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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신학 종교개혁사

2006.11.25 22:58

폭우 조회 수:54122 추천:64

I. 역사에 나타난 루터의 모습과 최근의 루터연구동향  
  하인리히 보른캄(Heinrich Bornkamm)은 루터를 독일역사의 거울이라 했다. 루터교에 있어서 루터는 루터교의 교부이다. 1577년에 나온 협정신조서(Formula Concordiae)는 요한계시록 14:6에 나오는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천사를 루터로 보았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 있어서 루터는 교회일치의 파괴자였다. 가톨릭 교회사학자인 헤르테(Adolf Herte)는 1943년 출판된 3권으로 된 저서인 '코클래우스의 루터 주석에 대한 파문에 나타난 가톨릭의 루터 모습'(Das katholische Lutherbild im Bann der Lutherkommentar des Cochl us, M nster)에서 근대의 문턱까지 카톨릭의 루터에 대한 평가는 루터의 동시대 사람인 코클래우스의 증오로 가득 찬 서술에 매어있었으며, 공지될 수 있는 소수의 예외들은 거의 모두 금서 목록에 있었음을 입증했다.
  레싱(Lessing)은 루터를 종교 자유의 투사로 보았다. 루터가 교회의 권위와 전통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생각했다.
  나치 시대에 루터는 바로 독일인으로 평가받았다.
  1983년은 루터 탄신 500주년 기념의 해였다. 루터에 관한 학문적인 연구는 1883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부터 바이마르판 루터 전집(Weimarer Ausgabe: WA)이 출판되기 시작되어 현재 100여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다.
  홀(Karl Holl, 1926년 사망)부터 루터 르네상스의 막이 열렸다. 이 후의 루터 연구가(제베르크, 보른캄, 뢰베니치, 에벨링, 히르쉬). 홀은 루터 연구의 획기적 논문들을 남겼는데 역사적이 아닌 조직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1917년 10월 31일 베를린 대학에서 행한 종교개혁기념강좌: "루터는 종교를 무엇으로 이해했는가"(Was verstand Luther unter Religion). 여기에서 루터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을 가능하게 했다.
  히르쉬(E. Hirsch, 1899-1972)는 1926년에 홀의 루터 해석은 사상적으로 민족주의적인 루터를 의미한다고 했다.
  홀은 1922년 비텐베르크에서 행한 "루터와 광신주의자들"(Luther und Schw rmer)라는 강연에서 루터와 뮨처를 대조하였다. 홀은 뮨처를 신비적인 영성주의자로 이해했다. 광신주의자들의 정신은 사실 루터에도 있었으나 후에 여기에서 분리되었다고 본다. 홀은 루터를 독일의 심성의 원형으로 이해했다.
  트뢸취(E. Troeltsch)는 루터를 중세인으로 보았다.
  에어랑엔의 루터 학자들인 알트하우스(P. Althaus)와 엘어르트(W. Elert)는 루터를 민족주의적인 경향의 인물로 보았다.
  변증법적 신학자인 바르트(Karl Barth)는 루터를 비판하고 있는데 바르트의 비판은 후기 루터에 대한 것이다. 그는 전기(前期) 루터에 대하여 거의 다루지 않았다.
  루터에 관한 논쟁은 오늘날 압도적으로 그의 공적인 생활에 대한 위치에 관한 것이다. 이 논쟁의 쟁점은 농민전쟁에 있어서 루터의 태도이다. 이에 대하여 루터에 대한 비판은 대단하다. 루터는 사회 혁명의 법칙을 완전히 거부하였으며 제후의 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1850년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농민전쟁에 관한 논문에 기인하고 있다. 블로흐(Ernst Bloch)도 '혁명의 신학자로서 토마스 뮨처(Thomas M ntzer)'라는 책에서 엥겔스의 영향을 받아 농민전쟁에 참여한 토마스 뮨처를 혁명의 신학자로 보았다. 과거 동독(DDR)에서는 소수만 제외하고 루터 연구에 있어서 역사에 대한 공산주의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막스(Karl Marx, 1818-1883)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루터를 민중의 배반자요 뮨처를 독일인의 참 선지자(예언자)로 여겼다. 포르테(Dieter Forte)는 '루터와 토마스 뮨처 또는 부기의 입문'(1971)에서 종교개혁과 루터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푸거(Jakob Fugger)의 대자본주의가 역사를 지배하였다. 루터는 푸거의 자본주의에 봉사했으며 제후들의 시종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뮨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 연극은 루터의 찬송가인 "내 주는 강한 성"과 그리고 그 목적을 내포한 거룩한 성직자회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연도(Litanei)로 끝을 맺었다고 본다.
  20세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루터를 투쟁의 모티브에서 연구했다. 이 투쟁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투쟁이다. 독일에서 헤르만(R. Hermann), 볼프(E. Wolf), 에벨링(G. Ebeling) 등은 민족주의적 입장의 루터 해석은 루터를 잊고 있다고 보았다.
  
II. 루터의 성장과정. 수도원의 입회까지(1483-1505)
  - 출생, 부모의 가계(家系), 학교교육
  루터의 아버지의 조상들은 농부였으며 튜링엔 지역의 변방 서쪽 삼림지대인 공작령 만스펠트(Mansfeld) 출신들이었다. 루터의 어머니인 마가레테(Margarete Luther. geb. Linde- mann)는 아이제나흐(Eisenach)의 시민 계급 출생이었다.  
  루터의 출생 연도는 사실 정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1483년 11월 10일이라고 인정되어진다.  이것은 멜랑히톤이 산출해낸 것인데 날짜만은 정확하다.  그의 이름 Martin은 그가 세례 받은 날인 11월 11일, 성 마틴 축일에서 온 것으로 당시에는 태어난 다음 날 세례를 받았다. 루터가 태어난 곳은 아이스레벤(Eisleben)이다.  이곳에는 루터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서 Luther의 성은 Luder인데 1518년부터 Luther로 철자화 되었다. 튜링엔 (Th ringen)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이다.  루터의 반대자들 가운데는 루터가 슬라브족의 이주민의 자손이라 하는데 이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당시 독일은 상속권이 막내 아들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막내가 아닌 한스 루터는 광부로서 일하였다.  그는 성실히 일하여 구리 광산의 광부에서 야금 공장장이 되었다(그러나 제련하는 불은 사실 자신의 소유가 아닌 Mansfeld 공작에게 속해 있어서 사용료를 내야 했다).
  루터는 만스펠트(Mansfeld, 1496-1497), 막데부르크(Magdeburg, 1497), 아이제나흐(Eisenach, 1498-1501)에서 라틴어 학교를 다녔다.
  루터의 가정 환경에서 오는 요인: 어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중세 후기의 평범한 가정 환경(사회적, 교육적, 신앙적 관점에서 볼 때).  
  에릭슨(E. Erikson)의 견해 - Luther에게 외디푸스 콤플렉스( dipuskomplex)가 있었다.  
* 외디푸스 콤플렉스: 테베의 왕 라이오스(Laios)와 로카스테(Lokaste)의 아들.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를 죽이고 스핑크스(Sphinx)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테베의 왕이 되어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었다. 자식이 이성 어버이에 대해 갖는 애착과 동성 어버이에 대해 반발을 보이는 심적 항쟁.  
즉 루터의 하나님에 대한 상은 바로 자기 아버지 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옳지 않은 너무 지엽적인 것이다.
  루터의 유년 시절은 중세 후기의 신앙심의 영향을 받았다. 의롭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세상의 심판주 그리스도. 그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어렸을 때 받은 교육과 신앙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1501. 4. 에어푸르트(Erfurt)대학 입학. 에어푸르트 대학에서는 초기 인문주의와 스콜라적인 교수법이 공존하였다.
둔스 스코투스(Duns Sscotus, 1270-1308)의 학문이 가르쳐졌다.
그당시의 교육
  Trivium (문법, 변증법, 수사학)
  Quadrivium (기하학, 산술, 음악, 천문학)
  에어푸르트 대학 예과 - 옥캄주의(Occamismus via moderna)가 주류를 이루었다.
  1502. 가을 - 문학사
  1505. 1. 7 - 문학석사
  1505. 5.20 - 법학 시작
III. 루터의 수도원 입회부터 박사학위까지(1505-1512)

a) 수도사 생활과 사제 서품

  법학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안 된 1505년 7월 2일 루터는 그의 생애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릴 사건에 접하게 된다. 루터는 만스펠트에서 에어푸르트로 돌아오는 길에 에어푸르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슈토턴하임(Stotternheim)이라는 마을 부근에서 굉장한 벼락을 만난  것이다. 번개가 그의 바로 옆에서 번쩍이며 땅에 떨어지고, 그는 기압에 의해 땅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성 안나(St. Anna)여 도와주소서, 그러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 루터가 친구와 함께 가다가 친구는 벼락에 맞아 죽고 루터만 살아남아 성 안나에게 도움을 호소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은 후대에 붙여진 하나의 전설적인 이야기이지 사실은 아니다. 성 안나는 성모 마리아의 모친으로 당시 산악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광부들의 성인(聖人)이었으며, 루터의 가정에서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이름을 불렀다.
