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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원교수의 신약성경의 도덕적 비젼 : 마가복음


십자가 짊어지기


1. 예수의 이야기에서 "윤리" 발견하기: 방법론 고찰

우리가 바울 서신에서 복음서로 이행하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문헌을 다루게 된다. 편지들은 특정의 공동체를 대상으로 명백한 도덕적 교훈과 조언을 제공하고 있지만 복음서들은 단지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 담겨진 모든 이야기들이 예수의 죽음 이후 40년에서 60년이 지난 당대의 상황들에 대해 간접적으로 증언하면서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조정되기는 했지만, 이것들이 어느 특정 상황이나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외적으로 표명되어 있지 않다.

복음서들은, 내러티브 형식(narrative mode, 역자는 narrative를 설화[說話]로 번역하지 않는다. '설화'라는 단어는 가공의 이야기 내지는 사실성과 거리가 있는 이야기라는 인상을 주고 있어 narrative의 번역으로 적당하지 못하다. 따라서 이후, story는 '이야기'로, narrative는 그대로 음역[音譯]하여 '내러티브'로 번역한다--역주)을 채용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이야기의 형태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포장한다. 그래서, 어디서 언제든지 교회가 예수의 삶과 죽음의 사건에 의해 그 운명을 조각하기 원할 때면, 이 복음서들의 메시지가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그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분명히 복음서들도 - 특히 마태복음 - 예수를 도덕적 교훈을 주는 선생으로 제시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들의 도덕적 의미는 이렇게 명백하게 교훈적인 구절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야기들은 다소 간접적이고도 복잡한 방식으로 우리의 가치와 도덕적 감각을 조성한다. 이야기들은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관찰하며,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이야기들은 지혜와 어리석음, 용기와 비겁함, 신실함과 불신 등에 대한 행위 전범(典範)의 뉘앙스 형식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그래서 아모스 와일더(Amos Wilder)가 말했듯이 "도덕적 판단으로 가는 길은 상상력을 통과한다."1

그래서 결과적으로 볼 때, 각 복음서의 윤리적 의미는 전체로서의 이야기의 형태를 통해 판별해야만 된다. 복음서 기자들의 도덕적 비전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의 삶과 사역이 이야기 속에 묘사되어 있고 어떻게 그의 제자도에의 소명이 다른 등장 인물들의 삶을 재조각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시간과 역사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개념들이 어떻게 내러티브(narrative)의 조직 속에 짜여져 들어가 있는가를 질문해야만 된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의 급격하고도 부당한 죽음이 어떻게 의미 있게 해석이 되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이 모든 질문들이 신약의 윤리학에 부합하는 것들이 된다.

마가복음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접근 방식의 중요성을 잘 설명해 주는 예가 될 것이다. 마가복음이 뚜렷하게 윤리적 교훈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2

윤리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조차도 (예를 들면, 마가 12:13-17의 "가이사에게 바치는 공세") 자세히 살펴보면 공동체의 행실을 위해 명백한 지침을 제정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예수의 정체와 권위에 대한 주장들을 정립하려는 목적을 지닌 애매한 수수께끼로 판명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마가의 예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윤리적 중요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짧은 교훈적인 단위를 넘어서 마가의 내러티브 세계의 광범위한 윤곽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마가의 신학을 해석하는데 사용되는 두 가지 보편적인 방법과 크게 다르다. 우선 첫째로, 특징적인 마가의 자료들이나 마가가 이전 전승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여 변형시킨 것들을 구분함으로써 마가의 신학과 윤리를 확인하는 편집 비평의 방법과는 구별이 될 것이다.3

복음서 자료들에 대한 편집 비평의 방법은 볼프강 쉬라게(Wolfgang Schrage)의 「신약 윤리학」(The Ethics of the New Testament)에서 잘 예시하고 있다. 쉬라게는 우선 예수의 윤리에 대한 긴 설명을 하고(역사적으로 재구성한 예수의 가르침이다) "초기 회중에 있어서의 윤리관의 기원"(즉, 공관복음 이전 전승들에 대한 재구성)이란 주제에 한 장을 할애한다. 이렇게 하고 난 뒤 쉬라게는 "공관복음의 윤리적 엑센트들"을 간략하게 그려낸다. 이 장(章)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가 크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 전승에 미세한 엑센트나 강조점을 부여하는 "방적공"(紡績工)으로 취급된다. 최초의 복음서인4

마가의 경우, 이 방법은 별반 효과를 보지 못한다. 마가 이전의 복음서의 텍스트가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마가의 자료들과 그의 특징적인 편집 결과를 구분해 내려는 시도가 많은 추정 작업을 포함하게 된다. 쉬라게 자신도 그가 취한 방법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마가 윤리의 내용에 대해 많은 추가적 이론들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마가의 편집 행위를 찾아내는 일은 언제나 상당한 정도로 가설적이다."5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학 비평으로 기울어진 방법은 마가가 만들어내는 내러티브의 총체적 형태를 분석함으로써 마가의 윤리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 내러티브가 얼마만큼 마가의 창작인지를 구분해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전체로서의 이야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의 형태를 조각하고 있느냐를 찾아내는 일이다.
둘째로, 비슷한 이유가 되겠지만, 나의 마가 읽기는 복음서를 써낸 정확한 역사적 정황을 확인하려는 시도에 거의 중점을 두지 않는다. 최근의 몇몇 연구들은 마가 공동체의 가설적 재구성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제시하고 주로 이와 같은 추정적인 역사 배경에 근거하여 복음서 전체를 해석했다.6
그러나 이러한 재구성들은 모두 지나치게 추정이 많다. 우리는 이 복음서가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와 배경을 결정할 수 있을만한 증거를 충분하게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한 추정들이 역사로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던 간에, 그것들이 우리의 내러티브 모양을 설명하는데는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내가 그리고 있는 마가의 윤리가 이때까지 제시된 여러 경쟁적인 재구성의 결과들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의 주장들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제 마가복음으로 가서 마가의 내러티브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설명을 이루어내고 있는가를 묻고자 한다.


