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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신뢰함으로

2008.05.14 10:18

폭우 조회 수:435 추천: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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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2장 10절~17절

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42: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두었고
42: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42: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42:15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42:16 그 후에 욥이 일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42: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샬롬!

오늘도 함께 예배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어머니날을 기념하고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가정주일로 기념하여 예배드립니다. 우리 서로에게 인사하겠습니다.

“행복한 가정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로, 아버지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오늘은 가정주일인데 욥기로 본문 말씀을 정하고 함께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왜 굳이 욥기 말씀이냐 하면 성경안에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했던 이들이 많지 않아서입니다. ㅁ루론 그 자녀 디모데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였던 유니게와 로이스도 있고 기도함으로 아들을 얻었던 기도의 어머니 한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의문이 드는 것은 참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지 못했던 경우들을 자주 접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의문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분명한 지도자였던 사무엘도 그 자신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선지자였고 그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상3:19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자녀들은 그리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사무엘상 8:3에는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백성들은 하나님께 왕을 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왕이었던 다윗이나 솔로몬은 어떠했습니까? 그들 역시 자녀들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양육하지 못했습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배반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서로 죽이기도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러했고 이삭도 그러했습니다. 일전에 살펴본 야곱도 그의 자녀들로 인하여 고통 당했음을 보았습니다. 어디 이런 사례를 성경에서 이들만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도 동일한 문제들을 발견합니다. 부모의 믿음을 좋으나 자녀들은 엇나가는 경우를 살펴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서 저의 고민은 출발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의 자녀를 이렇게 방치해 두셨을까? 그들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은 것도 아닐텐데 그렇다면 나는 과연 나의 자녀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는 어떠하십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고난의 사람 욥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당대의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받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신실했는지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1장은 그에 대한 삶을 잠간 보여주고 있습니다.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1: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1: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우리중 누가 이렇게 하나님의 평가를 얻을 수 있고 그 행사를 의롭게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만큼 온전한 삶을 살고자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를 두고 시기하는 사단에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자주 욥기를 통해서 그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범죄하지 않았더니 축복을 받았다더라는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런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완전하게 자녀들을 양육하였음에도 그 자녀들이 다 젊어서 죽은 슬픔을 겪었다는 사실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잘 믿었던 경건한 신앙인이요, 흠잡을 데 없는 다복했던 큰 부자였습니다. 7남 3녀를 가진 아버지요, 당시 목축업으로서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룻동안에 전 재산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자녀들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몸마저 문둥병 같은 병을 얻어 마을 입구 한적한 곳에 나가서, 머리끝부터 다리까지 악창이 나서 진물이 흘러 기왓장으로 긁으면서 잿더미위에 앉아있는 비참한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욥기서 전체에는 하나님이 욥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욥이 갑작스런 재앙을 만나고 흉측한 질병으로 고난을 당한다는 소식이 친구들 사이에서 퍼졌습니다. 욥은 외로웠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위로 받기를 원했습니다.

세 친구들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회개하지 않은 죄 때문일 것" 이라고 단정합니다. 친구들의 충고에 욥은 자기는 무죄하다고 변명을 합니다. 친구들은 상처 난 곳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욥의 상처를 깊고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무슨 일로 나와 다투시는 지를 좀 알게 해 주세요. 주님이 손수 만들었던 이 몸은 학대하시면서도, 악인들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고 형통하기만 하니 그런 것이 주님에게 무슨 유익이 됩니까? 욥은 울부짖었지만, 하나님은 계속 침묵하셨습니다. 친구들은 계속해서 욥을 비판하고 무엇인가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기 때문 일꺼라면서 죄를 회개하라고만 합니다. 자기들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몰아붙입니다.

마침내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직접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요. 당신을 드러내서 알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엄중하게 묻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바닷물이 땅의 모태에서 나올 때 누가 문을 닫아서 바다에 가두었느냐?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침을 명하여 동이 트게 해 본 일이 있느냐? 죽은 자들이 들어가는 문을 들여다 본 적이 있느냐? 세상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나 할 수 있느냐? 빛과 어둠이 있는 그곳에 가는 길을 아느냐? 눈을 쌓아둔 창고, 우박 창고를 들여다 본 일이 있느냐? 내가 환란 기에 쓰려고 간직해 두었고, 전쟁 때 쓰려고 준비해 두었다.

해 뜨는 곳에 가 본적이 있느냐? 동풍이 불어오는 출발점에 가 본적이 있느냐? 천둥 번개가 가는 길을 낸 이, 비를 내리는 이가 누구냐? 누가 물을 얼게 하느냐? 네가 북두칠성의 별 떼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느냐?