  루터는 1505년 7월 17일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틴 은자(隱者)수도원에 입문하였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외적인 요인은 물론 벼락의 경험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배후에는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죽음에 대한 아무런 준비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하는 것을 중세인들은 가장 두려워했다. 당시 에어푸르트에 만연된 흑사병으로 루터의 주위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으며, 루터 자신의 몸이 생명에 위태로운 부상을 당했다. 이에 루터는 죽음에 대한 위험을 느꼈으며 자신의 구원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또한 루터는 선행을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옥캄주의의 가르침대로 수도사가 됨으로써 완전의 길을 통해 확고한 구원의 보장을 원했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루터를 아버지와 한 마디 상의 없이 수도원의 담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에어푸르트에 수많은 수도원이 있었지만 루터가 아우구스틴 은자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이 수도원이 가장 엄격한 수도원 중의 하나였으며, 이 수도원이 학문적으로 수준이 높아서 이곳의 공부는 바로 대학교의 공부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으로 사람들은 추정하고 있다.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바로 수도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수도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훌륭히 마친 다음 1505년 9월 초 수도원 입문의 허락(Rezeption)을 받아 가입 선서식(Profe )을 마치고 1년간 수련수도사(Novitiat)로 지내게 되었다. 루터의 아버지는 루터가 수도사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이제까지 공들여 가꿔 온 자신의 모든 꿈을 상실한 것과 같은 허탈감을 느꼈다. 루터는 1507년 4월 에어푸르트에 있는 돔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507년 5월 2일 신임 신부로서 첫 미사(Primiz)를 드렸다.
b) 신학공부와 비텐베르크에서의 도덕철학 강사
  루터는 사제 서품 이후 신학공부를 하였다. 성직자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신학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비로소 종교개혁시대부터 이다. 루터가 신학공부를 할 때 주로 읽었던 책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00-1160)의 '네권의 명제집'(Libri quattuor sententiarum)이다. 이것은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교의학으로 다음과 같은 4가지 주요항목으로 이루어졌다: ① 하나님에 관하여(de deo) ② 창조에 관하여(de creatura) ③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de incarnatione verbi) ④ 성례에 관하여(de sacramentis). 그가 또한 읽은 책은  고대와 기독교적인 전통에 대한 해설서인 가브리엘 비일(Gabiel Biel)의 '콜렉토리움' (Collectorium)과 교의학에 대한 문제를 서술한 옥캄과 삐엘 다일리의 '쿠베스치오네스' ( Quaestiones)가 있다. 루터에게 성서통독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은 마테지우스(Mathesius)의 전설이다. 이와는 달리 루터는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였다. 특히 루터는 성서연구를 위하여 스트라보(Walahfrid Strabo, 849년 사망)의 주석(Glossa ordinaria)과 리라(Nikolaus von Lyra, 1340년 사망)의 성서해석서를 읽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루터가 이미 성서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쌓았음을 볼 수 있다.
1508. 가을 - 1509 도덕철학 가르침 (비텐베르크 대학교 문학부에서)
1509 신학사 취득(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c) 에어푸르트로 귀환. 로마 여행
1510년 겨울부터 1511년 초까지 루터는 독일 아우구스틴 은자수도회 내부의 엄격파와 비엄격파의 문제 해결을 위해 엄격파의 대표로 로마 여행을 하였지만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다시 독일에 돌아왔다. 루터의 로마여행은 그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일으킬 자극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까지 루터는 철저한 카톨릭교도였다.
  d)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신학 교수직과 박사학위
1511 여름 루터는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 1468-1524)의 주선으로 비텐베르크에 왔다. 슈타우피츠는 독일 아우구스틴 은자수도회 엄격파의 최고 책임자였다. 슈타우피츠는 1512년 10월 루터로 하여금 박사 학위를 받도록 고무시켰다.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비텐베르크 대학 성서신학 교수직을 이어 받았다.
안페히퉁엔
  루터가 수도사로서 겪게 된 위기는 구원에 대한 절망적인 의심의 뜻을 지닌 '안페히퉁엔'(Anfechtungen)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루터는 아주 모범적인 수도사로서 경건 생활을 진지하게 했으며, 수도원의 교육은 자신을 깊이 성찰하도록 가르쳤다. 이 점에 있어서 역사상 그 어떤 인물도 루터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성찰한 사람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겪은 영적인 투쟁은 그가 당시 교회의 '프락시스(praxis)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의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데서 시작되었다.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은 심령의 통회, 죄의 고백, 선행 그리고 사제로부터의 사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때 루터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웠다. 참 회개란 인간에게 현재적인 것 뿐 만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죄에 대한 회개까지 요청한다. 이와 같은 완전한 회개란 루터에게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당시 아우구스틴 은자수도회 수도사에게 요구된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심령의 완전한 통회였다. 루터는 이것을 완전히 성취하려고 하였지만 점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구원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루터가 배웠던 스콜라 신학의 가르침이 그 의미를 갖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그 당시 인간이 자신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의 길에 이른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생각했던 펠라기우스는 이미 418년 정죄를 받았으며 이 정죄는 다시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가 에어푸르트대학교에서 심취했던 옥캄의 유명론(Nominalismus)은 인간이 먼저 자신의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먼저 행해야 한다(facere quod in se est)고 가르쳤다. 이 요청은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으로서 구원에 있어서 행위를 정당화시켜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유명론이 가르친 대로 모든 의를 성취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 아래 루터는 의롭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심판자 그리스도 앞에서 두려움과 전율이 더해 갔다. 이것은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절망이었다. 이 즈음 루터는 아우구스틴(Augustin)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인간의 선한 행위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아우구스틴의 예정론을 통해, 이 절망은 더해 갔다.
  루터는 이 절망에서 헤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신비주의에도 심취해보았다. 그는 하나님이 신비적인 합일을 받아들인 자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보나벤투라(Bonaventura)가 하나님과 합일하기 위한 지침을 확실히 제시해주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몰입하면 인간 안에 있는 신의 본성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신비주의의 가르침이 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 안에 있는 가련한 자기,최고의 상태에 이를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그는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자기욕망'(Ich-Sucht)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자기욕망'은 루터에게 있어서 원죄로 간주되었으며 십계명의 제1계명을 범하는 것이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왔으나 오히려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는 절망적인 의심 속에서 루터는 그의 선생이자 고해신부인 슈타우피츠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아우구스틴과 베른하르트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심판자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라고 일려주었다. 루터는 이 권고에 일시적인 안정을 찾았으나, 구원에 관한 결정적인 도움을 슈타우피츠나 신비주의나 스콜라 신학이 아닌 성서 연구에서 받게 되었다.
IV. 루터의 초기 강의들과 소위 말하는 종교개혁적인 인식의 출현
  a) 루터의 초기 신학 개요
초기의 강의들: 시편 (1513-1515), 로마서 (1515-1516), 갈라디아서 (1516-1517), 히브리서(1517-1518)
  시편 강의.  4가지의 성서 해석에 있어서 의미 - 전통적으로 특히 루터는 문자적 의미(sensus litteralis)와 존재론적 의미(sensus tropologicus)에 중점, 가치를 둠.
  신비주의영향 - 겸비의 신학(Demutstheologie).  인간이 죄인으로 인식할 때 하나님께 인정됨.  겸손한 인간, 저주받은 인간이 의인으로 여김을 받게 된다.
  - Augustin의 영향 - 성서를 새롭게 발견 - 인식 'de spiritu et littera'.
로마서 강의는 중요한 더 발전된 루터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라틴어판 전집 제1권 (1545) 서문에서 루터는 과거에 대한 회상을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iustitia Dei, 롬1:17)는 주격적 소유격(genitivus subjectivus)이 아닌 목적격적 소유격(genitivus objectivus)으로 이해되었다. 능동적인 의가 아닌 수동적인 의이다.
  b) 종교개혁적인 신학의 발견에 대한 연구 현황
  - 종교개혁의 발견 - 과정(1513-1518)
  포겔장(Erich Vogelsang)은 로마서 강의 (1516. 4월)
  비체(E. Bize) 1518.