2. 마가의 기독론: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의 이야기

예수 자신에 의해 던져진 마가복음의 핵심적인 질문은 이야기의 중심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대화 속에 들어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 이 질문의 의미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마가 이야기 진행의 구상에서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숙고해야만 된다.
마가의 복음 이야기는 간결한 표제(superscription)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막 1:1).7

이 도입부의 '드러내기'(revelation)는 이야기 전체의 태엽(胎葉) 구실을 하는 극적인 아이러니를 설정한다. 우리는 독자로서 첫째 줄을 읽자마자 예수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 속의 등장 인물들은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 우리가 살펴볼 것이지만 귀신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독자가 예수의 참 정체를 추리해 내기 위해 주어진 단서들을 조합해야만 하는 탐정 소설과 같지 않다. 오히려 마가는 「외디푸스 왕」(Oedipus Rex)과 같은 방식으로 독자의 앎과 배우들의 무지 사이에 고조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이야기의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독자는 내러티브의 시작부터 예수의 정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것은 예수의 세례에서(1:11) 그리고 다시 변모 사건에서(9:7)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에 의해 확인된 호칭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올바르게 읽으려면 복음서 기자와 함께 이 고백을 따라해야만 된다.
그러나 한 특정 인물로서 예수에 대해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마가의 내러티브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사나이에 대한 그러한 고백의 낯설음을 파악할 수 있도록 우리 독자들을 이끌고자 세심하게 구성이 되어있다. 명예스러운 호칭인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가 풀어주는 이야기에 의해 그 독특하고 놀라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야기의 말미에 가서야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한 등장 인물이 그 고백을 제대로 발성한다. 그는 이방인 백부장이었으나 예수의 치욕스러운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면서 오히려 진리를 말하게 된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 여기,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에서 우리는 마가의 내러티브가 조여 들어간 목표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린 존재로 알려질 때만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될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음서의 전반부를 통해 (1:1-8:26), 우리는 진행되는 이야기의 다른 종국(終局)을 기대할 수도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장면에 폭발적으로 등장하여 권능의 사역을 베푼다.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죽은 자들을 일으킨다. 바다와 바람을 명해 잠잠케 하며 물위를 걷는가 하면 두 번에 걸쳐 음식을 기적적으로 늘려서 큰 군중을 먹인다.8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야기의 전반부에서 마가복음의 예수는 헬라 세계의 기적 사역자(wonder-worker)나 마법사 같이 보인다.9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사하여 악의 세력을 굴복시키는 초인적 영웅으로서의 극중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동시에 마가가 그리고 있는 예수의 권능 행사 이야기와 더불어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묘사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복음서 전반부에서 상술되어 있는 모든 경이의 사건들을 목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이해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남아있게 된다. 비록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었다고 선언을 하기는 하지만(4:11), 그들은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며(4:13, 7:17-18), 두려워하여 믿음이 없고(4:40), 떡의 양을 늘려서 무리를 먹인 것이 뜻하는 바를 바로 깨닫지 못한다(6:52). 그들의 몰이해는, 8:4에서 그들이 이전에 목격했던 기적의 먹임에 대해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가슴이 아플 정도로 극명(克明)하게 드러나 있다.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왜 제자들이 이처럼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일까? 어떤 신약학자들은 마가가 논쟁의 목적을 갖고 이렇게 했다고 주장한다. 마가가 자신이 전하는 형태의 복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자들인 예수의 원 제자들을 깍아 내리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10
이러한 가설의 다양한 형태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 기적에 대한 지나친 강조, 또는 마가가 기록된 말씀을 선호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구전"(口傳)을 좋아하는 것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복음을 대표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지나친 상상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별 신빙성이 없다. 무엇보다도, 마가의 복음서는 부활하신 주와 함께 제자들이 다시 모인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으며(14:28; 16:7), 그들이 복음을 위하여 신실한 증인이요 순교자가 될 운명을 갖고 있다는 점도 예언하고 있다(13:9-13). 더구나 로버트 탠너힐(Robert Tannehill)이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듯이, 마가의 내러티브는 독자들이 자신들을 제자들과 동일시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비록 제자들의 실패 속에서(예를 들면,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일) 대리적인 경험을 하지만,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결국 자신들이 용서를 받아서 더 신실하게 살도록 권면을 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11

가장 중요한 점은, 제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독자로 하여금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를 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권능의 역사(役事)와 제자들의 몰이해를 대비 병렬시킴으로써, 우리는 능력이 자기 검증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도록 인도를 받는다. 예수를 기적 사역자로만 알고있는 사람들은 그를 전혀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로 죽어야만 한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예수 기적의 자기 노출 행위와 제자들의 답답한 미련스러움은 이해의 위기를 도발한다. 이 위기는 마가복음 8장 후반부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다다른다.

두 번째 먹임의 기적을 베푼 후에(8:1-10)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기 위해 배에 올라탄다.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보여달라는 일군(一群)의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가볍게 털어 버린(8:11-13) 예수는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한다(8:15). 그러나, "배에 떡 한 개밖에" 갖고 있지 않았던 제자들은(8:14) 예수가 충분한 양식을 준비해서 가져오지 않은 자신들을 꾸짖는 것으로 오인한다. 그들의 고민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예수는 바로 얼마 전에 떡 일곱 개로 사 천명이나 먹이셨는데! 예수의 답답해하는 반응은 그가 제자들에 대해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막 8:17-18)

여기서 예수의 질문들은 그가 자신의 가르침을 비유로 베푸는 비밀스러운 목적을 일찍이 제자들에게 설명하던 말들과 어울어져 공명(共鳴)을 이룬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12
(막 4:11-12)

바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제자들은 "외부인"이 된다. 예수의 권능의 역사들이 제자들에게 해석이 되지 않은 채 모호하게 남겨진 수수께끼의 비유들처럼 되고 만다. 그들은 무리를 먹이는 기적을 체험했지만 예수의 면전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충분한 양식을 갖고있지 못한 것으로 인해 안달을 할만큼 이해해야 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배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두 번에 걸쳐 그들로 하여금 무리를 먹이는 사건을 통과하게 한 뒤 분명한 질문을 한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8:21). 아무런 답도 주어지지 않는다. 질문은 장면의 말미에 도발적으로 매달려 있으면서 독자가 스스로 반응을 하도록 초대를 한다.

다음 장면은 주목할만한 독특성을 지닌 간략한 치유의 이야기이다(8:22-26). 예수가 한 맹인을 치료한다. 그러나 그 치유는 - 복음서의 다른 치유 이야기와는 달리 - 두 단계로 진행된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막 8:22-26)
배 안에서 이루어진 이전의 대화가 "보지 못함"에 대해 크게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8:14-21), 이 이야기가 지닌 상징적인 함의(含意)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유례없는 근시안 독자라는 평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마가는 이 미묘한 에피소우드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루어지는 중추적인 대화 직전에 배치시켜서, 제자들이 이제 막 시각(視覺) 치유의 과정을 -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발생하는 점진적 치유 -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의 신호를 주고 있는 것이다.

