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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습니까?

2008.02.06 11:20

폭우 조회 수:457 추천:17

요한복음 3장 1절~8절 말씀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샬롬!
오늘도 말씀 나누기 전에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참 보기 좋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오늘의 설교 제목은 “살아있습니까?”입니다. 여러분은 살아있습니까?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시느냐는 표정들이신데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증거를 대기 전에 그저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찬양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다른 측면에서 다시 한 번 질문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정말 살아 숨 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학적인 의미로 살아있다는 것은 반대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죽었다는 것을 판단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는 “심장정지설”이고 또 하나는 “뇌사설”입니다. 심장정지를 죽음의 증거로 보는 것은 말 그대로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기관의 정지를 죽음이라고 보는데 그 기관 중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관인 심장이 그 작동을 멈추는 것으로 죽음을 판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장이 정지한 인간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심장이 정지해도 그 심장에 충격을 주어서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하지만 그 정지의 시간이 일정시간을 지나고 나면 다시는 어떠한 이유로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이때 의사들은 죽음의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인데 심장은 정지하지 않았으나 뇌가 그 활동을 멈추었을 때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장기중에서 뇌는 인간을 살아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래서 이 뇌가 자기의 기능을 잃고 본연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면 이를 뇌사 상태로 표현하고 이를 죽음이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뇌사 상태에서 수년을 지내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사례가 있기 때문이고 뇌사 상태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다른 신체의 기관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종종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두 경우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본연의 상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때 우리들은 그 삶이 죽었다고 표현하고 이를 살아있는 사람의 범주에 넣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는 그러하지만 인간은 좀 더 복잡한 인격체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문학의 여러 장면을 통해서 인간의 살아있음에 대한 증거들을 표현하는 장면들을 봅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일본 영화에서 주인공은 죽은 자신의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묻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너와 멀어지겠지만 내가 걸어가는 발자취에 네가 기억된다면 너는 내 가슴속에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피곤을 느끼는 것이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목사님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 어떤 이야기가 되었든지 우리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의 삶의 방향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순간 분명해지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늘 회지의 칼럼에도 썼지만 우리는 살아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저 숨 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향해 살아감으로 우리의 삶의 이유와 증거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 갈 때에 그 삶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선”이며 그 바른 목표를 향해 올바른 방법으로 달려간다면 그것을 “미”라고 부르는 시인의 음성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그저 살아 있는 것에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선한존재”이며 그 바른 방향을 향하 바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그 살아있음에 대한 또 다른 그러나 너무나도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앞에 이야기하는 그 살아있음의 이유가 다 우리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유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세인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 관원이었습니다. 바리세인이며 유대 관원이라는 신분은 그저 관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분은 율법에 정통한 학자라는 것이고 나아가 많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가르치고 그 기준을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한 낮에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밤에 은밀하게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은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그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가 바리세인이요 관원인데 어떻게 보면 당시에 가장 사회적인 이슈의 대상인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부끄러운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 그중에서도 율법에 정통하다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또 경계하고 있는 마당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그 마음에 풀리지 않는 갈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둘러가면서 질문을 합니다.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지자인줄을 압니다. 그래서 이런 여러 표적을 행하시는 줄 내가 압니다. 이렇게 애둘러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발언으로 만남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접근에 예수님은 그의 중심을 보시고 단도 직입적으로 그의 심중에 의문을 향해 말씀합니다.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전혀 연결되지 않는 대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왜 이 늦은 시간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당신에게 왔는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의 심중에 바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고 그의 백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온 이유가 다름이 아니라 그가 유대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정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있다는 것에 증거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그저 숨쉬고 살아 가는 것이 아니고 그저 나의 생계나 삶을 유지하는 인생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갈증 없이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니고데모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는 적어도 그의 삶이 율법을 지키고 배우는 것으로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느꼈고 그로 인한 심한 갈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거나 알면서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저 내가 아직은 죽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삶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으면서 나의 삶이 풍요롭고 부요하기만을 바라면서 사는 것이지요.

