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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김영진 외 15인 지음, 『구약성서개론. 한국인을 위한 최신 연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585-610쪽(‘제23장 예레미야’)에 실린 글의 원고입니다. 이 책의 편집과정에서 전체 편집자가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은 여기에서 따로 표시하지 않지만, 이 책의 쪽수는 쪽이 바뀌는 곳에서 [앞쪽수/뒷쪽수]의 형식으로 표시했습니다. 이를테면, [600/601]은 이 표시가 있는 곳에서 600쪽이 끝나고 601쪽이 시작됨을 뜻합니다. 이 글은 핵심적인 내용은 2000년 말에 대부분 작성되었습니다.




예레미야서 개론



1. 예레미야서의 짜임새와 내용


슈투트가르트 비평판 히브리어 성경(BHS)의 쪽수로 이사야서보다 11쪽이나 더 될 정도로 구약의 예언서 가운데서 가장 긴 책일 뿐만 아니라, 낱말 수 21819로 보면 시편의 19531보다 더 많아서(THAT II, 539-540) 구약 성경에서 가장 긴 책인 예레미야서는 표제와 소명 보도문인 1장, 유다에 대한 심판 예언 모음인 2-25장, 구원 예언 모음을 중심한 30-35장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바룩의 예레미야 전기’ 또는 ‘예레미야의 수난기’(26-29장, 36-45장), 이방 나라들에 대한 예언 모음인 46-51장, 유다 멸망에 대한 역사 기록인 52장의 일곱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2-25장은 다시 하나님 백성의 배신과 닥칠 재난에 대한 말씀과 돌아오라는 초청의 말씀이 중심을 이루는 2장 1절-4장 4절, 북으로부터 올 적군에 대한 묘사가 주로 나오는 4장 5절-6장 30절, 성전 설교로 시작하여 공동체의 기도로 끝나는 7-10장, 언약 파기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하여 탄식으로 끝나는 11-13장, 가뭄에 관련된 본문이 중심을 이루는 14-15장, 징표가 되는 예언자의 삶(아래 3의 [3] 참고)에 대한 본문으로 시작하여 안식일 관련 본문으로 끝나는 16-17장, 토기장이 관련 본문이 중심을 이루는 18-20장, 시드기야와 예레미야의 만남에 대한 본문(21:1-10)과 유다 왕가에 대한 말씀(21:11-23:8)과 예언자들에 대한 말씀(23:9-40)과 무화[585/586]과 광주리 환상(24장)으로 이루어진 21-24장, 예레미야 예언의 중간 결산(25:1-14)과 이방 민족들에 대한 총괄적인 재난 예언(25:15-38)으로 이루어진 25장의 아홉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25장의 중심 주제인 닥칠 심판에 대한 말씀은 한편으로 징표가 되는 예언자의 행위(13:1-11; 19:1-13)나 삶(16:1-13)이나 가뭄 관련 본문(14:1-15:5)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예언자가 독백 형식으로 하는 탄식, 탄식 묘사, 탄식 촉구(4:19-21; 6:24-26; 8:14-23[한글 성경9:1]; 9:9[10]-21[22]; 10:19-22; 14:2-6 등)는 하나님의 탄식(4:22; 12:7-12; 15:5-9)으로 뒷받침된다. 11-20장에는 예언자 직책의 수행과 관련하여 예언자가 안팎으로 겪는 갈등과 고난의 문제를 두고서 예언자가 하나님과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특별한 본문이 다섯(11:8-12:6; 15:10-21; 17:12[또는 14]-18; 18:18-23; 20:7-18) 들어있는데, 이를 흔히 ‘예레미야의 고백’이라 부른다.
‘예레미야 수난기’의 앞 부분인 26-29장은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알려주는 26장, 바벨론의 멍에를 메는 문제를 두고 예레미야가 거짓 예언자들, 특히 하나냐와 다투게 되는 27-28장,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사람들에게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가 들어 있는 2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30-35장에서 그 첫 부분인 30-31장은 구원 예언의 모음(이른바 ‘위로의 작은 책’)이고, 32장에는 아나돗의 밭을 사는 징표 행위와 그와 관련된 말씀이 들어 있고, 33장은 다시 구원과 회복의 말씀이고, 34장은 시드기야에 대한 재난 예언으로 레갑 족속에 대한 구원 예언인 35장과 대조를 이룬다.
‘예레미야 수난기’의 뒷부분인 36-45장의 첫 장 36장에는 여호야김 때 기록했지만 불탔다가 다시 기록된 두루마리의 이야기가 나오고, 37-38장에서는 시드기야 시대 예레미야가 겪는 어려움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고, 39장은 유다 멸망 때의 상황을 알려주며, 40-42장에서는 바벨론 왕이 세운 총독 그다랴가 암살된 뒤 유다 사람들이 이집트로 달아나기까지의 경과를 다루고, 43-44장에서는 이집트로 간 유다 사람들에게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이 중심을 이루며, 바룩의 탄식과 이에 대한 야훼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45장으로 ‘수난기’가 끝난다.
46-51장은 표제(46:1), 이집트(46:2-28), 블레셋(47장), 모압(48장), 암몬 자손(49:1-6), 에돔(49:7-22), 다메섹(49:23-27), 게달과 하솔 나라들(49:28-33), 엘람(49:34-39), 바벨론(50-51장)에 대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다.[586/587]



