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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9

2007.12.26 17:07

폭우 조회 수:479 추천:27

에베소서 2장 11절~13절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사도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로 인한 구원의 은혜가 중요한 관심사이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그 문제를 들고 쓰기 시작해서 오늘 본문에 이르도록 이야기를 연장해가고 있습니다.

그 구원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은 결국은 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것이 엇습니다.
그래서 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바르게 인식하는 첫 걸음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보지 못하는 가운데 소망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장에서 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에 대하여 진술하였고 2장으로 넘어와서는 “그러나”라고 하는 접속사를 써서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2장의 핵심 단어는 이 “그러나”라고 하는 접속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2장은 계속해서 두 가지에 대한 강력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의 대비가 선명하게 인식되어지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구원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보통 무엇인가에 대하여 분명하게 의미를 드러내고자 할 때 이 대비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마치 흰색은 검은색이 주위에 있을 때에 더욱 선명하고 분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내가 말하고자하는 내용에 대하여 두 가지의 분명한 대비를 통해 설명하면 훨씬 간결하게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도는 그래서 2장 내내 두 가지의 선명한 대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먼저 1절에서 7절까지의 대비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통해서 변화되어지는 변화를 설명하고 또 이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지를 설명하면서 구원받기전의 인간의 상태에 대하여 분명하게 진술하는 것으로 2장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4절부터 그런 상태에 있던 우리가 구원을 얻음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극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가지는 극명한 변화에 대하여 말하고자 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저 약간의 변화가 아니며 우리의 삶에 조금 유익이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전적인 변화이고 완전한 변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는 그러므로 그런 극명한 변화는 우리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각인 시켜줍니다.
약간의 변화라면 우리가 어떻게 이루어 볼 수 있지만 현격하고 불가능한 변화를 통해서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이 구원을 얻은 우리가 결코 자랑하지도 못하며 또 그것으로 서로에게 있는 행위를 재어보거나 비난하거나 하지 못하도록 하심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최초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인간을 창조하신 그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으로 선한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이전에는 전혀 그 일을 할 수 없는 존재이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인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재창조 되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일을 두고 “집업소명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의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본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므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도는 11절부터 또다시 한 번의 분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대비입니다.
이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코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좁혀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이방인인 우리에게 있어서 이 간격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얻는 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불가능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뭐라고 말합니까?
그때에는 너희가 1)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2)이스라엘 나라 밖에 사람이었다.
3)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이며,  4)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5)하나님도 없었다.

이것이 우리의 상태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은 별개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신 말씀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이 땅에서 온전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소망이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소망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요.
다른 것은 없어도 소망이 있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감옥에서 인생을 힘겹게 산다고 해도 이 감옥을 나갈 소망이 있다면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형수로 살아가는 삶이 참으로 힘겨운 것입니다.
만약 사형 언도를 받고 감옥에 갇혀있다면 매일 매일 새벽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힘들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도 하루를 맞이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부르는 부름에 문을 열고 나서면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나 죽음을 향해 가야한다는 사실을 인간을 참으로 인정하기 힘들어 합니다.

우리의 상태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죽음을 향해 갑니다.
언제라도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에 이 세상의 문을 열고 나아가면 이제는 영원한 형벌만이 우리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는 삶에서 온갖 쾌락을 누리기를 소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상태의 우리들이 이제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구원을 나오도록 우리를 인도하셨지만 실패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버린 유대인들과 또 그 언약조차 받지 못한 이방인인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본연의 목적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3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전에는 멀리 있었지만 이제는 가까워 졌다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멀었습니까?

예! 하나님으로부터 멀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보면 성전에서 가장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러개의 뜰과 성소로 되어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을 집접 만나는 곳은 단 한 곳 ‘지성소’입니다.
그리고 그 지성소 바로 밖에는 성소가 있고 이곳에는 제사장들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 갈 수 있는 유대인들의 뜰이 있고 그 밖에는 이방인들의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부로 나가면 성전 외벽 밖에 우리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뵐 수도 없었고 그분 앞에 나가지도 못하여 그분과 동행한다는 것은 꿈도 꿀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덯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왕의 지성소에 들어가 영화롭게 변하리”