첫 단계의 치유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질문을 함으로써 이루어진다(8:27-30). 먼저 예수가 제자들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들이 대중적인 소문에 대해 보고를 하고 난 뒤 예수는 제자들 자신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도록 다시 묻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3

베드로가 튀어나와 대답한다. "당신은 메시아이십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마가가 어떻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지 주의 깊게 읽어야만 한다. 마가의 베드로 고백 이야기의 독특한 특성은 자주 간과되고 있다. 베드로가, 교회를 그 위에 세울 반석으로 격찬(激讚)되는 마태의 설명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이루는데 강력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마 16:13-20). 그러나 마가는 그 사건을 마태와 달리 묘사하고 있다. 베드로가 하늘이 부여한 영감을 입었다고 칭찬하는 대신에(참고, 마 16:17) 예수는 갑자기 제자들을 꾸짖는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epetimesen, 꾸짖다--역주]"(막 8:30). 많은 번역들이 마가의 강한 어조를 부드럽게 만든다. 예를 들면,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그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NRSV).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꾸짖다"는 동사는, 예수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 지르는 귀신들을 꾸짖고 잠잠하라고 명령한 마가 3:12에서 쓴 것과 같은 단어이다. 이 두 군데 모두에서 예수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진리를 선언하는 화자(話者)들을 엄하게 꾸짖어 발언을 금지시킨다.14

왜 그랬을까?
첫째로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숙고해 보아야 한다. "당신은 '크리스토스'(Christos)입니다." 마태 판의 설명으로 인해 야기된 인상 때문에 장꾸 오해를 하게 되지만, 사실 두 용어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은 동의어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어떤 자료에서도 메시아가 초자연적이라거나 신적인 인물일 것으로 기대되는 곳은 없다. 사실, 유대교 내에서 반드시 "메시아"(문자적 의미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에 대해 통일된 일련의 기대들이 확정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기의 배경을 통해서 볼 때, "메시아"라는 용어는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을(특히 로마) 타도하고 다윗의 왕위를 회복시킬 기름부음을 받은 지도자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한 메시아적 인물에 대한 기대는 기원전 일세기 경 쓰여진 유대인의 기도 모음인 「솔로몬의 시편」에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주여 보시옵소서. 저들을 위하여 저들의 왕,
다윗의 아들을 일으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소서.
당신이 알고 계신 그 때에, 오 하나님.
그로 하여금 불의한 지배자들을 무너뜨릴 힘을 갖게 하소서.
예루살렘을 파멸로 몰아넣은
이방인들로부터 건져 예루살렘을 정하게 하시고
우리의 상속받은 유산들로부터
지혜와 의로 죄인들을 몰아내게 하소서.
오만한 죄인들을 토기장이의 그릇같이 부수게 하소서.
철장으로 저들의 모든 물건을 산산조각내게 하소서.
그의 입의 말씀으로 불법을 행하는 모든 나라들을 멸하게 하소서…
저가 거룩한 백성을 모아
의(義) 가운데로 인도하리라.
주님이신 저들의 하나님께서 성결케 하신
그 백성들의 지파를 그가 치리하실 것이요…
그는 하나님께 배워, 저들 위에 의로운 왕이 될 것이요.
그의 날에는 그들 중에 불의한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 모두가 성결케 될 것이니.
그들의 왕은 주 메시아가 될 것이라.16

이러한 열렬한 소망을 배경으로 볼 때,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아"라고 지칭하는 것은 강력하게 민족주의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될 것이고 세속 권력의 구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았던 사람처럼 불완전하게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예수가 "메시아"의 타이틀을 거부하지는 않으면서도 제자들을 꾸짖는 것은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교육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메시아"라는 용어의 의미는 고난받는 인자의 차원에서 다시 정의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17

놀랄 것도 없이 베드로는 단연코 이 어려운 가르침에 친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예수와 베드로 사이에서 서로간에 꾸짖기 경쟁이 일어난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epitiman)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epitemesen)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2b-33)
여기서 베드로를 사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의도적이다. 이 장면에서 베드로는 유혹자요 적(敵)으로 기능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의 정체와 자신의 소명을 메시아로 정의했으나 그가 정의한 메시아의 의미는 사람들의 모든 기대와 정치적 효험의 모든 정상적 규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합리적 반대는 예수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의 사명을 부인하라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말을 따르면 사단에게 복종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단호하게 베드로의 입장을 거부함으로써 예수는 자신이 고난받는 메시아가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의 사실을 확증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순종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는 계속하여 이르기를, 자신의 고난의 사명은 자신에게만 주어진 독특한 것이 아니라 한다. 자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도 유사한 소명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4)

메시아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고난과 거절과 죽음의 방식으로 메시아를 따르도록 부름을 입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전히 마가는 이 메시지를 "복음," 즉 좋은 소식이라고 명칭을 붙인다. 도대체 이것이 어떤 종류의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제자들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들이 아직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소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비전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회복이 된 셈이다. 그들은 훨씬 나중에 이를 때까지, 즉 십자가 사건 이후에 이를 때까지 되어지는 일을 분명하게 보지 못할 것이다. 사실 마가는 참된 메시아 소명의 상에 대해 그들이 모호함 없이 깨닫게 되는 순간에 대해 결코 공개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마가의 내러티브 전략은 독자들에게 도전을 주어 결론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라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인이야말로 마가 윤리학의 진지한 의미를 추론하게끔 도와준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버림받아 죽은 그분의 정체에 의해 자신의 정체가 각인되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마가의 답변을 수용할 때, 우리는 예수의 정체에 대한 신학적 확언을 발성하는 것만이 아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의 제자들과 내러티브의 핵심이 되는 대화를 나누고 난 뒤(8:27-9:1) 능력의 역사는 거의 중단되다시피 한다. 축귀(逐鬼)가 한번 있고(9:14-29), 병 고침이 한번 있었으며(10:46-52), 무화과나무가 시들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11:12-13, 20-21). 그 단 한번의 축귀조차 예수의 인내심 결여된 주저함으로 특징지어진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9:19). 기적을 베푸는 것도 예수의 사명의 표현이기보다는 차라리 사명으로부터의 분산이 된다. 이야기의 행동은 가차없이 골고다로 향한다.

가이사랴 빌립보를 분기점으로 해서 우리는 마가가, 기적 사역자(miracle-worker)로서의 예수 전승을 해석학적으로 통제하여 극복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를 능력의 조달자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 그것이 초자연적 능력이던 아니면 정치적 권력이던 간에 -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는 고난받고 죽기 위해 능력을 포기하는 인자로서 인식될 때 비로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십자가는 예수의 정체를 해석하는데 있어 통제의 상징이 된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는(15:39) 신앙고백에서 그 종국적 답을 찾는다. 이 신앙고백은 오직 십자가 밑에서만 올바르게 발성할 수 있는 성격의 정답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우리는 십자가가 예수의 정체를 이해하는데 완성의 조건일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필수적인 것이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비록 마가가 어떻게 예수의 죽음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구원의 효과를 갖는가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갖는 대속성 효과의 사실은 내러티브 속의 주요 위치에 있는 두 구절에서 단적으로 선언된다. 마가 10:45에서 예수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선언한다. 나중에 그가 제자들과 함께 갖는 최후의 만찬 석에서, 예수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예상하면서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분배하는 예언자적 상징의 행위를 수행한다. 그리고 그 일을 이렇게 해석한다.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또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14:22-24). 여기서 예수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위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봉인하는 희생제물로 설명된다. 마가 10:45의 긴박하게 압축된 말씀은, "속건제물"이 되어 많은 이들의 죄악을 짊어지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묘사와 공명(共鳴)하고 있다(사 52:13-53:12).18
이와 같이 신학적으로 부담된 단서들을 우리 앞에 두고, 우리는 마가의 연장된 수난 내러티브를, 예수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희생적인 행위를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이야기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3. 제자도: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따르기