  뢰베니치(W. v. Loewenich) 1513.
c) 논쟁들
1) 사면부 논쟁
① 사면부(indulgentia)의 역사
  
   루터의 사면부 논쟁은 기독교 역사에 전환을 가져다 준 놀라운 사건이다. 면죄부로 번역된 라틴어의 "인둘겐치아"(indulgentia, indulgence, Abla )는 원래 "관용, 부드러움, 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나중에 교회에서 "사면"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면죄부라는 용어보다 사면부라고 쓰는 이유는 "인둘겐치아"의 본래 의미가 '죄를 사해준다'는 면죄보다는 '죄와 벌을 면해 준다'는 사면이라는 뜻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먼저 사면부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사면부는 회개의 계율에 대한 실행이다. 신약성경에서 회개(Bu e)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심령의 일회적인 방향전환이었다. 고대 교회에서는 소위 말하는 "죽을 죄"(우상숭배, 간음, 살인)를 지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추방을 당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 세 가지 죽을죄도 용서받게 되었다. 중세 시대부터 공적인 회개 외에 신부 앞에서 개인적으로 회개를 하고 사죄를 받는 것까지 포함된 고해(Beichte)가 있었는데, 이것은 3단계로 구성되었다: ① 심령의 통회(contritio cordis), ② 입의 고백(confessio oris), ③ 선행의 보상(satisfactio operis). 선행의 보상으로 회개의 계율은 점점 약해지게 되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회개(고해)는 성례의 위치로 승격이 되었다. 여기에서 신부가 "내가 너를 용서한다"(ego te absolvo)는 사면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더 나아가 고해의 첫째와 셋째 부분이 완화되었다: ① 마음의 통회 대신 두려움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신부를 통한 성례전적인 특성이 강조되었다. ② 11세기부터 죄의 용서 이후에 행해지던 보상이 기한적인 벌들의 면제로 이해되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고해성사에서 죄는 사죄를 통해 없어진다. 즉 지옥에서의 영원한 벌은 죄의 용서로 받지 않게 된다. 그러나 전쟁, 병, 기근 등과 같은 세상에서 받게 될 기한적인 벌들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이것은 사면부에 의해 탕감 받게 된다. 그러므로 indulgentia는 죄의 용서가 아니라(면죄), 기한적인 죄와 벌을 면제받는 것이다(사면).
   사면부 발행은 11세기 남프랑스에서 교회건축을 위한 사면부로서 시작되었다(부분적인 사면부). 교황 우르반 2세(Urban II.)는 1095년 제1차 십자군에 지원한 사람들에게 완전 사면부를 약속했다. 후고 폰 쌍트 케어(Hugo von St. Cher, 1263년 사망)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잉여의 공로라고 하는 소위 말하는 "교회의 보화"(thesaurus ecclesiae)를 사면부의 근거로 삼았다. 교회의 보화의 자유로운 사용은 교황의 권한에 속한다. 교황 보니파츠 8세(Bonifaz VIII.)는 1300년에 소위 말하는 희년 사면부를 공고했다; 이 해에 로마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정해진 경건의 훈련을 받은 자는 이 사면부를 받았다. 이 희년 사면부는 100년에 한번씩 거행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곧 바로 이 기한은 50년으로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25년으로 줄어들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는 1476년 연옥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면부를 살 수 있다고 결정했다.  
   한 장의 사면부는 삶과 죽음의 위급한 순간에 지불할 수 있는 수표의 한 종류였다. 통회와 고해는 행하는 것이 아닌 지불해야 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면부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교회의 높은 수익성의 원천의 되었다. 사면부의 부과는 교황청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세속의 군주들은 자기들의 영토에서 사면부 판매를 금지할 수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면부는 중세교회의 가장 심한 타락 가운데 하나였다.
  ② 사면부 판매의 배경                      
   알브레히트 폰 마인츠(Albrecht von Mainz, 1490-1545)는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요한 치체로(Johann Cicero)의 아들로 영적인 일에 열심이 아주 미약하고 영적인 삶의 변화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1513년 막데부르크(Magdeburg)의 대주교와 할버슈타트(Halberstadt)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베틴가(Wettin)로부터 작센의 선제후들에게 속해 있었던 주교구 막데부르크를 빼앗았다. 그러나 호엔촐렌가(Hohenzollern)인 알브레히트와 그의 형인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힘 1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1514년 알브레히트는 대주교구 마인츠를 손에 넣음으로 1518년에는 선제후이며 동시에 추기경의 자리에 올랐다. 이러한 이중직이 교회법적으로 위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알브레히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특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이 대가로 뇌물을 주었다. 이 뇌물 외에도 알브레히트는 공식적으로 다른 대주교와 마찬가지로 교황청에 대주교직의 띠를 두르기 위해 돈을 바쳤다. 이 띠는 대주교직을 상징하는 것으로 20,000굴덴이었다(약 3억원). 알브레히트는 이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 아욱스부르크에 있는 당시 유럽의 최대 거부인 푸거가문(die Fugger)으로부터 빌렸다.
   1515년 교황은 알브레히트에게 사면부를 그의 영토에서 판매할 수 있다고 허가하면서, 사면부 판매의 수익금 절반은 바로 로마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푸거가에게 빚을 갚도록 해주었다. 공식적으로 이 수익금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신축을 위해 써야 했지만 교황레오 10세는 낭비벽 때문에 이 돈의 일부를 사사로이 사용하였다. 알브레히트는 "거룩한 사업"의 실행을 위해 사면부 설교가로 재능이 있는 요한네스 테첼을 채용하였다. 테첼은 10년 이상 사면부 설교자로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며 사기성이 농후한 말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이 일로 그는 상당히 돈도 벌었으며 자기 하인에게 상당한 일당을 지불할 능력도 있었다. 라이프치히에 그의 사생아가 둘이나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는 여린 마음을 가진 청중들에게 호소하였다: 생각하라, 당신들의 부모가 당신들을 위해 했던 일들을! 이제 당신들은 조금의 돈을 가지고 연옥의 불에서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돈이 연보함에 떨어져 튀어 오르자마자 영혼이 연옥의 불로부터 튀어 오를 것이다."
   루터가 살고 있는 작센선제후국의 프리드리히 현공(Friedrich der Weise)은 테첼이 자기 나라의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국민들의 돈이 호헨촐렌가로 새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테첼이 국경에서 가까운 위터복(J terbog)과 체릅스트(Zerbst)에서 활동할 때에 프리드리히의 비텐베르크 주민들은 그곳에 가서 사면부를 사왔다. 이들은 사면부를 사가지고 비텐베르크에 와서 시교회(市敎會)의 신부인 루터에게 고해성사시 그들의 죄에 대한 아무런 뉘우침이나 아픔도 없이 죄의 용서에 대한 선언을 요청했다. 진지한 신부였던 루터에게 있어서 이 일은 충격적이었다.
③ 루터의 사면부 논쟁(95개 논제)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오랫동안 망설여 왔고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 그리고 기도로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그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베드로 성당 사면부의 취소를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같은 날 루터는 자기가 속한 교구의 주교인 브란덴부르크의 히에로니무스 슐체(Hieronymus Schulze von Brandenburg)에게 편지를 썼다. 테첼이 이 교구에 나타나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남아 있지 않다.
   루터는 이 편지들 외에 사면부 논쟁을 뜨겁게 불러일으키게 될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문에 1517년 10월 31일 붙였다. 그 당시 성교회의 문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게시판이었다. 이 논제의 제목은 "사면부의 능력에 대한 논제"(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적인 선언이나 교리는 아니다.
   루터가 사면부에 대한 논쟁을 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성 베드로 성당의 사면부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a II., 1503-1513)는 성 베드로 성당 신축을 위한 사면부를 공고했다. 그의 후임자인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이 일을 계승하고 이 사면부를 교회령인 막데부르크와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위임하였다.
둘째, 루터는 막데부르크 대주교의 문장이 새겨진 사면부 설교자들을 위한 교본(Instructio summaria)을 입수하였다. 이 교본에서 알브레히트는 사면부를 구입함으로써 얻게 되는 죄의 완전한 용서를 약속했다. 또한 죽은 자들을 위해 사면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통회나 고해가 필요없다고 했다. 국민들은 사면부를 사게 되면 구원이 확실히 보장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들은 사면부가 벌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면제해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이에 대해 루터는 침묵할 수 없었다. 루터는 교회의 책임 있는 선생으로서(신학박사로서의 의무) 이에 대해 의견을 표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95개 논제의 제1항은 회개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주님이요 선생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회개하라…'(마4:17)는 것이다. 이 말씀은 신자들의 전 생애가 회개임을 알리시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지옥에 대한 공포는 아닌 것이다. 제92항-95항에서는 기독교인은 벌 때문에 도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따를 것을 주장하고 있다: "크리스챤은 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노력해야 한다"(제94항). "위안보다는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져야 한다" (제95항).