2. 예레미야서 칠십인역의 특성


『슈투트가르트 히브리 성경』의 한 부분으로 루돌프(W.Rudolph)가 1970년에 엮어낸 예레미야서의 기본 본문인 레닌그라드 사본보다 한 세기나 앞선 알렙포 사본을 기본 본문으로 하여 1997년에 출간된 『히브리 대학교 예레미야서』(Rabin/Talmon/Tov 1997)에서는 고대 일차 번역본들의 이독법, 유다 광야 사본과 랍비 문헌의 이독법, 중세 히브리어 사본들의 이독법(異讀法, variant), 철자법이나 모음이나 억양 기호의 차이를 각기 독립적인 비평란에서 소개함으로써 거의 2000년의 기간에 걸치는 히브리어 예레미야서 본문의 역사를 압축하여 제시한다(박동현 1998).
예레미야서 칠십인역 본문에만 있고 마소라 본문에는 없는 본문이 히브리 낱말 수로 300개 정도의 분량이고, 그 반대의 경우가 3000개 가량이어서(Min 1977), 칠십인역 본문은 마소라 본문(MT)보다 팔 분의 일 정도 짧다. 25장 14절부터는 장의 배열 방식도 달라서, 칠십인역 25장 14절-31장(마소라 본문으로는 46-51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개별적인 예언이 엘람, 이집트, 바벨론, 블레셋, 에돔, 암몬, 게달, 다메섹, 모압에 대한 예언의 순서로 이방 나라들 전체에 대한 예언인 32장 1-24절(마소라 본문으로는 25:15-28)보다 먼저 나온다. 뒤이어 이른바 예레미야의 수난기인 33-37장과 43-51장(마소라 본문으로는 26-30장과 36-45장)과 구원 예언 모음인 38-42장(마소라 본문으로는 31-35장)이 나오고, 마지막 장 52장은 마소라 본문과 마찬가지로 유다 멸망에 대한 기록이 차지하고 있다. 이리하여 칠십인역 예레미야서는 마소라 본문의 이사야서나 에스겔처럼 하나님 백성 심판, 이방 민족 심판, 하나님 백성 구원이라는 종말론적인 틀을 따르고 있다.
적어도 둘 이상의 번역자(1-28장과 29-52장)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예레미야서 칠십인역 본문과 마소라 본문의 이러한 차이는 예레미야서 칠십인역이 마소라 본문을 축소 번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칠십인역의 히브리어 대본이 마소라 본문보다 먼저 생겼으리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즈음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는 예레미야서 칠십인역의 번역이 이를테면 욥기의 칠십인역과 달리 히브리어 본문에 매우 충실하고, 대체적으로 문맥에도 잘 맞지 않게 마소라 본문에 더 있는 부분들은 문체상으로나 내용상으로 덧붙여 풀이하는 성격을 띠며, 쿰란 제4동[587/588]굴에서 나온 예레미야 단편 사본 가운데서 주전 50년 쯤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4QJerb(9:21-10:21)와 4QJerd(43:2-10)이 칠십인역 본문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예레미야서 칠십인역의 히브리 대본에 여러 가지 내용이 덧붙어서 포로기 이후에 마소라 본문이 이루어졌으리라는 가정 아래 이 둘을 각각 첫째 편집본(edition I), 둘째 편집본(edition II)으로 보자는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이는 성서 본문 연구에서 본문 비평과 문헌 비평 또는 편집 비평이 서로 엄격히 분리되는 과정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겹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한다(Tov, in: Bogaert [ed.] 1981: 145-167; Huwyler 1997: 60-61). 그렇지만, 칠십인역의 히브리어 대본을 확장한 것이 마소라 본문이라고 보기보다는 두 본문은 히브리어 본문의 여러 전통 가운데 두 가지이고, 전체적으로 보아서 칠십인역의 히브리어 대본이 마소라 본문보다 오래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Stipp 1992: 5). 그렇지만, 마소라 본문이든 칠십인역의 히브리어 대본이든 각각 그 나름대로 발전해 왔으므로 실제 주석 과정에서 어느 본문을 따를 것인지는 한편으로는 개별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좋다(Schmid 1996: 21, 23).
더 나아가서, 이처럼 예레미야서의 경우에는 칠십인역 전통과 마소라 본문 전통이 상당히 독자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데다가, 초대 교회의 구약 성경이 칠십인역이었고 동방 교회에서는 지금도 칠십인역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두 전통을 앞뒤로 또 나란히 번역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까지 대두되었다(민영진 2000).



3. 예레미야서 연구의 역사


1980년대 말까지 이루어진 예레미야서 연구의 역사는 헤르만(Herrmann 1990)이 포괄적으로 잘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그 이후 십 여 년 동안에 나타난 새로운 연구 경향에 집중하고, 그 전의 것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다루기로 한다. 또 예레미야서 칠십인역 연구의 역사는 이미 바로 앞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빼기로 한다. 1985-1999년의 예레미야서 관련 문헌 목록은 카롤의 연구사 소논[588/589]문(Carroll 1996: 139-159; 2000: 34-58)에 들어 있다.


