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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나의 예수님

2007.11.18 02:32

폭우 조회 수:546 추천: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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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나의 예수님

요한복음 15장 10~17절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샬롬!

샬롬이란 인사에 대해 언젠가 말씀 드린적이 있지만 샬롬은 “평안”이란 인사입니다. 그냥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안녕하십니까?” 이상의 의미가 샬롬이라는 인사에는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후에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비로소 하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의 샬롬이 바로 그 평강의 참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삶을 찾아 자기의 기쁨과 행복을 찾았을 때부터 이미 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세기 3장 9~10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이 당신과 동행하도록 지은 인간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평강으로 행복하게 살 것을 허락하셨지만 인간은 그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뱀의 유혹을 따라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금하신 약속을 깨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선택의 결과는 엔샬롬이었습니다. 즉 평강치 못함 불안과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 오셔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너희가 서있는 자리가 어디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을 느끼며 기쁨을 누릴 존재인 너희가 지금 어디로 숨어있느냐는 물음이지요.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리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만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연에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잃어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기쁨과 행복을 잃어 버렸고 평강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며 숨어서 자기만의 공간에 숨어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름에 하나님의 곁에서 평강을 누리고 있다고 대답하는 자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혼자만의 공간에 숨어있습니까?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과 함꼐 하는 기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두려움에 떠는 인간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자리에 오시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고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친구가 되어주심으로 우리가 잃었던 것을 회복하도록 도우셨고 결국은 그 샬롬의 자리로 우리를 다시 인도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샹롬의 완성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가진 가장 치욕스러운 자리 처형틀인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고 나아가 그 죽음을 지나 부활하심으로 완성하셔서 그 제자들에게 샬롬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의 시간을 함께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샬롬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이적을 몸으로 눈으로 채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행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그들 속에 있는 두려움을 물리치시고 그들이 어겼던 약속을 화복하심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샬롬을 다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바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샬롬”을 선포하신 것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다면 이는 샬롬을 회복하였다는 것이고 이로써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즐거움 기쁨을 회복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후에도 인간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을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샬롬을 얻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오늘부터 하나님의 주시는 샬롬의 평강을 누리며 만끽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자기가 믿기를 원하는 것을 믿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믿음은 언제나 객관적일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보고 듣는 수 많은 것들 그 사실들 중에서 인간은 유독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것 만을 골라서 믿고 때로는 왜곡해서 믿으려고 합니다.

남들은 다 당신은 참 행복한 삶이야라고 말해도 스스로 나는 불행하다고 믿기를 원하면 그 사람은 평생 불행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모두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을 앞에 두고도 자기가 그것을 믿을 수 없으므로 진리를 버리고 미신을 쫓아 가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믿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인생이 불안하다는 사실을 믿기를 원하십니까? 가변적인 세상의 여러 정황들을 좆아 현실의 불확실함을 믿고 불안과 두려움을 따르지 않습니까?

인생은 결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그 사실을 믿기 전까지는 여전히 돈과 부를 행복의 필요조건으로 따르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비로소 자기의 삶에서 진리를 발견할 때 그는 인생은 물질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알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더러 나는 너희들의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믿기만하면 우리 일생에 가장 훌륭하고 멋진 친구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아니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 기쁨을 누리지도 알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존재들 중에 으뜸을 꼽으라면 “친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친구가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자라면서 늘 한강이 가까운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지금은 공원으로 멋지게 꾸며진 한강변 공원들이지만 예전의 한강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 디트로이트강변의 공원들은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어제도 김순경권사님 댁을 심방하고 돌아오면서 강변을 따라 차를 타고 왔습니다. 오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가 언제 볼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습니다만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에도 불구하고 그 강변에 한번 나아가서 기쁨을 누리는 것 조차 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지요. 여러분들 자주 강변에 가족들과 나가셔서 산책도 하시고 기쁨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습니다만 제가 한국에서 자라면서 학창시절을 지나 결혼을 하고서도 저는 자주 강변에 나갔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고 고민거리가 있을 때에도 나갔고 기도할 제목들이 너무 많아서 힘겨울 때에도 그곳에 가서 머리를 식혔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저는 늘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들으면 질투하겠지만 그때 제 곁에 있었던 것은 아내가 아니라 친구였습니다.