   루터는 이 논제에 대해 누군가 토론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알브레히트측에서나 히에로니무스측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1517년 11월 11일 루터는 이 논제를 외부로 보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이 논제는 평신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논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논제는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전 독일에 퍼졌다. 이에 대해 루터의 동시대인으로 종교개혁사를 서술했던 뮈코니우스(Friedrich Myconius, 1490-1546)는 "마치 천사들 스스로가 이것을 전하는 사자(使者)들 같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뉘첼(Kaspar N tzel)이 1517년 12월에 독일어로 이 논제를 번역하였다. 루터의 이 논제는 루터가 생각지도 않은 반향을 일으켰으며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④ 루터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반박
  루터의 95개 논제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반응은 당시 사면부 설교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테첼(Tetzel)로부터 시작되었다. 테첼은 루터의 95개 논제를 반박하는 글을 1518년 1월 오더강변의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n der Oder) 대학의 빔피나( Konrad Wimpina)의 도움으로 작성하였다. 루터는 이에 대하여 1518년 2월 사면부 문제에 대해 학문적으로 다룬 글인 '사면부의 효능에 대한 논쟁의 해결'(Resolutioneos disputationem de indulgentiarum virtute)을 발표하였으며 1518년 3월에는 평신도들을 위해 '사면부와 은총에 관한 설교'(Sermon von dem Abla  und Gnade)를 통해 사면부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로마 교황청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신학자 프리에리아스(Silvester Prierias)를 통해 "교황이 교황의 자격으로 결정할 때는 오류가 없다. 그의 교리는 무오한 신앙의 통치이며, 성서의 힘과 권위도 거기에서 나온다"고 반박하였다.["교황권에 관하여"(De potestate papae)] 여기에서 교황이 카톨릭 교회의 최고 권위자이며 근본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같은 도미니크 수도회 신학자인 에크(Eck)는 "오벨리스치"(Obelisci)라는 글을 통해 루터를 반박했으며 이에 대해 루터는 "아스테리스치"(Asterisci)라는 글로 응대하였다. 에크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일생동안 종교개혁에 반대하며 루터와 논쟁하게 된다.
  루터의 사면부 논쟁에 대해 로마 교황청은 처음에는 아우구스틴 은자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 사이의 논쟁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느꼈는데 1518년 6월부터 독일 도미니크회의 밀고가 시작되었고, 루터는 이단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파문과 추방의 효력에 대한 루터의 의견 피력은 1518년 8월 법적으로 볼 때 이단임을 선고받게 했다. 그리하여 60일 이내에 루터는 로마에 나타나야만 했다. 이 때에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이 루터 문제를 독일 영토 내에서 다루기 위한 협상에 성공하여 1518년 10월  루터는 독일 아욱스부르크(Augsburg)에서 추기경 카예탄(Cajetan, 1469-1534)으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두 가지 중심 테마 : 루터는 교회의 보화가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와 동일하다는 것을 부인한다(제58항-95개 논제의).  루터는 제7항에서 성례전이 아닌 오직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에 대한 가르침에 확실히 반대 입장에 있다. 루터는 카예탄의 심문에 굴복하지 않았으나 1518년 10월부터 1520년 6월까지 루터에 대한 판결은 약 2년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 선출에 있었다. 1519년 1월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이 사망하자 교황청은 스페인의 칼(Karl)이 새 황제로 선출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황제 후보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교황청은 프리드리히의 국민인 루터를 문제삼음으로써 프리드리히의 기분을 언잖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1520.6. 추방압력 교서"Exs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가 나오다
  - 1520.12.10. 루터와 그의 친구들은 비텐베르크의 엘스터토어(Elstertor)에서 교회법전들과 스콜라 신학의 책들을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 파문압력 교서의 사본도 불에 던졌다.
d) 토론들과 1520년의 글들에 나타난 종교개혁적인 신학
루터의 초기 신학은 그의 2개의 논쟁과 3대 논문에 나타나 있다.
  - 하이델베르크 토론(Heidelberger Disputation, 1518.4).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칭의와 십자가의 신학은 함께 있다.  타락 이후에는 자유의지란 아예 없다.  인간은 단지 악에 대한 자유만 있다(facere quod in se est).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에서 비로소(resignatio ad infernum)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사색적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권세와 세상의 지혜에 비해 연약함과 어리석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한다.
- 라이프치히 논쟁(1519.6.27-7.16)에서 루터는 교황과 공의회들의 권위에 대해 논쟁하였다.  에크(Eck)는 루터로 하여금 교황과 공의회들 이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특히 후스를 정죄한 콘스탄츠 공의회는 오류를 범한 것임을 유도하였다.  이로써 루터는 후스파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라이프치히 논쟁으로 카톨릭의 교회관으로부터 단절이 나타난다.
- 라이프치히 논쟁으로 루터는 인문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 인문주의자들의 동아리로부터 이미 1518년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이 왔다. 멜랑히톤은 브레텐(Bretten) 출신으로 하이델베르크와 튀빙엔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루터의 가장 중요한 동역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 '선행에 관한 설교'(Sermon von den guten Werken)는 종교 개혁적인 윤리에 관한 글이다.  십계명에 의거하여 루터는 신앙선행에 관한 새로운 관련성을 제시하다: 최고의 선행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성.속 행위들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다.
  - '기독교 구성원의 향상을 위해 독일의 기독귀족에게'(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한 프로그램을 전개하다: 로마교회의 세 개의 장막에 대한 분쇄;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 권력의 우위; 성서해석에 있어서 교황의 독점; 공의회의 교황 단독 소집권.  이에 대해 루터는 항의하고 있다: 세례를 통해 모든 기독인들은 사제직에 있다(신자의 일반 사제직, 벧전 2:9).  이로써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이 사라짐.  주교들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루터는 세속의 권위에 요청하다.  이 글의 둘째 부분은 개혁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교회국가, 성직자의 독신제 그리고 구걸의 폐지, 독점기업에 대한 투쟁.
- '교회의 바벨론 포로'(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는 학문적인 글이다. 이 글은 특히 성례관에 대해 썼다. 성례는 약속(promissio)과 신앙(fides)에 의해 결정된다. 성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식을 통해 증빙이 되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든 선포와 마찬가지로 신앙을 요구한다. 이 신앙과 더불어 성례는 보이는 말씀(verbum visibiles)이다. 이것은 말씀과 동일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7개의 성례전이 다 인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례는 오직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설립이 될 수 있으며 약속이 포함된 외적 표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 성찬 그리고 회개는 성서적인 성례들이다. 성찬에서 그리스도는 요소에 현재적으로 존재한다.  이 성례의 은혜는 죄의 용서이다. 성찬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의 세가지 포로: 평신도의 배잔금지, 화체설과 미사의 제사 성격, 이 글로써 루터는 중세 교회의 성례주의(Sakramentalismus)와 단절한다.
- '기독인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1520년. 늦가을)에서 루터는 "기독인의 삶의 전체"를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드리는 편지이다. 이 글은 두 개의 역설적인 주제로 구분이 되고 결정이 된다: 기독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인인 동시에 섬기는 종이다(고전 9:19에 의거). 칭의 신학과 기독론이 내적이고 외적인 인간의 긴장 속에 나타난다: 믿는 영혼은 자신의 죄, 불의 그리고 고통을 그리스도에게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에 참여하는 "기쁜 교환"을 통하여 소위 모든 경건한 행위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섬기는 종으로서 외적인 인간은 선행으로 이웃을 섬긴다. 그러나 선행이 인간을 의롭게 만들 수 없고 오직 믿음이 의롭게 한다.
e) 보름스 제국의회(1521)
① 보름스 의회에서 황제 앞에 선 루터
  막시밀리안에 이어 새로 선출된 황제는 그의 손자인 칼5세 였다. 황제 선출 이후 루터문제는 또 다시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521년 1월 로마 교황청은 루터에 대한 파문장 "데체트 로마눔 폰티피쳄"(Decet Romanum Pontificem, 로마 대주교에 속하다)으로 루터를 교회로부터 파문하였다. 이 파문장으로 루터는 로마로 소환되어 교황의 심판대 앞에서야 했는데 프리드리히 현공이 루터의 판결을 독일 영토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정치세력의 신장으로 황제의 국민이 교황에게서 심문을 받기 이전 황제에게 호소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1521년 4월 루터는 보름스(Worms)의 제국의회서 칼 5세의 심문을 받았다. 루터는 보름스를 향해 가면서 "보름스에 있는 지붕 위의 기왓장들처럼 수많은 마귀들이  나를 겨냥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나는 보름스를 향해 말을 타고 가리라"(Wenn ich gewu t h tte, da  so viele Teufel auf mich gezielt h tten, als Ziegel auf den D chern waren zu Worms, so w re ich dennoch eingeritten)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황제는 루터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루터는 성서 말씀의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오도할 수 없으며 철회하는 것은 양심에 거역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Gott helfe mir, Amen!")이라는 말을 황제 앞에서 마지막으로 남기고 제국의회장을 떠났다.
