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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2007.07.08 01:14

폭우 조회 수:591 추천:21

매를 들어서 라도

1:1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1: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1:5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옆자리에 계신분들에게 인사합시다.
“함께 예배드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천사입니다”

우리들에게 과연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한국의 김남준목사님은 이미 현대의 교회가 아니 현대 한국교회의 예배가 이제는 참아야 하는 인내를 필요로 하는 시간으로 전락해가고 있다고 진단하고 그 중심에 설교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 역시 참아야하는 시간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중심에 저의 설교나 말씀을 전달하는 부족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오늘 본문 말라기서는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이스라엘백성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말라기는 그 이름이 “나의 사자”라는 뜻으로 이 이름이 정확히 어떤 개인의 이름인지 아니면 다른 선지자의 별명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바로 세워지기를 원하셨고 그러기에 다소 과격한 언어를 사용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말라기서 하면 먼저 3장 10절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자주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분명히 축복하신다라는 설교를 들었고 또 그렇게 하나님께 드려야할 십일조에 대한 축복을 되새겨 보곤합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결코 말라기서는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지자의 음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십일조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대한 고민이고 열정입니다.
말라기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하여 또 우리를 향하여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아니 “내가 너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를 사랑하셨습니까? 이렇게 반문한다는 것입니다.
말라기라는 선지자는 구약의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선지자입니다. 성경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통로로 우리에게 주어진 말라기 선지자의 음성은 신약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분명한 음성을 들려줍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다 멸망하여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루에게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나라를 잃어버리고 선전이 허물어져 타국에 방황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바벨론 강가에서 울며 부른 찬양을 들으셨고 그들을 다시 고토 고국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으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스룹바벨과 에스라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쉽게 자기들의 생계를 핑계로 또 주변의 대적들의 방해를 이유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늦추고 맙니다.
이때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부흥시키시고 그들에게 열심을 불어 넣으셔서 성전을 완공하게 하셨습니다. 지난번 학개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건립되고 이를 인하여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전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노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초라해 보이는 성전을 건립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성전에 계심으로 그들과 동행하는 놀라운 이상을 보여주셨고 그곳에서 메시여로 인하여 놀라운 영광을 회복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2:3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
2: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2: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2: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또다시 현실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성전을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격려하셨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예배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채험하는 놀라운 역사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울며 회개하였고 나아가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고 잊혀졌던 절기와 제사를 회복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때의 초막절과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는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바로 오늘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한 첫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니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수 있습니까?
이국땅에서 울며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나라를 회복하고 성전을 재건했으며 또 성벽을 복구하였음에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속히 떠나 갈 수 있었느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한시도 하나님은 은혜가 느껴지지 않으면 아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도 현실의 벽에 부닥치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이곳 윈저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불러 모으셔서 하나님은 예배하 수 있도록 예배처소를 허락하셨고 지난 긴 시간동안 고난 가운데 지켜주셔서 예배할 수 있도록 하셨는데 혹시 지금우리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감격하여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예배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이것은 먼저는 저의 잘못이요 또 우리들의 연약함을 인한 것일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았단 말이냐 너희 형제 에돔족속을 바라보아라. 그들이 누구입니까?
에서의 아들들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적대국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지 못하던 백성 아니 엇습니까? 그들을 버리고 너희를 사랑하였건만 또 너희의 기도를 듣고 나라와 성전을 회복케 하였건만 지금 또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형평이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삶을 살고 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조목 조목 반박하십니다.
먼저 너희의 예배를 살펴보아라 과연 너희가 온전한 예배르 ㄹ드리고 있느냐 나에게 드리는 너희의 예배가 나의 기뻐하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백성들에게 또 제사장들에게 너희가 들리는 예물을 살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면서 가지고 나온 헌물이 그들의 드리는 제물이 눈먼것과 흠있는 것으로 드리면서 하나slaRP 예배하였으나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2: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아니 이미 저주가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지 않는 그 순간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하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하는 사람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대신에 저주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축복을 받았기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드릴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에 대한 시험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께 드릴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좋은 것으로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유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아니 왜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저주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예배 받기 위해서 안달이 나있는 분이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수히 자주 말해왔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축복을 베푸시고 그들의 인생을 통하여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때로는 분노하시고 그들에게 겁을 주어서라도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 중에 그 자녀를 훈계하지 않는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훈계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어그러지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것을 그대로 보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저주의 메시지를 주어서라도 그 길을 돌이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자리로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을 허락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하나님은 당신의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지 않아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고 당신의 영광을 창송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온 세상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늘의 천사들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의 해와 별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공주의 새와 바다의 고기가 그 지으신 이를 노래하는 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찬양할 사람을 찾으시되 당신의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실 이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자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만일 네가 아빠 말을 잘 들으면 이번 주에 네가 원하는 장난감을 사줄게”

