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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원교수의 신약성경의 도덕적 비젼
누가복음-사도행전


성령의 능력을 통한 해방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당당하면서도 수려한 문체로 구원사의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한편의 장대한 분량의 문헌에 속한 두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의 행위가 서사시처럼 진행되고 있다. 이 서사시 같은 글은 교회가 인간 역사 속에서, 특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역사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이 된다.1
작품의 두 부분을 이루는 구조는 저자로 하여금2
교회의 발흥을 예수의 활동을 뒤잇는 분명하고 필연적인 연속 사건으로 제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두 번째 책의 도입부는 이 두 부분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행 1:1-2)
헬라어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을 해 보면, 누가의 의미심장한 구절 전환이 눈에 띄게 되는데, 이것은 복음서가 단지 예수가 이룩하려는 일의 시작 부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가 선택하여 가르친 제자들은 두 번째 책에서, 성령의 인도 하에 그 시작한 활동을 계속 전진 수행해 나가도록 되어있다.
누가가 마가를 자신의 복음서의 자료로 활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문체와 감수성은 마가의 것과 현저하게 다르다. 마가를 읽다가 누가를 읽는 것은 베울프(Bewulf) 읽기에서 밀톤(Milton) 읽기로 전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두 경우에 있어서 모두, 전자가 그 황량한 열정을 어두운 유리창을 통하여 오직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자의 세계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고전적 우아함의 사회적, 문학적 전통에 의해 잘 알려진 밝은 문명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누가의 문학적 업적의 일부분은 예수의 다소 어두운 이야기를 헬라 세계의 좀 더 문화적인 독자층에게 합리적이고 수용할만한 것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는데 있다.
누가는 복음서의 서론에서 모든 것을 '카쎄섹스'(kathexes) "순서대로" 이야기하고자 한다고 선언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눅 1:1-4)
누가가 "차례대로" 설명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단지 역사적인 정확성을 기하겠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보다, 누가가 잘 정돈된 이야기를 만들어, 독자들이 역사 속에 있는3
하나님 뜻의 질서를 감지하고 의지할 수 있게끔 정리해 나가겠다는 의미이다. NRSV에서 "진리"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는 '아스팔레이아'(asphaleia)인데 그 의미는 "굳건함," "확실함," 또는 "안전"이다(한글 개역 성경은 헬라어의 원 의미를 그대로 잘 전해주고 있다--역주). 오늘날의 '아스팔트'라는 말은 이 단어의 어근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는, 누가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이미 받은 교훈의 '견고성'을 확신시켜 주기를 의도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의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데오빌로"는4
누가가 전해주는 두 권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 전승의 신뢰성을 굳게 붙잡고 - 누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감동을 느껴야 된다.
하나님의 목적의 불변성은 무엇보다도 구약 성경과 누가복음의 이야기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상호일치를 통해 감지해야 한다. 예언자의 예견(prediction)의 성취에 초점을 맞추는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성경과 자신의 내러티브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연속성을 감지한다. 이 연속성은 무엇보다도 의식적으로 70인역의 어조를 채택하고 있는 누가의 언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점은 누가 1-2장의 탄생 내러티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닐스 달(Nils Dahl)이 잘 관찰하고 있듯이, 누가의 성경 스타일 모방은, 그가 의식적으로 "성서 역사의 연속"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5
더구나, 언어뿐만 아니라 누가 내러티브의 플롯 구조까지도 구약 성경에서 끄집어낸 유형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탄생과 유아 내러티브는 사라와 아브라함(창 17-18장), 그리고 한나(삼상 1-2장)의 이야기들의 반향을 담고 있다.6
누가가 이 구약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거나 특정의 인용 공식을 사용하여 모형론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성경의 배경을 아는 독자들은 누가가 어떻게 이음매를 보이지 않고도 이 모티브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짜 넣었는가를 쉽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7

