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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27

2008.04.25 10:06

폭우 조회 수:435 추천:24

에베소서 3장 8절~13절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자기를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면서 한편으로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지금까지 전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비밀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이제껏 계속해서 외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 풍성함인지를 설명하는 데에 자기의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진술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의 설명이었다면 바울은 이제 자기의 입장을 통해서 그 은혜를 설명하고 그 비밀의 풍성함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 첫 진술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하나님의 사도가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들에게 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바울이 이야기하고자하는 그리스도의 풍성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비밀과 풍성함을 알고 누리고 있습니까?
바울은 자기의 모든 힘을 다해 알리고 싶어 하는 그 비밀과 그 풍성한 은혜를 우리도 알고 있다면 아마도 지금 우리의 무력함이나 연약함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요?

바울은 그 비밀을 조금 더 확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바울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그 풍성함을 알게 하신 것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또 그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뿐만 아니라 하늘의 권세들에게도 다시 말하면 천사들에게도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던 때부터 이미 예정하셨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천사들조차 알지 못했던 비밀을 하나님이 교회에 알리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비밀은 천사들이 알고 싶어서 몸을 구부려 듣고자 하는 놀라운 비밀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 먼저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며 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역사들을 연구하면서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연구하였지만 그 누구도 분명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고 그 목표를 알 수 없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이 세상을 향한 계획을 알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만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순환론적인 역사인식일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라고하는 유명한 역사학자에 의해서 이야기되어진 역사인식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역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환적으로 발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발전의 원동력인 창조적인 소수를 이야기함으로 우리에게 희망과 격려를 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의 역사인식은 세상의 목적도 발견하지 못했고 의미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라는 입장입니다.
H.A.L 휘셔라는 학자의 주장처럼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이 세상에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것은 부조리의 세계라는 인식과 문학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인식은 지금도 유효해 보입니다.
알베를 까뮈에서 지금 폴 오스터라는 작가에 이르기까지 허무와 무의미는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세 번째는 그 반대로 낙관론입니다. 이것은 조금은 오래전 역사인식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에 의해서 그 기술과 노력에 의해서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이고 이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낙원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일정부분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인식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속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고 온전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육도 과학도 정치나 제도도 이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지금 우리의 인식 아닙니까?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돌아보면 우리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것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인 것입니다.

이 상황을 향해서 바울은 나는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고 그로 인해서 이 세상의 존재 이유와 그 목표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우리 교회에게 알려주었고 그것을 전하는 역할을 교회가 맡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비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었고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던 때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분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때에 이미 이 세상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그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나 창조는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발견하고자 하니까 알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진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까 우리는 그 목적을 알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 목적을 분명하게 알려주신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창조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하나님은 새 창조라고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5)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이미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의 이유나 목적을 보았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계획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도록 하게 하시는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세상으로 남아 있지 못하고 인간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인간을 다시 구원하셔서 창조의 본연의 목적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셨고 또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이루시는 것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입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천사도 알지 못했던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비밀을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오늘 이 사실을 힘주어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경험을 비추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이 비밀의 계획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냐 하면 다메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기 위해 달려가던 저기를 불러서 하나님의 사도로 삼으실만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굳이 죄인중의 괴수인 바울을 불러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신 이유가 이방 가운데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진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래서 바울에게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놀라움은 그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풍성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바울에게만 그런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비밀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함을 알고 누릴 수 있습니까?
혹시 아직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고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한번만 눈을 감고 묵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인간을 하나님의 원래 창조하신 본래의 선하고 의로운 존재로 서로 사랑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선한 사람이 있지만 때로는 사랑이 풍성한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이루지 못했는데 하나님의 구원은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어떻게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나의 죄를 해결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살기위해서 우리에게 선결되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인으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었고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큼 온전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해를 섬기기도 하고 달이나 별을, 혹은 소나 개구리를 섬기고 딱정벌레를 섬기기까지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발 섬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고 친밀히 동행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산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놀라운 비밀이며 풍성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저 은혜 가운데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고 그로 인하여 나의 죄를 대신 지시게 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비밀인지를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일에 대하여 핏대를 세우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구약의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인도에 목말라합니다. 기적을 행하셔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을 보면서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축복을 약속하듯이 나에게도 나타 나신다면 나는 얼마나 충성되이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하나님은 구약에 나타난 이적과 기사들 보다 더욱 풍성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또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도 그 은혜의 풍성함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뵈었지만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축복을 받았으되 백세나 되어서 아들을 얻었고 또 평생을 유리하며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의 놀라운 이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에서 살았고 광야에서 죽어 갔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였지만 자주 주변의 국가들의 침략으로 고통 받았고 하나님을 떠남으로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요.

더욱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함은 바울의 다음 진술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우리 그 안에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간다는 것이고 담대히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변화를 이야기 합니다.
먼저는 담대히 라는 단어와 관계되어 진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과 다르게 하나님 앞에 나아 갈 때에 담대히 나아 갈 수 있습니다. 담대하다는 것은 거절할 것을 걱정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아갈 때에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거절치 않으시는 하나님께 낭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보혈의 피로 양자 되었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아들을 거절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거절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당당히 나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 하나님께 나아갔던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사람들이 아니고는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을 따라 일 년에 한 차례씩 대 제사장만이 하나님께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 갈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매일 언제라도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자격을 얻었으니 그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라고 바울은 진술합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나의 죄인됨이 변하지 않았으나 그런 나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와 상관있는 것이라고 믿는 믿음을 의지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이 이 믿음과 은혜의 풍성함 속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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