②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의 상황

- 보름스 이후 종교개혁적인 사상에서 종교개혁 운동으로 되었다: 작센 선제후국, 高地 독일지역 그리고 자유도시 그리고 독일 국경을 넘어 종교개혁의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네덜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그리고 동 프로이센까지 이 운동은 퍼져 나간다.
- 루터 이외의 다른 종교개혁자들도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이들은 슈트라스부르크의 마틴 부처(Martin Bucer)와 취리히의 훌드라이히 츠빙글리(Huldreich Zwingli)이다. 보름스 제국의회가 끝나자 마자 종교개혁운동은 루터가 소위 "광신자들" (Schw rmer)이라고 일컬은 과격한 한 파를 갖게 된다. 이들은 무력으로 복음에 대한 직접적인 자유를 교회와 정치적인 프락시스에 이식시키기를 원했다. 이러한 개신교 내의 투쟁의 양상으로 로마교회와의 논쟁은 때때로 주춤하게 된다.
V. 바르트부르크 기간(1521/1522)
a) 상황과 저술들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황제로부터 심문을 받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는 길에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의 계획 하에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피신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신변에 곧 닥쳐 올 위험에서 보호하고자 오지인 바르트부르크로 루터를 납치한 것이다. 이곳에서 루터는 머리와 수염을 길고 호족 외르크(Junker J rg)로 변장하였다. 그는 바르트부르크에 1521년 5월 4일부터 1522년 3월 3일까지 머물면서 저술활동을 하는데 바로 이 때에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1519년에 나온 헬라어 신약성서 제2판에서 라틴어역을 참고하여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 성경은 1522년 9월 비텐베르크에서 출판되어 "9월 성경"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글들을 발표하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라토무스를 반박하며'(성직자 독신제에 반대하는 글), '수도사의 서원에 관하여'(de votis monasticis). 비논쟁적인 글로는 '설교집'(Kirchenpostille)이 있는데 루터는 복음적인 설교의 모범을 이 설교집에서 제시하였다.
b) 비텐베르크의 소요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없는 동안 비텐베르크 교회에는 변화가 왔다. 루터의 동료인  칼슈타트의 영향 하에 실질적인 개혁이 추진되었다. 칼슈타트는 성직자 독신제, 미사와 성화숭배를 폐지하였다. 1521년 성탄절에 칼슈타트는 성찬식에서 성직자복을 입지 않고, 제사기도,     떡과 포도주를 거룩케하는 말 그리고 고해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는 비텐베르크 교회에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또한 소위 "츠빅카우의 예언자들"이라는 스토르흐(Nikolaus Storch)와 드렉셀(Thomas Drexel) 이 비텐베르크에 와서 성령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유아 세례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비텐베르크가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음을 전해들은 루터는 선제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부르크를 떠나서 1522년 3월 9일부터 일주일간 인보카비트(Invokavit: 사순절 첫 주일)설교를 비텐베르크 시교회(市敎會)에서 하였다. 이 설교를 통해 루터는 종교개혁을 정상화시켜 놓았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내용이 아닌 방법에 대해 비판하였다.
VI. 예배의 개혁과 사회적인 개혁들
a) 예배의 개혁
- 비텐베르크에서는 칼슈타트를 비롯한 과격론자들의 개혁을 평정하기 위해 라틴어로 다시 예전을 행했다. 개인을 위한 미사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제사성격을 지닌 카논(Kanon) 미사는 허용되지 않았다.
- 뮨처는 1523년 알슈테트(Allstedt)에서 예배의 개혁을 위한 글인 "독일 교회 직무", "독일의 복음적인 미사"를 발표하였다.
- 이에 대하여 루터는 성인들과 마리아에 대한 축제일과 카논 미사가 없는 "미사 형식과 성만찬"을 1523년에 발표하였다.  
- "독일어판 세례예식서" (1523)
- "독일 미사" (1526): 이제까지의 미사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카논 미사는 없으며 설교와 성만찬이 예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새로운 교회를 위해 찬송가를 만들었다. 비텐베르크보다 진보적인 슈트라스부르크와 스위스에서 중세 후기시대의 설교, 찬송 기도가 중심이 된 설교예배가 드려졌다.
b) 사회적인 개혁
- 1522: "결혼 생활에 대하여"(Vom eherlichen Leben).  결혼은 "하나님에게서 온 축복의 상태"이지만 "외적이고 육신 혹은 세상적인 일"이다. 이것은 신앙고백의 제1항에 해당된 것이지 구속에 속한 것은 아니다.
- 1523: "교회의 헌금규정에 대하여"(Ordnung eines Gemeinen Kastens), 소위 말하는 "라이스니히 헌금규정"(Leisniger Kastenordnung). 라이스니히의 헌금이 사용되는 범위는 라이스니히 교구에 한정되어 있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몇 가지 예외적인 조항도 있다. 루터는 이 헌금이 사용되어야 할 곳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목사를 위해서-연봉과 일년에 네 차례의 보조금.
  ② 교회의 사찰을 위해서-연봉과 일년에 네 차례의 보조금.
  ③ 학교를 위해서-교사들의 사례비-연봉과 일년에 네 차례의 보조금.
  ④ 장애자, 병든 자와 가난한 사람들, 병과 노년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열 명의 위원들이 매 주일 또는 부정기적으로 위와 같은 어려운 사람들       을 돌본다(이들이 살 수 있는 집, 옷, 먹을 것). 이렇게 함으로써 구걸행위를           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⑤ 버려진 고아와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서-이들의 교육과 생계를 돌보아야 한       다.
  ⑥ 구걸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⑦ 나그네들을 위해서
  ⑧ 교회당, 다리, 목사관, 학교, 사찰 사택, 구빈원의 건축과 유지
  ⑨ 비축할 수 있는 곡식을 사들이기 위해
- 1523: "모든 교리를 판단하는 권한과 힘을 가진... 기독교적인 모임"(Da  eine christliche Versammlung…Recht und Macht habe, alle Lehre zu urteilen). 성서를 근간으로 한 새로운 교회규정.  교회의 권한은 교황과 주교의 직무보다 우선이다.
- 1524: "상거래 행위와 고리대금에 관하여"(Von Kaufshandlung und Wucher). 초기 자본주의적인 경제양식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비판의 신학적인 핵심: 모든 것을 자신만을 위해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 1524: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보존해야하는...시의원들에게"(An den Ratsherren..., dass sie christliche Schulen aufrichten und erhalten sollen).  인문주의의 정신에서 온, 광신주의를 대항하는 종교개혁적인 교육프로그램.
- 1523: "세속권위에 대하여, 세속권위에 얼마만큼 순종하는 의무를 가졌는가"(Von weltlicher Obrigkeit, wie weit man ihr Gehorsam schuldig sei).  이 글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 작센의 제후 게옥(루터의 가장 심한 적수 가운데 한 사람)이 루터의 "9월 성서"(Septermbertestament)를 작센에 보급하는 것을 금한 데 있었다.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글이며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
  ① 세속권위의 성서적인 근거(롬13)와 산상수훈의 말씀은 겉으로는 모순된다.  두 단계의 윤리(수도사의 길과 일반인의 길 "consilia", "concepta")에 대한 중세적인 대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루터는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지배와 영적인 지배를 구별한다. 검과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시 사용한 두 가지 매체이다.
  ② 세속권위의 한계들: 세속권위는 외적인 것, 육신에 대한 것에만 관계하지 영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견해가 이 글의 주요부이다.
  ③ 제후들의 거울, 소위 정당한 전쟁에 대한 원칙들.
VII. 소위 말하는 종교개혁의 좌파
  종교개혁의 좌파라는 말을 사용한 학자: 독일의 A. Cornelis, 네덜란드의 Emil Egli.
종교개혁의 좌파들: 광신자들, 영성주의자들, 재세례파
① 뮨처와 츠빅카우의 예언자들: 1521년 비텐베르크
② 스위스의 형제들: 츠빙글리의 동아리에서 시작되었다. 1525년 Konrad Grebel은 취리히에서 재세례를 행하였다. 이들의 신앙고백서는 Confessio Schlatensis(1527)이며 1527년 츠빙글리, 1544년 칼빈으로부터 반박을 받았다.
③ 멜히오르파(die Melchioriten): Melchior Hoffmann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박한 종말을 기다렸다.
④ Jan Mattis와 Johann Beukels는 독일의 뮨스터에 재세례파 왕국(1533-35)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1,000년 왕국의 도래를 기다렸다.