가장 중요한 점은, 누가가 예수의 삶을 둘러싼 사건들을 제시할 때 그것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것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미래 사건을 미리 말해 놓은 신탁 예견의 책으로 읽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책으로 취급된다. 이 약속은 예수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의 사건들 속에서 선하게 이루어지고 또한 뒤이어지는 교회의 경험 속에서도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은 오직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 속에서만 그 성취를 발견할 수 있는 구속적(拘束的, binding)인 자기 연관의 공약이다. 누가 1:47-55에 있는 마리아의 찬미(마그니피카트)의 클라이막스는 이 구원의 행위가 그녀가 배속에 잉태한 어린아이를 통하여 실재가 되었다는 것을 - 또는 곧 실재가 될 것이라는 것 - 선언한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54-55)
약속과 성취에 대해 되풀이되는 강조는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독특하게 골간을 이루는 모티브이다. 결과적으로 누가의 윤리는 성취된 약속의 담지자들로서의 하나님 백성을 위한 그의 광범위한 비전의 단면으로 볼 때만 이해가 가능해진다.
누가가 예수의 생애 내러티브를 어떻게 교회를 위한 자신의 규범적 비전에 연관시키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로 누가의 예수 소개, 둘째로 누가의 성령으로 능력을 입은 공동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가의 종말론이 그의 윤리를 구성하는 방식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주제들을 차례대로 상고한 뒤, 우리는 누가의 내러티브 세계가 어떻게 도덕적 분별과 행동을 위한 배경을 마련해 주는가 종합하여 요약해 보고자 한다.


1. 누가의 기독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우리가 앞에서 관찰했듯이 복음서 기자의 예수 묘사와 그의 공동체를 위한 윤리적 비전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래서 누가의 윤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누가의 기독론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한가지 기독론적 개념이 누가의 예수 제시를 체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는 절충주의적인 방식으로 여러 기독론적 전통을 결합시켰다.
후대의 그리스도교 신학과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위(位, person)에 대해 존재론적인 주장을 하는데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실상 예수의 사역(work)과 예수의 위를 구분하여 후자를 실재론자의 범주 속에서 논의한다는 생각은 누가의 사고 세계에서는 오히려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요한과 달리, 누가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preexistence) 교의를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교회 속에 머물러 계신다는 마태와 요한의 확신도 누가에게는 발견되지 않는다. 누가의 내러티브에서 이 임재의 역할은 교회에 쏟아 부어진 성령이 감당한다. 누가의 기독론은 기능적(functional)이다. 예수는 그가 행하신 일의 입장에서 이해가 된다. 세계 속에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오는데 있어서 예수가 한 역할의 입장에서 그의 기독론은 제시된다. 이것이 바로, 누가의 구약 성경 사용이 일반적으로 공개적이지 못하고 암시적인 이유이다. 예를 들자면, 누가는 예수가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예수가 이사야의 종이 예시(豫示)한 구원을 이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시키려 한다.
누가가 채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기독론적 이미지들 중에서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의 능력을 입은 종, 모세와 같은 선지자, 그리고 의로운 순교자를 차례로 상고한다. 이 기독론적 개념들은 누가가 뒤이어 이루는 교회의 소명 묘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가) 성령의 능력을 입은 종
누가의 내러티브에서, 광야에서의 유혹 후에 즉시 예수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갈릴리로 돌아와 안식일에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 나타난다. 여기서 누가는 마가의 내러티브 진행 순서를 조정해서 배치했다. 마가가 예수의 고향 회당 출현을 이야기의 훨씬 뒷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고, 논쟁을 하고, 가르침을 베푼 이후에야 이루어지도록 배치시키는 반면(막 6:1-6a), 누가는 그 이야기를 예수의 공적 사역의 처음으로 옮겨서 기획적인 선언으로 만들어 버린다.8
마가가 단순히 예수가 "회당에서 가르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예수가 그 상황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상세하게 설명을 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다름 아닌 자신의 메시아 소명의 공개적 선언이 된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9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16-21)
일단 청중은 예수의 "은혜로운 말"(4:22)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예수가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혜택"이 이스라엘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지적했을 때 (4:25-27) 사태는 신속하게 험한 모양으로 바뀐다. 사람들은 "분이 가득하여" 그를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려 하지만 예수는 그곳을 피해 빠져 나온다(4:28-30).
만일 나사렛 회당에서의 예수 선포에 대한 누가의 이야기가 메시아적 선언으로 읽혀야 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예수의 정체와 사명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몇 가지 누가의 주제들이 여기에 나타난다.

▶ 이사야 61:1-2(그리고 이사야 58:6)에 대한 호소는 예수를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승의 연속선상에 일치시킨다. 예수는, 이 전승의 권위를 자기 자신의 선포의 승인이라 주장하면서 동시에 이 전승이 자기 자신의 활동을 통해 성취되도록 되어있다는 점을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는 이사야의 예언에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의 종," 즉 '파이스 쎄우'(pais theou)의 망토를 취하는 것이다.

