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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두 날개로 난다

2006.11.17 11:22

폭우 조회 수:410 추천:30

두 날개로 나는 새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14절까지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는 이영희선생의 말을 들어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말은 좌익과 우익 두 그룹이 공존할 때 사회는 바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거이고 그러므로 좌익이라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올지 않다는 논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좌익과 우익을 오늘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데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좌익과 우익의 경계를 넘나드는듯이 균형을 잡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기에 이 이야기로 시작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규형감은 두 가지의 경계선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리스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지만 여전히 이 세상의 가치관의 평가를 받고 그 안에서 살아 내야 하는 삶이다.
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그 값없는 구원의 은혜를 인해서만 우리는 구원을 얻었지만 또 그 구원을 이루어 가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이는 결코 변하지 않고 되돌려지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는 또한 이 땅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 가도록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태할 수도 없고 게으를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이유도 없다.

그리스도인은 구원과 성화라는 두 날개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어는 것 하나라도 우리가 잊어버린다면 우리의 신앙은 불균형을 이룰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 자녀로 부름을 입은 사람들이지만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경계를 이해하면서 이미 이 땅에 임하여 변혁을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한 임재로 그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꿈꾸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러한 두 날개는 어쩌면 예수님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도 모르겠다.
완전한 인간이시면서 또 완전한 하나님이셨던 예수님,
전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죄도 없으시면 완전한 분이시지만 그 완전함을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입으심으로 함께 거하셨던 분 예수, 그 둘 사이가 어떻게 조화되는지는 알수 없는 비밀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둘을 완벽하게 좌화시키셨고 그렇기에 지금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이해하시고 또 도우실 분이시기도 한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의 균형을 이렇게 이야기한다.(A.W. 토저의 글을 인용해본다)

첫째, 우리는 담대해 지려다가 지나쳐서 뻔뻔해 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구원을 얻었고 그로 인하여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담대하게 한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우리를 이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나의 어떠한 죄도 하나님은 용서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때로 우리를 지나치게 뻔뻔하게 만들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용기와 온유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스도 예수는 이 두가지를 완벽하게 조화시키셨고 이를 우리에게 보이셨을 뿐 아니라 모범으로 따르기를 바라신다.
어떻게 용기 있으되 온유할 수 있는가?
어떠한 고난 가운데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으셨던 예수님과 바울의 모범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도 바울도 그 마음에 온유함을 잃지 않으셨던 것 또한 우리는 기억한다. 불의를 향하여 담대하게 외치고 경고하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을 향하여 그 연약한 사람들을 향하여 온유함을 잃지 않을 수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용기있게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하기에 온유함을 잃고 자비로움을 잊을 때가 있다.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장이 자기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목숨도 버릴 수 있었던 것 처럼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도 온유하기가 쉽지 않은 존재들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온유하기 때문에 용기를 버릴 때가 만은 존재들이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형편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을 묵과하거나 지나치게 되는 경우를 본다. 그들이 나의 친한 친구이거나 혹은 친족들일 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마치 구약의 엘리제사장이 자기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를 그대로 묵과하고 넘어 갔던 것 처럼 말이다.

둘째, 우리는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다가 그것이 지나쳐 예의에 어긋나게 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솔직해야하고 진실해야 한다. 그러나 그 솔직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다가 가서는 않된다. 이것 또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인간 사회의 철칙이다.
작가 김훈은 “신도시 러브호텔의 추차장에 있는 차양막은 우리 사회를 보호해주는 적절한 거리의 차단막이다”라고 말하기 까지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서로의 잘못이 있다하더라도 깊숙이 알려고 하지 않으므로 눈감아 줄 수 있고 또 그 치부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다른 눈으로 보지 않는 공식적인 입장을 유지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솔직해야하고 또 진실해야 한다. 그러나 그 진실함을 인해서 다른 이들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자기의 솔직함의 자유를 제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거짓을 혹은 눈감아주는 것을 평안의 빙폐로 삼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진실함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로 인하여 다른 이들을 평가하지 않고 그들을 궁지로 몰아 넣지 않는다는 것일게다. 어렵다...