마가가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인 희생으로 묘사하는 반면, 더 압도적인 강조를 그 사건의 전범(典範)적인 성격에 두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모형을 정립한다. 우리는 이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반응하는 방식에서 - 이야기 진행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곳이다 - 제자도에의 부름은 필연적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부름이기도 하다는 대담한 내용을 드러내는 것을 관찰했다. 사실, 이 주제는 마가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조직된 복음서의 중심 단원에서 반복하여 강조 되풀이된다. 마가 8:27에서 10:45로 이어지면서, 세 번에 걸친 수난 예고의 주변에서 (8:31, 9:31, 10:32-34) 등장하며, 그리고 두 소경을 고치는 책 말미의 이야기들에 의해 골격을 갖춘 단원을 통해 이 주제는 계속 강화된다. 이 핵심 단원 내에서 예수는 자신의 사명과 그들의 사명을 제자들이 바로 이해하도록 교육적인 프로젝트를 전개시켜 나간다.
수난에 대한 예고 셋은 모두 비슷한 순서로 진행이 된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반대나 오해를 보이는 방식으로 반응하면, 예수는 고난받는 제자도에의 소명에 초점을 맞추는 교정(矯正)의 가르침을 제공한다. 마가 8:27-10:45의 골격을 구성하는 이 진행의 연속은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정리될 수 있다.

수난 예고 오해 교정의 가르침
8:31 8:32-33 8:34-9:1
9:31 9:33-34 9:35-37(-50?)
10:32-34 10:35-41 10:42-45

이 연속적 진행 중 첫 번째 것은 그 기독론적 의미와 함께 위에서 논의한 바 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세 번째 장면은 가장 자세한 예수의 수난 예고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예수 자신의 운명과 제자들의 소명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일치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주석을 달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이 경고를 들을 수 있도록 쇼크를 가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자신에게 닥칠 암울한 고난의 내용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10:34). 그러나 그 직후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께 와서 자신들이 예수의 말을 하나도 제대로 듣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요구를 한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그들의 무분별함에 경악한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참고, 14:36]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순진한 허장성세로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쉽게 대답한다.
예수는, 그들이 결국 "걸려 넘어지고" 위기의 시간이 오면 도망할 것이라는(14:27, 50) 사실을 알고, 여전히 잔과 세례의 메타포를 사용하여 그들이 실로 그와 함께 고난을 겪을 것이지만 특별한 영예를 얻는 것에 대해서는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영예를 부여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사안이다. (개신교에서 종종 불려지는 감성적인 찬송 "너는 할 수 있느냐?"는 이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여기에 내재한 아이러니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 이 찬송은 아무 것도 모르는 자화자찬의 "주여 우리가 할 수 있나이다!"를 외치는 야고보와 요한에 동참하도록 회중들을 격려하고 있는 셈이다.)

놀랄 것도 없이, 다른 열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영예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신들의 길에 방해하며 끼어 드는 것에 분개한다. 예수는 기회를 포착하여 그들에게 제자도가 의미하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고자 마지막 시도를 한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2-45)
서로 모이를 쪼아먹으려는 것과 같은 자리다툼 속에 범벅을 만드는 제자들의 계속적 시도는 (9:33-34, 10:35-37) 그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이나 자신들의 소명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제자 공동체에 부름을 입은 사람들은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종 됨의 모형은 말할 것도 없이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예수가 보여주고 있다. 이 모형의 온전한 충격적 영향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자세한 설명에 가서야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은 이미 최대한 명명백백한 모양으로 설정이 되었다.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세계의 권력 욕망을 포기하고 그분의 고난의 종 됨의 소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방인들" 가운데서는 지배와 자기 주장이 규칙이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자들로 이루어지는 새 공동체에서는 다른 논리가 작용한다.

제자도의 성격을 확고하게 정립하고 나서, 이제 예수의 기초 교육 프로젝트는 그 결론에 다다른다. 확실히 제자들은 여전히 실패하고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예수가 정의하는 그들의 사명 개념에 대해 도전을 하거나 오해를 하지 않는다. (예수가 다시 그의 임박한 붕괴에 대해 마지막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했을 때,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고 결단을 한다[14:27-31]. 그들의 결심은 공허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는 이해의 실패가 아니라 담대함에 있어서의 실패였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14:38b].)
마가 10장은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는 이야기로 결말을 맺는데, 여기서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메시아적 타이틀을 사용하여 예수를 부른다. 앞에 있는 두 단계 치유와는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고침이 즉각적이고 완성적이었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10:52). 첫 번째 치유가 제자들의 재오리엔테이션 과정의 시작을 상징했다면 두 번째 치유는 그 과정의 완성을 상징한다. "길에서 좇으니라"는 구절은 신실한 제자도를 암시하면서, 예수가 이 내러티브 단원의 시작 부분에서 십자가를 지라는 부름에서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동사(akolouthein)를 통해 메아리를 울린다(8:34).19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서 예수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를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라고 바로 부를 수 있다. 이제 내러티브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는 절정의 대면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절정의 대면은 예수가 잡힐 때에 제자들이 그를 버리고 달아나는 사건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일로 가장 생생하게 극화된다 - 우리는 마가의 도덕적 삶의 비전에서 제자도의 실패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마가의 제자들 묘사는 인간의 무능에 대한 냉엄한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전수 받아 가장 예수와 가까웠던 제자들까지도 시련이 왔을 때 떨어져 나간다. 예수가 고난의 소명을 수용하기 위한 기도로 마지막 싸움을 하고있는 순간에,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도 졸고 있다(14:32). 베드로가 예수에게 한 비타협적 충성 서약은("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14:31) 공허한 큰소리임이 증명되었고 베드로는 마침내 무너져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애통해 하며 운다(14:72). 요약하자면, 마가는 인간의 하나님의 뜻 성취 가능성에 대해서 즐거운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육신의 연약함, 심령의 기만성, 마음의 어두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도에의 부름은 계속 반복하여 주어진다. 이 복음서의 어디에서도 인간의 연약함을 감안하여 하나님의 요구가 교묘하게 재단되거나 "현실적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기 희생적인 제자도에의 요구는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마가의 프로그램적 비유라 할 수 있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4:3-9) 씨뿌리는 자가 옥토와 박토를 구별 않고 씨를 뿌리듯이 마가의 제자도에의 소명은 "들을 귀 있는" 모든 이들을 향하고 있다. 여러 사람들에게서 씨가 허비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결국에 가서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여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을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마태와 대조적으로) 마가는 마음의 동기나 의도보다는 단순한 외적인 순종에 초점을 맞춘다. 어떻게 순종이 가능하게 될까에 대한 가시적인 관심은 보이지 않는다. 바울과 달리 마가는 순종을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서 성령의 능력 주심에 대해 일체의 강조를 하지 않고 있다. 마가가 성령의 능력 주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장소는 다가오는 왕국의 묵시적 산통(産痛)에 대해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막 13:9, 11)

