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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가운데서

2008.04.20 01:11

폭우 조회 수:469 추천:23

민수기 11장 16~23절

11: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 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 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11:17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
11:18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 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것이라
11:19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 일만 먹을 뿐 아니라
11:20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 개월 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함이라 하라
11:21 모세가 가로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 개월 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11:22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11: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샬롬! 오늘도 말씀을 나누기 전에 서로에게 인사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광야라고 하는 곳은 성경의 구약과 신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있는 출애굽 당시에 지나온 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단시키시며 가르치시는 특별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선택한 족장들이 훈련받은 곳이 이미 광야였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살도록 하신 곳이 바로 가나안 땅이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도 의지할 것이 없는 광야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과 야곱이 살던 땅도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또한 광야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기도하신 곳이 바로 광야였고 바울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그를 다메섹 광야로 보내셔서 삼년간이나 연단을 시키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의 위협을 떠나 숨었던 곳도 바로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이 직접 그의 자녀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의지할 곳이 없을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의 인도와 임재하심을 간구하는 곳이 바로 광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런 의문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는데 왜 아직 우리는 여전히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걷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기 까지 하셔서 당신의 자녀 삼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삶의 터전에서는 왜 광야와 같은 참담한 현실에 처해 있느냐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구원 받았으면 우리에게 있는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마땅할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시고 이 세상을 여전히 주관하고 있는 분이신 것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불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자로 만드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처한 힘겨운 환경을 해결할 능력이 없으신 분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질병을 낫게 하실 수 없어서 우리가 아프고 고통 가운데 거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광야란 것입니다.


오늘 분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불평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의 불평은 아마도 이러한 것에 기인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상태에서 구원하셔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세겠다고 해서 다라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압제하던 애굽의 바로를 무너뜨리시는데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들을 무력하게 만드셨습니다.
홍해를 만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큰 바다를 가르시고 그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너게 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들은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로 전에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장면을 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위엄 가운데 시내 산에 임재 하셔서 무려 40일간이나 모세를 만나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허락하셨고 그 지시를 자라 성막을 만들고 언약궤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 성막과 언약궤를 보시고 광야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불평할만한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능력을 보이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셔서 이곳에 이르게 하셨는데 왜 우리가 먹을 것 때문에 고생하는 광야에 여전히 있느냐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에 가지고 나온 음식들이 떨어졌습니다.
그들이 먹을 물이 없는 광야에 서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반석을 깨뜨려서 물을 마시게 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평할만한 상황에 있습니다.
그들의 불평이 무엇입니까?

11: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11: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하나님이 하늘을 여셔서 그들의 일용할 음식인 만나를 먹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꿀 섞은 과자와 같은 만나라 할지라도 매일 먹으니까 이제 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신데 왜 좀 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왜 아직도 여기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셔야 마땅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기독교를 향해서 외치는 음성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다면 왜 아직도 너희 사는 형편이 그 모양이냐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주눅이 듭니다. 그러게 왜 그럴까? 아니면 또 다른 여러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합니다.

아마 지금 이스라엘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구원을 인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하늘에서 매일 아침마다 만나가 내려서 오늘도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인지는 알지만 좀 더 풍족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는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 아닙니까?
내게 있는 불편을 다 해결하셔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여봐라 할 수 있는 축복을 풍성하게 주시면 진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겠습니다. 이런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응답하십니다.
하늘에서 만나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추라기 떼를 보내셔서 그들이 질릴 때 까지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이 힘들다고 불평하는 모세를 향해서도 칠십명의 사람들을 세워 그들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하나님의 응답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인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질리도록 먹는 그 메추라기 고기가 아직도 그들의 이빨 사이에 끼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1:33 고기가 아직 잇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11:34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왜 우리는 구원 이후에도 여전히 광야 길을 걸어야 합니까?
왜 구원을 받았는데도 우리의 삶은 아직도 고통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확실합니까?

이스라엘은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걷지만 그 하나님이 내리시는 만나를 매일 먹으면서 살고 있지만 그들의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아 이 땅으로 온 이상 여전히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 하나님의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우리의 일용할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종국에 그들을 광야가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곳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풍족을 누리며 축복을 누리며 살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저 지금 처한 환경 속에서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삶을 바라 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애굽에서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때는 비록 노예로 살았지만 자식을 나아도 살릴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았지만 먹을 것을 넉넉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넉넉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여러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지금 이렇게 만나만 먹는 것보다 더 좋았던 것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은 여전히 세상에 다른 이들을 향해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만 아직은 축복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아닙니까?
누구에 비해서 세상에 잘살고 풍족한 재벌들에 비하니까 나는 아직도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평안하게 지내는 것 같아 보이는 다른 이들을 보니까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은 견딜 수 없는 힘겨움이라는 것 아닙니까?
 지금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온데 간데없고 그 구원으로 인해서 나의 실제 삶이 달라져야 겠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는데 왜 이깟 문제 하나 해결해 주시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내가 손이 짧아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냐 어디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1미터나 되는 메추라기 떼를 보내셔서 하루 이틀이 아니라 널어놓고 말려서 한 달 동안을 풍족하게 먹을 만큼의 고기를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아마 원하신다면 그들이 사는 땅을 변화 시키셔서 온갖 향신료나 양념들도 얻을 수 있도록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들에게 주신 구원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허락해 놓으면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구원이 하나님께서 온 것임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의 생각이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사사기를 통해서 읽습니다.
우리의 삶도 또한 그러한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다는 사실을 인해서 감격하지만 곧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여전히 이 세상 가운데 거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축복을 간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3장 14절부터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그들은 구원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을 경험했던 첫 사랑의 뜨거움을 간직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어떠합니까?
이제는 살만하다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책망하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나에게는 금도 있고 아프지 않으며 곤고하지 않다고 하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첫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를 즐겨합니다.
나에게 축복하시면 제가 하나님을 정말 신실하게 믿을 것입니다.
저에게 엄청난 물질의 축복을 허락하시면 제가 진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수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또 때로는 물질을 얻었지만 그들이 물질을 얻은 대가로 하나님을 떠났던 것을 우리는 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풍족하면 그것을 누리고 만족하느라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쉽니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풍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는 어떤 때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어서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할 때는 언제인가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도무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의 순간일 때 그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들을 광야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광야 같은 일생 길을 간다고 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을 부르는 사람 만드시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에이 저는 풍족하고 넉넉해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잘 섬길 자신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의 무지를 깨우치시기 위해서 탕자처럼 가진 재산을 탕진하도록 놔두시기도 하지만 결국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방탕하도록 허락하시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윈저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광야 같은 인생길에 있을 때에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이들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들을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광야로 부르셔서 매일 일용할 것을 얻도록 기도하며 그로 인하여 매일 우리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기가 먹고 싶다고 투정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우리를 그대로 놓아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기를 원하셔서 지금 우리를 광야에 두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고 그 백성과 자녀된 우리들을 인도하셔서 결국 하나님의 나라 그 풍요롭고 넉넉한 곳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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