아바가 딸의 순종이 목말라서 이렇게 이야기 하겠습니까? 그 딸을 사랑하기에 그 딸이 온전한 길로 걸어가기를 소원하고 자녀가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라서 심지어 무슨 좋은 것을 미끼로 라도 말을 듣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당신의 이름을 높이고 싶어서 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더욱 우리가 예배하는 그때에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사란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헬라어로 “열정”이란말은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말고 동일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열정을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열정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예배는 환경에 의해서 드려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분위기를 잘 만들었을 때에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나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준비하고 잘 전달하기 위해서 애씀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배를 드릴 때에 나의 마음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함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작고 허름한 교회에서라도 단 두세사람이 모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은 가장 아름다운 예배를 받을 실 것입니다.
윈저사랑의교회 성도 여럽누 우리 이제 풍성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적어도 여러분의 시간중에 하루에 단 십분 만이라도 예배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한 예배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예배드릴 수 있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저희집에 기니피그라는 작은 동물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생일 선물로 사준 애완용 쥐 비슷한 것입니다.
이녀석들도 제가 내려가면 자기에게 밥을 주고 또 집을 청소해 주는 줄 알고 달려나와서 케이지에 발을 올려놓고 소리를 냅니다. 녀석들도 자기를 이롭게 하는 삶을 알아보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또 저희 집 문 밖에 언제 부터인가 새끼 고양이가 한 마리 와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녀석은 누가 길르던 것인지 아니면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밖에 나가서 서있을라치면 발에와서 자기 몸을 부빕니다. 아마도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원하는 간절한 몸짓인 것 같습니다.
예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동물중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동물들은 적어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알아보고 그 사람을 헤꼬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만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이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또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이 녀석들 처럼 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를 사랑해 주세요 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라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와 예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문종성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27의 한국 광주 지산교회 대학부소속 청년으로 6년의 여정으로 미국 뉴저지를 출발해서 캐나다를 거처 미국을 횡단한후 샌디애고에서 멕시코로 그리고 남미를 종단해서 남아프리카로 그곳에서 거꾸로 올라가서 유럽으로 그리고 중동을거처 동남아시아를 거처 호주로 갔다가 일본,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세계 비젼트립을 진행하는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의 홈페이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만 복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나무들과 꽃들, 구름들과 별들에도 기록하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삶에서 과연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이 청년은 자기의 삶에 하나님의 비젼을 발견하기 위해서 또 아프리카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곳의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이런 여행을 계획하였습니다.
젊어서 좋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는 이 청년의 마음으로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열정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함으로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이런 열정이 일어나고 이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열정이 가득한 분위기의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은혜로운 일이지만 내가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럴떄에 이 땅 윈저에 있는 많은 이들이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 캐나다의 수많은 교회들은 이미 노인들로 가득찬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들에게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진심으로 그들의 삶을 드리는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들이 때로는 외로이 모여 곡조에 화음에 맞지 않는 찬양을 하고 통성으로 기도하지 못하고 눈물로 하나님께 아뢸 때에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 교회가 간직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긍휼이 아닌 적이 없었다고..
아버지의 마음은
용서가 아닌 적이 없었다고..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사랑뿐이었다고 말이죠..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 시편 146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