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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2 / 1장2절

2007.05.17 14:13

폭우 조회 수:535 추천:22

에베소서 강해2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를 시작하면서 아니 편지를 쓰는 서두에서 자기의 편지를 받는 이들에게 당신들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밝히고 그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된 사람들 예수님으로 인하여 신실한 이들에게 쓰는 편지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편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비밀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변화된 우리의 정체에 대하여 명확히 인식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편지의 수신인을 향하여 성도와 신실한 이들이라고 인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진술이자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진 우리의 정체성과 그에 합당한 삶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입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회로 어떻게 세워져야하는 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원하고 또 우리가 그 은혜를 잘 지켜 나아가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편지를 누가 쓰는 것인지와 누구에게 쓰는지를 밝히고 나서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참으로 풍성한 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라면서 인사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시작과 끝에 대한 진술이며 이로 얻어진 우리의 상태에 대한 인사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놀라운 선물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또한 그 은혜로 말미암는 평강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항상 인사할 때에 이 “평강”에 대하여 말하였고 서로에게 평강을 빌었습니다. 평강은 히브리어로 “샬롬”이라는 말이고 이 “샬롬”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화해이자 기쁨인 것입니다.
히브리어 “샬롬”과 헬라어 “에이레네”는 그저 소극적인 의미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를 이루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에베소서 2장 14절에 나오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진술하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평화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샬롬이 이야기하는 평화는 그저 싸움을 그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싸움을 그치고 서로 화해하여 연합하는 것 까지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적극적으로 이제는 함께 평화를 누리는 관계가 되었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또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에는 이 “샬롬”만 있었지 "은혜"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또한 이 샬롬의 인사는 인간의 삶에 관하여 하나님이 평화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에 싸움이 그치고 평화가 있었으면 하는 욕구가 그들로 하여금 평화의 인사를 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옛날의 모든 나라들과 사람들은 항상 긴장 가운데 살았습니다. 하시라도 나의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이 나에게 와서 싸움을 걸거나 우리가족을 혹은 민족을 국가를 침략할 것을 염려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현대 사회도 그러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그 때의 삶은 적극적으로 싸움을 통해 땅을 확장하고 또 먹을 것들을 구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평화라고 하는 것은 생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을 잘 살펴보면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때부터 그들에게는 이 샬롬에의 욕구가 강력하게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사사기 2장 2절-3절에보면
2: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였을 때에 다 정복하지 못하고 남겨 두었던 가나안 민족들이 그들 중에 섞여 살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살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인데 아직 왕정이 시작되지 않았고 또 이스라엘 전역이 아주 듬성 듬성하게 성을 쌓고 그 중간에는 광야와 같은 지역들로 이루어 져있었기 때문에 지역전체에 국경선을 나누어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가나안에서 사는 내내 다른 민족의 침략이나 노략질을 당해야 했고 그러한 어려움은 지금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있는 신약의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샬롬은 그야말로 간절한 인사였고 서로에게 확인하고 싶은 인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샬롬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샬롬은 전쟁이 그치는 것이고 그들의 삶이 평안을 누리는 것에 대한 바람이었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로 완전해 지는 것에 대한 열망이었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평안은 아직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평강이 같이 붙어 인사되어지는 사도 바울의 인사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평화를 얻을 때에 그저 일신상의 평화나 싸움 없음으로 인한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 나셔서 인사하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평화의 인사인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샬롬”은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인사였고 줄 수 없던 인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고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은 그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평화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장 14절에 읽었던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6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그 평강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습니까? 그거 나의 마음에 평화가 있고 평안함을 누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있었던 불안과 죄악의 요소가 사라진 것에 대한 평강의 인사인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놓였던 “罪”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과 죄인된 우리가 평화를 이루었음에 대한 선언인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비로소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리가 평강을 이룰 수 있음을 선언하시고 우리에게 주셨던 이사가 바로 그 평강의 인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 인간은 하나님과 평화할 수 있도록 지어진 존재였습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을 지으신 것을 인하여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존재로 하나님과 평화하는 존재로 지으셨음을 말하는 것이고 나아가 “당신의 형상을 따라 당신의 모양대로”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충만한 관계를 위하여 지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서 죄가 우리 가운데 들어왔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평강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은 온전히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타락한 인간들을 향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지만 인간은 그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무섭고 두려운 분으로만 인식하고 그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인식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그 대속의 죽으심을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할 수 있게 된 것입낟. 최초의 창조하실 때의 인간이 누렸던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얻은 것이고 이로써 창조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리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하는 “평강”의 인사는 그야말로 온전한 의미에서의 샬롬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는 평강을 지금 바울은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저 평강을 전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은혜”를 함께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그야말로 죽음 가운데 거하는 것이며 어둠 가운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과 평화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온전하게 살려고 발버둥 친다고 하여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다가갈 수 없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원죄 이후로 죄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굳이 그 증거를 대지 않아도 우리는 죄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이 그래왔고 또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발버둥 처도 저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와 악한 감정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좋은 사람으로 행동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 스스로를 속이지는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고민과 갈등을 품고 살아갑니다.  내 안에 있는 죄를 인해서 내 안에 있는 분노를 인해서 내 안에 여전히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절망과 자존심, 또 열등감과 우월감 나아가서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마음이나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등등...
우리는 그 수많은 연약과 악함으로 인해서 때로는 아프고 대로는 지치고 때로는 분노하면서 마음에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진실로 평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가정의 평화와 사랑을 강의하시는 어떤 분은 그 가정에서 불화로 가정이 깨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고 많은 돈을 소유하고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안락한 것을 누리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도 자주 마약이나 술에 자기의 불안을 해소하는 모습을 봅니다. 심지어 아무런 문명의 침입을 받지 않은 자연 가운데 사는 원주민들조차도 그들이 항상 평안을 누리지 못해서 때로는 굿을 벌이거나 나름대로의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제가 태국으로 청년들과 단기서교를 갔을때에 북쪽 산지족에게 간적이 있었습니다.
“몽족”이라고 하는 산지족 마을은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만큼 오지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방문했을 때에 선교사님의 설명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무당이 절반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그만큼 그들도 두려움과 연약함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연 가운데 문명과 떨어져 살아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이후로부터 항상 두려움과 연약함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평화를 가지지 못하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절대로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 할 때 인간은 온전하고 평안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자 그 안에 죄악이 들어왔고 또 불안이 들어온 것입니다.