셋째,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하지만 지나쳐서 의심하는 그리스도인이어서는 않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어야 하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언제라도 내가 적들에게 공격을 받거나 속지 않기 위해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철저하게 적들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유혹 당하지 않으려다가 보니까 너무 사소한 문제에 적의를 품고 함께 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에 어긋나지 아니한 문제라면 우리는 기꺼이 용납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나치게 사소한 문제들로 얼마나 자주 나뉘어오고 또 다투어 왔는지 모른다.
종교개혁때의 루터와 쯔빙글리등의 개혁자들이 모든 사항에 합의하고서도 성만찬의 문제를 서로 합의 하지 못함으로 결국 서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이후에 개혁교회조차도 여러개의 종파로 갈리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남아공에가면 유명한 신학교가 두 개 있다. 물론 다른 곳들도 있다.
그중 하나는 포체스트롭이고 또 하나는 스텔렌보쉬라는 신학교들입니다.
문제는 이 두학교가 너무도 똑같은 개혁 신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신학적인 차이로 둘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학교는 서로 말하기를 그 차이가 바로 성찬식 때에 큰 그릇에서 잔을 나눌 것인지 각자 다로 잔을 나눌 것인지의 차이 정도라고 말합니다.
다시말하면 우리는 너무 다르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있기 때문에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경계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혀 다른 신앙과 궁원의 문제라면 우리는 철저하게 막아야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넷째, 진지한 그리스도인이어야 하지만 지나침으로 우울한 그리스도인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지하게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 처럼 인생을 살아갈 때 고민없이 아무 생각없이 즐겁게 살자는 식의 삶의 태도를 견지할 수 없는 존재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의 삶이 너무 우울을 향해 가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며 또 나의 죄성을 인하여 늘 괴롭고 고민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 하나님의 손길을 잊어서는 않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해 성경은 끊임없이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항상 우울하다는 것은 그 마음에 기븜이 없다는 것이고 또 구원의 감격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 받았음에도 혹 나의 자존심을 인해서 우울하지는 않은지 살펴볼 것이다.
또 경건은 결코 기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양심적이지만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양심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덕목임을 안다. 그러나 그 양심적임에 너무 지나침으로 스스로를 제한하여 일상 생활조차 할 수 없는 소극적인 신자가 되는 것은 옳지 않다.
혹시라도 범죄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대할 때에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예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거나 일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슬픈일일 것이다.
물론 너무 양심적이지 않는 것 역시 사단의 기뻐할 일일 것이다. 나의 양심을 지키고 그 상식적인 선에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삶일 것이다. 그러나 치우치지 아니함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루터가 자기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 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아무리 양심적이고자 한다해도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마음을 속이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참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말씀을 살펴 볼때에 조차도 한 쪽에 치우치지 아니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 성경구절 만을 좋아하고 그로 인하여 다른 말씀을 등한시 한다면 우리는 바로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주어졌다. 이 말씀을 읽을며 따를 대에도 우리는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이성을 사용하여 살펴보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편협하게 성경을 읽으며 그로 인한 오류에 빠지게 되는가?
많은 비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작은 단편만을 들어 그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하고 그들의 가치관에 위배된다고 이야기 하는가 말이다.
단적으로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많은 이단 중에서 “한번 죄를 고백하면 더 이상 회개하거나 고백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러한가?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아시고 이전에 지은 죄나 앞으로 지을 모든 죄르 fdnl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십자가의 죄사함을 한번 경험하면 바로 그때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고 이후로는 죄를 지어도 더 이상 고백하거나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죄를 지으며 불와전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 죄사함의 권세를 누려야 한다.
요한1서 1장 9절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성경은 바울의 예를 들어서도 여전히 구원 받은 성도가 죄의 유혹 아래 거하고 이를 하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 받을 수 있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또 다른 예는 기도할 필요에 대하여 말하는 야고보서의 예다.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의심하고 기도하지 않는가하는 오해와 불안을 경험한다.
그러나 성경은 또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RP서 우리에게 적절한 것으로 응답하실 것이며 우리의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하 saledma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이렇듯이 넓고 풍성하되 치우치지 아니함으로 세워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