현대인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많은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이유와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저 숨  쉬니까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 있고 그 지으신 목적이 있는데 나는 그 사실에 대하여 명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인해서 힘들어 했고 그래서 느지막한 시간이라도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적어도 유대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키신 분입니다.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권위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시면서 그동안 유대사회를 지배하던 인식을 깨뜨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예수님을 찾아오면 어떤 실마리를 얻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갈증이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저는 먼저 오늘 여러분과 제게 이러한 갈증과 열정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세상에서 그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갈증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찾아 나가는 용기와 열심히 우리에게 있기를 말입니다. 나의 어떤 환경이나 자존심이 아니라 그저 나의 삶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알기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세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비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어쩌면 별 감흥없이 오늘 본문을 읽고 지나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거듭남의 비밀에 대하여 조금 더 깊은 묵상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거듭남이 아니라 진짜 삶의 증거를 이야기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다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숨 쉬고 살아가는 것은 일차적인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더 태어나야 진정한 삶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참으로 적절합니다. 예수님에게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그것으로 살아있는 것이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장성하였는데 이미 장성한 사람이 다시 죽어서 어머니의 태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한반 말입니까?
그의 생각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나란말입니까? 혹시 다른 어떤 비결이 있다면 들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율법의 어떤 기준을 대고 그것을 충족하라고 하셨다면 그는 예수님에게 감사하며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실제로 예수님은 또 다른 젊은 관원이 와서 물었을 때에 그렇게 대답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에게는 그 중심을 보셨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의 비밀을 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맞다 네가 아는 것처럼 인간은 이미 한 번 어머니의 태속에서 생명을 얻어서 이 땅에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한 번 더 태어나야 되는데 그 때에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육체로 난 것은 육체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모두 육체를 따라 어머니의 태속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태어남은 다른 동물의 태어남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숨 쉬고 이 땅에서 살아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다시 한 번 성령으로 태어나면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다시 태어남의 조건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그 다시 태어남의 조건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물과 성령입니다.
물은 아마도 인간의 죄를 회개하는 회개의 세례를 이야기 하는 것일 겁니다. 인간이 육체로 태어나면 가지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죄의 요소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물로 씻음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죄 씻음의 시간에 인간에게 새로 주어지는 영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중요한 하나의 행위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는 장면입니다.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 이미지를 예수님은 오늘 다시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타락함으로 다시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없게 됨을 인해서 인간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 넣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단어인 “성령”을 인간에게 불어 넣어 주심으로 그가 살아 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미 한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8절에서 10절을 찾아보겠습니다.
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하나님이 살리신 이스라엘이 뼈와 육체는 있으되 여전히 죽어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이 생기는 오늘 본문의 성령과 같은 단어입니다. 성경이 성령으로 쓰고 있는 이 단어는 바로 “바람”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생기”로 번역되기도 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살기 위해서는 이 성령이 우리 속에 불어 넣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육체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육체가 살아있지만 그들 속에 성령이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 죽은 것입니다. 그 죽은 이들에게 숨이 성령이 들어가면 비로소 그들이 숨쉬고 살아있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성령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장은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성령으로 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불어 넣으심 성령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성령은 어떻게 우리게 오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우리게 임하십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오는 것은 우리가 임의로 알수도 없고 도 조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사람들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 불어오는 바람을 인식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오는 것을 알 수 없지만 그로 인하여 사는 사람은 그 살아있음과 성령의 존재를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성령을 우리가 찾고 또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기를 소망한다면 내 속에 성령이 있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성령이 없어 죽어가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있기를 구해야 할 것이고 그로 인하여 함께 살아가기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 난 사람은 그 삶이 영적인 것이 됩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며 그 성령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이 시간 한번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성령을 알고 그분의 존재를 인식하며 그 성령이 내 속에 계신 것을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말입니다.
그럼 어떤것이 성령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우리가 숨쉬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내가 숨쉬기 불편한 상황을 우리는 잘 인식합니다.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는 심장이 힘들어 하고 너무 건조하고 더운 방에서 자면 우리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존재를 느끼는 것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함께 하심을 인식하려고 하면 그 기뻐하시는 환경에 거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때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슴을 가까이 할 때 호흡의 편안함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풍성하게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이 기뻐하는 말을 할 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입술에서 성령의 기뻐하시는 말이 나오지 아니하고 인간의 말이 나온다면 경계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시간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나의 호흡과 같이 계심을 기억하고 나의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는 분이심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은 우리가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존재를 깊이 인식할 때 가능해집니다.
시편의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밤마다 나의 심장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심장이 뛰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우리를 살계하신 성령이 우리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자리를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함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자기 코에 있는 호흡을 의지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말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 앞에 나의 존재를 내려놓고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분명 성령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계십니까?
그렇다면 성령을 인식하고 그분을 가까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 삶에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말하고 행동하며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하여 나의 생명이 의미 있는 것이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발 한번만 우리의 삶이 성령에 의지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나의 생각과 계획이 성령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 성령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라 인정받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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