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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32 / 엡 3:14~19

2008.05.29 11:00

폭우 조회 수:483 추천:22

에베소서 강해 32

에베소서 3장 14절~19절

3: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3: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바울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를 원하고 그 충만하게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 바울의 기도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였고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그래서 그 가운데 구원의 비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의 내용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누리고 성장하며 세워져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마도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과 지금 우리들의 위치가 비슷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먼저 구원 받은 이후에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우리의 외면의 모습은 건강이거나 물질이거나 환경의 문제이겠지만 바울의 기도는 거기에 있지 않고 우리의 속사람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문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곳의 건강을 강하게 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사람의 강건함은 또한 우리들이 만나게 될 고난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위기를 만나기 때문인데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함으로 그 위기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그들에게 닥칠 많은 위기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속사람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기에 구원과 관련되어진 그리스도의 임재가 아닌 것은 분명하였고 따라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므로 그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아는 것에 이르기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계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동행은 그저 구원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풍성을 누리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은 “믿음으로” 가능해 진다고 하는 사실도 도한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이 땅에서 소망하는 근거이고 또한 사는 기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서 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듣고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기 깨달아 알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서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거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알 수 없으면서 그분의 눈으로 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되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그 후에 우리가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충만하신 데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좀 복잡하고 여러 가지 관계들이 얽혀 있습니다. 그중에서 첫 번째 기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면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을 알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을 우리 가운데서 충만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바울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사랑의 첫 관문인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의 풍성함을 알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이러한 기도의 출발점은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그 충만하신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그러한 능력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것들을 에베소 교회가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우리가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누리는 것은 그저 구원 받았으니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그 풍성함으로 나아가는 성장이 있어야 하고 이는 기도함으로 얻어질 수 있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경건의 훈련을 통해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우리의 모든 출발점이자 힘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사랑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흔히 이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박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면 맞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 사랑의 주체는 우리여야 한다고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은 바로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뿌리가 박혀지는 것이고 그 터가 굳어지는 것이라고 보기 보다는 그들이 사랑함으로, 그들 속에 있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뿌리가 깊어지고 기초가 굳어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충만하신 곳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지금의 출발점에 우리가 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를 사랑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자리에 굳어지고 바라가는 풍성함으로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세상이 사랑이라는 말에 감동하고 또 우리의 삶 역시 사랑이라는 말과 많이 과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체 없는 사랑을 생각하고 그 사랑에 메여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서나 혹은 많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 만나는 사랑은 때로는 그 실체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만을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그들의 사랑을 나에게 감정이입해서 적용하는 것일 뿐 그들의 사랑의 대상이 우리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참 재미있는 구경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에서도 싸움 구경만큼이나 사랑하는 이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있습니다. 그들이 애타하는 감정이나 그들의 절절한 감정을 옆에서 보노라면 때로는 같은 마음으로 기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유치함에 웃음 짓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많은 위험 요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함정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니므로 얻어지는 사랑이라는 말의 함정 말입니다.
그 안에서 사랑하는 대상이 걸린 병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 아님으로 얻어지는 것이거니와 그 열악하고 아픈 환경이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격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그런 생각이 아니라 분명한 대상을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온갖 좋은 미사여구로 장식된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분명한 대상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구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뿌리박히고 터가 굳어질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이 여러분 속에 거하시지 않으면서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 아닙니까? 마치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 나오는 사랑처럼 여러분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도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까?
감정은 있으나 현실은 없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행동은 수반되지 않은 사랑 말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믿음처럼 우리에게 사랑이란 단어도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까? 모호하고 불분명하지만 무엇인가 좋은 마음을 들게 하는 단어인 사랑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말에는 집중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집중해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어쩌면 우리의 사랑이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점검되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우리의 생활에서의 희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에 성경공부하면서 한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지만 저는 청녀 시절부터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 수 있는가?”하는 고민이 엇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예수님의 사랑을 갚으면서 평생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고 그래서 내가 살았으니 이제는 내가 그 사랑을 갚으면서 살아야 갰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한일서 3장 16절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이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제가 이 말씀을 읽고서 그래 바로 이 말씀이로구나 하고 감격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내 목숨을 버리면서 사랑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아십니까?
청년시절부터 저는 길을 가면서 늘 주의를 기울이면서 걸었습니다. 가능하면 찻길 가까이로 걸었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무슨 기회겠습니까? 누군가가 교통사고를 당할 위기에 처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내 목숨을 걸고 그 사람을 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것을 기대했는지요. 그러면 조금은 제가 받은 사랑이 갚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아직 그 기회는 한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기회는 있었습니다.
강에서도 바다에서도 별로 하지도 못하는 수영 실력을 가지고 남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무모함이 저에게 있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공명심이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한마디고 빚갚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이 참 수준 낮은 믿음인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한구석에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에 참 가난한 수준인 것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거하셔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좋아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까 나도 그래야지는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출발한 마음이 그분의 기뻐하시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사랑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것이어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가운데 사랑이 풍성하여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여서 마치 큰 나무가 깊이 뿌리박아 서서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계속해서 자라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으로 점점 성숙해가고 자라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뿌리박고 있는 땅이 바로 “사랑”이라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에 우리의 뿌리는 박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자양분으로 하여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이 풍성해지고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에너지가 됩니다. 어떠한 것도 우리에게 이만한 힘을 줄 수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저의 어리석고 가난한 사랑은 아마도 작은 어려움만 만나도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풍성해지면 그 마음을 알아 그 사랑을 닮아 가면 우리는 분명 더 풍성하게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그 마음 자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머니가 의무감으로 자식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가슴으로 자식을 품는 순간 그 자식을 향한 사랑이 우러나오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나의 모든 것을 그 자식을 향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그 마음을 알게 되면 그를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이 닮아야 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은 산상수훈을 기록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배워야할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그 사랑의 온전함처럼 우리의 사랑도 온전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결코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그렇지 않은 자를 미워하시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인과 악인을 향해 똑같이 구원을 베푸시고 또한 비를 내리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도 그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가 뿌리박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분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닮아 가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그 풍성함을 누리는 첫 걸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 삶에 대한 가르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가복은 12장에는 예쑤님을 찾아온 서기관 중 한 사람과의 대화를 쓰고 있습니다.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12: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과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는 길목에서 분명히 만나게 될 것은 바로 이 사랑에의 요청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무가 된다면 사랑하면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아주 많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기는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고 구분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넉넉함의 자리까지 말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뿌리 박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가지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뿌리없는 그리스동닝이 될지도 모릅니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무너지는 그런 집을 지은 사람들 처럼 구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지도 못하고 그 마음으로 살지도 못하며 그분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지도 못하는 가나나한 삶에서 그치는 것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직도 구약의 율법 시대에 사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신앙은 여전히 그 의무감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것일까요?
역사상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의무감이나 빗을 갚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도 그분을 사랑했기 때문에 목숨을 걸 수도 있었고 또 남을 사랑 하 룻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이들을 향해 어떻게 사랑으로 용서하고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눈이 예순님의 시선으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 풍성한 지경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땅에 뿌리박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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