▶ 여기서 예수는 암묵적으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로 확인된다. 성령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기(echrisen) 때문에, 그는 '크리스토스'(Christos)이다. 누가는 이미,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예수에게 내려왔고 예수가 성령에 의해 능력을 입었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4:1, 14). 종과 메시아, 그리고 성령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것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이다.

▶ 종의 사명은 좋은 소식을 가난한 자, 소경, 포로 된 자, 압제 당하는 자 등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에게 있어서 예수의 메시아적 활동은 해방의 사역이다. 복음과 선지자의 메시지와의 직접적인 연계는 정의를 위한 선지자적 소명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여기서도 마태와의 현저한 차이가 있다. 마태에게 있어서 선지자에 대한 관심은 메시아의 생애 속의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예견과 관계된 것이었다.) 누가의 설명에서 혼합된 특별한 이사야 본문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사야 61장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약속이며 이사야 58장은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봉사의 요청이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사 58:6-7, 9)

이러한 구약 본문들을 예수 사역의 시작에 위치시킴으로서 누가의 예수는 자신을 성령의 능력에 의해 회복된 이스라엘을 창조할 메시아로 선언한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 안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와 자비가 지배할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통해 기록된 모든 예수의 기적과 치유들은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사인들인데, 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압제 당하는 자들이 자유를 얻을 것이다. 예수의 활동에 대한 비슷한 이해가 사도행전 10:38에 명시되어 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참고, 눅 7:18-23).

▶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는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예시(豫示)한다. 여기에는 이방인들도 포함된다. 이미 예수의 공적 사역의 시작 장면에서 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설 것이라는 점을 예고했고 이러한 포용적인 은혜의 메시지에 대해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적대감을 보였다. 여기서 운동이 시작된 이슈와 긴장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쪽까지 계속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나사렛 회당에서의 공표는 예수가,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 사역을 출범시키기 위해 성령으로 능력을 입었다는 선언이다. 이어지는 사도행전은 이 해방이 어떻게 교회의 삶 속에서 전개되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나) 모세와 같은 선지자
마태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가에게도 예수의 사역이 모형론적으로 모세의 사역과 비교가 된다는 암시가 담겨져 있다. 물론 누가의 테마적 강조는 선생과 율법의 수여자로 보다는 자신의 백성들의 예언자적 해방자로서의 이미지에 주어진다.10
예를 들어서, 누가의 변모 이야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취할 예수의 '엑소더스'(exodus, 탈출, 출애굽, 한글 개역에서는 "별세하실 것"이라고 번역해 놓았다--역주, 눅 9:31)"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예수가 죽음을 거쳐 부활의 생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여행을 통해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의 본형(antitype)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실, 어떤 해석자들은 누가 9:51-19:44는 구조상 신명기 1-26장에 일치한다는 주장을 한다. 데이빗 뫼스너(David Moessner)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모세의 생애는 실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들"(눅 24:27)을 성취하는 예수의 생애와 같이 수렴된다. 예수는 새로운 출애굽을 위해 보냄을 받았듯이, 그가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거부당함으로써 언약의 약속을 성취시킨다… 신명기의 중심주제는 누가가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를 [누가복음의] 중심 단락에서 이스라엘로 보내도록 플롯을 구상하도록 하는 힘이다… 누가는 중심 단락의 여행하는 예수를 신명기 18:15-19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제시한다.11

신명기가 누가복음의 자료 구성에 있어 상세한 기초를 제공한다는 가설을 수용하든 수용하지 않든, 누가가 예수를 신명기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두 구절이 이것을 분명하게 확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난 뒤, 베드로는 운집한 청중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살리신" 예수가 바로 모세가 예고했던 그 선지자였음을 직접적으로 주장한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신 18:15, 19]12
하였고…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행 3:22-23, 25)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의 역사는 모세가 행한 "이적과 기사"에 유비된다 (참고, 신 34:10-12). 처음에는 예수에 의해서, 그리고 이제는 그의 사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기적들은 사람들에 대한 경고가 된다. 그들이 생명을 찾으려면, 예수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받아들여 회개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된다. 고집을 꺽지 않는 사람들과 그를 따르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언약 백성으로부터 잘려 나갈 것이다.
룩 존슨(Luke Johnson)은 모세와 예수 사이의 이 모형론적 일치가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에 한 연설에서 한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지배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행 7).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시리라는 모세의 말을 공공연하게 언급한다(7:37). 존슨은 이렇게 쓰고 있다.
모세는… 두 번 보냄을 받았다. 한번은 연약함 속에서, 그리고 두 번째는 능력을 입어서. 사람들에게는 두 번의 구원이 제시된다. 첫 번째는 무지로 인해 거절되었으나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 만일 압도적인 기사와 이적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거절되면 하나님도 그 백성들을 거절할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누가의 예수 설명과 현저한 일치를 이룬다… 누가는 그의 모세 묘사를 통해 그의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있어 필수적으로 긴요한 단서를 우리에게 주었다.13