성령은 핍박을 받고있는 예수의 제자들의 증언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마가 복음의 어디에서도 성령의 "은사"나 공동체를 인도하고 위로하며 그 순종을 촉진시키는 성령의 계속적 임재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대신, 우리는 고난받는 제자도에 대한 강한 부름과 듣는 이들이 따를 것이라는 단순한 기대를 직면하게 된다. 어떻게? 그것은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진다.
예를 들어서 마가 10:17-31을 보면 예수가 부(富)에 대한 충격적인 교훈을 공표한다.20
예수는 "영생"을 추구하는 부자에게 모든 소유물을 팔아서 생긴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서 예수의 순회 제자 그룹에 가입하라고 말한다.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갔다. 이 부자의 예기되었던 반응은 예수로 하여금 전적으로 예기치 못한 말씀을 이끌어 낸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0:25).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제자들의 경악하는 반응에 대응하여 예수는 아리송한 대답을 한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하나님께 순종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스러운 가능성이다. 씨에 대한 비유가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막 4:26-29)
사실 예수의 소유에 대한 가르침과 씨의 비유 사이에 존재하는 이 연계는 그가 과격한 제자도를 위해 소유와 가족을 포기했던 사람들을 위해 준 약속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30, 강조는 필자의 것). 백 배의 보상은 4:18과 4:20에서 선포되었던 옥토에 떨어진 씨의 백 배의 결실을 돌이켜보고 있다. 이 두 경우에 있어 모두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고 결실의 선물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역사이다.21

그렇듯이 마가는 과격하게 도전적인 제자의 삶의 이야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재물과 명예와 안전을 포기할 것을 요청 받을 수 있다. 확실히 그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신실한 무리의 공동체에 동참하는 일은 그것 자체가 축복이다. 마가 10:30은 이와 같이 공동체에의 귀속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새로운 가족을 이룬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예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3:35). 더구나 충성스럽게 견뎌내는 사람들을 위하여 종말론적 보상이 예비되어 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잃음으로써 결국 생명을 찾게 되리라는 확언을 받았다(8:35).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가는 길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신실한 자들의 삶은 결국 십자가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의 이야기는, 제자도가 영광이나 축복을 얻을 것을 목적하는 수단으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매번 제자들이 자신들의 미래의 보상을 계산하는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그들은 어리석고 부주의한 것으로 평가되고 이어서 예수는 확고하게 그들을 교정한다(예를 들어, 9:33-35, 10:35-45를 보라). 사람이 예수를 따르는 것은 약속된 좋은 결과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가 "권세 있는 새 교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1:27). 예수가 가르치는 길이 - 십자가의 길 - 합리적인 조건에 비추어 볼 때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탈 없이 그 길을 따라야만 된다. 약속된 종말론적 신원(伸寃, vindication)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

제자도의 규범은 십자가에 의해 정의된다. 종 됨으로 해석된 예수 자신의 순종은 신실함을 위한 유일한 모형이다. 놀랍게도,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항상 나타나는 사랑의 개념은 마가에서 거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오직 한 구절만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는데(12:28-34), 이것도 예수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정황이 아니고 논쟁의 담화 속에서 주어진다. 토라의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으뜸"인가를 묻는 서기관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는 쉐마를 (신 6:4-5) 레위기 19:18과 연결시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의 사랑 계명을 구성함으로써 답변을 한다. 서기관이 예수의 대답을 지지하며 사랑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라고 코멘트를 더하자, 예수는 부드러운 칭찬으로 반응한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확실히 이 구절은 마가가 율법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가리키고 있는 중요한 지표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의 급진적인 사랑을 요구한다.22

마가 12:28-34는, 안식일에 병고친 일을 비난하던 바리새인들과 (3:1-6)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 같이 (12:38-40) 율법에 열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인정하는 규범에 의해 스스로 책망을 받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 어디에서도 마가의 예수는 제자도의 특징적인 표지로서 사랑을 선전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도록 부름을 받고, 그들을 위한 유일한 근본 규범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이루는 죽음에서 발견된다. 바울이나 요한과 달리, 마가는 어디서도 예수의 죽음을 "사랑"의 행위로 해석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길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길일뿐이다. 그리고 제자도는 희생의 비용과 결과에 관계없이 무조건 그 길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4. 마가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기대: "깨어 있으라"

마가복음을 여는 순간부터 우리는 긴장 가득한 종말론적 기대의 환경 속에 던져진다. 복음서는 내뿜는 화염과 같은 일련의 예언과 성취로 시작된다.
예언: 이사야가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메신저를 예언했다.
성취: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다(1:2-4).
예언: 요한이 더 능력있는 분이 오실 것을 예언한다(1:7-8).
성취: 예수가 세례를 받으러 오고 하늘의 음성이 그를 위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한다(9-11).
예언: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1:14-15).
성취?: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가?

시작 부분의 이러한 연속적 움직임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메시지의 즉각적 성취를 기대하게끔 만든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1:15). 그래서 우리는 복음서의 남은 부분을 계속 읽어가면서 되어질 나머지 일들의 성취를 고대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임박함을 알리는 여러 사인들이 우리의 조바심을 불러일으킨다. 예수의 축귀 능력과 치유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가 진입해 들어오는 사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아직도 성취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예수가 귀신들의 입을 다물게 한 일은 최종적인 계시를 위한 때가 아직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지표이다. 그는 비유로 이야기한다(4:1-34). 비유는 양 시대 사이에 놓은 과도기에 적절한, 가려진 계시를 제공하는 담화 방식이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선언하지만(9:1), 그들은 중간 과도기에 존재하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고난의 모범을 따르도록 부름을 입는다. 예수의 변형 사건은 (9:2-8) 그의 종말론적 영광을 앞당겨 미리 보는 노출의 계시이지만,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다른 이들에게 아직 얘기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다(9:9-10). 그가 성전에서 보여준 저항의 사건은 (11:15-17) 이사야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이사야는 종말에 이방인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편입되고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마가는 (누가-사도행전과 달리) 이방인의 회심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거라사인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위한 축귀(5:1-20),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7:24-30), 그리고 십자가 아래서 이루어지는 백부장의 고백(15:39) 등을 통해 이방인의 포함에 대해 힌트와 사인을 제공한다.

마가가 가장 광범위하게 임박한 종말을 다루는 것은 예수가 감람산에서 그의 제자들과 성전의 파괴에 대한 자신의 예언에 관해 담화하는 곳에서이다(13:1-37). 한편으로 볼 때, 이 담화는 종말론적 완성을 성급하게 기대해서는 아니 된다는 경고를 많이 담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13:5-8, 21-24)

인자가 정확하게 언제 권능으로 임할 것인가를 추정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13:32).
반면에, 이 담화는 성전의 파멸, 인자의 강림, 택함 받은 자들을 불러모음 등의 사건들이 가까운 미래에 발생할 것이라는 열렬한 기대감으로 박동하고 있다. "해산의 진통"은 이미 시작되었다. 제자들은 핍박을 받고 복음을 증언하느라고 죽임을 당할 것이며,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13:9-13). 그들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세워지는 것을 잘 살펴야 하며 이 사인이 나타나면 산으로 피신해야 된다. 다행스럽게도 선택받은 이들을 위하여 주께서 고난의 날들을 "감하셨다"(13:14-20). 마가 9:1의 약속은 13:30에서 되풀이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는 긴장감을 갖고 주위를 살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13:33-37)

