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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동안 한결같이

2008.01.06 03:08

폭우 조회 수:540 추천:20

23년 동안 한결같이
예레미야 25장 절~7절

25:2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고하여 가로되
25:3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십삼 년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25:4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25:5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주어 영원히 있게 한 그 땅에 거하리니
25:6 너희는 다른 신을 좇아 섬기거나 숭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을 인하여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25:7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샬롬!
2008년입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 위에 그리고 윈저사랑의교회 위에 늘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서로에게 인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2008년도에도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올 한해도 기쁘고 행복하세요!”

이미 송구영신예배 때에도 말씀드렸지만 올 한해 우리 교회의 표어를 “주님과 함께 달려 가는 삶”이라고 정했습니다. 소망하기는 성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피부 깊숙이 느껴지고 경험되시는 한해이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기쁘고 즐거우며 서로의 기쁨이 나뉘어 짐으로 이곳 만리타향 이국의 삶이 결코 외롭지 않고 즐거운 시간들이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중에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미 작년에 한번 소개 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책입니다. 예레미야서를 통찰하면서 쓴 책인데 참 많은 도전과 은혜를 주는 책입니다. 그 책의 일부분에 오늘 본문을 묵상하고 쓴 부분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란 목사님은 예레미야 12장 5절의 말씀을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12:5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네가 조용한 땅에서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요단 강의 창일한 물 속에서는 어찌 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바로 이러하지 않습니까? 안전하고 평안한 삶에서조차 힘들어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경험하지 못해서 허덕이고 있다면 어떻게 더욱 힘들고 어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 질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Run With the Horses"라고 책의 제목을 붙였고 이를 한국어로 “주와 함께 달려 가리이다”로 옮겼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말과 함께 달리는 하나님의 일꾼의 삶이기를 소원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책의 오늘 본문 묵상 중에 한 단어를 주목해서 바로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3절과 4절에 나오는 “부지런히”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하쉬켐’이란 단어인데 이 단어는 ‘세겜’이란 단어에서 파생되어온 단어입니다.
세겜이란 곳은 이스라엘의 지명중에 팔레스타인 산지 중앙에 있는 두 개의 산인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사이에 있는 곳입니다. 산지의 어깨에 자리하고 있는 이곳을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자주 중요한 지역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광야 40년의 여정을 끝내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을 그곳에 부르시고 양 쪽 산으로 두 개가 그룹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읽어 들이고 그 말씀에 응답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에는 그리심 산에 선 사람들이 “아멘”으로 응답하게 하셨고 만약 하나님의 언약을 어김으로 주어지는 환란과 저주는 에발 산에 선 백성들이 응답하게 하셨습니다.
이곳 세겜은 그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갱신하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곳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언약을 상기하고 새롭게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다듬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이스라엘의 열조들이 가나안 땅을 거쳐 들어오고 나갈 때에 주요하게 거치는 곳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 세겜이란 지명은 다시 또 다른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아침 일찍 당나귀의 어깨에 짐을 지우거나 스스로의 어깨에 짐을 지고 출발하는데 이 때 “하루 여행에 필요한 짐을 짐승의 어깨에 올려놓는다”는 동사로 세겜이란 단어가 확장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더운 나라여서 여행을 하려면 아침 일찍 떠나야만 뜨거운 햇볕을 피해 갈 거리들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겜이란 단어는 히쉬켐이란 단어로 변형되면서 “꾸준히” 혹은 “부지런히”라는 단어로 병형이었던 것입니다.

이 하쉬켐이란 단어가 바로 예레미야의 가장 중심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활동하는 그의 인생을 설명하는 단어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멸망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을 때에 그의 온 삶을 다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하여 애썼던 선지자입니다.
그 열심의 삶을 설명하기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열심”을 요구하셨고 그는 그의 삶에서 “꾸준함”과 "부지런함“이란 단어를 중심에 두고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는 이 단어가 자주 중요한 상황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레미야의 삶은 이 단어 “히쉬켐”이란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응답하지 않는 백성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외치는 선지자의 삶을 말입니다. 노아가 120년을 허공을 향해 외친 것처럼 허공을 향해 외치기를 40여년이나 했던 예레미야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굴하지 않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을 향해 전했습니다.


그 예레미야의 삶이 바로 우리 윈저사랑의교회가 2008년에 바라보고 따라갈 삶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이민의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공을 향해 외치는 공허한 외침처럼 지치고 힘든 일인지를 우리는 압니다. 스스로만을 위하여 내 앞의 일을 위해서만 살아도 시간이 없고 에너지가 부족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다른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삶은 그야 말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실감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부지런히 그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의 생애 가운데 한 복판에 자리한 지금 무려 23년이나 열심히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여 구원을 외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했던 예레미야였지만 그를 향해 돌아오는 것은 질시와 미움 밖에 없었습니다.

