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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20

2008.02.27 18:02

폭우 조회 수:493 추천:20

에베소서 강해 20

에베소서 2장 14절~16절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오래간만에 에베소서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요.

지난 에베소서의 주요 요점을 한번 점검해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에베소서를 시작하면서 에베소 교회에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기를 ‘믿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해서라고 1장 19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이것을 알게하기 위해서 바울은 여러 논증을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의 원 상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의미를 바로 아는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우리의 상태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죽었던 상태 이미 생명이 없는 상태 더 이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아니면 절대로 변할 수 없ㄱ는 상태가 우리의 상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존재가 이방인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것은 유대인도 실패한 하나님의 백성 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크심을 아는데 분명한 이유가 됩니다. 2장 11절로부터 이야기하는 우리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죽었던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작정하시고 허락하신 율법의 방법조차 받지 못했던 우리에게도 동일한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14절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4절을 시작하는 앞에 ‘왜냐하면’이란 말을 넣는 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존재였고 죽었던 존재였는데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말씀하신 선언의 이유를 14절에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화평이십니다.

“샬롬”이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듭해서 예수님이 화평을 위하여 오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피로서 화평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화평을 예수님을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에게 화평을 주시고자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믿는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영원히 들어왔던 죄와 죽음으로 인하여 평화 없는 삶 -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없으므로 가질 수 없었던 평화 - 으로부터 화평을 허락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고 그 능력으로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20, 21절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님이 또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속성이 평강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그 속성을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룰 수 있는 자리까지 인도하시고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여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구원에 대하여 오해하기를 구원은 무엇인가 좋은 일을 이루거나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좋은 것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출발점은 분명히 긍정적인 곳에서가 아니라 부정적이며 낮은 곳이어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가 앞으로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거나 더 좋은 것을 누릴 것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죽음 가운데 있었던 우리를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부정적인 자리에서 인도하여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구원의 본질인데 자꾸 우리는 무언가 구원으로 인하여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기 때문에 구원을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으면 이전보다 잘살고 건강해지기를 소원합니다. 이전보다 행복해 질 수 있는 축복이 있어야 구원받은 것이 효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조롱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믿어도 별 다른 것이 없구만” 아닙니까?

별로 부자가 되지도 않고 건강해지지도 않고 오히려 가난하거나 아픈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자기들이 보기에는 더 약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구원을 오해한 곳에서 출발한 오류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종교는 다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잘 믿으면 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축복이 무엇이냐는 측면에서 구원을 접근한다면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겠지만 세상적인 입장에서 잘되는 것이라면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은 우리의 죽음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생명으로 옮기는 것을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으로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웠기에 이것이 구원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다만 세상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구원이 화평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의 죄가 불열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 조화로움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이 세상을 분열시켰고 이로써 세상을 서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분열을 두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나뉨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나뉘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로서 두 번째 분열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 서로간의 분열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미워하고 시기함으로 둘이 나뉘어 싸우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현 상태는 “자기중심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은 다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세상이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말을 할 때에도 나에게 이익이 될 때 그렇게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언제 서로에게 좋은 말들을 합니까? 다른 이들에게 나의 덕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닙니까? 의도적이든지 그렇지 않든 지간에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향하여 사랑의 말을 내기가 쉽지 않은 존재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지난 한 주간 동안 누군가를 만나서 처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 때에 먼저 좋고 선한 이야기를 하였는지 아니면 그 사람의 나쁜 점을 이야기 했는지 말입니다. 또 그 사람을 좋게 이야기 할 때에 진심으로 그 사람을 인정하고 사랑하기에 하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이라도 그러했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수양을 통해서 선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근본적으로 그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화평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지 못한 인간이 서로에 대한 화평을 이룬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단체들과 모임들이 이 세상의 평화를 이야기하고 또 외치지만 근본적으로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능력과 선함을 이야기하고 법이나 규칙을 지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결코 역사상 어는 것도 성공하지 못했음을 우리는 봅니다.

민족이 민족을 대하여 나라가 나라를 대하여 단체가 단체를 대하여 대립하지 않고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사는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의 것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 없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마틴 부버는 자신의 책 ‘나와 너’에서 이 세상은 나라는 존재와 대응하는 너라는 존재로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이미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구분되는 속성을 가진 인간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순간 그들에게 자기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졌습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사단의 유혹이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이 위대하다는 유혹이었고 스스로가 신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이었습니다.

이후로 인간은 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위대하다는 생각과 내가 노력하면 무엇인가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이 우리를 덮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보지 못하면 영원히 우리는 화평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우리에게 화평을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고 이로써 우리가 다시 인간 서로에게 화평한 존재들이 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하여 죽음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서 결코 서로간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게 되기 전에 결코 서로에 대하여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 처럼 온전할 때 비로소 서로에게 평화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높이는 자만심을 가지고 결코 서로에게 화해하는 평화의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화평한 관계의 사람이라는 것은 결코 그저 싸우지 아니하는 정도의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이며 그로 인하여 즐거운 것이 바로 화평입니다.

화평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할 때 더욱 분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나누기를 즐겨합니다. 오늘 바울이 또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화평치 못함을 서로 사이에 막힌 담이 있었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11절 이하의 언급의 연장선상에 있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담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때로 우리가 서로에게 담을 쌓는 경우를 만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화평에 이르지 못하였고 옛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담을 쌓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율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소에 다가올 권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예배하러 갈 때에 이스라엘의 성전에는 여러 담들이 있었습니다.

제일 밖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고 그 안쪽에는 여인들의 뜰이 있고 또 안으로 들어가면 백성들의 뜰이 있고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구별에 대하여 상징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벽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별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되지 못함으로 죽음에 이른 존재들인데 그들을 살리시고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것을 은혜로 받지 않고 특권과 구별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함으로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깨닫기를 요구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그 은혜를 구별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다 해도 그것을 오히려 스스로를 높이는 도구로 사용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담을 허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담을 허셨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의 벽을 허셨고 모든 인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에 반응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인간 서로의 담을 허셨습니다.

서로 간에 쌓은 담을 허심으로 서로가 다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전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계명을 지키고 그로써 스스로가 의로운 존재인 줄 알았더니 이제는 그 자기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백성, 그 자녀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하나님과 화평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특권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의 열심도 역시 특권이거나 서로를 구분할 무엇일 수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자주 이 구원을 은혜로 받지 않고 남과 나를 구별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지요. “나는 주일성수를 하는데 저 인간은 왜 안 하나”, “나는 교회 봉사를 이렇게 하는데 왜 저 사람은 봉사를 안 하나?”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슴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아래 하나님의 백성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벽을 허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서로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그저 우리의 머리에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 질 때에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그 삶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나아갈 바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히신 것은 이로써 우리가 서로 시기하고 다투며 구분하는 것을 벗어 버리고 함께 사랑함으로 화평하는 관계를 가지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15, 16절에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예수님의 육체로 폐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방편으로 주셨으나 우리 서로를 구별하는데 사용되었던 율법을 폐하시고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지음 받은 새사람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안에서 새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는 이전에는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20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와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안에는 구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구별할 아무런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을 뿐이므로 이것은 우리로 자랑할 것이 없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권면하기를 야고보서 2장에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2: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교회는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는 결코 구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서로가 봉사하되 서로의 눈 앞에서 함으로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이 화평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람을 사랑함으로 화평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을 바로 아는 삶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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