예수 고난의 "필연성"은 모세 모형론에 일치해야 하는 필연성에 의해 결정된다.
이 모든 것은 교회를 대면하는 윤리적 명령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주요 함의를 제공한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의해 불러모아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은 예수와 함께 여로를 가며,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신명기의 비전을 성취할 언약의 새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을 깨달아 알도록 되어 있다.
(다) 의로운 순교자
누가의 수난 내러티브는 다른 어떤 복음서들보다 예수의 무죄함을 강조한다. 빌라도는 세 번에 걸쳐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선언한다(눅 23:4, 13-15, 22).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범죄자들 중 하나가 그를 조롱하지만 나머지 둘은 조롱하는 이를 꾸짖는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눅 23:40-41)
예수 죽음의 순간에 로마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dikaios]"라고 말한다(눅 23:47). 이 마지막 순간은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누가가, 마가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를 대신하여 배부장의 입을 통한 이러한 무죄의 선언을 그 자리에 배치시키기 때문이다.
예수의 무죄함에 대한 이러한 강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스 콘뵉만(Hans Conzelmann)이 한 고전적인 해석은, 교회가 정치적으로 순수한 집단이라는 것을 로마 당국에게 보여주기 위해 최선의 모양으로 소개하는 정치적 변호였다는 것이다.14
이러한 해석에 대해 실질적인 반론들이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설득력 있는 반대는, 콘뵉만의 주장이 예수 무죄에 대한 누가 선언의 성경적 배경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의 지적이다.15
예수를 '디카이오스'(dikaios, 의인--역주)로 묘사한 것은, "의로운 자"가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줄 것이라는 「70인역」의 이사야 53:11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좀더 적절한 평행 구절은 「솔로몬의 지혜서」2:12-20에서 발견된다. 아래의 번역에서 누가가 예수를 예시하는 것으로 읽었을 가능성이 있는 표현들에 밑줄을 그었다.

의인[ton dikaion]은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긴다고 우리를 책망하고
배운 대로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니 그를 함정에 빠뜨리자.
의인은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고 큰소리치고
주님의 아들[paida kyriou]로 자처한다…
그가 한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인생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기다려 보자.
의인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ho dikaios huios theou]이라면 하느님이 그를 도와서
원수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폭력과 고문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의 온유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입만 열면, 주님이 자기를 도와주신다고 말해 왔으니
그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죽음을 한번 안겨 보자.
(솔로몬의 지혜서 2:12-13, 17-20, 공동번역)

우리가 예수의 무죄함에 대한 누가의 설명을 「솔로몬의 지혜서」를 배경으로 하여 읽으면, 그것이 탄식 시편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의인의 고난과 신원(伸寃)의 유형에 부드럽게 맞아 들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람이 '디카이오스'(dikaios)였다는 백부장의 선언은 누가의 극적인 아이러니의 예가 된다. 여기서 백부장의 발언은 그저 "그가 죄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의 지혜서」의 반향을 감지하는 독자의 귀에는 이 말이, "그는 의인이었습니다"로 들린다.16

