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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나눌 친구

2007.12.09 02:11

폭우 조회 수:516 추천: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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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나눌 친구

사무엘상 15장 19절~29절

15:19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15:20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없이 가니 오늘날 어찌 너로 우리와 함께 유리하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15:21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15:22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 종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15:23 온 땅 사람이 대성통곡하며 모든 인민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15:24 사독과 그와 함께한 모든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더니
15: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15:26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15: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으로 돌아가라
15:28 너희에게서 내게 고하는 기별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룻터에서 기다리리라
15: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유하니라

샬롬!

오늘도 옆에 있는 분들과 함께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이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참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간이 많으십니까? 아니면 난 참 외롭다고 느끼시는 시간이 더 많으십니까? 물론 그 시간의 비례를 가지고 우리의 행복을 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삶이 참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이기에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힘이되고 용기가 되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인생의 가장 절망의 순간에 함께 함으로 그 절망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느닷없이 이런 본문을 가지고 묵상하게 되었느냐하면 유독 요즈음 저에게 닥치는 상황이 친구나 위로자에 대한 것이고 또 우리의 삶에 힘이되어 줄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묵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번주에 저의집 아이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주제인 즉슨 자기에게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런던에서는 자기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자기의 생각을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곳에 오고나서 Forest Glade School에서는 그런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는 것입니다. 이미 지난 봄에 한번 겪었던 일이어서 참 새삼스럽게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녀석에게 닥친 문제이겠지만 또 한편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보편적으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만날 수 있는 어려움 중에 하나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녁늦은 시간에 혹시라도 마음이 허전할 때 저도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연락처를 뒤져서 전화를 하곤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떠 올려봅니다.

왜 이렇게 전화할 친구 찾기가 쉽지 않은지요. 나의 마음을 스스럼없이 나누고 또 위로해줄 친구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을 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기도함으로 그 외로움을 이기란 말을 하지만 가끔은 그런 말들보다 한마디 위로해주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의 존재가 절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히 이민의 땅에서 살다가보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의 마음을 알아줄 친구를 필요로 하는지요.

지난 몇주전에 나의 친구 나의 예수님이란 제목으로도 말씀을 나누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때에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이 모두 나를 외면해도 나의 편에 서서 나를 지지해주실 그 친구로 예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은 그야말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험악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가 왕이되기전에도 참으로 험악한 시절을 보낸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자기의 주변에 다윗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왕위에 올라 승승장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처지가 참으로 처량하기 그지없습니다. 바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궁전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맨발로 건너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왕궁을 떠난 것도 모자라 급히 떠나느라 신도 신지 못하고 도망하고 있는데 거기에 시므이라는 베냐민지파 사람이 돌을 던지고 띠끌을 날리면 저주하고 있는 상황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절망의 순간인지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 할지라도 이런 고난과 절망을 지나면서 한탄하며 외로와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때의 마음을 시편3편을 통해서 극명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3:2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천만 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꺽으셨나이다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둘러치려는자가 많음을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거기에 자기를 조롱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또한 고백합니다. 너를 지키는 하나님이 어디있느냐고 말하기도하고 너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스스로도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거하게 되면 가장 극명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외로움 아니겠습니까?

