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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라 담대하라!

2007.09.09 00:46

폭우 조회 수:418 추천:23

강하라 담대하라!


                                                                           요한복음 15장 15절~19절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오늘은 다른 말씀을 준비하다가 오늘 본문으로 바꾸어서 준비하게 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미 끝이 난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논란이며 한번은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문제이기에 고민을 하다가 이게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지난 두 달여 동안 한국과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교회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의 인질문제는 계속된 관심의 대상이었고 논란의 중심에 있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정부는 구상권을 행사하겠다고 말하고 있고 여전히 인터넷과 한국 사회는 이 문제로 떠들썩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이 어떠했느냐 거나 혹은 이번 일을 기독교 교회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아가 앞으로의 선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조금 더 궁극적인 문제를 도외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논란과 움직임 속에서 교회가 아니 우리가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지나 갈 수 있기에 한 번 더 깊숙이 숙고해 볼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번 일로 어떤 고민을 하셨습니까?

아마도 그 첫 고민은 그들이 과연 잘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문제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적대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나아가 앞으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하며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나아가야 할까하는 것일 겝니다.


저는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한 가지 분명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방법론에서 잘했건 아니면 실수했거나 잘못했거나 간에 교회가 세상의 환영을 받기만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고 의아해 하실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로 한번도 교회는 세상에서 하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았음을 직시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느라 세상의 미움을 받거나 조롱을 받은 예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에도 교회는 여전히 세상과는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 첫 번째 예가 바로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계실 때에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 수많은 적들을 가지고 사역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많은 추종자들조차도 예수님을 떠나고 홀로 쓸쓸히 십자가상에서 당신의 사역의 궁극적인 구속의 죽으심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세상과 화해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리가 어떠하든지 자기의 길을 가도록 세움을 입은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에서도 이기적이거나 욕심이 가득한 공동체여서는 안 되고 그들이 보기에도 아집과 비이성적임으로 혼탁한 공동체여도 아니될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으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교회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 본질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려고 할 때에도 세상은 결코 교회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이번 사건을 간략하게 개요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샘물교회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간 23명의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준비하였고 행하였습니까?

그들은 먼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인 교회의 사명인 선교와 봉사의 정신에 입각해서 이 일을 준비하고 실행 하였습니다. 적어도 이 문제에서는 의심이 없어야 할 줄 압니다.
그들이 괜한 영웅심의 발로로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서는 이 일을 행하기 위해서 이미 오랜 시간 아프가니스탄에 머물렀던 사람들도 있었고 또 자기의 직장을 휴직하거나 그만두고서 이곳으로 향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이러한 일을 전적으로 시도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들 중에 혹시 아프가니스탄을 가는 것이 자기의 인생의 모험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나 이 일을 통해서 개인적인 기쁨을 추구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행함이 비난 받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삶들은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자기의 여가나 여행 심지어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 투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비난 받을 만큼의 비난을 이들에게 가하는 것이라면 이번 일로 그들에게 지워지는 비난은 너무도 가혹합니다.


두 번째로 그들이 행한 선교나 봉사의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국가에서 가지 말라고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우겨서 그곳으로 갔고 이미 작년에 아프가니스탄에 평화 대행진이란 이름으로 그곳을 섣불리 방문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란 이유로 그들의 방법은 그곳의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은 어리석은 방법이라는 주장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확대 재 가공된 사실일 뿐입니다.