누가의 수난 내러티브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사도행전에 있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두 회고조의 언급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연설에서 예루살렘의 청중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그들을 견책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pais]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ton hagion kai dikaion]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행 3:13-15)
비슷하게 사도행전 7장에 위치한 스데반의 연설의 클라이막스 부분도 사람들을 의인을 죽인 죄로 비판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tou dikaiou]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1-52)
이런 모든 것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누가의 예수가 성경대로, 이사야, 탄식 시편, 솔로몬의 지혜서 등에 나타나는 의인으로서 죽었다는 것이다.17
그의 죽음은, 참된 선지자가 거부를 당하도록 되어 있으며, 또한 - 스데반의 순교가 보여주듯이 - 그를 따르는 자들의 유형을 설정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
누가의 수난 내러티브에 등장하는 예수는 침착하고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적들을 용서하고(23:34),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범죄자에게 자비로운 말을 하며(23:43),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손에 의탁한다(23:46).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담은 구절은 다시 한번, 누가가 마가의 자료들을 어떻게 기술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마가의 내러티브에서는 죽어가는 예수가 시편 22편의 말에 자신의 고뇌를 담으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부르짖는다. 누가는 이 모습이 이제까지 자신이 해 온 예수의 해석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고 다른 왕의 탄식 시편인 시편 31:5의 말로 대체한 것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그렇듯이, 누가는 예수의 죽음이 분명히 성경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기본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예수를 마카비 순교자들과 같이 모델이 되는 순교자로 그린다.18
마카비 순교자들의 죽음은 마카비2서 6-7장과 마카비4서 5-18장에서 기록되어 있다. 마카비4서에 있는 엘리에자르의 죽음이 그 유사성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제 거의 뼈 속까지 타들어가면서 숨을 거두려는 순간에, 그는 그의 눈을 들어 하나님께 말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다. 제가 생명을 보전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저는 이제 율법을 위하여 불타는 고문 속에서 죽어갑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우리의 형벌이 이제 그들을 위해 충분한 것이 되게 하소서. 나의 피가 그들을 정결케 하는 것이 되게 하소서. 저들을 위하여 나의 영혼을 받으소서." (마카비4서 6:26-29)
이 엘리에자르의 죽음에 대해 코멘트를 하면서 마카비2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그는 자기의 죽음을 젊은이에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포들에게 용기의 모범과 덕행의 본보기로 남기고 죽었다"(마카비하 6:31, 공동번역). 순교자의 죽어가는 방식이 그의 의로움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영웅적으로 고난과 죽음을 극복하면서 순교자는 자신의 믿음과 진리에 대한 확신을 과시한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의 방식을 통해 자신이 참 의인이었음을 증명하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 믿음의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미지들 중 어느 것도 그것 하나로만은 누가에게 있어서 예수가 차지하는 의미를 종합해 낼 수 없다. 이것들은 서로 얽혀서 같이 꼬여 하나의 밧줄을 이루는 개별적인 가닥과 같아서, 전체로 모아질 때 실제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예수는 정의를 선포하는 성령 충만한 종만으로는 설명이 제대로 완성되지 않는다. 예수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이상이고 고귀한 신실함의 모범을 제시하는 의로운 순교자를 넘어선다. 예수는, 성서적으로 전조가 되었던 이 모든 인물들의 총합(總合) 속에서 약속을 성취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누가의 기독론 안에 있는 이 여러 중요한 가닥들 개개는 여전히, 예수에 의해 해방된 공동체의 삶을 제시하는 누가의 건설적 비전에서 각자 자기 구실을 하고 있다.
2.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가) 교회 사역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예수
사도행전에서 예수에 의해 출범된 사역은 교회로 넘겨진다.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행 1:1)이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로 이월(移越)된다.
예수가 가난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처럼, 사도행전에서는 교회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은 교회가 예수의 일을 계속할 수 있게끔 능력을 부여하는 사건이다. 누가복음의 결말 부분에서, 부활이 있고 나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위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를 기다리라고 지시한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 24:46-49)
이 약속은 사도행전 시작 부분에서 예수의 승천이 있기 전에 되풀이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누가의 주된 관심은 예수에 대해 증거하기 위한 성령의 능력 부여이지만,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사명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좋은 소식, 포로 된 자의 해방,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한 자유 등의 입장에서 정의를 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된다. 그래서 사도들이 예수에 대해 성령으로 능력 입어 베푸는 설교는 필연적으로 같은 해방의 메시지를 포함할 것이다.

사도들의 이야기를 예수의 후계자들의 것으로 취급하려는 누가의 특별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가 갖고 있는 교회 내의 성령의 능력에 대한 비전은 더 종합적이고 평등주의적인 방식으로 전체 하나님 백성으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베드로가 그의 오순절 설교에서 요엘 선지자를 인용하면서 전체 공동체에 쏟아 부어준 성령에 대해 설명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7-18, 욜 2:28-29의 인용)

성령은 사도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이 모든 이를 위한 성령의 선물에 함축된 뜻은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예수의 소명을 짊어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능력이다. 실로, 누가에게 있어서 복음 선포의 중심에 놓여 있는 회개에의 부름은 (눅 24:47, 행 2:38) 선지자적인 정의의 비전에 맞도록 개인의 삶과 공동체 실천을 개혁하도록 소명하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 이 정의의 비전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요지로서 이사야의 본문에 의해 설정되었다.
예수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계시가 되었듯이, 이제 사도들도 예수처럼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드러난다. 그들은 "고치고 계시하기 위하여" 예수의 소명을 전진 이행시킨다19