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외로움이고 나의 처지가 혹시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며 그로 인하여 이 고통과 외로움이 치료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이렇게 노래한다 할지라도 그가 얼마나 절망에 빠져 있는지를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처지를 원통해 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저주하는 그 저주에도 대항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맞기고 스스로의 길을 겸허하게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다윗과 같은 시기를 보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 꼭 다윗과 같은 극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이런 외로움과 씨름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완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지혜를 따라 이 땅을 다스릴 존재로 지음 받았고 또한 그 권세를 누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자리를 잊고 죄를 범하므로 먼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로써 인간은 끊임없는 갈증을 느낄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연약한 그릇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외로움을 이기도록 하시기 위하여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지만 범죄는 그 연합을 분열시켜 놓았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하고 외로워하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홀로 완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서로를 의지함으로 완성되는 존재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완성되는 우리의 관계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불완전해졌고 그로써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러한 인간의 돕는 베필됨을 또한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통해서도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다시 완전하게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형제가 연합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시인은 노래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을뿐 아니라 우리의 사는 이 세상을 또한 완전하게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죄가 이 모든 것을 불완전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성경학자들은 방향과 구조의 문제로 이야기합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구조는 완전한 것이지만 이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방향성이 죄를 향하도록 함으로 불완전한 죄악의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형성하는 것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온전하게 사용한다면 아름다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성은 그것을 자기의 편의대로 사용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는 환경들은 모두 불완전하고 불편하며 외로운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 연합함으로 완전해 질 수 있는 관계가 서로의 필요를 위해 상대를 사용함으로 불완전하고 불편한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윗이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기의 적이된 아들에게 있는 아히도벨이라는 모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의 모략을 실패하도록 도우시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31절에 이 사실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 때 다윗에게는 친구 후새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절망의 순간에도 홀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그의 곁에 친구를 두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친구들이 나옵니다. 먼저는 가드 사람 잇대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드 사람으로 그의 백성들을 데리고 다윗에게로 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도망할 지경에 이르게 되자 그를 떠나지 않고 신실하게 다윗과 동행하기를 자처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먼길을 떠나는 다윗을 위해 잇대라고 하는 신실한 사람을 보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의 형평이 결코 다윗을 따라갈만하지 않았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잇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5:21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잇대의 마음이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에게 신실한 이에게 남겨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다윗이 하나님께 행했던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그 뒤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여호와의 궤는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세우신 왕임을 상징하는 증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함께 가지고 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전에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5: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15:26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자기의 처지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의 다윗의 마음은 시편 3편에 나와 있는 시처럼 절박합니다. 그러나 결코 자기의 뜻으로 이 절망을 헤어 나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절망의 상황을 돌이키시고 나의 방패가 되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군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지경에서 여호와께서 만군의 적으로 나를 보호하실 것을 구하고 그들이 나를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 나를 세우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은 주님께 있다는 확신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렇게 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면을 살펴본다면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시되 하나님의 역사로 하셨지만 그의 주변에 신실한 친구들을 보내주심으로 그 절망의 순간을 넘길 힘을 허락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하신 친구이십니다. 그러나 그 친구되심은 하나님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되 우리에게 붙여주신 사람들을 통하여 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친구가 되어주며 서로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묻는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흡사 우리가 나를 위로할 친구가 도데체 누구입니까하고 묻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아프고 절망적인 이에게 누가 친구가 되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우리가 친구가 필요하다고 외칠 때에 하나님은 누가 절망가운데 빠진 이의 친구가 되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 간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한 친구들을 보내주심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일방적으로 하나님 처럼 우리의 친구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 줄때 우리는 비로소 신실한 친구들을 통하여 위로를 얻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묵상해 보았다면 오늘은 그 친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통하여 주어진 위로를 함께 나누고 또 서로를 세움으로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는 도구로 서기를 소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지만 그 신실하심을 통하여 다윗에게 끊임없이 친구들을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절망을 이길 힘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절망에서 신음할 때 우리 옆에 있는 성도들을 통하여 또 형제들을 통하여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친구가 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옆에 있는 우리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주는 친구가 되어서 서로를 세움으로 도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신실한 일을 감당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이민의 땅에서 우리는 자주 친구 없음으로 외로워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의지하여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줌으로 우리가 서로의 사랑의 의지하여 이 인생의 터널을 평강으로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안식일에 병고치는 문제로 이야기하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14:2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1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14:4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14:5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14:6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여기에 고창병이라함은 다른 말로 수종병이라고 부르는 것이어서 몸속에 물이 계속해서 차는 부종입니다. 이 병은 너무도 갈증을 느껴 계속해서 물을 찾지만 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오히려 갈증만 더해지는 병입니다. 그 마신 물은 몸에 차서 그것이 병이 되는 것이지요.

어쩌면 현대인의 삶이 아니 인간의 삶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무엇엔가 갈증을 느끼고 욕망을 느끼지만 우리가 가진 것으로 채울 수 없고 오히려 더 깊은 갈증을 경험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 병자를 고치심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갈증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갈증을 치료하는 것이 어쩌면 안식일의 올바른 의미일 것입니다.

타락 이후로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갈증을 해결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심으로 서로의 갈증을 채워주는 관계를 맺을 것을 부탁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이구요.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는 갈증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날에 우리가 서로의 갈증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통하여 채워줌으로 서로의 위로자가 되어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로썬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험한 세상 가운데서 죄악으로 갈증을 느끼는 우리에게 서로 받은 은GP의 단비를 나누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른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그대 지치고 외로울때
두눈에 눈물 고일때
닦아주고 싶습니다
당신의 옆에서
고난이 오고 친구가 없을지라도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나를 눕힐겁니다.

그대 좌절하고 길거리에 있을때
그래서 저녁이 오는게 너무 힘들때
편안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당신의 일부분이 되고 싶습니다.
어둠이 들고 고통이 엄습할때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나를 눕힐겁니다.

계속 항해를 해요.
당신의 시간이 반짝이고 있어요..
모든 당신의 꿈은 그 길 위에 있고
얼마나 빛나는지 보아요..
친구가 필요하다면
바로 뒤로 다가가서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When you're weary feelin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

When you're down and out when you're on the street
when evening fall so hard
I will comfort you
I'm take your part oh when darkness comes
And pain is all ar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

Sail on silver girl sail on by
your time has come to shine
All your dreams are on their way
See how they shine
oh if you need a friend
I'm sailing right behind
Like a bridge over triubled water I'll aese your mind.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예수님의 힘을 의지하여 우리 서로에게 다리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줌으로 한 교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행복일 수 있도록 또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뉘어지고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나를 위로하실 하나님을 찾을 뿐 아니라 나에게 주신 사명을 가지고 우리 주변에 나의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찾아가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 가정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