⑤ 메노나이트파: 홀란드 카톨릭 신부인 Menno Simons(1496-1561)의 지도 아래 나타났다.
a) 칼슈타트라 불리우는 안드레아스 보덴슈타인(대략 1480-1541)
- 시민계급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에어푸르트대학과 쾰른대학에서 공부를 한 후 1504년부터 비텐베르크에서 가르쳤다.  1512년 루터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영향을 받은 칼슈타트는 1517년부터 어거스틴의 신학적인 입장에 서게 되고 루터의 협조자가 되었다.
-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와 함께 Eck를 반박하는 논쟁을 했다(1519).
- 비텐베르크에서 오르간과 성화를 제거하였다.
- 비텐베르크의 소요 이후 칼슈타트는 1523년 오를라뮌데에서 목사로 일한다.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 농민전쟁 때 폭력에 대하여 거리를 두었다.  
- 1529년 작센으로부터 키일(Kiel)로 추방되고, 그곳에서 재세례파의 설교가인 멜히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을 만났다. 1530년부터 취리히의 츠빙글리에게서 지냈다. 바젤에서 신학교수로 세상을 떠났다.
- 그의 급진적인 개혁은 축자적인 성서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십계명은 의식적이고 율법적인 규정들이 엄수되어야 함을 담고 있다(우상숭배금지와 주일 성수).  칼슈타트는 요소에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하여 강한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인 후니우스(Hoenius)의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말씀의 상징적인 의미를 받아들였다.  성찬은 성령으로부터 인도함을 받게되는 내적인 회상의 만찬이다(신비주의의 영향).  또한 믿는 사람들에게도 율법은 의미가 있다: "율법의 제3의 사용"(tertius usus legis: 거듭난 사람에게는 율법이 여전히 법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멜랑히톤과 Formula Concordiae에 따름).
- 칼슈타트는 루터와 반대적 입장에 섰다. 루터: 외적인 말씀에 대한 신뢰. 칼슈타트: 내적인 영의 소유(Geistbesitz)에 대한 신뢰.
- 루터는 1524/25년에 '하늘의 예언자를 반박(Wider die himmlischen Propheten)'이라는 책을 통해 칼슈타트를 "광신자(Schw rmer)"로 낙인찍었다. 루터는 칼슈타트의 영성주의(Spiritualism)를 비판하였다.
  b) 토마스 뮨처(대략1490-1525)
  뮨처는 1490년경 독일의 중부 산악지방인 하르츠의 스톨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과 오더 강변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헬라어 성서와 히브리어 성서 그리고 헬라 철학자들과 교부들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실력도 갖춘 사람이었다. 그가 루터와 만나게 된 것은 1519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는 사실 루터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지만 후에는 루터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그는 루터의 소개로 1520년 츠빅카우에서 설교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과격한 영성주의자들인 '츠빅카우의 예언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또한 뮨처는 중세후기의 신비주의(타울러)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이 신비사상들은 묵시론적이고 천년왕국적인 관점과 결합되어 있다. 그는 신앙이란 인간 안에 존재하는(내적인 말씀) 영적인 경험으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언뜻 듣기에는 타당한 것 같으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신앙이 밖으로부터 즉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온다는 루터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뮌처는 자신을 "하나님의 선택된 종"이라고 여겼으며 새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에 루터가 아닌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제후들에게 요청하였지만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했다(제후들에 대한 설교). 후에 뮨처는 농민전쟁에 가담하였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의 시작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농민전쟁의 사회적인 동기(Motiv)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1525년 5월 프랑켄하우젠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포로로 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참수형에 처해 졌다.
- 주요 저서들: "프라하 선언"(Prager Manifest, 1521): 보헤미아인들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는데 무위로 끝났다. "독일 교회직무", "독일의 복음적인 미사"(1523); "제후들에 대한 설교"(1524); "비텐베르크에 편히 살고 있는 영이 죽은 육신에 반박하는 최고로 야기된 변명"(1524).
- 루터는 어거스틴적인 입장에 서 있었으며 중세적인 전통에 머물러서 최후의 심판과 세상의 종말을 기다렸다.
- 뮨처는 이 세상에서 1,000년 왕국을 기다렸다. 지금은 추수의 때이며 선택받은 자와 타락하는 자를 결정하는 시기이다. 뮨처는 자신을 도래하는 왕국의 예언자이며 마지막 시대의 싸움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도구로 이해했다. 기드온의 말이 타락한 자에게 임했다고 보았다.
VIII. 츠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와 스위스의 종교개혁
a) 츠빙글리의 성장과정과 신학사상
   루터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스위스의 취리히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츠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인(Wien)과 바젤(Basel)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따르는 고대의 방법(via antiqua)과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506년부터 1516까지 글라루스(Glarus)에서, 1516년부터 아인지델른(Einsideln)에서 신부로서 일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깊은 교제를 가졌는데 1516년에는 바젤에서 에라스무스와 만났다. 츠빙글리는 1516년 성서인식의 명료성에 도달한다: 문자적인 의미는 성서해석의 바른 관문이다.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가 신약성서 원문 연구의 길을 개척한 것에 대해 사의를 표했다. 성서연구 외에 교부들 그 중에서도 어거스틴에 대해 특히 연구하였다.
   1519년부터 취리히에 있는 대성당 교구소속 신부가 되었다. 취리히에 부름을 받은 이후 이제까지 전통에 따라 설교본문을 오직 정해진 복음서 안에서만 해야하는 페리코펜규정(Perikopenordnung)을 무시하고 신·구약 전반을 본문으로 선택하여 설교하였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소시지를 먹는 일에서 발단되었다. 1522년 봄 츠빙글리의 추종자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금식규정"을 어기고 소시지를 먹자 콘스탄츠(Konstanz)의 주교가 그들을 고소하였다. 그러자 츠빙글리는 '음식의 선택과 자유'(Vom Erkiesen und Freiheit der Speisen)라는 글을 통해 이들을 변호하는 자신의 최초의 종교개혁적인 글을 발표하였다.
   스위스는 지리적으로 여러 나라에 둘러싸여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용병으로 나갔는데 1522년 츠빙글리는 소위 "용병으로 출전하는 것"(Reislauf)을 취리히 시와 현에서 금하는데 성공하였다. 1523년 구교회의 대표들과 성서의 원칙, 성상과 미사에 대해 두번에 걸쳐 논쟁을 하였다. 1523년부터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목사들과 시의회 의원들의 위원회를 통하여 점차 진행되었다. 이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의 예배의식과 법을 뿌리채 제거하는 과격한 것이었다. 이것은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행해졌다.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의 미사와 더불어 오르간, 찬송, 그리고 제단이 교회에서 사라졌으며, 더 나아가 성유물, 성상, 종부성사 등이 자취를 감추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개혁교회의 기반을 다진 것이다.
   1525년부터 복음적인 성만찬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갱신과 실제적으로 연관되었다: 미사의 폐지, 성서에 입각한 설교, 성상의 금지, 규칙적인 빈민구제, 유곽의 폐지를 통한 매춘의 폐지, 신학교의 설립(성서번역과 해석을 위한 소위 "예언자"). 1528년 소위 베른(Bern)의 논쟁이 있었다. 종교개혁이 베른에서 제네바까지 퍼졌다. 1529년 카톨릭 제후들의 "기독교연합"과 복음적인 스위스 사이의 무장투쟁은 제1·2차의 카펠전쟁과 스위스의 종파분열을 야기하였다.
   츠빙글리와 루터는 1529년 독일 말부르크(Marburg)에서 열린 성찬논쟁에서 결별하게 되는데 츠빙글리는 성찬의 제정어인 "이것은 내몸이요, 이것은 내피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이해했고 루터는 문자 그대로 떡에 그리스도의 몸이,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피가 실재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츠빙글리는 1531년 로마 카톨릭 교도와의 제2차 카펠전쟁에서 나가 싸우다가 종군목사로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 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 루터와 다른점: 신부였던 츠빙글리는 개인 영혼의 구원에 대한 문제보다는 자기 민족의 어려움에 고통을 받았다. 카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은 창조물의 신격화, 즉 우상숭배에 극을 이룬다. 이와함께 그는 선행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중세후기의 성례전주의(Sakramentalismus)를 반박한다. 복음은 인간의 삶 모든 영역에 관련된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갱신을 추구한 것이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작센 선제후국과는 달리 高地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회적 정신사적인 영향을 끼쳤다: 통치적인 헌법규정들은 시민의 윤리적 정치적 책임을 강화했다. 종교개혁운동에 인문주의적인 영향을 강하게 끼쳤다.