(1) 자료비평, 편집비평

다른 예언서와는 달리 예레미야서에는 시문 형식의 예언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예언자의 탄식과 기도처럼 보이는 시문이, 다른 한편으로는 예언자에 대한 산문 형식의 글과 심지어는 설교문처럼 읽을 수 있는 산문 형식의 글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또 예레미야서 안에서 서로 중복되는 부분(Macchi, in: Curtis/Romer [eds.] 1997: 119-150 참고)과, 구약의 다른 본문, 특히 신명기 및 신명기 역사서에 나오는 표현을 상기시키는 부분도 적지 않다(Parke-Taylor 2000).
이리하여, 일찍이 둠(Duhm 1901)이 예레미야의 시문(약 280절)과 바룩의 책(약 220절)과 나중에 덧붙은 부분(약 850절)의 세 전승 묶음으로 예레미야서가 이루어진 것으로 주장한 데 이어, 모빙켈(S.Mowinckel, Zur Komposition des Buches Jeremia, 1914)은 1-45장에서 주전 6-5세기에 생긴 예레미야 예언 모음 A자료(1:1-16; 2; 3:1-5,19-25; 4; 5; 6; 8:4-23; 9; 10:17-22; 11:15-23; 12:1-12; 13:12-27; 14; 15; 16; 17:1-4,9-18; 18:18-23; 20:14-18; 21:11-14; 22:10-20; 23:5-6,9-24,29; 24:1-10[?]; 25:15-16,27-38), 조금 뒤에 바룩이 아닌 다른 무명의 사람에 의해 기록된 역사 이야기 모음 B자료(19:1-20:6; 26; 28; 29:24-32; 36; 37:1-43:12; 44:15-30), 주전 5세기 말에 생긴 신명기 전통의 연설문 모음 C자료(7:1-8:3; 11:1-14; 18:1-12; 21:1-10; 25:1-11전; 32:1-2,6-16,24-44; 34:1-22; 35:1-19; 44:1-14. 또 27; 29:1-23; 3:6-13; 22:1-5; 39:15-18; 45장도 이에 속한다고 본다), 나중에 덧붙은 부분을 뺀 30-31장으로만 생긴 D자료를 구별해 내어, 주전 580-480년에 이 네 자료의 편집이 있은 뒤에 46-52장과 다른 보충 부분이 덧붙어 오늘의 예레미야서가 되었다고 보았다. 이를 조금 수정하여 루돌프(Rudolph 31968: XIV-XXII)는 30-31장과 46장 1절-49장 33절을 A자료에, 34장 1-7절과 45장과 51장 59-64절을 바룩이 쓴 B자료에 넣으며, 신명기 역사 전통의 손질을 거친 예레미야의 연설문 모음인 C자료의 저자가 예레미야서의 주 편집자일 가능성을 추측했다. 자이볼트(Seybold 1993: 21-35)는 모빙켈의 견해를 그 나름대로 수정하여, 1-25; 30-31; 46-49장에 들어 있는 예레미야의 시[589/590]문을 A자료로, 26-45장에 들어 있는 이야기식으로 된 전기적인 본문들을 B자료로, A와 B자료가 합한 것(1-25; 26-45; 46-51장) 곳곳에 들어 있는 신명기 또는 신명기 역사 전통의 작업 부분을 C자료층(주전 580-520년)으로, 마지막으로 전체 전승을 한데 묶는 과정에서 생긴 편집 작업 부분(52장 포함)을 D자료층(주전 500년 이후)으로 구별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얏(Hyatt, in: Perdue/Kovacs 1984: 247-268[=1951]과 1956년의 주석)과 틸(Thiel 1973; 1981)은 예레미야서 1-45장 전체에 걸쳐 신명기 역사 전통의 편집자가 손질한 부분(D로 표시)을 자세히 밝혀내었다. 틸에 의하면 이는 주전 550년 경 유다 땅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당시 상황에 맞게 새롭게 풀이하여 지난 역사를 이해하고 앞날에 희망을 품게 했는데, 물론 그 뒤에 열방 예언을 비롯하여 다른 보충 부분이 덧붙은 편집이 더 있었다. 이와는 달리 하얏은 신명기 역사 전통의 편집 활동이 이집트 땅에서 있었던 것으로 본다.
예레미야서의 산문 부분을 니콜슨(E.W.Nicholson, Preaching to the Exiles, 1970)은 신명기 역사 전통의 바벨론 포로 공동체가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예언자의 말을 새롭게 해석하여 편집한 산물로 보았다면, 카롤(R.P.Carroll, From Chaos to Covenant, 1981과 1986년의 주석)에 따르면 예레미야서는 주로 주전 6세기 신명기 역사 전통에 선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편집 활동으로 생겨난 책이다. 나중에 카롤은 자신의 예레미야서 이해를 ‘본문 사이의 관련성’(intertextuality)과 ‘이념 비판’(ideological criticism)의 개념으로 설명한다(Carroll, in: Diamond/O'Connor/Stulman [eds.], 220-243).
1970-80년대에는 예레미야서의 각 부분에 대해 편집사적으로 연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그 가운데 특징 있는 것으로는 뵈머(S.Bohmer, Heimkehr und neuer Bund, 1976)가 30-31장을 연구하면서 예레미야의 말과 신명기 역사 전통에 의한 층 사이에 ‘예레미야 이후의’(nachjeremianisch) 층이 있었다고 주장한 것을, 오다시마(Odaschima 1989)는 이 표현을 ‘신명기 역사 이전’(vor-deuteronomistisch) 층으로 고치면서 30-31장뿐만 아니라 2,3,6,10장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제시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예레미야서의 한 부분을 중심으로 예레미야서의 생성 과정을 연구하는 1990년대 경향의 한 가지 보기로는 <사림>(‘방백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26장과 36-43장과 45장을, 마소라 본문에 대한 칠십인역의 상대적 우월성을 전제한 본문 비평, 자료 비평, 편집 비평, 양식 비평을 유기적으로 관련시켜 적용하여 살펴 본 결과, 유다[590/591] 왕국 말기부터 포로기를 거쳐 포로기 이후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다 사회에서 다양한 역학 관계를 유지해왔던 여러 무리의 귀족들 - 요시야 시대의 주도적인 개혁자 집안이었으며 예레미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사반 집안과 예레미야를 반역자로 몰아 죽이려 했던 귀족들이 그 대표적인 두 무리이다 - 사이에 벌어졌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다툼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예레미야 전통이 지속적으로 새롭게 해석되어 이루어진 것이 이 본문들이라는 주장(Stipp 1992: 287-299)을 들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슈미트(Schmid 1996)는 예레미야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책으로서 ‘써나가기’(Fortschreibung)를 통해 이루어져 왔으리라는 전제 아래, 예레미야서 안에 들어 있는 여러 책 가운데 하나인 30-33장의 형성사를 먼저 살펴본 뒤에 이를 중심으로, 열 단계의 확장 편집을 거쳐 오늘의 예레미야서가 되었다는 포괄적인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4-6장(*표는 나중에 덧붙은 부분을 뺀 첫 알맹이 부분을 가리킨다), *8-10장, *11-23장에 들어 있는 예레미야의 재난 예언과 탄식 및 *46-49장의 열방 예언에 예루살렘을 단수 이인칭 여성으로 부르면서 유다의 죄를 지적하는 *2-4장 본문과 바벨론 관련 본문인 *50-51장이 이른 포로기에 덧붙어 예레미야서의 첫 단계를 이루고, 늦은 포로기에 *2-23장과 *46-51장 사이에 *30-31장(30:4,5-7, 12-17, *18-21; 31:4-5, 15-22,26)이 들어간 것이 둘째 단계이며, 셋째 단계로 주전 6세기 말 다리오 일세 때 포로 기간을 70년으로 제시하는 25장 12절과 29장 10절의 프로그램을 따라 *37장 10절-43장 7절(과 30장 8-9절[?])이 들어간 책이 되었고, 넷째 단계로 이른 주전 5세기에 24장을 중심 본문으로 하여 <골라>(바벨론에 사로잡혀간 유다 사람들)의 구원에 촛점을 맞추어 30-33장의 경우에는 32장(3-5절), *16-35절, 42-44절이 덧붙는 편집(K.-F.Pohlmann, Studien zum Jeremiabuch [Got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8] 참고)이 있었으며, 이것을 다섯째 단계로 늦은 5세기에는 모든 디아스포라에게로 확장 적용하도록 30-33장의 경우에는 32장 37-41절을 덧붙여 새로 썼고, 뒤이어 여섯째 단계로 이른 4세기에 이르도록 디아스포라에 대한 조건부 약속의 선포로 새롭게 이해되었고, 일곱째 단계로 늦은 4세기에 30-33장에 30장1-3절, 31장 27-30절, 31-34절을 덧붙이는 등으로 새 언약의 관점에서 예레미야서를 새롭게 읽게 편집하였고, 여덟째 단계로 4세기 말에 30장 23절-31장 3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예레미야서 전체를 세계 심판 예언으로 이해하게 하였고, 아홉째 단계로 같은 시기에 본디 예레미야서의 열방 예언 뒤에 붙었을 이사야 40장 이하 본문(대하 36:22 참고)이 이사야서 뒷부분으로 옮겨가면서 칠십인역 예레미야서의 히브리어[591/592] 대본에서 열방 예언을 예레미야서 가운데로 옮겨 예레미야서의 칠십인역 전통과 마소라 전통이 갈라지게 되었으며, 열째 단계로 33장 14-26절에서도 똑똑히 드러나듯이 다윗 왕조의 회복에 따른 전면적인 회복의 관점에서 마지막 편집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종래의 문헌 비평 및 편집 비평 방법을 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미쌍관(inclusio) 등의 수사 비평의 관점도 원용하고 있는 슈미트의 이런 주장은 예레미야서의 핵심 부분이 시간이 흐르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편집 과정을 거쳤다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확장되어 오늘의 예레미야서가 생겨났다는 ‘구르는 몸’(rolling corpus) 이론(McKane 1986)과 예레미야서가 서너 가지 자료로 이루어져 있다거나, 예레미야서가 신명기 역사가 전통에 의해 체계적인 편집 과정을 거쳤다고 보는 견해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2) 수사비평 및 기타 공시(共時)적 연구