네가 사자의 먹이를 계속하여 댈 수 있느냐? 굶주린 사자새끼의 식욕을 채워줄 수 있느냐? 까마귀 새끼가 먹이가 없다고 조를 때 그 까마귀 떼에게 먹이를 주는 이가 누구냐? 들 사슴이 새끼를 낳는 일을 본 일이 있느냐? 말에게 강한 힘을 준 이가 너냐? 네가 말을 메뚜기처럼 뛰게 만들었느냐? 독수리가 하늘 높이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일이 네 명령을 따른 것이냐? 내가 유일한 해답이 아니냐?"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이 모든 말들은 세상을 창조하고, 주관하는 자가 누구냐? 욥이냐! 하나님이냐! 한번 대답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가운데 있을 때 그 상황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고통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그 문제를 맡길 때 우리는 그 고통스런 상황까지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분명하지 않은 대답을 하십니까?

이미 두 번째 대답인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도무지 그 답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그 첫 번째는 2절에서, "주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고백입니다. 이제야 저는 주님이 누구신지 알겠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심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며 천지를 지으신 분이심을 분명히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드신 세상을 보면서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하고 이것이 얼마나 오묘하고 놀라운 일인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39장 40장을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도무지 풀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운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는 지금의 지구가 태양에서 2,3%만 멀리 떨어져 있거나 가까우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멸종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이처럼 완전한 것입니다. 그 궤도가 잠간만 벗어나도 또 힘이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우리는 이 땅에서 살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신 이래로 지금까지 온전하게 유지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둘째로, 욥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지혜로우신데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하고 불평하고 무지하게 불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 모든 고난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일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욥기38장 3절과 40장 3절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대답이 바로 4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욥이 말할 테니 주님이 들어주시고, 욥이 주님께 물어 볼 텐데, 주님이 욥에게 알게 하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욥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충분히 말씀하였사오니 이제 욥이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줄기차게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나라들의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자연 환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구러나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슴을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고 살아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저는 자주 하나님의 모든 대답은 이미 성경안에 분명히 나와 있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리석어서 그 대답을 조금 더 나에게 자세히 풀어주기를 요청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면 내가 기대하고 있는 대답을 듣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욥은 비로소 5절 말씀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J. I. Packer 목사님이 말했듯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압니다. 불신자들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지식적으로 알고 정보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일대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해서 하나님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이 발견한 것처럼, "하나님은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학문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연구해서 이해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서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머릿속에서 알게되는 분이 아니라 삶에서 고백하게 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비로소 이후에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보면 욥이 회개한 후에 그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잃었던 재산을 2배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자녀들도 10명의 자녀들을 다시 주셨습니다. 건강의 복을 주셔서 140년이나 더 살면서 손자 4대를 보게 하셨습니다.

Happy Ending으로 행복한 여생을 갖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이 고난 투성이의 세상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무한히 위대하시고, 모든 상식을 초월하여 무엇이든지 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신지를 올바로 알려면 하나님이 위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극히 무력하다는 것도 또한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인간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는 아무것도 안보이고 우리의 손에는 그 어느 것 하나 안 잡히지만, 그러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항상 해결해 줄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이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안다면, 우리가 겪는 문제들은 잠시 잠깐 동안의 것들이며, 모든 문제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주관아래 있다는 것을 알도록 도와주십니다. 욥이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이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우리의 믿음이 이만하면 족하다고 생각해도 어쩌면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가정이 내 생각대로 평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모든 문제가 내가 온전하지 않고 연약하며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고 나의 가정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욥이 그의 말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으로 그가 겪은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욥은 하나님을 만났기에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많은 재산 때문도 아니요. 새로 얻은 아내나 자녀들의 축복 때문도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머리로 알았다가 그의 삶에서 고백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평안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칼럼에서도 썼듯이 인생은 긴 싸움입니다. 필연적으로 그 삶의 여정에는 고난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때로는 알 수 없는 역경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어쩔 수 없이 닥치게 되는 고난과 절망으로 인해 우리가 죽게 될 것만 같은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의 그 삶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고백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 나고 지는 풀과 꽃들도 입히시는 분이신데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왜 관심없이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우리 가정이 그 관심 아래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온전한 힘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때로 환란을 당하더라도 그 안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부모가 그 상황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함으로 평안을 얻고 승리하는 삶을 살 때 가능할 것입니다.

욥기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슴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면 족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나의 가정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이 지금은 희미할지라도 그의 나라에 들어가면 명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다만 지금 이당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 하나님을 삶에서 고백함으로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라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윈저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듯이 우리 자녀들의 인생도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 가정 역시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그 손 아래 있는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잘 알지 못하고 힘겨울 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그로 인하여 풍요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다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자녀들을 사랑할 때에 그 조건이나 어떠함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선하고 악함을 가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식이기에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은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를 보살피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지금은 조금 실패하고 어려운 곳을 걷고 있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는 한 우리는 절대 실패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뭐라해도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당신의 자녀의 삶을 살고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가정이 끝까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시간이 아니라 멋진 기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삶에서 고백하면서 그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신실하게 그 앞에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가정들이 되기를 바라고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만은 기억할 수 있도록 양육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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