이번에 간 팀들은 이미 아프가니스탄에 병원을 개설해서 그곳의 사람들을 돕고 있던 단체의 일원으로 그곳을 방문했고 그곳에서도 봉사의 일들을 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었던 사람들입니다. 작년에 문제가 되었던 단체는 인터콥이라는 선교단체였고 이들은 그들과 같은 단체는 아닙니다. 물론 설사 같은 단체라 하더라도 여행 금지구역도 아니고 경고가 있었던 지역에 들어갔다고 해서 무작정 비난 받아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경고했다는 국가 기관의 경고는 없었으며 이미 이들 이전에도 많은 200여 단체가 올해 그곳을 방문했고 또 봉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곳 가기 전에 준비한 훈련을 보면 그들이 그곳을 향해서 가서 그곳에서 공격적으로 선교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그곳은 기독교가 공격적으로 선교할 수 없는 지역이며 그들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곳에 가기 전에 복장이나 행동을 철저히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사람들이 실어 나르는 많은 사진들과 이야기들은 인터넷에 올라있는 다른 사진들과 그들이 다른 곳에서 행했던 많은 일들에 대한 것을 악의적으로 확대 재생산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곳에서의 이동하면서 행한 부주의에 대한 문제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잘못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조금 더 안전하게 움직였어야 하고 또 실수한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잘못이 그들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에 그들을 죽여도 좋다고 또는 그들이 돌아와서도 비난 받아야한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이런 비난에 직면하게 된 가장 일차적인 이유가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던 병폐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은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온전하지 않고 나아가 심지어 세상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모습조차 가지고 있을 때가 있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 모습에 대하서는 우리가 깊숙이 자성하고 우리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모습을 비난하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비난 받지 않을 어떤 누구도 없으며 어떤 단체도 없을 우리는 봅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인해서 그들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단체로 비난하는 것은 있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하겠습니까?
그 첫 번째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일단 이 세상은 교회를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인터넷을 통해서 가장 빈번하게 들리는 비난은 교회가 너무 공격적이고 독단적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을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들이 있고 수많은 지식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유일한 방법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맏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 밖에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조차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세상과 충돌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고 그들의 칭찬을 듣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이 문제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가 세상과 교회가 충돌하는 지점인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세워지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요구하는 사랑과 우리가 주어야 하는 사랑은 때로는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많은 사람들을 살리시고 고치시며 또 먹이셨습니다. 불쌍하고 가난한 이들을 측은히 여기셨고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사역의 중심에 놓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왔지만 그들 중에 일부만을 고치시고 낫게 하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치시면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고치셨고 또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예수님의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육체의 고통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영혼이 살림을 받지 않으면 그들의 육체가 나음을 입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예수님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지금 이 세상에는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그들에게 직접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기 전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또 이번에 그곳에 간 사람들도 그 사실에 동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곳으로 간 것이고 그들에게 봉사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봉사는 궁극적으로 그들의 육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영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고 또 우리가 해야 할 방법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서 그들의 육체만을 고쳐주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줄때 교회를 칭찬합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에 교회가 힘을 쏟을 때에 그들은 교회가 자기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교회가 변해 가면 갈수록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약화되고 사라져 갔던 것을 우리는 봅니다.

유럽의 교회들이 그러했고 북미의 교회들이 그러했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복음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교회들은 교회가 사회에 공헌하는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아니라 ㅅ교회가 세워질 수 없는 곳에 교회로 세워지면 박해 받는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 그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있습니까?
그들은 그것만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회에 어떻게 공헌할 까보다 그들이 믿음을 어떻게 유지할까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더욱 기도하고 말씀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자유가 주어지고 교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진 모든 곳에서 교회는 부패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자유와 평안 그리고 부유함을 가지고 사회가 주는 칭찬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교회가 사회에 공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교회는 그 복음의 본질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의 요구는 주목하되 그 가운데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김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야 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들을 수 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을 강구해야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일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혹시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 무식한 방법으로 다가가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눈에만 신경을 쓰다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지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들의 관심이 그들에게 칭찬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그 제자가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말씀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 줄때에 세상은 예수님께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그들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느꼈기 때문이고 그들이 믿는 것을 따르지 않고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구원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할 때에 강하고 담대해야 할 것입니다.

점점 더 세상은 교회에게 자기들의 가치와 혼합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교회가 예배당을 비워 지역 사회에 도움을 주기를 요구하고 그들에게 전도하기보다 그들의 필요를 살펴보아서 도와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다른 종교라 하더라도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면 세상은 그것을 칭찬합니다.
한국에 많은 교회들이 또 유럽과 북미의 많은 교회와 신학자들이 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교류할 수 있다고 말합니까? 그것이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조차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임을 인식하고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존재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는 모든 목적과 의미들이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접근하는 육체적인 봉사는 때로 통로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그들의 반응이나 말에 너무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한탄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이 땅은 점점 더 우리의 믿음을 교묘한 방법으로 시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합시다.
이 땅 가운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와 우리를 보내신 목적을 기억하면서 때로는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고립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을 희석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지혜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로움 이전에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용기가 우리에게 없다면 지혜로움은 어쩌면 우리를 약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도구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독불장군이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용기와 다짐이 있다면 이제 우리는 지혜로워야 할 것입니다.

한때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치료하는 “국경없는 의사회”라는 단체가 한국에서 88년 올림픽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상을 수상하러 온 그들의 대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세상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한국의 독재를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상을 수상하는 것은 당신들의 이념과 상치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그럴 때에 그는 자기들이 이 상을 받는 것은 어쩌면 자기들의 이년과 다른 일에 동원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을 통해 얻어지는 상금은 지금 죽어가는 많은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살릴 수 있다고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명예가 조금 실추되는 것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자세라면 이것은 지혜로움일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목적을 잃지 않고 그 삶의 목표를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때로 지혜롭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조금 욕을 먹어서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지혜로워 진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입니다.

무리 모두 강하고 담대하되 또한 지혜로울 수 있기를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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