한편 예레미야서의 산문에 나타난 다양한 문체와 표현 방식을 문헌 비평이나 편집 비평의 관점보다는 주전 7세기말과 6세기초 유다에 널리 퍼져 있던 수사적 산문의 독특한 경우로 보아서 예언자 자신 또는 측근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J.Bright, in: Perdue/Kovacs [eds.] 1984: 193-212[=1965]와 1965년의 주석; W.L.Holladay, ‘Prototype and Copies’, JBL 79[1960] 351-367 등; H.Weippert, Die Prosareden des Jeremiabuches, 1973)에 뒤이어, 마침내 런드봄(Lundbom 1999)은 예레미야를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수사(修辭) 학교에서 가르친 정통 히브리 수사학에 능숙한 예언자로 보고, 본문의 최종 형태 곧 마소라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수미쌍관법(inclusio)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사학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본문의 메시지를 밝혀내는 데 주력하는 수사비평의 방법을 써서, 예레미야의 탁월한 수사학적 능력을 예레미야서 여러 본문에서 찾아내어 제시하는 방식으로 본문을 주석한다.
다른 한편으로 힐(Hill 1999)은 리꾀르(P.Ricoeur)의 은유(metaphor) 규칙 이론을 원용한 공시적인 본문 이해 방법을 써서 특히 바벨론이 예레미야서 마소라 본문 20장 1-6절과 25장과 28-29장과 50-51장에서 여러 가지 뜻을 지닌다는 점을 밝힌다. 곧, 예레미야서 마소라 본문에서 바벨론은 그저 야훼의 심판 도구나 이스라엘의 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야훼의 심정을 지니고서 유다에 대해서 여[592/593]호수아나 다윗처럼 야훼의 일을 수행하는 종으로서(27장), 때로는 유다와 마찬가지로 범죄하고 야훼의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50-51장), 때로는 야훼께서 약속의 땅에 약속하신 행복을 제한한 기간 안에서라도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29장), 때로는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한계를 넘어서 야훼를 대적하는 자의 원형(25:15-29)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러한 예레미야서 마소라 본문의 최종 모습은 결국 한편으로는 바벨론 포로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고(렘1:1-3과 52장)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 중심의 신학에서 벗어난 포로기 이후 공동체의 관심을 반영한다고 본다.
스털맨(Stulman 1998)은 통시적 연구의 결과를 고려하면서도 예레미야서를 저자 중심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본문 중심으로 보는 공시적 이해를 시도한다. 그리하여, 통시적 연구에서 말하는 C 자료에 작가인 동시에 독자의 기능을 부여하면서, 예레미야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산문 부분이 '책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Sitz im Buch)를 거시구조(macro structure)의 관점에서 살펴본 결과, 예레미야서 최종 본문은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체제의 몰락과 해체를 다루는 1-25장과 포로와 혼돈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서 현실을 새롭게 구성하려고 준비하는 26-52장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드라마로 해석한다.


(3) 예언 전통 연구

옛 이스라엘의 모든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예언 전통이라는 큰 틀 안에서 자기의 시대에 맞게 야훼께서 알려주신 대로 말씀을 선포한 사람이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에 영향을 준 선배 예언자로는 호세아를 비롯하여 이사야와 미가와 아모스가 있고, 예레미야의 영향을 받은 후배이자 동시대 예언자로는 에스겔을 들 수 있다.
뿌리가 북왕국인 예레미야가 한 백 년 전 북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 호세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예레미야서와 호세아서에 공통된 낱말이나 표현을 통계적으로 비교하여, 예레미야가 호세아서를 애독하고 그 신학 세계에 크게 영향을 받아 자기도 모르게 호세아가 즐겨쓰던 낱말이나 표현이나 비유로 예언을 선포했다는 연구(K.Gross, Die literarische Verwandschaft Jeremias und[593/594] Hoseas, 1930)가 일찍이 있었고 그동안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 인용했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예언자가 문필가이기 전에 선포자라는 사실과 호세아서이든 예레미야서이든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책이며 예레미야가 호세아 이외의 다른 예언자들의 영향도 받았으리라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소홀히 한 평면적인 견해이다. 이리하여 최근에는 오늘의 문헌 비평, 편집 비평의 결과를 고려하면서 두 책에 나오는 바알 관련 본문(렘18:15; 2:20-25,8;23:13,27)과 역사 회상 본문(렘2:5-9; 호9:10; 13:5-6; 2:16-17; 렘2:2-3)과 혼인 비유 본문(호2:4-17; 3:1; 렘3:20,1; 호4:11-14; 5:3-4; 렘3:1-5)을 주석적으로 서로 견주어 봄으로써 호세아 예언에 나타나는 중요한 관점을 예레미야가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무엇보다도 거짓 예언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자기 시대와 청중에게 알맞게 새롭게 발전시켜 예언 선포에 활용한 점을 밝혀낼 수 있었다(Schulz-Rauch 1996).
또한 예레미야가 남왕국 출신으로 북왕국에 가서 재난 예언을 한 아모스에게서도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주장이 두 예언서 가운데서 내용이나 형식이 비슷한 본문(암 7:7,8 및 8:1,2와 렘 1:11-14의 환상 보도문, 암 9:1-4와 렘 15:9후; 21:10, 암 4:6-12와 렘 5:3; 2:30; 3:3의 징계 언급 본문, 암 5:18-20; 2:6-16과 렘 46:3-12의 ‘야훼의 날’ 본문, 암 3:3-6; 5:12,16,17과 렘 5:1-6, 암 3:9-11과 렘 6:1-8 등)에 대한 비교 분석을 근거로 제기된 바 있으나(J.M.Berridge, “Jeremia und die Propheten des Amos”, ThZ 35[1979]: 321-341), 이 가운데서 적어도 아모스의 환상 본문의 요소를 반영하고 있는 예레미야 본문(렘 1:11-14//암 7:7-8; 8:1-2, 렘 1:18-18; 15:20; 21:4//암 7:7-8, 렘 21:10전; 39:16전; 44:27전//암 9:4후, 렘 24장//암 7:7-8; 8:1-2; 9:4후)은 늦은 포로기 또는 포로후기 시대에 이스라엘이 겪어야 했던 재난에 직면하여 신학적인 불연속성을 느끼면서 아모스의 환상 본문에서 신학적 연속성을 찾기 위해 애쓰던 여러 편집자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Beyerlin 1989).
다른 한편으로 남북왕국의 예언 전통을 굳이 구별하지 않고, 아모스와 호세아와 예레미야에 공통된 세 주제, 곧 회개와 희망, 언약, 예언자의 역할이라는 주제가 각각의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독특하게 표현되었다는 관점에서 예레미야가 아모스와 호세아에게 볼 수 있는 예언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Lalleman-de Winkel 2000).[594/595]
이뿐만 아니라, 이른바 성전 설교 이후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어려움을 겪게 된 예레미야를 몇몇 장로가 미가서 3장 12절의 재난 예언을 근거로 살려낸 예레미야 26장 17-19절에서 출발하여, 미가가 애곡(哀哭) 촉구(미 1:10,16//렘 6:26; 7:29, 미 1:8//렘 4:8), 애가(哀歌)(미 2:4//렘 9:18), 해산 고통의 비유(미 4:9,10//렘 4:31; 6:24; 22:23)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앞으로 겪을 재난에 대해 예언하고, ‘거짓’(미 2:11//렘 5:13,31), ‘평화’(미 3:5//렘 6:14=8:11), ‘미혹함’(미 3:5//렘 23:13), ‘부끄러움 당함’(미 3:7//렘 6:15=8:12)의 표현을 써서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 예언하고 사회 불의를 고발한(미 3:1//렘 5:4-5; 8:7, 미 3:10//렘 22:13, 미 7:1-2// 렘5:1; 7:28, 미 7:5-6//렘 9:3-5[한글성경 4-6]; 12:6) 내용을 예레미야가 받아들여 더 확대했다는 연구 결과도 제시되었다(Cha 1996).
더 나아가서, 전반적으로 유다에 대해 재난 예언을 선포한 예레미야가 시온 보존 전통에 서 있는 이사야와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 온 종래의 견해와는 달리, 포도원 또는 포도의 비유(사 5:1-7; 렘 2:21 등)나 유다 백성의 배신(사 1:2-3; 렘 2:12-13 등)이나 완악함(사 6:9-10; 렘 5:21 등) 따위의 주제에 있어서 예레미야가 이사야의 예언을 받아들이면서도 무엇보다도 유다 백성의 죄를 더욱더 강력하게 지적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예언 활동에 활용하였다는 점을 주장하는 연구도 있었다(Wendel 1995).
마지막으로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예언 활동은 예레미야보다 한 세대 정도 늦게, 그것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유다 사람들을 상대로 시작한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관계에 대해 두 책에 들어 있는 비슷한 본문을 중심으로 연구해 왔는데, 최근에는 예레미야 전통을 보존 발전시켜 온 사람들이 에스겔과 에스겔의 제자들에게까지 미친 영향도 연구한 바 있다(Vieweger 1993). 특히 구약 예언자들이 말이 아닌 행동이나 삶, 곧 이른바 ‘징표 행위’(sign-acts) 또는 징표가 되는 삶으로써 야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경우를 알려주는 본문이 주로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나오기 때문에 이를 유다 멸망 전(렘 16:1-9[독신 생활과 경조사 불참여]; 13:1-11[썩은 베띠]; 19:1-13[깨진 오지병]; 35:1-19[레갑 족속]; 27-28장[멍에]; 51:59-64전[다 읽은 책을 강물에 던짐]; 겔3:22-27 + 24:25-27+ 33:21-22[입이 닫혔다 열림]; 4-5장[예루살렘 관련 여러 가지 징표 행위]; 6:11-12[손뼉치고 발구르기]; 12:1-16[이사 행동]; 12:17-20[이상한 식사 행동]; 21:11-12[한글성경 6-7[탄식]; 21:13-22[한글성경 8-17][칼]; 21:23-29[한글성경 18-24][손뼉치[595/596]기]), 멸망 직전(렘 32:1-44[아나돗 밭 사기]; 겔 24:15-24[아내 죽어도 울지 못함]), 멸망 후(렘 43:8-13[이집트에서]; 겔 37:15-28[두 막대기 합하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비교하며 다루기도 한다. 에스겔은 포로로 사로잡혀가기 전에 예레미야가 징표가 되는 행위를 하거나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인다(Friebel 1999).


