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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위해 갈까?

2008.03.04 10:27

폭우 조회 수:534 추천:15

이사야 6장 6절~13절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6: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6: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샬롬!
오늘도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인사하겠습니다. “당신 때문에 참 행복합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했던 이야기 중에서 한 가지를 가지고 말씀을 시작할까합니다. 지난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말씀을 하면서 전쟁에 나가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했었습니다. 혹시 그중에서 백제의 마지막 전쟁이었던 황산벌전쟁의 장군 계백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아십니까?
“황산벌”이라는 코미디영화로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상영했던 영화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은 많은 궁녀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국가의 위기 상황에 닥쳤을 때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사람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 많은 신하들도 왕의 명령을 따라 나당연합군과 싸우기를 꺼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 같이 도무지 승산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하들 뿐 아니라 그의 아들들인 왕자들도 이 싸움에 자기의 목숨을 걸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시시각각 전쟁의 위협은 높아지고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전쟁에 나갈 군대를 모으고 이를 이끌 장수를 세워야 할 그 때에 왕은 한사람 계백장군을 떠올립니다. 그는 용맹한 사람이었고 훌륭한 장군이었으며 왕을 위해 나라를 위해 기거이 자기의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왕은 계백장군을 왕궁으로 불러들입니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마주 앉은 왕은 장군에게 술잔을 건네면서 이런저런 저간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을 합니다.
“계백아! 니가 거시기 좀 해야것다” 무슨 말입니까? 니가 나가서 질수밖에 없을 것 같은 싸움이지만 이 전쟁을 이끄는 장수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나라안에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때에 자기의 목숨을 걸고 나가 싸움을 싸울 한 사람을 불러서 믿음으로 던지는 말이 바로 이것인 겁니다. 그리고 계백은 잘 아는 것처럼 자기의 가족들 조차 다 죽이고 나서 결연한 마음으로 마지막 황산벌 전투에 나서게 되고 그곳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하나 믿을 사람이 없고 하나님의 편에서 싸울 사람이 없을 때에 하나님이 한 사람을 부르셔서 그 일을 맡기고자 할 때 누구를 부르시겠습니까?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향해서 말씀 하시는 것 처럼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음성에 응답하시는 사람이 여러분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너와 여러분들이 아니 우리 윈저 사랑의교회가 이 시대말의 어두운 시기를 지나는 때에 한사람 하나님의 일꾼을 찾으실 때 불리워지고 기억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를 향해서 “요환아! 니가 좀 거시기 해야겠다.”고 말씀하시기를 바라고 그 말씀에 그러하겠노라고 응답할 수 있기를 또한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의 사명을 맡기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시는 장면의 시작은 이렇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다같이 1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날짜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기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하는 기록으로 그 때 당시의 시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누구입니까? 그는 남쪽 유다의 왕으로 그의 이름의 뜻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는 이름처럼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통치했던 선한 왕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려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문둥병이 걸렸고 이로 투병하다 죽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다의 마지막 선왕이었던 요시야처럼 웃시야 역시 하나님의 나라의 선한 왕으로 섬기던 몇 되지 않은 왕이었는데 그가 죽은 대에 그것도 하나님의 앞에서 실패해서 문둥병이 걸려서 그대로 죽고 마는 이때에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이고 희망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왕이 실패하고 죽은 것을 기록함으로 그 때를 설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시의 이스라엘의 현실을 적절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참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이었음을 우리는 봅니다. 1절에서 4절의 말씀입니다.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이러했습니다. 높이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주변에는 스랍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날개는 여섯이 있었는데 그중의 둘은 얼굴을 가리웠고 둘은 발을 가리웠습니다. 그리고 둘은 날면서 외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다른 말은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노래를 부를 뿐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분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하신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에게 있는 죄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죄가 있으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고 그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선 이사야는 어떻게 고백합니까?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렇습니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거룩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얻을 것은 죽음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의 죄 뿐 아니라 백성의 죄까지 함께 고백하면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정황이며 우리에게 알리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에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그의 입술을 정하게 하심으로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사야가 받은 사명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이렇게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장소를 우리가 돌아보면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인가 준비되고 하나님 앞에 설만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을 대에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런 우리의 생각을 뚜어 넘으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면 그들을 부르실 때에 하나님의 요구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사야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의 마음에 있는 상한 심령이며 죄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서보니 나의 죄로 인해서 도무지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할 대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연약한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나의 부족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도무지 설 수 없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그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당당하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설 수 있는가를 생각할 때 나의 신앙을 들먹이기도 하고 나의 의로움을 말하기도 합니다. 조금은 부족하지만 나의 겸손을 자랑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핑계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고 고백하기를 바라실 뿐이십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힘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허락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그 전에 알 것은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죄인 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하나님의 용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아니면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수도 변할 수도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바로 그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사모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나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은혜를 감격하여 고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나는 부족하고 못났을 찌라도 다른 이들 앞에 나의 모습이 그럴싸해 보이기를 원합니다. 내가 참 무력하고 한심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다 드러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심지어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조차 그대로 드러나서 하나님 앞에서도 그럴싸한 나의 모습을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그 구원의 풍성함을 고백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그렇게 신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스스로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분명히 알았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평생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였음에도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며 나는 빚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가장 악한 그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기 때문이고 그 거룩하심 앞에 눈이 멀 만큼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스스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도무지 그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비로소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안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한 일이 자랑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스스로가 밧세바로 인하여 범죄하였을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였고 그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위를 허락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어떠했습니까? 그가 깎이고 좌절하여 인생의 바닥에 있을 그 때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고 그로써 스스로가 얼마나 연약하며 부족한 존재인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과 동행할 때에는 얼마나 자신 만만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고난당하시고 죽음에 이를 것이라 말씀하실 때에도 그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모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고난당하시는 제판정에 멀찍이 따라가서는 예수님을 부인하되 세 번씩이나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비로소 예수님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탁을 따라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복음의 전파자로 제자로 삶을 살아갔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지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스스로의 연약함을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기실 때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부수어 트리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부수시기를 원하시고 내가 조금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는 없에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서 참 죄인인 스스로를 고백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나의 겉모습과 속 마음을 속이기를 잘 합니다. 속 마음은 죄를 범하고 나쁜 마음을 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좋은 사람인 것 처럼 보이고 대접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속 사람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 우리의 부족함과 죄인됨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고 그 거룩하심 앞에 넘어져서 도무지 스스로를 감당 할 수 없을 그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놀라운 구속의 감격을 체험할 것이고 비로소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고 형편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떳떳하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스스로를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만났던 거룩하신 하나님, 도무지 너무도 거룩하여서 인간의 눈에 뿐만 아니라 스랍들에게도 볼 수 없고 발을 가리며 날면서 창화 할 수밖에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고 나의 죄인 됨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서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기 위해서 우리를 가장 낮은 자리까지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가장 낮은 모습을 대면하고 하나님 앞에서나 우리 서로의 앞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서로를 향하여 나의 죄인 됨을 인하여 겸손히 스스로를 낮추고 나의 못난 부분을 고백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사야를 쓰시고 바울을 세우신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지난 한주동안 하나님께서 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네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여야 한다. 입으로 시인하고 그저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철저하게 무너져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가지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해야 한다고 요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윈저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고백이 이러하기를 원합니다. 저희 교회가 이 윈저에서 하나님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가진 죄인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만나 고백할 수 있기를 바라고 예배 가운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스스로를 겸손히 바라 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죽음의 이유인 우리의 죄인 됨을 바라보고 고백하는 이번 예배 일주일 한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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