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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8 / 1: 7-10

2007.06.27 17:08

폭우 조회 수:425 추천:26

에베소서 강해 8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인간에 대한 헌사..
영화 “파워 오브 원”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PK는 아프리카너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영국계백인인 아프리카너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곤 난 이후의 성장과정을 통해 독일계 아프리카너들과의 갈등 그리고 흑인과 백인과의 사이에서 성장의 진통을 겪습니다. 그리고 흑인인 줄루족 노인으로부터 권투를 배우고 이를 통해 흑인을 하나로 화합시키고 흑백간의 갈등을 화합시키는 “레인메이커”가 되어 간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청년때에 이 영화를 보고서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한스짐머”라고 하는 사람의 음악을 통해서 흑인들 특유의 화음과 전통의 소리에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악기가 아닌 순수한 인간의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에 대한 감동이었을 것이고 한 인간을 통해서 화합을 이루어 가는 희망에 대한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때 느꼈던 것은 감동뿐만이 아니라 안타까움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굳이 흑인들의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는 “레인메이커”가 바로 흑인이 아니라 백인 소년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줄루족의 전설에 나오는 화해의 사람이 왜 백인 소년으로 형상화 되어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과 백인 중심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한계를 보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영화의 또 다른 한계를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생각입니다.

현대 사회뿐만 아니라 인간은 끊임 없이 인간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인간은 결국 이 세상에서 돌파구를 찾을 것이고 또 그들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힘이 있고 그 중심에 인간다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 역시 인간은 악하며 이 세상은 결국 “디스토피아”를 향해 달려가는 세상이라는 시각보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각을 가지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고 그 희망을 위해 고민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에게 발견 할 수 있는 희망의 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하나님의 구속이 없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 노력이 자주 실패를 향한 길이 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는 착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과 착하지 않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슬프고 인정하기 싫은 이야기이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은 그러합니다.
오늘 에베소서를 쓰고 있는 바울은 이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는 구속을 받았습니다.
그 구속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우리는 구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속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죄인의 자리에서 구원을 받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그 구속을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착하게 살려고 애를 쓴다고 해도 우리는 스스로의 삶에 구속을 이룰 힘이 없습니다. 때를 따라서 우리가 보기에 착하고 정직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비교적 이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착하고 정직하며 선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할 수는 없습니다.
그 힌트를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입니다. 그 복음을 듣고 그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산다 할지라도 스스로의 열심을 가지고 그 의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평가하거나 다른 이들을 평가할 때 소극적으로 평가합니다.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아니면 죄를 저지르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지를 보고자하고 만약 그의 삶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잘 산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은 구원과 구속을 바라볼 때 그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주목하고자 함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는 어떠한 것을 발견하고자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고 넘어지기 쉬워서 하나님을 떠나 온전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룰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그 완전한 자리로 인도하실 계획을 세우셨는데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구속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따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며 그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하여져야 하는데 인간에게 하나님과 동등하고자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고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그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가운데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욕심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 일은 우리가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셔서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아들을 우리를 대신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하고자 하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속을 받을 수 있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속과 죄사함이 바로 놀라운 은혜이며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심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으로 이 비밀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은 유대인이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에베소라고 하는 도시에서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신을 섬기며 문화를 향유하고 정치적인 행동을 해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을 이야기 하는 바울의 심정이야말로 안타까운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인 교회에 그들이 구속함을 받아 죄사함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이야기 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교회를 향해서 그 구속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하고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죄사함 말고 그 이후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시고 죽이시며 이로써 우리를 구속해 주셨는데 우리는 아직도 “예 압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이제 좀 잘 살게해주세요”라고 말한단 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온전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성되어 가기를 손꼽아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놓으시기 까지 하신 분이신데 왜 그분이 그렇게 구원한 우리에게 매일 어떻게 사는가를 관심 가지시고 그것을 가지고 축복하고 저주하는 하나님이시겠습니까?
물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구원을 입을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삶에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를 기대하시면서 또한 여전히 우리를 도우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주시고 그것으로 우리와의 관계를 끊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 깊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인이었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속성이 어두워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도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의로움과 선함을 드러내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다면 분명히 우리는 빛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부터 멀어지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다른 이들이 보기에 더 나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 잘 사는 삶을 인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우리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됨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아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 더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로 나아가 관계를 회복하였는데 그렇게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는 것일까요?
저도 그것이 의문입니다. 분명히 구속 죄사함을 받았으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진 것이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빛이 우리 가운데 비췰텐데 어떻게 여전히 예수 믿기 전하고 조금도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른 해답을 찾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변화되어지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만큼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결국 구원이 아니라 상급과의 관계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죄 사함을 입었고 이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것이고 이로써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의 거룩함에 나의 죄를 비춰볼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고백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이 고백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이 예수 안에 있는 은혜를 기대하고 기대는 것은 그가 이를 통해서만 자기 속에 있는 죄책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입니다. 이것이 성화이고 하나님의 사람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위해서 우리에게 선한 삶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입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으므로 그 가지된 지체로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빛된 삶을 살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이 아니라 구원 얻었기 때문에 드러나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구원 받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입었지만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은 아직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거짓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전에는 죄로 느끼지 못하고 잘못으로 알지 못하던 것을 이제는 죄로 알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그랬는데 이제는 만성이 되어서 잘 못느끼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관계를 회복한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했는데도 죄가 여전히 아프지 않고 괴롭지 않다면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죄인지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강하게 비취는 사람은 아주 작은 것을 통해서도 죄인됨을 고백할 것이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멀찌기 따라 간 사람이라면 조금 무디게 죄를 느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 가운데 성령의 충만이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소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왜 현대교회가 하나님의 은사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 그 죄사함의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적으로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나의 의지로 하나님RP 나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죄성을 유지하면서 나의 의를 세우기를 원하고 나의 힘과 능력으로 교회를 세우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 결코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조들을 기억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던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이 분들의 신앙을 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니 지금도 그렇지만 순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죽을 때 깨끗하게 죽을 수만 았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고문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다면 참 힘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데 이 분들이 이렇게 살 수 있었고 죽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결코 인간의 의지와 능력이 또 인내가 이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에 능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전 재산을 다 드리고 가난하게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이 세상의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고 일으켜 주는 것들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 않는 삶을 사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투명히 드러나기를 소원했고 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역사히시면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때를 채우는 사람들이 되자고 설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를 채우는 기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림의 때를 채우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임하실 때를 채우는 사람들
얼마저 터키에서 터키기독교현대사에 첫 터키인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실히 찾고 그 앞에 온전히 살기를 몸부림치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사를 풍성히 허락하십니다. 우리들이 그 자리에 서기를 원합니다.