(4) 영향사(影響史) 및 수용사(受用史) 연구, 여성 신학적 이해

예레미야에게서 비롯된 전통은 포로기 신명기 역사가들이나 포로기 이후 예레미야 전통 보유자들에 의해 예레미야서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형성된 예레미야서의 전통 가운데서 그 이후에 생겨난 구약 성서 본문에도 영향을 미친 보기는 ‘70년 바벨론 포로기(捕虜期)’라는 25장 11-12절과 29장 10절에 나타난 주제이다. 이것이 역대하 36장 21절, 22절과 에스라 1장 1절과 다니엘 9장 2절과 스가랴 1장 12절과 7장 5절에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언급되어 있다.
또한 주전 2세기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외경인『바룩』서의 앞부분(1-5장)에서는 우선 한편으로 예레미야 43장에서 바룩이 예레미야와 함께 이집트로 끌려갔다고 한 바와는 달리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점령당한 지 다섯 해째 되는 때에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보낸 편지의 형식을 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편지 내용 가운데 예레미야 29장에서 예레미야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사람들에게 거기서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 한 바와 비슷하게 바벨론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과 예레미야가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선포한 것을 회상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편지』라고도 불리는『바룩』서의 뒷부분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사람들에게 이방 우상들의 무력함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을 따름인데, 이는 예레미야 10장 1-16절을 생각나게 한다.
위경 『시리아 바룩 묵시록』에서는 예레미야 1장 18절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쇠기둥’으로 만들어주시겠다고 한 것을, 바룩과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에 대해 ‘쇠기둥’이라고 하나님이 바룩에게 말씀하셨다는 등으로 예레미야서 본문을 더러 새롭게 풀이하였고, 이에 뒤이어 주후 2세기초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위경『예언자 예레미야의 나머지 글들』(헬라말로 <타 파랄레이포메나 예레미우 투 프로페투>)에서[596/597]는 예레미야가 스스로 제사장 노릇을 하였고 또 나중에 이집트에서 돌에 맞아 죽은 것을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시키는데, 무엇보다도 에티오피아 사람 아비멜렉(=렘 38:7-12; 39:16의 구스 사람 에벳멜렉)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환상 가운데 보고 잠시 잠든 사이에 66년이 흘렀다는 내용을 통해서 포로로 사로잡혀 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리라는 희망과 마지막 때에 의인들이 부활하여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가리라는 희망을 결합시켰다(Kaestli, in: Curtis/Romer [eds.] 1997: 217-231).
외경 및 위경에서는 이밖에도 예레미야를 먼 훗날의 일까지 미리 내다보는 사람,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자, 비법을 전수하는 자, 마지막 때의 인물로 묘사하기도 한다(Barton, in: Diamond/O'Connor/Stulman (eds.) 1999: 306-317).
쿰란 문헌에서 예레미야서가 이사야서만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하나 그 나름대로 쿰란 공동체에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레미야 칠십인역 본문의 상대적인 독자성에 상당한 근거를 제시해 준 두 사본(4QJerb,d)을 포함한 여섯 단편 사본 말고도 예레미야 관련 쿰란 사본으로는 다섯 개의 위경 성격의 예레미야 단편 사본(4Q383, 384, 385, 387, 389)과 예레미야서가 인용된 네 자료(4Q177, 182, 163, 396 1-2 iv 5)와 기타 다메섹 문서(CD), 찬송가집(1QH), 성전 두루마리(11QTa)에서 예레미야서를 부분적으로 암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이런 자료에서는 예레미야를 포로로 사로잡혀 간 사람들에게 특히 어느 정도 모세에 견줄 만한 역할을 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고, 쿰란 공동체를 예레미야서에 약속된 새 언약의 수혜자로 보는 듯한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Brooke, in: Curtis/Romer [eds.] 1997: 183-205).
유대교 절기 설교집인 <프식타 랍바티> 26장을 비롯하여 <미드라쉬>와 <탈무드> 곳곳에서도 예레미야의 신상에 관한 내용을 보충하기도 하고 확대 해석하기도 하여, 이를테면 이스라엘의 불행을 대한 탄식 본문의 주인공을 예레미야가 아닌 하나님으로 보기도 하고, 예레미야 31장 9,18,20절의 ‘에브라임’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새 언약 본문 31장 31-34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예레미아 타르굼에서는 비유적이거나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은 피하고, 누가 말하는지를 분명히 하기도 하고, 관습이나 장소를 자기 시대에 맞추기도 하고, 하나님과 우상,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키는 말을 명확히 구분하기도 한다. 예레미야서에 관한 한 타르굼과 랍비 문헌은 서로 크게 영향을 주고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Tomes, in: Curtis/Romer [eds.] 1997: 233-253).
예레미야 및 예레미야서가 신약 성서(특히 마 16:14와 고린도전서)에서 어떤[597/598]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래 “6. 예레미야와 신약성서”를 보라.
다른 한편으로 예레미야서에서 자주 쓰이는 여성 어법과 여성 이미지를 통해서 예레미야서 전체 또는 일부를 새롭게 이해해 보려는 여성 신학적 시도도 있다(Bauer 1999; 박혜경 1993).