예수처럼, 그들은 회개와 용서, 그리고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한다. 예수처럼, 그들은, 예수의 이름의 신적인 권위를 인정하도록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경고의 행위가 되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도록 되어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많은 기적 사화들은 의도적으로 복음서의 예수의 기적의 이야기들을 반영한다. 특별히 극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베드로가 오르가를 죽음에서 일으킨 사건이다(행 9:36-43). 이것은 예수가 야이로의 딸을 일으킨 사건을 가깝게 재현한 것이다(눅 8:40-42, 49-56).20
모세와 예수처럼, 사도들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가르치고 조각한다(행 2:42-47, 4:32-37).
예수와 교회의 상동관계는 의로운 순교자 역할에까지 확대된다. 우리가 이미 주목했듯이, 스데반의 죽음(행 7:54-60)은 예수의 죽음의 이야기를 모델로 하고 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 또한 순교자의 죽음을 겪는다(행 12:1-2). 그리고 내러티브가 진행되면서 복음 선포자들은 수난 내러티브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폭도들의 저항과 체포를 겪는다. 바울이 체포될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결심하는 모습은(행 19:21; 21:10-14) 예수가 자신의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했던(눅 9:51) 장면의 재현이 된다. 둘 다, 그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확신과 더불어 죽음을 전망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사도행전 내러티브에 있는 사도들의 어려움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눅 9:23-27; 14:25-33) 예수의 부르심의 성취로 읽을 수 있다. 성령에 의해 교회 안에 풀어놓아진 능력에도 불구하고, 또한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기쁨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고난의 주제를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도"(The Way)에 동참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의무를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나) 새로운 공동체: "큰 은혜를 입은 무리"
누가복음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는, 개별 인간들의 구원만이 아니라, '백성'(people)의 형성을 의도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스가랴에게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은, 그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에게 태어날 아들이 - 즉 세례 요한은 -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눅 1:17)하는 사명을 가질 것이라 했다. 탄생 태러티브의 찬송시들은 반복하여 예수의 탄생을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의 사인으로 해석한다(눅 1:54-55; 1:68-79; 2:29-32). 그리고 이사야 40:3-5에 입각한 요한의 설교의 해석도 예수의 활동을 예언자적 비전에 입각한(눅 3:1-6) 이스라엘의 회복으로서 이해하는 장면을 설정한다. 좀더 넓게 이야기하자면, 복음서의 플롯 진행은 - 특히 9:51-19:44의 "여행 내러티브" - 예수에게,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시는 새로운 언약 백성의 핵을 불러모아 가르치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룩 존슨의 말을 들어보자.
지도자들의 손에 의한 거부와 죽음을 직면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선지자 예수는 자신의 주변에 참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모으고 있다. 무리들은 회개를 요구받고, 이에 응하는 사람들은 제자의 본질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선지자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경고를 받는다.21

그래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도달할 무렵에, 누가는 예수를 왕으로 환영하는 "제자의 온 무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눅 19:37).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은 오순절 이후에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다.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새 신자들이 처음의 핵심 구성원들에게 더해진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공동체는 독특한 형태의 삶을 보여준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2-47)
사도행전 4장에서 누가는 이 새롭게 형성된 교제에 대해 또 하나의 묘사를 한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행 4:32-34)
여기서 필자는 NRSV의 본문을 약간 변형시켰다. 이 성경은 33절과 34절 사이에서 끊어지고, 34절 시작 부분에 있는 단어 '가르'(gar, 왜냐하면, "for")를 번역하지 않는다. 그러나 헬라어 구문("… 큰 은혜가 그들 모두 위에 임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어려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은 두 절 사이에 인과관계를 가리키고 있다. 즉, 공동체에 어려운 사람들이 없다는 것 자체가 선행하는 신학적 주장인 "큰 은혜가 모두에게 임했다"는 내용의 근거가 된다. (우리의 개역 성경도 이 인과관계를 반영하는 헬라어 '가르'의 함의가 번역 상에 드러나 있지 않다 --역주)
이 묘사들이 역사적으로 실제이던 아니던 간에,22
누가는 여기서 오순절 이후의 교회를 두 고대 이상의 성취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의 이상인 참된 우정과 신명기의 이상인 언약 공동체가 그 두 이상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케아의 윤리」(Nicomachean Ethics)에서 친구들 사이에 있어서 나눔의 이상과 영혼의 일치는 공리가 되어있다. "모든 금언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다. '친구들은 한 영혼을 소유한다'. 또한 '친구'의 물건은 공동 재산이다."23
따라서 예루살렘 공동체는 그 삶 속에 진정한 우정에 대한 헬라식 비전을 구현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두 사람 사이나 친밀한 소그룹 내에서만이 아니고 이제 수많은 사람을 담고 있는 공동체의 삶 속으로 팽창된다. 적대감, 불신, 이기심 등은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을 철학적 이상에 따른 친구로 취급하는 나눔의 공동 윤리에 의해 대체된다. 동시에,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 공동체는, 신명기 15장의 언약 규정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이스라엘로 자신을 보여준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신 15:4-5, 7-8)
그에 따라, 교회의 경제적 나눔의 공동 생활에서 우리는 예수가 누가 4:16-21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을 실현하기 위해 공표하였던 사명의 결실을 - 아니면 최소한 첫열매를 - 보게 된다. 이 회복된 이스라엘 안에서는 가난한 자들과 눌림을 받는 자들을 위한 좋은 소식이 선포되고 실행되도록 되어 있었다.
공동체가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물건들을 분배하는 실천은 누가복음 전반에 걸쳐 흩어져 있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의 반응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은 이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어려운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의 자원들을 공유할 것에 대한이 긴박한 관심을 잘 드러내는 중요한 누가의 본문들 중에서 몇 가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누가의 지복론(至福論, Beatitude)은 단순하게 그저 가난한 자와 주린 자에게 축복 선언을 하지, (마태에서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한정하는 것이 아니다(눅 6:20-21, 참고, 마 5:3, 6). 누가가 이 지복론의 영적인 해석을 거부한다는 것은 동반된 예언적 저주에 의해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눅 6:24-25)