겟세마네에서 졸고 있던 제자들은 (14:32-42)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주는 이 권고를 위한 포장의 역할을 한다. 마가 13;37에서 갑자기 복음서의 독자가 말씀을 듣는 대상이 된다. 즉 예수께서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 돌아보시면서 긴박한 어조로 "정신차리라!"고 말씀하시는 형국이다.
마가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절정에 다다른 종말론적 사건으로 제시한다. 예수에게 생겨난 모든 일은 다 성경에서 기록된 것을 성취시키는 것이었다(14:27, 49). 그리고 예수는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이 다니엘 7:13-14에 예언된 인자라고 공공연하게 말함으로써 비밀의 베일을 벗겨 버린다. 예수가 죽는 순간에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도 이 시대의 종말을 가리키는 사인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능력의 마지막 계시는 예수의 부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마가는 놀라운 '비틀기'(twist)를 제공한다. 빈 무덤, 그리고 부활의 나타남이 전혀 없는 것이 그것이다. 이 복음서의 원래 끝은 마가 16:8이다.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23
이 복음서에서 마지막 대사는 예수가 놓였던 무덤에 앉아 있던 의문의 흰 옷 입은 청년의 말이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나사렛 사람,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24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16:6-7)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에 왔던 여인들은 -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 공포에 떨면서 도망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기서 이대로 복음서는 대단원을 내린다. 다시 사신 주의 부활의 나타나심이 없다. 베드로와의 화목도 없고, 사도들에게 지상 명령을 내리는 장면도 없고, 성령을 선물로 수여하는 일도 없으며 예수의 승천 사건도 없다. 사도행전에서처럼 교회가 세상 속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영광스러운 이야기도 없다. 오직,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예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과 무덤 가에서 경악하여 놀라버린 여인들의 침묵이 전부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결말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막대한 분량의 주석이 쓰여졌다.25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간략하게 몇 가지를 관찰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부활의 나타나심 없이 갑작스럽게 결말을 냈다는 사실은 저자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성격을 강조하여 가리키고 있음을 말한다. 이 이야기의 말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의 소식과 다시 사신 주님에 대한 체험 사이에 매달려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갈릴리"는 '파루시아'(parousia, 강림) 때에 예수와 이루어질 미래의 만남의 상징이 된다.26

현재로는 예수의 정체와 임재가 정의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다.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16:6). 부활 사건에서조차 마가의 예수는 우리의 손에서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간다. 그는 저기 어느 구석에 남겨진 채 "문 앞에 이르러 있다"(13:29b).

마가의 종말론적 기대가 어떻게 그의 도덕적 삶의 비전을 조각하는가? 최소한 세 가지 함의가 명백하게 다가온다.

첫째로, 임박한 기대로 인한 긴박성은 제자도의 급진적 요구를 타협하여 완화시킬 가능성을 일체 배제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어떤 결과가 자신들을 기다린다 해도 "끝까지 견뎌야"만 된다. 공동체는 경계하며 깨어서 기다리는 상태에서 살아야 한다.

둘째,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진입은 옛 질서의 규범을 극적으로 상대화시킨다. 마가의 경우 토라가 옛 질서의 규범에 포함된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 바리새적 전통과 극적인 대립을 이루면서 - 외적인 것은 결코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모든 식물(食物)은 깨끗하다"고 선언한다. 내러티브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정결례의 범절(凡節)을 무시하며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한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면서도 일관성을 잘 유지한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존재하며 그래서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에 담아서는 아니 된다(2:21-22). 안식일 준수와 같은 사안에 관해서 말하자면,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2:28). 그래서 새로운 종말론적 실재가 딱딱하고 생산성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 옛날의 규정에 기초한 규범들을 덮어 버린다. 예를 들자면, 복음서의 논쟁 이야기의 첫 번째 순환 주기에 있는(2:1-3:6) 절정의 에피소우드는 예수가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가 묻는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3:4-6)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예수가 격렬한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곳이다. 그 결말은, 하나님의 자비심에 입각한 새 질서와 옛 질서에 갇힌 사람들 마음의 폭력적인 거칠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묵시적 충돌의 귀결로 묘사된다.27

마지막으로, 시대와 시대의 중간 시간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주님의 직접적인 임재 없이 고난받는 제자도의 직분을 살아나가도록 부름을 입었다. 예수는 제자도를 위한 모형을 제공하고 공동체가 종말론적 완성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 제자도를 실천해 나가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나 마태나 요한의 경우와는 크게 대조적으로, 마가는 예수가 공동체와 함께 할 것이라는 위로의 약속을 베풀지 않는다.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인자가 영광 중에 올 때에 위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여기서는 오직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냉엄한 소명만이 있을 뿐이다.


5. 행동의 배경으로서의 마가의 내러티브 세계

마가의 윤리 설명이 내러티브 전체가 만들어내는 "세계" 속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 이 복음서가 도덕적 행동의 배경을 정의하는 방식에 대해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을까? 마가의 내러티브 세계의 윤곽에 대해 여섯 가지 사항을 관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 마가복음에 따른 세계는 하나님께서 찢어서 열어놓으신 세계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이 찢어져 열리는(schizomenous) 순간부터(1:10) 예수의 죽음에서 성전의 휘장이 둘로 갈라지는(eschisthe) 순간까지(15:38), 이것은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의 질서 속에 강력하게 진입하여 들어오시는 이야기이다.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정열적인 외침에 대한 응답을 제공한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시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나이다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사 63:15-64:4, 강조는 필자의 것)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나타남은 새로운 포도주가 옛 부대를 터트리듯이, 현상유지의 안일을 타파한다. 안정과 권위의 환상을 - 로마의 지배의 권위와(12:13-17) 유대인의 종교적 기성 권위(11:27-12:12) 두 가지 다를 - 송두리째 벗겨버린다. 역사는 내재한 인과관계의 폐쇄 체계로 볼 수 없다. 하나님의 급격한 간섭은 외향으로 나타나는 역사적 연속성에 금이 가게 하며, 인간의 삶은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채 드러난다. 귀신들의 울부짖음은 우주 질서 속에서 격변을 일으키는 혼란의 사인이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1:24).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예수의 오심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억압하는 악의 권세에 대항하는 결정적인 전투를 수행하신다.28
그러나 그 전투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수행되어 십자가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둘째로, 우주적인 갈등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시간이 압축된다. "때가 찼다"(peplerotai ho kairos, 1:15). 모든 예언들은 현재의 시간을 가리키며 모든 인간 역사는 이 순간에 걸려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빠르게 발생하고 현재의 행위에 대해 엄청남 긴박감이 흐른다. 마가 내러티브의 긴급한 진행은 복음서의 시작 장면에서도 강력하게 표현된다. 첫 번째 장에서만 마가는 '유쒸스'(euthys, 즉시)라는 단어를 11번 이상 사용한다. 이것은 서로 구분된 개별 일화를 연결하는데 보인 언어의 미숙한 사용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묵시적 전투가 펼쳐지는 숨가쁜 보폭(步幅)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멀티-미디어 프레젠테이션에서 화면의 불빛이 급속하게 뒤바뀌면서 자세한 내용을 소화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사건들이 전면으로 급속하게 진행하는 것을 보게 되며 우리가 그 가운데 사로잡혀 가는 것을 발견한다. 마가의 예수는 한가하게 들에 핀 백합화에 대한 이야기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 복음서는 우리를 앞으로 기운 우주적 갈등의 한가운데로 던져 버린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따라 가려면 그 진행 속도를 따라 잡을 필요가 있다.