- 츠빙글리의 대표작들: "음식의 선택과 자유"(1522) "결론의 해석과 근거들"(제1차 취리히 논쟁-1523.1.29-에 대한 67개의 결론, 독어로 처음 발표된 복음주의 신학의 교의학). "참종교와 거짓종교에 대한 해설"(1525)
-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의 인식에 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라이프치히 논쟁이후 그는 루터의 교황 교회에 대한 비판에 영향을 받았다. 츠빙글리의 신학은 다음과 같은 요소에 근거하고 있다: 고대의 방법의 의미에 있는 스콜라 철학, 인문주의(스토아적인 영향을 받은 덕의 이상, 성서의 원문연구), 교부연구, 특히 어거스틴.
b) 재세례파와 영성주의자들
  일반적으로 '재세례파'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것은 재세례파를 반대하는 측에서 붙인 이름이고 재세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재세례'라는 용어 대신 '신앙세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재세례파는 취리히의 종교개혁파에서 처음 분열되어 나왔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비판하였는데, 그 이유는 선악을 분간할 수 없고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유아 때 받은 세례는 참세례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아세례를 부패한 교회의 근본적인 표식으로서 이해했다. 이들은 참 믿음과 성결의 표식으로 주는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구성된 교회가 참교회라는 교회관에 뿌리를 두고 신앙세례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525년 1월 21일 취리히에서 처음 신앙세례가 행해졌다.
   재세례파 운동의 초기에 활동했던 두 사람으로는 취리히의 시민인 그레벨(Konrad Grebel, 1498경-1526)과 만츠(Felix Mantz, 1500경-1527)가 있다. 이들은 인문주의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동조했던 사람들이었다. 취리히에서 첫 재세례자인 만츠는 취리히의 현청으로부터 1527년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순교로 이 운동은 스위스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 남부 독일과 중부 독일로 확산되었다. 특히 도시에서 재세례파는 환영을 받았으며 이들은 여러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이 운동의 확산으로 영성적이고 신비적이며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사상이 재세례파에 스며들었다.
   재세례파의 신앙고백서는 자틀러(Michael Sattler)에 의해 1527년 '슐라트하임(Schlatheim) 신앙고백'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되었다. 이 신앙고백서에는 초기 재세례파의 다음과 같은 표식들이 특징을 이루고 있다: 초기 기독교적인 모범에 따른 공동체적 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와 종교개혁적인 교회와의 경계, 세상과의 구별, 맹세, 전쟁출전의 임무와 이자지불에 대한 거절, 공무원의 직위를 갖지 않음, 공동체 식사로서 성만찬.
   재세례파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좌파'로 일컬어지는 영성주의자들(Spiritualisten)은 모든 외적인 은혜의 수단들인 성례전과 말씀을 거부하고 특히 영혼의 내면에 있는 영의 활동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이들을 소위 "광신자들"(Schw rmer)이라고 일컬었다. 영성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제발두스 학교의 교장인 한스 덴크(Hans Denck, 1500경-1527)와 제바스티안 프랑크(Sebastian Frank, 1499-1542)가 있다. 프랑크의 '터어키 연대'(1531)와 더불어 그는 영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최초의 복음주의적 사가이다.
   슐레지엔의 귀족인 Kaspar von Schwenckfeld(1489-1561)도 영성주의자에 속한다. 그는 영성주의적인 성찬론을 주장한다. 그의 추종자들은 슐레지엔, 남독일 그리고 후에 Neuen Welt에 모여들었다.
  그 이외에 재세례파에 속한 사람들: Balthsar Hubmaier(1528년 화형), Hans Hut(1527년 사망), Jakob Huter(1536년 인스부르크에서 처형당함).
IX. 종교개혁의 위기의 해 1525년
a) 루터와 에라스무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쟁
  1525년은 루터의 생애의 위기의 해였다. 농민전쟁과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이 그것이다. 루터는 농민전쟁으로 농민으로부터 지지를 잃게 되었고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으로 인문주의자와 결별하게 되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와 대학개혁에 관해서 1517년 이전부터 슈팔라틴(Spalatin)과 랑(Joh. Lang)을 통하여 편지교환을 했다.
  루터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견해: "소요"를 일으킨 자는 루터가 아닌 루터의 적수들이다. 루터의 대한 파문위협의 조서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1520.6. Exsurge domine).
  사람들은 에라스무스를 루터 편으로 이해했다(루벵, 홀란드, 파리, 스페인, 이탈리아). 에라스무스가 루터의 이름으로 글들을 써서 발표한 것이라는 풍문도 나돌았다.
  에라스무스가 1522.3.30 프리크하이머(Willibald Prickheimer)에게 쓴 편지: "루터란들은 비방으로 나를 위협하고, 황제는 내가 루터 소요의 모든 머리요 근원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두 파로부터 모두 불신임 당하고 있었다. 또한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쓰라는 위협을 받고 있었다. "왕들, 친구들이 모든 점에서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쓰라고 독촉했다"(1524.6.19).
- 1524. 9. 에라스무스는 루터를 반박하는 글 "자유의지에 관한 논문(Diatribe de libero arbitrio)"을 썼다. 루터는 이에 반박하는 글인 "종의 의지"(De servo arbitrio)를 1525년 9월에 쓰기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완성하여 12월에 발행하였다. 늦어진 이유: 칼슈타트와 논쟁, 농민전쟁.
1526. 2. Erasmus는 이에 대해 답변하였다: "방패(Hyperaspistes)". 이에 대해 루터는 더 이상 답변하지 않았다.  대신 에라스무스에게 자신의 격렬함에 대해 사과를 했다.
- 에라스무스의 글은 Diatribe: 서문: 보편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를 다룸.
           설명: 자유의지에 관해서 구약과 신약의 근거를 들어 증명.
           자유의지를 반박하는 논지를 반박하는 글
           결론: 자신의 관점을 요약: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자유의지란 인간이 구원으로 혹은 멸망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의 힘(Kraft)이다.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시작과 마지막에 하나님의 활동이 있지만 이 가운데 또한 인간이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의 협력이다.  
  에라스무스에게 극단적인 과격주의는 거리가 멀다.  에라스무스는 은총과 자연의 관계를 아퀴나스와 비슷하게 본다: 은총이 자연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Gratia perficit naturam).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의 근거로 구약과 신약을 든다.  그리고 그는 성경이 자유의지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반대자의 견해를 반박하며 자신의 견해를 요약한다.
- 루터의 종의 의지
구성
서론: 보편적이고 방법론적이다.
보편적 서론: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회의론자임을 주장. 확신이 없는 기독인은 기독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비밀이 있지만 성서는 명료하다. 성서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방법론적 서론: 전통이 아닌 성서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교회는 역사적인 모습으로만 동일시 되어서는 안 된다. 전통에 의존하는 것은 교리적인 시금석이 아니다. 교리적인 진리를 위한 오직 두개의 척도가 있다; 성령의 내적 증거와 성서의 외적인 명료성이다.
이어서 성서의 증거; ① 자유의지를 주장한다는 성서의 증거에 대한 반박. 성서의 중심은 바울의 칭의론의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에라스무스는 율법과 복음, 계시된 하나님과 숨겨진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체의 차이를 오해했다.
② 성서를 근거로 하여 자유의지 반박.
③ 바울과 요한의 글들을 통해 자유의지 반박.
  세가지 질문: 루터의 결정주의(Determinismus)
               숨겨진 하나님
               예정론
루터의 종의 의지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주제가 담겨져 있다: 성서에 대한 인식, 교회론, 칭의론(인간론과 기독론), 하나님의 상(deus abscondifus et revelatus).
- 루터는 성서에서 인간의 비자유의지를 확신한다. 그는 인간의 비자유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인간을 하나님이나 사탄이 타는 말로 비유하였다.  에라스무스와는 대조적으로 루터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성서의 확실성과 하나님 한 분만의 역사를 주장한다.
  
b) 농민전쟁
- 15세기에 무거운 짐에 대항하는 농민들의 동맹이 이루어짐. 농민들은 15세기의 변화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상황들로 자기 인식을 하게 되었다.
- 1524/25. 바이에른과 북독일을 제외한 지역에서 농민봉기들이 일어났었다.
- 고지 슈바벤지역 농민들의 프로그램 글: "슈바벤 농민들의 12조항"(1525. 3). 작성자: Sebastian Lotzer와 크리스토프 샤펠러.  요구사항: 성직자 선택의 자유, 농노의 폐지, 세금의 부담 억제
- 루터의 답변: "평화를 위한 경고"(1525. 4).  루터는 제후들과 농민들에게 평화적인 해결을 촉구.  이 일은 세속의 법과 관련된 것이다.  제후들이 먼저 잘못했다.  그러나 농민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빌미로 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울 권리가 없다.