부자에 대한 이 책망은 두 건의 강력한 누가의 비유에 의해 극적인 표현을 입고 있다. 하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이고 (12:13-21) 또 하나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이다(16;19-31). 둘 다, 부를 축적한 것이 비참한 오산(誤算)으로 또는 영원한 고통의 근거로까지 이해되었다. 후자의 경우,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 부자와, 헌데로 가득 차서 부자의 문 앞에 누워있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는 가난한 사람 나사로를 생생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그런데 내세에서 그들의 운명이 뒤바뀌었을 때, 부자는 나사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보내 그의 다섯 형제에게 경계를 해 줄 것을 아브라함(!)에게 구걸한다.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예를 들자면, 그들은 신명기 15장과 이사야 58장을 읽어야 된다. 부자는 - 자기 형제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사람들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 이렇게 간청한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브라함의 냉정한 대답은 누가의 신학과 윤리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준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부활조차도 - 예수 자신의 부활조차도 -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에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고 말없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예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성경의 메시지가, 사도행전의 초기 장들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예시된 관대한 나눔을 이루도록 공동체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또한 누가는 예수의 제자도 부름의 입장에서 부에 대한 의롭거나 불의한 반응을 설명하는 두 개의 선언 이야기(pronouncement stories)를 제공하고 있다. 부자 청년(눅 18:18-30)은 재산을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예수의 부르심을 안타깝게 거절한 반면, 삭개오는(눅 19:1-10) 예수를 만나면서 자발적으로 회개하고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불의한 소득에 대해서는 네 로 갚아서 보상하겠다고 약속을 한다.24
예수는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이 이야기는, 누가가 소유의 전적인 부인을 제자도의 보편적 요구사항으로 삼는 기계적인 기준이나 필수조건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예시하고 있다. 물론 어떤 구절들은 이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예, 14:33). 삭개오의 경우, 자기 소유의 절반을 포기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했다면 그가 그것을 기꺼이 수용했을까? 룩 존슨이 설득력 있게 보여주듯이,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소유는 하나님께 대한 반응의 상징으로 기능한다.25
삭개오의 강요받지 않은 관대함은 회개와 믿음의 사인이었으나, 부자 청년의 주저하는 인색함은 - 아니면 더 악한 경우로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11) -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마음을 닫은 심령을 반영한다.
따라서, 예루살렘 공동체의 "기쁨과 순전한[관대한] 마음"(행 2:46)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다는 확실한 표식이었고, 재산을 나눔으로써 그들 가운데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은혜의 외적, 가시적 사인이다. 실로 누가에 의하면, 사도들의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일"의 능력은 공동체의 경제적 나눔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행 4:32-35).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가 그 공동체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 증거는 신뢰할만한 것이었다.