셋째로, 하나님의 묵시적 세계 진입은 전도(顚倒, inversion)를 발생시켰다. 하나님은 내부인과 외부인의 위치를 뒤집어 놓으셨다. 권위와 특권을 지닌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메시지를 거절한다.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있어 신속하지 못하다. 그러나 외부인들은 - 일세기 유대 문화에서 하층 계급에 속하거나 무시를 받는 사람들 -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들의 필요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나환자들, 귀신 들린 자들, 혈루증에 걸린 여인(5:25-34),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7:24-30), 어린아이들(10:13-16), 소경 바디매오(10:46-52), 베다니에서 그의 "장사(葬事)"를 위하여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무명의 여인(14:3-9), 십자가 아래에 서 있던 이방인 백부장(15:39) - 이들은 예수에게 믿음의 반응을 보인 예로서 마가가 들고 있는 사람들이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0:31). 우리 중에서 그 이야기에 너무 익숙하여 무감각해진 사람들이 있다면 이 전도(顚倒)의 충격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넷째로, 마가의 복음서는 능력의 본질과 고난의 가치를 재정립한다. 예수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하여 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진정한 능력은 역설적으로 십자가에서 발휘된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죽이거나 압제를 하기 위해서 능력(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악한으로 취급될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스스로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세력의 졸개로 여겨진다. 이것은 특히 헤롯과 (6:14-29) 빌라도의 경우에 (15:1-15) 분명하게 나타난다. 반면에 외관상으로 볼 때 무력한 예수의 고난은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의 표현이 된다.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신비스럽게 작동시키는데 있어서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필수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능력과 고난 사이의 이러한 반-직관적(反-直觀的)인 설명은 신자 공동체의 형성에 있어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기능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고난받는 공동체는 마가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의 투쟁에 대한 격려와 정당화를 발견할 것이다.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마가복음서와 같은 권면의 기능을 적절하게 반영하는 위안의 말을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반면에 권력과 특권의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독자들은 마가의 복음서에서 자신들의 안일한 삶에 대한 엄중한 도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가 10:17-22에 등장하는 부자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버리고 십자가로 가는 예수를 따르라는 부름을 듣는다.29

다섯 번째로, 마가의 도덕적 삶에 대한 비전은 심오하게 반어적(反語的, ironic)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양식은 '숨겨짐', '반전'(反轉), '놀라움' 등으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되풀이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자기 노출이 수수께끼나 난문제(難問題)의 형태를 띤다면 윤리적 사안에 있어 오만과 교조주의가 차지할 자리는 없어진다. 규정이 자신들 손안에 확고하게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경직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다(3:1-6, 7:1-23). 진행되는 이야기의 마감이 없기 때문에 독자들은 개방성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의 지각력(知覺力)이 이 내러티브에 의해 조각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아야 할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기 비판적이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예기치 않은 현시(顯示)에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복음서가 마감을 포함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독자 쪽에서 적극적인 반응이 요청된다.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마가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을 넘어서는 것을 목적하는 질문이나 권면으로 내러티브 단원을 마감하면서 거기서 바로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기를 좋아한다(예를 들자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또는 "깨어 있으라!"). 복음서의 이상한 결말도 마찬가지 기능을 한다. 기쁜 희망의 메시지가 갑작스럽고 의아한 말,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16:8)로 끝나게 하는 글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이야기인가? 그것은 해석되지 않은 몸짓과 함축성 있는 침묵의 복음서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복음서는, 독자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자기 자신의 제자도의 삶 속에서 해석을 완결지음으로써 결말 부분을 제공하게끔 독자자들을 부른다. 마가복음서는 바깥으로부터 "이해될" 수가 없다. 이 복음서는 독자가 스스로 참여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섬김 속에서 예수를 따를 때 비로소 바로 읽을 수 있는 성격의 글이다.