언제나 제 곁에서 친구로 저의 말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던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친구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재철목사님은 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함석헌 선생님의 시를 한편 들려줍니다. 바로 “그런 사람ㄴ을 가졌는가”라는 시입니다. 그 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선생은 한마디로 자기의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신뢰하고 사랑할 만한 친구가 당신에게는 있는가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저에게는 그 강변에 함께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지금도 제게 친구이고 또 나의 힘이 되어주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도 나를 힘있게하고 즐겁게 웃게해주는 친구로 있습니다.

부러우시죠. 그런 친구가 저에게만이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거친 세상이라는 이 땅을살아가면서 이만한 친구 하나 가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큰 힘이요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친구간에 뿐 아니라 인간의 어떤 관계 가운데에서도 신의와 우정이 사라진 세상에서 이런 친구를 가진 것이야 말로 오늘 우리를 웃게하는 가장 큰 힘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먼길을 떠나면서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기거이 맡기며 든든해할 친구,

세상에 버림받고 더 이상 나를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 없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나와 함께 서 있어줄 친구, 절대절명의 순간 나의 목숨을 양보해서라도 이 세상을 위해 살려주고 싶은 친구 또 그렇게 나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 놓을 친구, 그래서 이 세상을 위해서 아끼고 남아주기를 기대하는 친구, 내가 이 세상에 하나님 주신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떠나는 그 순간에도 나 대신 그 일을 떠 맡아 줄 친구가 있기에 평안히 웃을 수 있는 친구 수 많은 유혹을 당하면서도 그건 아니라고 말려줄 얼굴을 떠 올리면서 그래 이건 아니야 하고 결심하게 할 친구를 여러분은 가지셨습니까?

제게 있는 많은 친구들 중에서 이런 친구가 하나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그 친구를 얻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고 그들에게 이제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갈 준비를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말씀 가운데 오늘의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한번 그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친구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데 내가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로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의 주관자가 되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이 우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일을 하시기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친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 중에 성공회대학에서 가르치시다가 작년에 퇴임하신 신영복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통혁당사건으로 구속되어서 20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시다가 나오셔서 18년간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감옥에서 보낸 엽서들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관계의 최고의 형태”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글중에 제일 마지막 구절입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든 우산을 씌워주는 것 보다 그 사람과 함께 비를 맞는 것이 그 사람과 공감을 형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이를 통하여 가장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글을 좋아하고 가능하면 그렇게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참 쉽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자기의 형편과 상황이 커보이고 아무리 타인의 상황에 들어가려 노력한다해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겪으시고 그 상황 아래 내려 오셨습니다.

인간이 거치는 모든 과정을 거치시면서 우리의 연약함과 아픔을 공감하셨습니다.

인간처럼 연약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시되 가장 가난한 곳에 태어나셨고 인간의 육체로 할 수 있는 목수의 삶을 30년간 사셨습니다. 배고프고 저친 가난한 동네에서 나라를 잃어버린 아픔을 안고 자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제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그 외로움을 홀로 겪으셨습니다.

육체가 찢어지는 고난을 당하셨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누명과 고난 가운데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외침을 우리가 듣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바로 그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안다 그리고 내가 너희의 친구가 되어주마!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가장 좋은 친구이십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어떠함에 관계없이 우리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나를 외면한다 해도 나의 좋은 친구 예수님을 인해서 용기를 얻고 격려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무슨 굉장히 호사스러운 직업이어서 목사로 사는 것이 행복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의 친구로 나보다 먼저 이렇게 사셨기에 기쁨으로 살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이시면서 우리에게 또 친구로 살아가도록 격려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이제 예수님을 내 친구로 사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주변에 친구로 살아가보지 않으시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 기쁨이 충만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 행복을 나누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세상이 친구없음으로 힘들어 할 때 나를 찾아 오셔서 “샬롬”으로 인사하시는 예수님

부부조차도 서로를 기뻐하지 못할 때 나에게 오셔서 웃음을 주시는 예수님을 인해서 오늘 우리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윈저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