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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21

2008.03.14 11:25

폭우 조회 수:471 추천:28


에베소서 2장 13절~18절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장 11절 이하에서 계속해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지고 연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었음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던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것을 해결하셨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우리 서로가 원수 되어 담을 쌓았던 것을 허무셔서 우리로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또 이 사건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다가옵니까? 지금의 우리에게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입니까?
오늘 본문 가운데 17절과 18절은 성경의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진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진술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멀리 있던 이방인들에게와 가까이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 번째로 예수님의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성육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고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리에게 평안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줄곧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신(가르치신) 평안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즉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화평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좀 이상하게 표현되었지만 예수님이 이 당에서 가르치신 평안은 그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불안 없이 사는 평화로움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인간의 불안과 고통이 사라진 평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평안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은 이것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단 한 삶들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7절의 말씀은 분명하게 두 종류의 사람들을 구분하여 각각에게 예수님께서 평안을 전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여 말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오늘의 문맥을 따라가 보면 계속해서 바울은 이 둘을 구분하였다가 이 둘을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굳이 이 둘을 구분하여 말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구원에 멀리 있고 한 사람은 거의 구원을 받을 만큼 가까이 왔다고 하면 그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 둘의 차이는 전혀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디쯤에 도달했느냐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들어가기 전에는 모두 죄인일 뿐입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모두가 죽어서 영원한 벌에 떨어질 죄인일 뿐이지 그중에 어떤 단계의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가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이방인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저들보다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담을 쌓았습니다. 이방인의 뜰을 만들고 그들은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은 그 안에 백성의 들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들은 그 밖에서 하나님께 제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둘이 모두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죄인일 뿐이지 그 둘 사이에 구        분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은 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는 죄인임을 배우게 할 도구여서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죄인 됨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아가도록 하셨는데 그들은 실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평 하는 은혜가 필요했고 이방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평 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어느 누구도 의인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평화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통하여 주어지는 구속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이 스스로를 향하여 하는 고백을 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5)
그렇습니다. 바울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이 없으면 죄인일 따름입니다. 죄인과 의인 그 사이에 어디쯤은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느냐 아니면 아직 구원을 받지 않았느냐 밖에 없는 것이지 이제 거의 구원을 받아갑니다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면 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다른 어떤 것이 나를 구원하리라 생각 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의로움이나 선행이 나를 하나님의 나라에 인도해 줄 것이라고 믿을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서만 거기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 받았다면 내가 누구보다 먼저 구원 받았다고 자랑하거나 아직 구원받은 것이 실감 나지 않고 여전히 내 속에 연약함이 있어서 나는 구원받지 못하 srjt은 아닌가 고민하지말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됨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하여 길을 내셨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구원받은 우리가 할 것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들고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 가십시오. 나의 아직 벗지 못한 죄의 모습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만약 교만하여 다른 이들이 나의 마음에 평가되어지거나 그들의 삶의 모습이 나의 눈에 거슬린다면 역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우리 구원받은 이들의 할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 진술이 이야기 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평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평화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화평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한 힘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고 또 그 힘을 기뻐했습니다. 그것이 마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기쁘고 즐거웠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에 최초의 아담은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였고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그의 찬양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그 마음에 죄악이 들어 왔을 때에 인간은 또 다른 힘에 의하여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죄의 영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마틴 로이드존즈 목사님은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물은 큰 두 가지 힘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데 하나는 달의 인력이고 또 하나는 지구의 중력이다. 그래서 두 가지 힘이 서로 끌어당김으로 바닷물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과 죄의 영향을 받으므로 둘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 이것이 인간이 겪는 고통이며 혼란이자 평안 없음이다.’
인간에게 두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평화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으나 그 안에 죄를 들이므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서로 싸우는 동안 인간을 고통 가운데 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1-25절 말씀입니다.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하나님의 영향으로 그의 전적인 주권 아래만 거하는 것을 평안이라 한다면 그와 함께 죄의 소욕 가운데 거하는 것을 우리는 평강이 없는 엔샬롬의 상태 즉 지금의 인간의 상태라 할 것입니다.
죄가 우리 속에 있으므로 어떤 누구도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계획할지라도 우리의 육신은 자주 죄의 소욕을 따라 스스로를 위하여 일하고 싶어 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일을 하고 싶어 하며 나아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평화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우리에게 있는 화목의 권면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화목의 힘을 얻고 나아가 이로서 우리가 서로 화목하여 평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평안이 없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57: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57:20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마음속에 죄가 진흙처럼 떠다니므로 그 속에 있는 죄가 삶에서 드러나 흔들리기에 그로 인하여 그의 삶이 평화 없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평안은 우리가 노력하므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수양함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참선을 한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면 온전한 평안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노력함으로 우리 속에 있는 죄를 가라앉힐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므로 언젠가 다시 우리의 삶이 흔들리면 여지없이 그 죄로 인하여 고통하고 혼란스러우며 평안 없는 삶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주시는 평강,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얻었다면 우리의 삶에 있는 수많은 죄의 요소들과 고통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평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곧 이르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누릴 것이지만 이 땅에서의 삶 가운데서도 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히 누릴 수 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이며 매 순간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일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평안 한 것은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는 것일 테고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기꺼이 누리는 삶을 산다는 것일 겁니다.
저는 이 말을 기억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우리의 삶이 이러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진정한 평안 가운데 거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평안을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이를 계획하셨으며 나아가 이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18절 말씀은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전 인격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얻고 이를 각 개인에게 알리시고 믿게하시며 또한 이로써 그 구원을 향하여 이끄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아버지 되신 하나님에게로 나가가게 되는 권리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선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이며 이로써 우리가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이 안에 어는 것으로도 우리의 능력이나 힘이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곳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처럼 삼위 하나님의 동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죄가 이처럼 크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이들의 변화입니다. 성경은 자주 하나님과 아버지를 혼동하여 사용합니다. 이것은 그 하나님의 구원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 친밀함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혹시 아직도 하나님이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에서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저 나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시는 분 그래서 우리와 함께 이 땅에서의 삶을 동행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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