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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옷을 입은 청년들... - UWO 에벤에셀에서 -

2006.10.13 16:46

폭우 조회 수:410 추천:18

“거룩한 청년들...”

시 110 : 1 - 7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110: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110:5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110:6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110:7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거룩”이라는 말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은 거룩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참 우리는 ‘네’라고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나아가서는 그 “거룩”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또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우리와 어울리기보다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에게 어울리고 조금 양보해도 인류 역사상 가장 순결하게 살아간 성인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것은 우리가 그 거룩을 옷입고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사람들이 무어라 부릅니까?
“개독교인?” 요즘은 불행하게도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주로 우리가 서로를 부를때에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 혹은 사람들이 우리를 부를 때에는 “성도”라고 부르고 이 성도란 이야기는 바로 “Saint"란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돌려 이야기하면 ”거룩한 사람들“이란 이야기이고 우리가 그 거룩한 사람들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그 호칭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낮뜨거워서 나를 성도로 부르는 것에 즐겁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 서로를 한번 성도로 거룩한 사람으로 불러보겠습니까? 김용의 선교사님 말처럼 너무 진지하게 오래 부르고 바라보면 곤란하니까 잠시 아주 잠깐 불러주고 바로 앞으로 얼굴을 돌립시다.

이제 우리 성경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다윗의 시편이고 메시야에 대한 시편입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도 인용해서 사용했던 예수님에 대해 다윗이 고백하고 찬양하고 있는 노래란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을 발견합니다.

3절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우리가 청년이기에 이 구절이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뛰게하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권능의 날에 새벽이슬과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도다. 찬양하면서 우리는 가슴 한편이 벅차오르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 나도 새벽이슬과 같이 주님 앞에 나아가리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온 세상에 비취게 하리라. “할렐루야!”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청년의 때는 새벽 이슬과 같습니다.

대지를 깨우고 에너지를 공급하며 새 힘을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특별히 이스라엘과 같은 건조한 기후의 나라에서는 이 새벽이슬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온 식물을 살리고 그들을 자라게하는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이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새벽 이슬과 같은 청년들을 기다리십니다.
온 땅을 적시고 메마르고 척박한 땅을 새롭게 할 힘있는 청년들을 기다리십니다.

이른 새벽 대지를 두르고 있는 이슬의 청명함을 여러분은 느껴보십니까? 특별히 요즘 같은 가을에는 그 차가운 느낌이 우리의 폐부를 시원하게 하는 것을 느낍니다. 영롱하게 풀잎에 매달려서 약하고 부족하지만 힘 있게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는 이슬의 모습을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그러나 이슬은 곧 사라지고 맙니다. 아침 안개처럼 햇살이 비취기 시작하면 이슬은 마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청년의 때는 지나가고 맙니다. 그리고는 그 청년의 때의 순결함을 잊어버리고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는 아주 잠깐 우리 인생에 주어지는 축복의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지는데 있어서도 이토록 중요하고도 짧은 시기는 없을 것입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도 하고 놀라운 담력으로 불의와 죄악과 싸울 수 있으며 나아가 나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에 바칠 용기를 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가 얼마나 짧은지요. 불과 몇 년을 상간으로 우리는 더 이상 청년의 용기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청년인 듯 하지만 그 속 사람은 이미 청년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의 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도전하십니다.
청년의 헌신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906년 8월 사무엘 밀즈라는 재수생이 미국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당시 예일대학에서 일어나 제 2차 각성운동의 영향으로 내면에는 복음에 대한 열망이 끓고 있었고 그는 윌리엄스 대학에 들어가 친구 4명과 기도모임을 만들어 꾸준히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건초더미에 피했다가 여기서 세계선교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이것이 건초더미 운동의 시작이며 이를 통하여 북미지역내에 놀라운 선교의 헌신이 일어나게 되었고 한국을 향한 선교사들도 이 영향으로 헌신하게 되어집니다.

영국에서는 옥스퍼드의 웨슬레와 캠브리지의 찰스 시몬, 그리고 영국 교회내의 윌리엄 캐리등의 헌신이 영국과 세계를 향한 청년들의 헌신으로 이어졌고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진 것을 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청년들을 변화시키셔서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청년들이 헌신했을때에 복음을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였고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였던 것을 봅니다.

우리들도 이제 헌신을 다짐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앞에 나를 드려보아야 겠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듣고 나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면서 나의 삶은 그저 평안하기만을 구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담대한 일인지요. 이렇게 캠퍼스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에 참석하면서 나의 삶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그런 신앙인으로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요.