4.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서의 역사적 배경


(1) 예레미야의 시대

예레미야서 1장 2절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유다 왕 요시야 제 13년(주전 627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시대에 예언했던 예레미야는, 39-44장에 따르면,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뒤 바벨론이 유다 땅에 세운 총독 그다랴가 암살되자 이에 대한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한 사람들에 의해 억지로 이집트로 끌려갔고 거기서도 몇 차례에 걸쳐 동포들에게 예언한다. 그 이후 예레미야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예레미야서에 나오지 않는다. 이리하여, 예레미야는 유다 멸망 전 40년 전부터 멸망 직후까지 예언 활동을 한 예언자로 알려져 있다.
주전 8세기 말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이제 곧바로 남왕국 유다까지 압박해 오던 앗수르는, 유다 왕 므낫세 시대에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그 위력이 정점이 이르렀으나, 요시야가 왕위에 오른지 10년쯤 되는 주전 630년에서 627년 사이에 앗수르바니팔이 죽은 뒤로는 급격히 쇠퇴하여, 612년에는 마침내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에게 니느웨를 내주게 된다. 이처럼 서북 아시아에 권력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틈을 타서 남왕국 유다는 요시야 왕의 지도를 받아 안으로는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결속을 다지고 밖으로는 옛 북왕국의 땅을 찾으려고 애쓴 것으로 보인다(왕하 22:1-23:28). 그렇지만, 군대를 끌고 북진해 오던 이집트의 바로 느고에게 요시야는 609년에 므깃도에서 목숨을 잃고, 유다 귀족들이 왕으로 세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바로 느고는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사로잡아가고, 그 대신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을 유다 왕으로 삼는다(23:29-34). 이리하여, 유다는[598/599] 이제 이집트의 손아귀에 들어간 듯 했는데, 겨우 네 해가 지난 605년에 시리아의 갈그미스에서 바로 느고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대패함으로써(렘 46:2) 여호야김은 603년부터 바벨론을 섬기게 된다(Herrmann 1990: 18). 그런데, 삼 년 뒤에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하자 바벨론 군대가 아람 군대와 모압 군대와 암몬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서 (아마도 예루살렘이 포위된 가운데 598년에 죽은) 여호야김의 아들로 왕이 된 여호야긴과 유다 지도층들을 느부갓네살이 597년에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고, 그 대신에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인 시드기야를 유다 왕으로 삼는다(왕하 24장). 시드기야도 601년 바벨론의 이집트 원정이 성공적이지 못한 채 끝나자 급속한 사태의 전환을 예언하는 잘못된 예언자들을 비롯한, 나라 안의 반(反) 바벨론 세력들의 후원을 받아, 594/3년에 이집트에 새 왕이 들어서는 것을 계기로 삼아 주변의 이웃 나라들과 동맹을 꾀하는(렘 27-28장 참고) 등으로 애쓰다가 마침내 바벨론을 배반하였다. 이에 바벨론 군대가 589년에 다시 유다로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에워쌌고, 588년에 잠시 이집트의 출병으로 잠시 포위가 풀렸으나(렘37:5), 587년에 유다는 완전히 망하고 시드기야는 눈알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간다(왕하 25장; 렘 39장; 52장).


(2) 예레미야와 요시야의 개혁

열왕기하 22-23장에 따르면, 유다 왕 요시야는 왕이 된 지 18년 되는 해(622년)에 성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율법 두루마리의 내용을 따라 온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게 하고,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전 유다 땅뿐만 아니라 지난날 북왕국 이스라엘의 땅이었던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숭배하던 이방 우상을 다 부수고 거기에 종사하던 제사장들을 내쫓는 등의 대대적인 개혁을 했다. 예레미야에게 야훼의 말씀이 처음으로 임한 때가 요시야 제 13년이라면, 이 개혁이 일어나기 전부터 예레미야는 예언 활동을 한 셈인데, 요시야 개혁에 관한 본문에서는 예레미야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또한 예레미야서에서도 요시야 개혁에 대한 말은 찾아보기 힘들고, 요시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는, 3장 6절로 여기서는 요시야 왕 때에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다고 하고, 뒤이어 그 임한 말씀의 내용으로, 유다를 이미 망해버린 북왕국 이스라엘보다 더 나[500/600]쁘다고 하는데, 이는 요시야 개혁 이전의 유다에 어울릴 만하다. 다른 하나는 여호아하스에 대한 말씀 가운데 들어 있는 22장 15-16절로, ‘네 아버지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여 ‘형통’하였다고 평가한다. 역대하 35장 25절에서 유다 왕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죽은 뒤에 예레미야가 그를 위해서 애가를 지었다고 할 때, 이는 예레미야가 요시야에 대해 일단은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이와는 달리 여호야김과 시드기야의 이름은 예레미야서에 자주 등장함으로써, 예레미야가 주로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시대에 예언 활동을 하였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개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예레미야서에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열왕기하 22-23장의 내용과 같은 개혁이 실제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예레미야가 그에 대해 어떤 입장을 밝힐 수가 없었으리라는 견해(Niehr, in: Groß 1995: 33-55), 예레미야가 요시야 시대에는 요시야가 개혁 운동을 일으켜 잘 하고 있으므로, 또는 그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므로 침묵을 지켰으리라는 견해, 예레미야 2-3장과 30-31장 등을 근거로 예레미야가 적극적으로 요시야의 개혁 운동을 뒷받침했으리라는 견해(Bohler, in: Groß 1995: 91-127 등), 예레미야에게는 요시야의 개혁 운동조차도 만족스럽지 못해서 이를 신랄히 비판했으리라는 견해, 요시야가 개혁 운동을 벌이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아직 어린아이였으리라는 견해 등이 서로 맞서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는 편집 비평의 결과를 따라, 열왕기하 22-23장 본문과 예레미야 1장 2절은 둘 다 신명기 역사가들이 쓴 신학적인 본문이어서 실제 역사를 말한다기 보다는 예레미야가 요시야 개혁 운동이 벌어지기 전에 이미 유다 백성들에게 권면과 경고의 말을 함으로써 그 길을 준비한 인물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Schreiner 1995: 7-31).


