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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 / 1장 1절

2007.05.17 13:44

폭우 조회 수:552 추천:17

에베소서강해

에베소서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로 불립니다. 그러나 신약의 다른 성경들이나 바울이 쓴 편지들과 조금은 다르게 에베소서는 에베소교회뿐 아니라 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가장 기본적인 성경적 가르침으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이런 특징은 당시 개 교회의 특정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을 설교처럼 하고 있는 것을 통해 드러나는데 바로 그 근본적 가르침이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편지로써 보다는 설교로써 읽는 것이 좋을 듯하고 이 에베소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나눌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때의 성도들에게 하신 성경의 진리와 구원의 은혜에 대한 진술은 여전히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구속의 방식의 부요함과 영광, 그 신비와 놀라움을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해이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 경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그 하나님의 인식과 경륜을 이해 할 수 없도록 막고 있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으로 직접 계시해 주셨는데 바로 그것이 성경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오염된 이성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기 전에 미리 우리에게 하나님의 경륜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지금 나의 눈으로 나를 중심으로 이 세상을 판단하고 또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눈으로 그 하나님의 주권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의 삶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면할 때 비로소 우리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의 경륜과 주권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주권, 그 경륜을 대면하여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양이며 가르침이고 또한 고백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하여 말하고 그 놀라운 은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고백과 찬양에 바울은 자기의 말이 부족하므로 결국 부사에 부사를 더하고 많은 형용사를 동원하다가 결국 찬양으로 끝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는 거대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도시이고 우상이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이교도의 도시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하여서 이 죄악의 도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덧 입혀져 있었던 것을 바울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첫 인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개인적으로 이 서두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고백하는 바울과 나의 정체성 사이의 간극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과연 나는 나의 사역과 삶이 하나님의 뜻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나의 삶의 순간과 시간들에 나는 하나님의 뜻을 민감히 발견하고 따르면 순종하고 있는지 자문해보면서 에베소서를 읽고 또 묵상해 봅니다. 함께 이 말씀을 통해서 나의 현재를 점검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성도로 부르시고 세우셨음을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나의 그리스도인 되었음 역시 하나님의 뜻과 그 계획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는가?”
나아가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자기의 소속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자기의 소속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임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떠한 존재인식을 할 것인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나의 소속은 어디이며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라고 표현하면서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이들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성도가 된 사람들을 수신자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성도가 되었습니까? 그리스도의 구별하여 부르신 거룩한 성도 말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것은 먼저 구별함을 받은 사람(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이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그 구별된 의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하면서 당시에 교회의 소속된 사람들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구별된 사람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성도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당신을 부르시는 부르심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저 그렇게 교회에 오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부르시고 우리를 구별하셨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부르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그냥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버스가 급정거해서 앞으로 굴러간 사람이 다시 출발하니까 뒤로 굴러와서는 옆사람에게 하는 말처럼....
“버스기사가 날 부른 줄 알았더니 안 불렀다네!” 이처럼 불렀는지 아닌지 모를 만큼 그냥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고백하는 바울의 고백 처럼 부름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정결함을 입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이제 거룩하여진 백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죄를 사함 받아서 거룩한 백성이 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합니까? 우리는 거룩하고 정결한 백성입니까?
우리의 정체성이 7절에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인 것을 고백하십니까? 우리의 현재가 어떠함과 관계없이 우리는 정결하게 죄 없이 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임을 인정하시냐는 말입니다.
자주 우리는 거룩함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은 우리의 삶의 모양이나 도덕에 관계없이 일단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나의 행실이 거룩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의 행실과 의지가 거룩하려면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우리는 거룩하다고 인침을 받은 것입니다. 내 속에 거룩한 하나님이 오셔서 나와 동행하심으로 그로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에게도 전이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더럽고 볼품없는 그릇이라도 보물을 담으면 보석함이 되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복음을 담았고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우리는 거룩히 구별된 성도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는 이 세상에 주관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가 아직도 세상의 주권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과연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 세상의 일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펴보면 우리가 세상의 여러 가치관에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세상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슴의 어떠함에 따라 우리가 영향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이 세상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히 구별된 성도라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과 섞여 있을 때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고 하면 아직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에 사용되어진 “신실한”이란 단어는 도마가 예수님을 의심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못 박히신 손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이시면서 요한복은 20장 27절에 말씀하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되라”고 하실 때에 “믿는”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은 믿는 자들이고 믿음이 있는 자들이며 믿음을 지키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고 있는지 명확한 인식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믿음을 신실하게 붙잡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붙잡고 살아갈 것입니까?
이 세상의 다른 교훈과 풍조를 좆지 않고 의존하지 않는 신실한 사람들입니까?
요즘 세상은 자기가 배운 학문과 과학적인 사고 혹은 이성의 우월성을 믿고 있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향해서도 이성적이냐 아니면 과학적이냐를 가지고 접근하고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하나님의 허락하신 믿음이 없는 탓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구원, 믿음이 있기에 말씀을 바라볼 때 이성과 과학의 잦대가 아니라 믿음의 잦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말씀을 이해하고 알아 가도록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대에 이성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 속하였다고 하는 인식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도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리스도안에 속하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그와 한 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한 지체인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는 예수님의 지체로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그의 가지인 것입니다.
나무에 잘려진 가지가 생명이 없는것 처럼 우리도 예수와 동행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그 가지에 붙어 있는한 우리는 죽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와 한 몸이라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소속은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소속으로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신실해 질 수 있고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신 그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한신 말씀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가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