만약 하나님께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으시고 그 일꾼을 찾으실 때 어디를 주목해 보시고 어떤 사람들을 찾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나이기를 바라고 우리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냥 나는 나의 배를 불리는 신앙을 가지고 살겠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당신을 향해서 열심을 보이는 순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맡기고 싶어하십니다. 오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부정하는 이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꺼리는 이 때에 당신의 청년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과 비젼을 부으실 때를 기다리십니다. 언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부으시고 우리를 당신의 일꾼으로 들어쓰시는줄 아십니까?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처럼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그때가 바로 청년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때입니다.

청년들이 거룩하게 세워지기를 소망하는 때에 그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그 때 하나님은 세상을 변혁시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거룩하게 설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부흥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청년 에스겔에게 나타나시고 그를 통하여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회복케 하시기를 원하신 하나님은 청년 바울에게 나타나셨고 청년들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청년인 우리에게 나타나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경기하던 그 거룩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을 우리에게서 발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청년 루터는 자기의 삶에서 거룩한 경건을 이루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기도와 금식뿐 아니라 기도원 안에서 고행을 행하고 스스로에게 채찍을 때리기 까지 하였지만 그는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는 위로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하나님의 앞에서 스스로를 만족할 만한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청년 웨슬레도 기도와 말씀묵상으로 구제와 빈민가를 전도함으로 금식과 규칙적인 삶으로 경건을 힘썼지만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에 이르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값없는 십자가의 구속을 고백하면서 스스로의 의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함을 고백하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내려놓음으로 경건에 이를 수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단 하루만에 되어지거나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닐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나서도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를 구원하심을 믿는다면 그 구원의 은혜를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 구원에 절대적으로 개입할 수 없음도 고백하고 나아가 그런 구원을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삶을 당신의 것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도우시기 위하여 나의 마음 가운데 계신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의 것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구원의 옷을 입고 그분의 부르심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비로소 쓰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쓰시는 때는 바로 권능의 날이며 우리를 당신의 군대로 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절묘한 댓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원수를 네 발등상이 되기까지 승리하게 하시고 높이심은 5절과 6절에서 다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에서 4절의 여호와의 맹세로 발전하면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이 세상을 이기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의 대리인 인 다윗으로 하여금 대적을 이길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 가운데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질 것을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기 위해 애쓰는 사단의 세력을 밟아 무찌르는 승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는 우리의 발아래 있지만 우리로 머리를 들게 하실 것입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당신의 싸움을 싸우신 것을 압니다. 이 세상에서 죄의 권세와 싸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로 하여금 그 싸움을 대신 싸우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우편에 서셔서 우리의 싸움을 도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우리가 싸우는 것은 나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닌데 왜 우리는 이렇게 헌신하기를 두려워 합니까?

헌신, 경건, 복음, 전도, 선교라는 말들만 들어도 왜 우리는 알레르기 증세를 보이냔 말이죠.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삶이고 우리를 쓰시겠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청년들아!
가자! 이제 나의 청년들아 일어나자!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해 보십니다. 지금 이곳에 얼떨결에 왔다가 이 무슨 황당한 헌신을 하고 있는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길가다가 어쩔수 없이 불려와서 아니 한마디로 재수없이 구경하다 끌려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사람 시몬 처럼 우리가 얼떨결에 하나님의 무르심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가슴에 어떤 일들이 있기를 소원하십니까?
한 평생 살아가면서 가슴 아픈 사랑한 번 못해본 사람 처럼 한심한 사람도 없지만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가슴 뜨거운 열정한번 품지 못한 사람은 더 없이 불쌍합니다. 그것도 나를 향해서 애타게 부르시고 요청하시는 애정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귀를 막고 나는 결코 그것에 빠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내가 무슨 T.V홈쇼핑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의심하면서 나에게 이익이 있을까 없을까를 따져본단 말입니까?
또 이렇게 신랄한 말씀을 귀를 긇는 귀이개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그러지 맙시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기대가 이제 무르익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학생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성령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는 청년들이 중국에 또 온 세계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순교한 순교자의 숫자가 그 이전 백년동안 순교한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오랬동안 기다리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일을위해 헌신하는 청년들을 세우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부르시는 음성 앞에
우리 구원의 거룩한 옷을 입고 즐겁게 헌신해 보지 않으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