(3) 예언자 예레미야

예레미야서가 보여주는 것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사진이 아니라 여러 가지 초상이지만(King 1993: 10), 예언자에 대해서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예레미야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600/601]
우리말 성서에서 ‘예레미야’로 적은 히브리 고유 명사 <이르므야후>가 본디 어떤 뜻을 지니는지 정확히 알기가 힘들지만, “야훼께서 일으켜 세우시기를!”이나 “야훼께서 높이시기를!”를 뜻한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이름을 지닌 인물이 구약 성경에 아홉이나 더 있는데, 예언자 예레미야는 베냐민 지파의 땅에 속하는 아나돗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다(1:1). 이는 예레미야의 뿌리가 북왕국에 있었으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4, 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던 아나돗(King 1993: 1에 따르면, 오늘의 Deir es-Sid)은 실로의 제사장 엘리의 후예로서 다윗의 측근 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솔로몬 즉위 직전에 아도니야를 좇다가 솔로몬에 의해 유배당한 곳이기도 하고(왕상2:26-27), 북왕국이 망한 직후 남쪽으로 넘어온 제사장들이 국경 마을인 이 곳에 정착했으리라는 추측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Herrmann 1990: 3).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 대해 예레미야가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다룬 바 있는데, 아무튼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시대에 예레미야는 야훼께서 시온을 지켜주실 것이고,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사람들과 옮겨간 성전 기물들도 곧 돌아오게 되리라는 일방적인 믿음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반 바벨론 정책을 펴는 사람들에 의해 예레미야는 생명의 위협도 받고 반역자로 오해받기도 하고 옥이나 구덩이에 갇히기도 하는 등으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예레미야를 박해하거나 예레미야와 맞선 인물로는 바스훌(20:1-6)과 하나냐(28장)와 스마야(29:24) 등이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반면, 예레미야에게는 그에게 끝까지 성실한 조력자로 머물렀던 사람으로는 우선 바룩(32; 36; 43; 45장)을 들 수 있고, 요시야 시대 개혁 운동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서기관 사반의 가족들이 또한 예레미야의 보호 또는 후원 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6:24; 36:11-12,25). 왕궁 관리 가운데서는 외국인 에벳멜렉이 시드기야 왕에게 간청하여, 구덩이에 갇힌 예레미야를 건져낸다(38:7-13).
예레미야서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여호야김은 예레미야를 크게 박해한 왕인 반면, 시드기야는 보통 때는 신하들과 더불어 예레미야의 권고를 듣지 아니하다가(37:2) 어려울 때면 예레미야를 찾아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37:3) 야훼의 말씀에 대해 물으며 예언자를 보호해주기로 은밀히 약속하고(37:17-21; 38:14-28) 구스 인 에벳멜렉의 청을 따라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이끌어내는 것을 허락하지만(38:7-13) 신하들이 예언자를 벌하라고 주장하면 이를 막지 못하고 예언자를 감금하는[601/602](38:1-6) 등으로 일관성 없는 왕이다. 역대하 36장 12절에서는 이런 시드기야를 두고서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다고 평가한다.
예레미야 39-44장에 따르면,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 감옥 뜰에서 풀려난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서 잘 대접받을 길이 있었지만 이를 사양하고 유다 땅에 남아, 느부갓네살이 유다 땅의 총독으로 세운 그다랴와 함께 미스바에 있었는데, 그다랴가 아마도 암몬의 후원을 받았을 이스마엘 일당에게 암살당하자 요하난이 앞장서서 이들을 물리쳤으나 이에 대한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달아나려는 사람들에게 유다 땅에 머물라는 야훼의 말씀을 전했고, 이들에게 끌려 억지로 이집트로 간 뒤에는 거기서도 예언 활동을 했다.
타르굼, 외경, 위경에서는 정경 예레미야서에서 예언자에 대해 말하지 않는 부분을 그 나름대로 보충하고 있다. 타르굼에서는 예레미야의 아버지 힐기야를 제사장 반열 지도자에 속하면서 예루살렘 성전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고, 위경『예언자 예레미야의 나머지 글들』(<타 파랄레이포메나 예레미우 투 프로페투>)에서는 예레미야가 스스로 제사장 노릇을 하였다고 하며, 또 『예언자들의 생애』에서는 예레미야가 나중에 이집트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외경 마카베오하 2장 1-8절에서는 예레미야가 성막과 언약궤와 분향 제단을 동굴에 안치하고 그 입구를 막았다고 한다.
그 밖에 예레미야 전승의 확대에 대해서는 위 3(4)를 참고하라.



5. 예레미야서의 신학


예레미야서를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모아둔 책으로만 보지 않고, 예레미야 이후로도 예레미야 전통을 따라 야훼를 섬기던 사람들이 각 시대에 맞게 예레미야의 예언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 놓은 것들까지 들어 있는 책으로 이해하면서 이 책에서 가르치는 야훼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찾아 정리하려면, 예레미야서의 어느 부분이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이고 어느 부분이 뒤이어 확대 해석된 부분인지를 밝[602/603]혀내어야 하지만,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다. 다른 한편으로 구약 신학의 주제 가운데서 예레미야서에서 다루지 않는 것은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 역사의 온갖 전승이 예레미야서에 나타난다(Seybold 1993: 182). 아래에서는 그저 예레미야서의 신학 주제 가운데 몇 가지 특징적인 것만 간추려 보기로 한다.


(1) 역사 이해

예레미야는 바벨론 제국이 당시 중동 세계를 석권하기 직전부터 조국 유다의 운명이 세계 역사를 움직여가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선포했다. 구체적으로는 북왕국이 야훼를 떠나 이방신들을 좇다가 망한 것을 보고도 이를 교훈으로 삼지 않고 북왕국보다 더 타락한 남왕국의 죄를 지적하기에 앞서, 광야 시대를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의 밀월시대로 묘사하면서(2:2), 이런 과거와는 달리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하나님을 거스른 이스라엘을 야훼 하나님은 바벨론을 시켜 벌하실 수밖에 없으므로 바벨론에 대항하기보다는 굴복할 것을 야훼의 이름으로 권유했다. 이러한 사실은 ‘열방의 선지자’로 야훼께서 세우신(1:5) 예레미야가 유다뿐만 아니라 이집트, 블레셋, 모압, 암몬, 다메섹 같은 이웃 나라들도 바벨론에게 정복되리라는 관점에서 선포된 열방 예언(*46-49장)에서도 드러난다(Huwyler 1997: 388-389). 그렇지만 바벨론의 세계 통치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70년이라는 기간의 제약을 받고(25:12; 29:10),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오만하게 하나님 백성을 괴롭히는 바벨론은 마침내 또 다른 적에게 망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50-51장). 이런 식으로 예레미야서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세계 역사의 큰 틀 안에서 이해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유다 멸망 이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롭게 펼쳐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주역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사람들(<골라>)이 맡는 것으로 되어 있다.[603/604]


(2) 탄식과 고백

하나님 백성 유다의 이해할 수 없는 배신 상황, 이를 벌하시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상황, 재난을 당해 엄청난 괴로움을 겪고 있거나 겪게 될 백성의 상황은 한편으로는 재난 예언을 전하는 예언자가 쏟아내는 탄식(4:19-21; 8:18-23[한글 성경으로는 9:1]; 10:19-21 등)이 담긴 본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야훼 스스로 탄식하는 내용의 본문(12:7-12; 15:5-9 등)에 격정적으로 묘사된다. 예언자의 탄식은 결국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인격적인 표현이다(박동현 2000: 103-143; 류호준 2000).
이런 탄식의 전통은 또한 이미 망해버린 북왕국에 대한 구원을 선포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은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회복의 말씀(30:7후, 16-17; 31:16-17,20) 앞에 놓이는 탄식이나 기도의 말(30:5-7전, 12-15; 31:15,18-19)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방 민족 모압의 멸망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탄식(48:31-39)으로까지 발전된다.
더 나아가서, 탄식의 전통은 개인 탄원시 및 민족 탄원시의 요소, 감사시의 요소, 지혜 문학적 요소, 법률적인 요소까지 쓰면서 예언 직책 수행 과정에서 박해자들에게 겪는 엄청난 어려움뿐만 아니라 악인의 번영과 의인의 고난에 직면하여 야훼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서 내면적으로 겪는 심각한 갈등 가운데 야훼 하나님에 대한 굳센 믿음을 고백하는 예언자의 모습을 그리는 ‘예레미야의 고백’에도 나타난다(Bak 1990).