터키 말라트야 순교사건을 정리하면서

2007년 4월 18 일 수요일 13시경 터키 중동부 도시 말라트야에 있는 기독교 출판사를 기습한 5명의 난폭한 무슬림들이 독일인 선교사 1명과 현지 기독교인 2명을 무참히 살해하는 야만적 만행이 자행되었다.
이슬람 기업이 운영하는 학생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는 19,20세 전후의 대학 재수생으로 구성된 5명의 젊은 무슬림들이 수요일 아침 10시경 기독교서적을 출판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질베 출판사를 침입해 준비된 권총으로 위협하고 손발을 묶고 3시간여 칼로 심한 고문을 한 후 3명을 차례로 칼로 목을 베는 끔찍스런 살해를 저질렀다.

1. 저들을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한 것이 무엇인지 진실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터키의 수도 앙카라로부터 동남부로 약 500 Km 떨어진 도시 말라트야의 도심의 한 3층 기독교 출판사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 오후 1시경 출판사를 방문한 사람이 문이 잠겨 있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 경찰에 신고했고 신고를 받은 경찰의 출동으로 4명의 범행자가 현장에서 체포되고 달아나기 위해 3 층에서 뛰어내린 한 명은 혼수상태에 병원으로 우송되었다.
독일출신의 모 국제 선교기관의 틸만(Tilmann Geske) 선교사는 1961년 생으로 지난 1998년 터키로 들어와 9년여 간 말라트야를 중심으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의 시신은 156군데의 고문흔적으로 3시간여의 심한 고문 후 목이 무참하게 잘린 채 발견되었다.

2. 나는 무슬림으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현지 기독교인으로 터키 현대 선교역사에 첫 순교자가 된 네자티 아이든과 우우르 육셀도 거룩한 피를 흘렸다. 그들의 시신에서도 심한 고문의 흔적과 코뼈가 부러진 것을 볼 때 오랜 시간 고문을 당한 후 참수 되어지는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 잔혹한 무슬림 살해자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아서 어떤 고문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슬람을 강요하고 기독교를 부인할 것을 종용하고 그들의 신앙을 조롱하는 고문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3. 나는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을 전하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우우르 육셀(U�ur Y�ksel)은 1976년 터키의 동부도시 엘라자으의 한 시골 마을의 알레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분명하지만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말한다. 2001년 이즈밑 지방에서 전기공으로 근무할 당시 성경통신 과정으로 성경을 접하면서 조금씩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후 H.의 도움으로 이스탄불에서 보내면서 L. 교회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2004년 말라트야로 자리를 옮기면서 네자티 형제와 함께 말라트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였다. 네자티 형제의 도움으로 그는 깊은 신앙의 세계를 맛보며 매일 매일을 천국에서 사는 기쁨을 누렸다고 한다.
2005년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의 주민등록증 종교 란에 기독교로 바꾸는 일을 시도했으며 그는 언제나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을 전하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말라트야 공동체가 여러 번의 위협과 협박 가운데 있었지만 이를 떠나지 않고 전기공으로서 출판사의 일을 하면서 충성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장례식은 부모님들에 의해 아무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참석하지 못한 채 자신의 고향 마을 엘라자으에서 이슬람식으로 치루어졌다.

터키 선교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터키 현대 선교역사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순교사건은 이번이 세 번째 입니다. 이러한 순교의 피로 인해 이 땅은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도는 너무나 느렸습니다. 그러다 1999년 대지진 사건이 있은 후부터 조금씩 가속도가 붙어지면서 선교의 열매들이 맺혀가기 시작했습니다.

터키 종교청의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1997년에서 2004년 사이에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공식적인 절차를 밟고 종교를 바꾼 사람은 338명으로 발표되었습니다. 2004년 이후로는 실제로 종교란을 반드시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2000년에 1000명 내외의 프로테스탄트의 숫자가 현재는 4000을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볼 때 빠른 속도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사건은 터키 현대 교회사에서 첫 순교자가 탄생됨으로 터키 선교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터키 현지 기독교인들은 돈과 해외도피용으로 기독교를 택했다는 비난을 받아 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그러는 중에서도 현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건전하고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자라났는가를 증명해 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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