창세기 3장 8절에 첫 범죄를 지은 인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그리고 10절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두려워” 숨었다고 말합니다. 그전까지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평화로운 삶을 살았던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그 평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에게 다시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강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을 수도 이를 수도 없는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얻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편지하면서 이 사실을 먼저 전하면서 인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평강이 임하였음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소식이며 바로 에베소서를 쓰고 있는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본연이 상태는 죽음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떠한 노력으로도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없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구원론에 대하여 공부하면서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가 죽음의 상태에서 살아나는 것은 기적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들은 자주 이 은혜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낍니다. 전적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한다고 하면 불쾌한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분명하지만 내가 감당하는 몫도 좀 있기를 기대합니다. 또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의무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얻기를 원하지만 그 은혜에 대해서는 조금씩 자기만의 생각으로 각색하여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은혜”는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주어야할 이유가 없어도 베푸는 호의일 것이고 받는 입장에서는 아무런 공로가 없이 받는 호의나 베풂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란 나에게 주어지는 감정적인 고조나 구체적인 축복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면 모두에게 또한 그러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면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초자연적이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경험을 하게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은혜란 그 이전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 그 자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그 자체입니다.
이미 그것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후에는 그 은혜를 다시 발견하게 하는 것이거나 기억나게 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이 인사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속하심으로 얻어지는 구원의 은혜가 있기를 원하는 것이고 또 그 은혜를 다시 상기하기를 원하는 인사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뒤편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또 우리는 자주 십자가로 목걸이를 하거나 귀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을 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냥 예쁘라고 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구속의 은혜를 상기하고 기억하기 위함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memorial”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볼 때 “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구나, 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셨구나!” 하고 다시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구원의 사건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물론 이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줄 압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가장 놀라운 은혜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이제 우리는 그 은혜를 다시 기억함으로 은혜의 충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함이며 그 은혜를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고 그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놀라운 은혜를 매일 새롭게 기억하고 또 회복하여서 항상 충만한 은혜가운데 살아 가시기를 원합니다.
가끔 우리는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기적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적어도 나의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를 허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찾고 마늘과 파를 찾아 요구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을 우리는 가질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고 그 풍성하심에 감사하며 주시는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이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고 말합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구약의 여호와를 부르던 말인 “주”로 부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이전에는 어디에도 하나님은 아버지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이전에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되시는 예수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은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심판주 혹은 창조주의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이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음을 기억합시다.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 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아버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우리의 주권과 주관자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어느누구도 주권자 하나님되심을 몰았지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으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우편에서 영ㅇ원히 중보하고 계심을 압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을 이기는 또 다른 힘인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주권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고백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