(3) 말씀과 예언

멸망 직전의 유다 왕국의 종교 상황이 절박한 만큼, 예레미야는 그 어느 예언자보다도 격렬히 값싼 평화가 구원을 선포하는 거짓 예언자들과 싸우게 되는데, 이는 누가 참으로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야훼의 ‘회의’에 참여한 적 없이 자신들이 꾸는 꿈을 따라 자기들 맘대로 예언하여 백성을 잘못 인도하는 자들을 야훼께서는 보내신 적이 없고, 이들이 전하는[604/605] 꿈 이야기는 불 같고 방망이 같은 야훼의 말씀에 견주어 보면 겨와 같은 것이다(23:9-32). 야훼의 말씀을 욕으로 여기는 자들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6:10-11). 야훼의 말씀을 ‘짐’(23:33-40절의 ‘엄중한 말씀’)이라고 하는 자들은 바로 그 말 때문에 중벌을 받게 된다. 말씀의 일꾼을 박해하는 자들은 예언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하고(11:21) 야훼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다(17:15)라고 비웃는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예언자에게 중요한 것은 말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는 대로 가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말하는 것이다(1:7). 야훼는 예레미야의 입에 자신의 말을 두셨고(1:9), 참된 말씀의 일꾼은 말씀이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15:16).
이른바 예레미야의 ‘고백’과 ‘수난기’에서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겪는 수난은 곧 바로 말씀의 수난이요, 이 말씀의 수난은 말씀의 주이신 야훼 하나님의 수난이므로, 말씀은 어떤 저항과 장애를 넘어서서 계속 전달된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4) 언약

하나님 백성은 선조 때로부터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야훼를 떠나 다른 신들을 좇아 섬김으로써 야훼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깨뜨렸다(11장). 야훼를 떠나 이방신들을 섬기면서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2:23), “나는 무죄하다”,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2:35)하고, 징계를 받고도 돌아오기를 싫어하는(5:3) 유다 백성의 상황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는 바(13:23)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바른 길로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야훼께서는 이제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고 “그들이 다시는 각기 ... 여호와를 알라 하지”아니할 정도로 모두가 야훼를 알게 될,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신다(31:31-34). 이는 더 이상 하나님 백성에게 순종의 의무를 지우지 않고 불순종의 가능성을 일방적으로 제거하신다고 약속하신 은혜의 언약이다.[605/606]



6. 예레미야서와 신약 성서


(1) 네 복음서 가운데 마태복음 16장 14절에서만 “사람들이 나를 누구냐 하느냐?”하는 예수의 질문에 대한 답 가운데 예레미야의 이름이 나온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의 저자가 예레미야를 세상 끝에 다시 올 예언자, 구약 예언자들의 대표자, 고난받는 예언자, 배척당하는 예언자, 불행 가운데 탄식하는 예언자 등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예시할 수 있는 인물로 보고 그 이름을 여기에 넣었다는 여러 견해가 있어 왔지만, 최근에는 이 모든 면을 고려하면서,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 교회가 새 언약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Law, in: Curtis/Romer [eds.] 1997: 277-302).  

(2) 신약 성경에서 예레미야서를 두드러지게 이끌어 쓴 경우가 몇 가지 있다. 일찍이 마태복음 2장 18절에서는 동방 박사들에게 속은 헤롯이 베들레헴 지역의 사내아이들을 죽인 것과 관련하여 라헬의 애곡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예레미야 31장 15절을 인용하였고, 마가복음 8장 18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깨닫지 못하는 백성의 모습을 묘사하는 예레미야 5장 21절의 표현을 빌어쓰셨고, 마가복음 11장 17절(//마21:13; 눅19:46)에서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면서 예레미야 7장 11절의 일부 표현(‘강도의 소굴’)을 사용하셨고, 히브리서 8장 8-12절과 10장 16-17절에서는 예레미야 31장 31-34절 전부 또는 일부를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단번에 모든 죄를 없이하신 탁월한 대제사장이 되신 점을 말하고, 고린도전서 1장 31절과 고린도후서 10장 17절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자랑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사람의 부나 지혜나 힘보다는 야훼를 자랑하라는 예레미야 9장 23[22]-24[23]절을 요약하여 인용한다.
이처럼 드러나게 하지는 않았으나 주제에 있어서 은근히 예레미야서 일부를 이끌어다가 신약 성서의 새로운 문맥에 새로운 뜻으로 쓴 경우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이를테면 예레미야 31장 3-4절, 31절, 4장 22절, 24장 6절의 주제가 각각 고린도전서 8장 1절, 11장 25절, 14장 20절, 3장 6+10절에 암시되어 있다(Rakotoharintsifa, in: Curtis/ Romer [eds.] 1997: 207-216).[606/607]
특히 앞서 언급한 히브리서 8장 8-12절과 10장 16-17절 말고도 마가복음 14장 24절(//마26:28)나 고린도전서 11장 25절(//눅22:20)에서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시면서 하신 말씀과, 로마서 9장 4절과 11장 26-27절에서 바울이 유대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한 말과,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새 언약의 일꾼에 대해 한 말의 배경으로 예레미야서에 유일하게 나타난 ‘새 언약’의 주제를 생각하는 수가 많지만, 그 내용이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본문과 예레미야 31장 31-34절의 관련성이 희미하거나 일방적인 점이 드러난다. 최근 유럽에서 하나님 백성의 자기 묘사의 민감한 도구로서 ‘언약’ 개념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 백성이 되어 그 완성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유대교에서는 세상 끝에 나타날 메시야를 통하여 새 언약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므로, 이 언약 개념으로 둘 사이에 대화를 진척시키기에는 아직 현실적인 어려움이 적지 않다(W.Groß, Zukunft fur Israel. Alttestamentliche Bundeskonzepte und die aktuelle Debatte um den Neuen Bund, 1998, 153-182). [607/608]



참고 문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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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다 쓴 뒤에 나온 중요문헌으로는 de Waard, Jan. A Handbook on Jeremiah (Textual Criticism and the Translator 2). Winona Lake, Indiana: Eisenbrauns, 2003; Sharp, Carolyn J. Prophecy and Ideology in Jeremiah. Struggles for Authority in the Deutero-Jeremianic Prose. London/New York: T & T Clark, 2003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