히브리서 4장 16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 성소 밖에 이방인의 뜰에만 들어 갈 수 있었던 우리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뵈옵고 만나며 그분과 동행하고 함께 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뿐 아니라 그 보좌 우편에 앉히신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도록 하시는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하여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동행 할 수도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 40년동안 모두 죽음을 당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빼셔서 당신께 예배하고 제사하는 일에 전무하도록 하셨습니다.
비느하스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보시고 그들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레위인들도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한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입었던 대 제사장들은 어떠했습니까?
사독의 계열로 하나님의 성전을 섬길 대 제사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님이 오시기전에는 그 제사장직을 로마에게서 돈을 주고 사고 팔기까지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그들을 지성소에서 만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사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야 말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동방의 조그마한 나라 그 땅에서 우상을 섬기는 백성으로 살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조선의 땅에서 산에 산신령을 섬기다가 우연히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고 기대나 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에 선교사로 들어왔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가 한국에 들어와 만난 조선인들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전혀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뵈지 않는 조선의 마음
                                                                                                                         언더우드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이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셨고 그 말씀을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 민족에게 성령을 부으셨고 하나님의 나라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곳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진술이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 진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인 것입니다.
구원은 샬롬의 완성입니다. 엔샬롬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죽음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삶의 정황에서 우리는 불안하며 두려워하고 힘겨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 그 하나님과 가까워져서 동행함으로 우리는 비로소 샬롬을 누릴 수 있게된 것입니다.

우리는 평안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불안한 요소들이 다 사라지면 우리는 비로소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삶에서 결코 모든 불안한 요소가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미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를 자꾸 세뇌시키는 것입니다. 이것만 없어지면 이제는 불안이 없어지고 평안이 찾아 올거야...
그 위로를 가지고 스스로를 지탱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샬롬과 엔샬롬의 차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이지 결코 우리의 삶에 있는 환경의 어떠함에 따라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샬롬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주셨던 “평강”은 바로 비로소 우리 가운데 동행하시고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그 막힌 담을 허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샬롬을 누리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샬롬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인정해 주실 때에 우리에게 결코 모든 문제의 해결을 제시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동행과 지지를 보여주십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하나님의 지지와 동행이 비로소 우리를 평안으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입니다.

평화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바닷가 절벽위에 있는 둥지위에서 폭풍우가 몰아치고 그 세찬 비바람 속에서 엄마새의 품에 있는 아기새를 그린 그림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안이 아니겠습니까?

“세상 다 날 버려도 주 예수 안버려” 이 고백을 할 수 있음이 평안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자기를 지지해 주는 사람으로 인해서 용기를 낼 수 있고 또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 지지는 나의 어떠함에 관계없이 변하지 않고 주어질 때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러한 지지를 잘 얻을 수 없습니다.
가장 친한 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또 뒤통수를 맞아서 나락으로 떨어진 경험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주 우리는 나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능해 졌다고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동행으로 누리는 평안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 함께 하심의 놀라운 비밀을 깊이 묵상함으로 나의 구원을 만끽하고 또 그 깊은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구원은 바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 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전혀 같은 편일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쪽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어서 그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평안을 누린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습니까?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습니다.
성경은 예외 없이 우리의 구원을 언급하실 때에 이 그리스도의 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다고 고백합니다.
구원은 결코 이 그리스도의 피, 혹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표현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지난 모든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의 피”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다면 훨씬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으심을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자존심이 상합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실패한 죽음인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구원했다고 하니까 인정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들은 좀 더 나은 능력이나 힘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피를 흘리셨는데 그 피가 나를 살렸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단순하게 내 생명을 살리려고 예수님의 생명을 주었다니까 인정하기 힘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 능력이 있으니까 그 말씀을 듣고 내가 그 말씀을 이해함으로 믿음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좀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 수준에 맞추어서 구원의 방법을 주셨으면 내가 그것을 인정 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오히려 나와 관계없이 그냥 내 생명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맞바꾸었다니까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사도의 진술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여전히 그 수준에 있지 않습니까?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에 나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의 피로 인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으로 인하여 얻을 것은 묵상할 것은 무엇입니까?
아 나의 구원이 참으로 은혜이구나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도무지 구원 받을 만하지 못한 존재인데 지금 하나님과 가까이 있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 고백이고 내가 하나님의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것 밖에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나를 당신 편이라고 말씀해주셨구나 아 그래서 나는 평안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 사이에 이 풍성한 고백과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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