주)
1. Wilder 1971, 60쪽을 보라. 와일더의 이 금언은 Via 1978, 1985에서 창조적으로 인용, 발전되었다. 또한 Beardslee 1970을 보라.
2. 이 복음서의 "윤리적 자료의 빈곤성"에 대해서는 Houlden(1973, 41-46)의 언급을 참고하라. Houlden은 "마가가 포함시키고 있는 윤리적 자료들조차도 대부분의 경우에 순수하게 윤리적 관심의 결과가 아닌 것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3. 편집 비평 방법에 대한 뛰어난 비평을 위해서는 Black 1989를 보라.
4. 비록 최근 들어 여러 가지 도전이 있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마가 우선설이 공관복음의 문헌적 의존과 관련된 복잡한 의문들에 대해 가장 만족스러운 답을 주고 있다고 믿고 있다. 나 자신 이와 같은 공감대에 동참하고 있고, 이어지는 자료 논의는 마가 우선설을 전제하여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각 복음서에서 도덕적 비전을 분석해내는 방법은 이제까지 제시된 복음서의 기원과 관계에 대한 어느 특정 이론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5. Schrage 1998, 143.
6. 중요한 예들을 위해서 Kelber 1974, Kee 1977, Myers 1988, Marcus 1992 등을 보라. 이러한 연구들에 대한 비평을 위해서는 D. N. Peterson 1995를 보라.
7. 고대 사본들 중 일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담고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원본 본문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몇몇 사본들의 누락은 필사(筆寫)시 발생한 요인들로 설명될 수 있다. Metzger 1975의 73쪽을 보라.
8. 마가가 전통적인 기적 사화(miracle stories)들의 모음을 활용했다거나 또는 두 주기(週期)의 기적 이야기들을 사용했다는 (그래서 많은 무리를 먹이는 이야기가 중복되어 있다) 주장들이 있다. 전(前)-마가 전승의 구조를 그려내려는 세심한 노력들 중의 하나는, Achtemeier 1970, 1972이다. 또한 Fowler 1981을 보라. 그러나 기적 사역의 모티브가 전승의 블록에서뿐 아니라 마가의 편집 요약에서도 (1:32-34, 3:7-12, 6:53-56, 7:37)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9. 그러나 이것이, 마가나 그의 자료들이 "신인"(神人, divine-man)에 대해 확정된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0. Weeden 1971; Kelber 1974; Kelber 1983.
11. Tannehill 1977.
12. 이 구절의 뛰어난 해석을 읽기 위해서는 Kermode 1979를 보라.
13. 헬라 원문에서 대명사 yhmeis(당신)은 강조 위치에 놓여있다. 예수는 제자들을 지목하여 이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나는 "But you - who do you say that I am?"으로 바꾸어 번역을 하고자 한다.
14. 여기서 우리는 마가의 독특한 모티브인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을 만나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연구들로는 Wrede 1971 [1901], Tuckett 1983, Marcus 1986 등이 있다. 이 주제가 마가 신학의 핵심적인 요소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Wrede는 옳았다. 그러나 이것이 비(非)메시아적인 예수를 메시아적인 인물로 변형시키기 위한 정당화의 변론 수단이었다고 본 것은 잘못이었다. 우리의 이어지는 논의가 보여주겠지만, 마가의 비밀 모티브는 그가 예수의 정체에 대한 해석을 십자가 위에 집중시키려는 목적을 돕기 위한 것이다.
15. 이 시대의 증거를 통해 볼 때, 올 메시아에 대해 다양한 기대들이 있었다. 더구나 유대인의 경건에 있어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추정을 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보다는 훨씬 주변적이고 사소한 것이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de Jonge 1966, Neusner 1987, E. P. Sanders 1992, 295-298, Wright 1992, 307-320, Horsley 1992 등을 보라.
16. 「솔로몬의 시편」17:21-24, 26, 32이다. (역자의 번역은 Charlesworth 1983 (제 2권) 667쪽에 있는 R. B. Wright의 영문판에 기초한 것이다--역주.) 이 개념의 구약적 배경을 위해서는 사무엘하 7:12-13, 이사야 9:7, 11:1-10, 예레미야 23:5-6, 미가 5:1-5a 등을 읽으라. 일세기 유대교에서 발견되는 메시아 소망의 다른 표현들을 위해서는 에스드라2서 7:28-29, 12:32-34, 에녹1서 52:4 등을 보라.
17. "인자"라는 용어의 배경은 너무 복잡한 이슈가 되어 여기서 논하기는 힘들다. 이 타이틀이 다니엘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은 마가 14:62를 통해 볼 때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마가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예수가 자신을 지칭할 때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용어는 마가에서 고난을 받고 영광을 입는 인물로서의 미래적 운명을 특별히 가리킨다. 마가 9:31, 10:33-34를 참고하라. Nicklesburg는(1992), "인자" 개념이 인간 예수와 그의 미래적인 승격 지위를 함께 가리키는 "이중적 사용"이라고 주장한다. 인간 예수는 "미래의" 인자에 속한 권위를 이미 소유하고 있다(예를 들어 2:1-12, 23-28을 보라). 그는 권위를 가질 것이다(8:38). 그러나 이것은 고난의 필연성에 매여있다. 그래서 마가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의도된 애매모호함"을 담지한다(144쪽).
18. 마가 10:45를 이사야의 에언에 연결시키는 것은 신약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이슈이다. Hooker(1959)는 아무런 연결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여기서 필자가 취한 입장은 Stuhlmacher 1986 [1981]의 16-29쪽과 Marcus 1992, 186-196쪽의 주장들을 대변한다.
19. Kingsbury 1978.
20. 이 구절에 대해서는 Wheeler 1995, 39-56쪽을 보라.
21. Via(1985, 164-165)는 이 점을 강조한다. "마가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의한 기적이 없으면 제자도는 불가능하다. 신성한 능력이 없이 개안(開眼)은 불가능하다(10:52).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적 가능성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을 입을 때 발생하도록 되어있다(10:21-22, 26-27)." Tolbert(1989, 310)도 마가의 설명에서 이러한 특징에 주목하기는 하지만 이에 찬성하지는 않는다.
마가가 현대인들에게 적용하기 어려워 보이는 부분은, 인간 상황에 대한 마가의 부정적 평가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마가의 해결책이다. 마가의 주장에 따르면, 오직 직접적인 하나님의 간섭하심만이 선택받은 이들을 이 세대가 우주에 야기시킨 혼돈으로부터 구출해낼 수 있다. 어떤 이들이 지금도 마가의 견해를 계속 인정하기를 소원하고 있는 동안에, 불행하게도 그러한 묵인은 지난 이 천년 동안 이 시대가 계속 혼란을 가중시키게끔 내버려두고 말았다. 마가의 분석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일을 해야만 한다. 개별적으로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나라인 풍성하고도 사랑스럽게 창조된 이 포도원에 결실을 가져다주기 위해 다른 이들과의 연대 속에서 일을 해야만 한다.
Tolbert가 솔직하게 마가의 입장을 교정하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간섭보다는 인간의 노력에 근본적 신뢰를 부여하는 복음도 여전히 '복음'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질문들은 우리의 연구의 제 3부를 기대하고 있다.
22. 마가의 이야기에서 유대인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 율법에 대한 진정한 개별적 반응은 인정을 받고 또한 확증도 받는다.
23. 이 결말의 이상함에도 불구하고 사본의 증거는 결정적이다. 마가 16:8을 넘어서 연장되는 모든 사본은 후대의 것이고 간접적인 것들이다(Metzger 1975, 122-126, Lane 1974; 601-605). 따라서 원본의 결말 부분을 초기 단계에 잃어버렸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 한 의아한 모습으로 끝나는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놓고 사고를 해야 한다. 이어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이러한 갑작스런 결말은 마가의 전반적인 비전과 일치하는 문학적 전략으로 보여진다.
24. 나의 번역은 이러하다. Do not be alarmed; Jesus you seek, the Nazarene, the Crucified One… 이것은 헬라 원문의 순서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현재완료 분사인 estauromenon에 강조를 준 번역으로서, 이 경우 분사는 실질적으로 타이틀, "the Crucified One"이 된다. 부활 이후에도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고 그런 상태를 보전하는(그래서 현재완료 시제가 사용된다) 존재로 확인된다.
25. 참고를 위해 Farmer 1974; Lane 1974; N. Peterson 1980을 보라.
26. 마가의 본문 형성이, 글자 뜻 그대로 예수의 다시 오심이 갈릴리에서 빠른 시일 내에 발생할 것을 기대하는 전승의 초기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지라도(Marxen 1969 [1956], 57-95), 여기서 사용된 언어는 마가의 내러티브 세계 내에서 풍요한 상징적 의미를 담는다.
27. 마가가 묵시적 갈등의 요소들에 하이라이트를 주기 위해 이야기를 조각하고 있으며 이 하이라이트는 일세기 유대교에 대한 다소 왜곡된 견해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Daniel Boyarin은 진지한 담화 중에 이런 사실에 주목했다. "생명과 사지에 위험이 있을 때 랍비 유대교는 안식일의 치유를 허락, 아니 요구하기까지 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자비심을 갖는 것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마가의 예수는 여기서 자비심을 갖는 행위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자체를 수사학적으로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1995년 1월 18일 이루어진 개인적인 대화).
28. Myers 1988; Marcus 1992.
29. 마가복음서가, 괴롭힘을 당한 사람을 안심시키고 안심하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양면에 날을 가진 칼로서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너무 협소하게 본문의 목적과 사회적 배경을 제한하는 가설들을 세우는 일은 자제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