때로는 그를 가두는 권력 앞에서 숨어야 했고 때로는 그를 질시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막아야만 했습니다. 그의 얼굴을 치는 거짓 선지자가 있었고 이를 묵묵히 감내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선지자의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즉각적이고 분명한 응답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대로 되는 경험을 통해서 세상도 변하고 우리도 힘을 얻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걸까?” 또 “왜 하나님은 이렇게 악한 이들을 그대로 보고 놔두시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전하라고 했던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면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있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그 앞에 절망하기도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지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것을 신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5:1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년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그는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까지가 자기의 몫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그 일을 분명하게 이루시고 이 일을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을 아시고 찾으시는 분임을 확신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삶은 그래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5:3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십삼 년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25:4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그렇습니다. 23년 동안이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전했다 그러나 너희는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뿐 아니라 다른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냈으나 역시 너희들은 듣지 않았다는 것이고 오히려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그래도 나는 이 일을 계속했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분명히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너희가 여전히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너희를 멸하시고 이제는 용서 않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말을 확증하기 위해서 앞으로도 20여년이나 되는 시간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외치는 음성을 여전히 지키시되 바로 응답하시지 않고 이스라엘이 돌이키기까지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비록 지금 너희가 여전히 힘들고 지친 상황 가운데 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삶 가운데서 용기를 잃지 말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시기가 어느 때인지 알수 없고 또 우리가 이 땅에서 그 하나님의 응답을 다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이 일을 마무리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며 우리는 그 가운데 도구로 하나님의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하나님의 동행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의 삶이 매일 같이 시종 여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났고 그날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듣지 않는 백성들을 향해서라도 그의 입은 쉬지 않았고 그의 삶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외치는 음성을 기뻐하셨고 그의 신실함을 기뻐하셨습니다.
그의 일생은 어쩌면 변화 없는 생의 순간에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미리 경험함으로 날마다 새로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매일 아침을 일어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려고 할 때 왜 그의 마음에 회의가 없었겠습니까? 오늘은 그만 하고 싶은 마음이 왜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가 하루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신실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멸망한 이스라엘을 보면 어쩌면 그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단정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이며 이 세상의 평가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그가 바라본 것은 이 세상의 변화나 그들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사람들의 이러저러함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난 김순경권사님의 장례 예배 때에도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그 바라지 못할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며 우리의 마음에 심으신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는 너무도 분명하게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이성을 따라 자기에게 유리한 모든 것을 쫒을 때에도 그들을 책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의지하려고 할 때에도 그들이 애굽에 손을 벌려 구원을 요청 할 때에도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세상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찾고 그 일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내게 힘이 되는 이들을 내 곁에 두려고 애쓰며 그들의 신임을 얻기위해 나의 모든 것을 주기도 합니다. 정권이 바뀌면 하루 아침에 사설의 논조가 바뀌는 것이 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의 모습을 보면서 참 공무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의 사촌 형님도 한국의 외교통상부 팀장으로 무역관련 일을 담당하고 계시지만 만날 때 마다 하시는 말슴이 도데체가 위에 있는 사람들이 바뀌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의 기조가 바뀌고 방침이 바뀌어서 꾸준히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호소하십니다.
요즘 한국의 신문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정권이 바뀔 때가 되니까 그동안 가지고 있던 기조를 다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발맞추어 말도 바뀌고 논조도 바뀌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때로는 나의 입장도 바꾸고 나의 신념도 바꾸는 세상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 출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지는 유일한 잦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캐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잦대가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의 시간의 단위는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지금은 1초의 기준을 "세슘 133 원소에서 발생하는 특정파장 빛의 진동 주기의 9,192,631,770 배" 로 정하고 있습니다. 원래 지구의 자전을 기준으로 시간의 단위를 정하던 사람들이 그 분명한 기준을 정하기 위해 원자시계를 개발하였고 지금 우리는 그 기준을 따라 시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세상의 시간의 기준이 바뀐다해도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슴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변하지 않는 상황과어려움 속에서도 부지런히 자기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전하고 나서도 무려 20여년이나 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며 살다가 결국에는 이집트로 포로되어 가서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외쳤던 이스라엘의 돌아옴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고국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애가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3: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3: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3: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을 바라보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윈저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한해가 이와 같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 신실하심을 믿고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살아가기 위함임을 고백하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동행을 누리는 삶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삶을 축복하시고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찾는 자에게 찾아지고 그것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때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로 인하여 누리는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의 삶이 고단하고 힘겨우시다면 예레미야를 떠올리시면서 그가 고백했던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즐거움을 누리며 행복 가운데 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나누어 주는 성도님의 2008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