 제한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주기도문을 이상하게 모방했습니다.


   "땅에 계신 우리 형제들이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에 하나님께 얼굴을 향하던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에 얼굴을 향했고 새로운 사회를 안내하는 데 필요한 기계를 가졌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이 미신이 폭발될 때가 왔습니다. 그것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지역에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50메가톤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학은 우리에게 단지 물리적인 힘만 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과학이 영적인 힘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는다면 불가피하게 우주적인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힘이 선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힘은 결코 선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알프레드(Alfred) 대주교의 말은 아직도 진리입니다.
우리는 과학보다는 좀 더 영적인 힘으로 지탱이 되고 도덕적으로 통제되는 무엇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 아래에 있을 때 과학은 사람이 육체적 안전의 정점에 이르도록 해 줄 것입니다.
성령과는 상관없이 과학이 존재한다면 과학은 더 깊은 혼돈만을 안겨주는 죽음의 무기가 될 것입니다. 왜 우리자신은 어리석게 자동 진화를 믿고 사람이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눈을 우리의 진정한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돌려야 합니다.
단지 그렇게 할 때 현대과학 기술의 발전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의 노력은 허사가 될 것이며 우리가 맞이하는 동틀 녘은 가장 어두운 밤으로 변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케이 체스터톤(G.K. Chesterton)이 말했던 "치료없는 치료, 축복없는 축복, 문제해결 없는 해결"만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힘이시며 환난 날에 즉시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불행하게도 부자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20세기의 많은 사람들처럼 크고 작은 일들에 참여하면서 그 일에 관계된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유한한 것에 무한한 중요성을 두었고 서론에 불과한 일들에 최종적인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부자가 막대한 부를 쌓을 때 그가 투자한 주식의 이익배당율이 최고였고 궁궐같은 그의 집은 세간의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후에 모든 사람들이라는 공통분모가 도저히 약분할 수 없는 분자인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특별한 때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이야기에 활기와 극적인 요소를 불어넣지만 부자가 므두셀라가 살았던 나이만큼 살았다 해도 이 비유의 핵심 진리는 꼭 같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다 해도 이미 영적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숨이 끊어진 것은 이미 죽어있는 상태에 대한 때 늦은 선포일 뿐입니다. 그는 살아가는 삶의 목적과 그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수단을 구분하지 못했을 때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어떤 부자"가 서구 시민인 우리들 자신이 아닐 수 있습니까? 상품과 물질이 풍성할수록 우리의 성공의 기준은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얽혀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수단은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점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와 같이 하늘을 날고 고기와 같이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것을 배우지만 우리는 다른 형제들과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아주 간단한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물질의 풍요함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강이나 영혼의 쉼을 주지는 않습니다. 한 동양의 작가가 우리가 처한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숨김없이 말합니다.

   당신은 수천의 기계들을 "노동력 절감을 위한 기계"라고 부르지만 당신은 영원히 "바쁩니다".
당신의 복잡한 기계는 점점 당신을 더 피곤하게 하고 화나게 하고 신경이 예민해지게 하고 불만족하게 합니다.
당신이 무엇을 더 가지게 되든 당신은 더 가지고 싶어합니다.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당신은 또 다른 곳에 가고 싶어합니다.
당신은 자신을 위해서 자원을 파내는 기계를 만듭니다. 자원을 가공하는 기계, 그것을 운반할 기계, 메시지를 전하는 기계, 글을 쓰는 기계, 말하는 기계, 노래하는 데 필요한 기계, 극장에서 상영하는 데 필요한 기계, 투표하는 데 필요한 기계, 재봉하는 기계…. 당신을 위해 필요한 다른 수백 가지의 기계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입니다.
당신이 가진 기계들은 당신의 시간을 벌어주지도 않고 영혼을 구원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날카로운 손톱들이 더 많은 기계를 만들도록 재촉하고 당신에게 더 많은 일거리를 줍니다.

   이것은 매서운 진실입니다.
이 진실은 서구 시민인 우리에게 몇 가지 사실을 이야기 해 줍니다.
서양의 번영을 질투하는 동양 사상가가 선입관에 사로잡혀서 그냥 던져 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고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보다 앞서서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가 가진 과학의 힘이 우리가 가진 영적 힘을 능가합니다.
우리는 미사일을 조준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조정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늙은 부자와 같이 어리석게도 우리는 내면의 것을 최소화하고 외면의 것을 최대화했습니다.
우리는 생계를 꾸려가는 데 정신을 집중합니다.
"사람의 삶은 그가 소유한 재산의 부유함에 있지 않고 도둑도 들지 않고 좀도 쓸지 않는 내면의 영적 보물에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배워야 우리 세대에 평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창조적인 삶을 꾸려가고자 하는 우리의 소망은 개인적인 인격과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영적인 목적을 다시 세우는 우리의 능력에 있습니다.
이 영적이고 도덕적인 깨우침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기술의 오용 때문에 스스로를 파괴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질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의 내면, 사람의 영혼을 잃고서 비행기와 전기와 자동차와 칼라 텔레비전과 같은 외부적인 것들을 모두 얻는 것이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