- 튀링엔 지역의 봉기에 직면하여 루터는 부록이 포함되어 있는 자신의 두 번째 글을 발표하다(1525. 5). "또한 도적과 살인자같은 다른 농민들에 반대하며".  이 부록은 별도로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인쇄 되었다: "도적과 살인자같은 농민들에 반대하며". 이로써 루터가 단지 제후들의 편에 서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봉기를 일으킨 농민들에 대한 루터의 깊은 증오는 그의 종말론에서 온 것이다.  루터는 농민전쟁에서 복음의 승리를 반대하는 악마의 마지막 발악을 보았다.
- 1525. 5.14.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에서 농민들은 참패를 당함: 카톨릭과 종교개혁파의 제후들로부터 농민들은 완전히 멸절되었다. 약 6000명이 죽었다.
- 루터는 "농민들을 반박하는 편지"(Sendbnef von dem harten B chlein wider die Bauern, 1525년 7월)에서 자신이 농민들을 비판한 글들을 정당화 하였다.
- 농민전쟁이후 종교개혁은 "국민운동"으로서 계속되었지만 제후의 권력이 우선적이 되었다.
X. 종교개혁의 지역적인 성립(1526-1530)
a) 정치적인 상황
- 1524-26 사이에 여러 형태의 제후동맹들이 결성되었다: 1524년 레겐스부르크 연맹(Regensburger Bund). 바이에른(Bayern)의 지도 아래에 있었던 카톨릭의 정치세력.
1525년 데사우 연맹(Dessauer Bund). 북독의 카톨릭 제후들의 정치 동맹.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선제후국 마인츠(Kurmainz),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뷰텔(Branschweig - Wolfenb ttel). 이에 대항한 루터파 제후들(헷센의 방백인 필립과 작센의 선제후 요한)의 토르가우 연맹(Torgauer Bund, 1526)이 있다.
- 제1차 슈파이어(Speyer) 제국의회는 보름스 칙령의 실행을 무력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카톨릭의 제후들에게 이로운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프랑스 왕 프란츠(Franz) 1세에 대한 칼 5세의 승리는 교황과 프랑스의 동맹을 야기 시켰다. 이것이 소위 꼬냑 동맹(Liga von Cognac)이다(1526년).
b) 루터교의 초창기 지역교회
- 카톨릭 제후들의 분열로 1526년 슈파이어에서 타협안이 성립된다: 이 타협안으로 헷센과  작센(Sachsen)에서 독자적인 교회 개혁안을 이룬다.
- 1526년의 홈부르크(Homberg) 공의회는 헷센의 모델을 제시한다: 밑으로부터의 교회 구성, 개교회들이 총회의 대표들을 선출한다. 신앙의 공동체(Glaubeusgemeinde)와 시민 공동체(B rgergemeinde)의 확실한 차이.  신앙의 공동체는 순결, 그리고 성결 안에서 산다(엄격한 교회 규율). 루터가 항의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 헌법은 바로 "율법의 무리"(Haufen Gesetze)였다.
- 작센 선제후국에서는 나라의 통치 위원회를 통한 교회 조직이다: 작센 선제후국의 교회와 학교 탐방이 1526-30에 이루어짐: 법률가들과 신학자들의 위원들이 통치자의 칙령을 통해 예배, 교리, 강의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 루터 자신이 작센 선제후국 교회들에 대한 시찰을 야기 시켰다. 감독들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제후가 비상 감독(Notbischof)이 되어야 한다.
- 작센의 모델이 채택되었다: 과도기적으로  통치자의 교회 지배 (landesherrliches Kirchenregiment)에 대한 규정이 되었다. 멜랑히톤(Melanchthon)이 이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세속권위는 하나님의 계명들의 두 판의 보호자이다(custodia utriusque tabulae).
c) 성찬논쟁
- 처음에는 루터가 칼슈타트와 논쟁하였다. 1526-1529년에 성찬논쟁은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글의 논쟁이다.
- 츠빙글리는 1524년 말 성찬의 제정어를 상징적으로 주장하였다(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인 후니우스Hoenius의 영향으로  이다 est를  상징한다 significat로 이해하였다).  바젤과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들도 상징적으로 이해하였다: 외콜람파트( kolampad)와 부처(Bucer).
- 중요한 논문들:
츠빙글리:  Amica exegesis (사랑받았던 해석).
루터: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지금도 변함없으며, 광신자를 반박함 .
츠빙글리:  이 말씀들은  ... 영원히 과거의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
루터: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관하여. 신앙고백  (1528년 3월).
-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있어서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직접 들어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육신으로 임재한다는 것은 제외되었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하늘과 땅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이에 반하여 루터는 자신의 성육신 신학을 세운다. 그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떤 하나님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 1529년 성찬논쟁은 종교와 정치의 땔 수 없는 관계를 보여준 것이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1526년의 결정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에 대하여 5개의 제후국과 14개의 자유도시들이 1529. 4.19 저항을 했다. 헷센, 작센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안스바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안할트(Hessen, Kursachsen, Brandenburg-Ansbach, Braunschweig-L neburg, Anhalt).
d)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정에 대한 항거(1529)
- 이 저항에서 "프로테스탄티무스"(Protestantismus)라는 말이 왔다(Protestari = 복음에 관련하여 양심의 자유를 위해 증언함).
- 말부르크(Marburg)의 종교 회담(1529.10.1-4)에서 헷센의 필립(Philipp)은 이와는 반대로 성찬론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였다.  15개항은 일치하였다.  단지 물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방법에 있어서 하나가 되지 못하였다. 마부르크에서 논쟁에 참여했던 사람들: Luther, Melanchthon, Zwingli, 외콜람파트( kolampad), 그 외에도 Jonas, Brenz, Osiander와 Bucer.
e)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1530)
제국의회(Reichstag)란 무엇인가?
   14세기부터 점차 제국의회가 열림; 관할권과 절차와 마찬가지로 참여권과 참여의무는 오랫동안 확실하지 않았다. 1485-97년에야 Berthold von Henneberg의 인도 하에 제국의회 헌법의 완성을 이루었다. 제국의회는 이것을 소집하고 제안을 했었던 황제에 대한 신분 대표자들의 조직이 되었지만 심리들은 할 수 없었다. 제국의회는 독자적으로 협의를 하는 세 개의 의회(선제후, 제후 그리고 자유도시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결정들은 마인츠 선제후의 지도하에 차례차례 표결에 부쳐졌다; 이것들은 황제의 동의를 통해 효력을 발생할 수 있었으며 1497년부터 제국의회 결의 조례를 간행하였다. 종료에 임박해서 나온 문제들에 대해서는 위원회들의 조직에 넘겨졌다. 자유도시들의 의결권은 오랫동안 확실하지 않았다. 베스트팔렌 조약 때에야 자유도시들이 의결권(Votum decisivum)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국의회의 결의가 참석하지 않은 신분 대표자들에게도 강제적인 힘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미결정의 상태로 남아있다. 제국의회의 심의 사항들과 이에 따르는 입법은 실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의 실행은 지역의 지배권할 아래 있어서 제국은 실제적으로 원칙만 줄 수 있었다.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가 열리게 된 이유
   1530년 2월 24일 볼로냐에서 독일황제의 마지막 대관식이 교황에 의해 거행되었다. 9년간의 부재 후에 칼 5세는 독일로 돌아왔다. 제국의회를 열어 터키에 대한 도움을 청하는 일 외에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터키 문제의 어려움 가운데 황제는 종교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일치를 멀리할 수 없었다; 1530년 3월 11일 토르가우(Torgau)에서 제국의회 소집을 공고하는 글에서 그는 "각 사람의 판단과 견해 그리고 의견을 듣고 싶다"는 화해적인 어조를 띠었다.
- Melanchthon은  선제후 작센의 요한(Johann v. Sachsen)의 부탁으로 신앙고백서를 작성
-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약자 CA)이 1530. 6.25. 제국의회에서 낭독되었다.
- Johann Eck는 황제의 부탁으로 CA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반박'(Confutatio).
- Karl 5세는 CA를 거부하였다.
- Melanchthon은 그 이후 자신의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변증 (Apologie der CA)을 발표하였다.
- CA는 멜랑히톤의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나온 것인데 두 부분으로 내용을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 제1-21항. 신앙과 교리에 관하여. 종교개혁적인 입장은 성서와 고대 교회들의     신앙고백들과 일치함을 강조. 때문에 구교와의 논쟁은 단지 몇 가지 오류에 대한 것이다.
  둘째 부분: 제22-28항. 논쟁적인 문제들. 미사, 배잔금지, 독신제, 금식, 수도사 서원.
- Luther는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 기간 동안 페스테 코부르크(Veste Coburg)에 있었다.  그는 CA를 칭찬했지만 교황 수위권과 연옥의 불에 대한 비판이 없었음을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