(다) 교회와 제국: 세계 뒤집어 놓기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 있는 새 공동체는 이 세상의 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전도를 하기 시작했을 때의 한 일화가 이 질문에 대해 심각하게 숙고하고 있다(행 17:1-9). 그들은 곧, 그들의 초기 선교의 성공에 "시기하여" 노한 유대인들에 의해 조직된 폭도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한 폭도들은 다른 신자들을 끌어내 도시 당국자들 앞으로 데려간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행 17:6-7)
누가복음-사도행전의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인 질문은 신자들에 대한 이 비난이 잘못 알고 이루어진 그릇된 것인가 - 그래서 무죄한 신자들이 말썽을 일으킨 것으로 잘못 기소되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누가의 정치적 변증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것인지 - 아니면 분노한 무리들이 복음이 로마 세계에 미친 충격의 영향에 대해 현실을 바로 분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쨌든 간에, 예수는 가이사의 관할권을 초월하는 궁극적 충성을 요구하는 "왕"이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그리스도인 운동이 정말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세상을 뒤집어엎는) 그래서 기존 정치 질서를 위협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학자들은 이 질문을 놓고 광범위하게 논쟁을 벌였다. 거의 한 세대 동안 한스 콘뵉만의 주장이 이 분야를 지배했다. 누가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세계 내에서 정치적으로 순수하여 해롭지 않은 집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변증을 시도했다는 것이다.26
콘뵉만의 누가복음-사도행전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루기 쉬운 고분고분한 대상들이었지만 유대인들이 대중을 선동해 교회에 거짓 비난을 할 때만 말썽이 생긴 것으로 누가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우선은 리차드 캐시디(Richard J. Cassidy)에 의해 그리고 이어서 다른 여러 누가 전문의 학자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27
캐시디는 누가의 예수를 로마 제국에 실제적으로 잠재적인 위험을 가져왔던 비폭력주의 사회 반체제 인사로 해석한다. 예수는, "간디가 인디아에서의 대영제국의 지배에 위험한 존재였던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로마제국에 위협적이었다는 말이다.28
캐시디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 부자들에 대한 그의 정죄, 불의와 압제의 구조에 대한 그의 비판, 봉사와 겸손에 기초한 사회적 관계를 요구하는 일, 폭력에 대한 그의 반대 등을 주목한다. 이런 요인들에 기초하여, 캐시디는 누가의 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비록 로마에게 있어서 예수가 열심당이나 파르티안 같은 종류의 위협을 구성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부과한 위협이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보다 덜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급진적으로 새로운 사회 모형을 신봉함으로써, 그리고 기존 정치 권위에 존경을 보내기를 거절함으로써, 예수는 로마나 다른 어떤 압제 집단이라도 붙들어매어 잡아둘 수 없는 사회질서에의 길을 열었다.29

콘뵉만과 캐시디 모두, 누가의 본문이 구체적인 역사와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읽혀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구실을 한다. 신약의 다른 어떤 저자들보다도, 누가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광범위한 세계사 속에 위치시키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예수의 탄생의 시기를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및 시리아의 퀴리니우스가 총독으로 있을 때로 맞추어 잡는다(눅 2:1-2)30
. 또한 예수 사역 시작의 때를 구체적으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즉위 15년 째 되는 해"로 맞춘다(3:1). 그리고 누가는 자신의 내러티브 속에 - 특히 사도행전에서 - 여러 구체적인 통치자와 공공 관리들을 소개시킨다. 바울이 로마 총독 베스도와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한 연설에서 자신의 생애를 돌이키면서 말했듯이,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행 26:26). 예수의 삶과 뒤이어진 교회의 발흥은 공적인 사안의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따라서 누가가 교회와 이 정치 당국의 세력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묻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일이다. 설사 콘뵉만과 캐시디가 모두 제한된 증거로 너무 많은 무게를 짊어지게 하고 상대 쪽의 증거를 과소평가 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논쟁은 검토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이슈들을 제기한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할 것인가를 물었던 교묘한 질문에 예수가 답변한 내용에 대해(눅 20:20-26) 수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그 구절은 이 이슈들에 대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사 속의 기독교는 예수의 반응을, 통치자에게 세금 내기를 묵인하는 것으로 해석을 해 왔다. 그래서 세속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을 구분하는 "두 왕국" 이론을 설정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적절하지 못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왜 예수의 적들이 그의 대답에 "놀라워" 하고 입을 다물어 버리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의 대답이 단순하게, "그래요, 황제에게 세금을 내시오"였다면, 그의 적들은 예수를 성공적으로 순응주의자로 낙인찍는 함정 속에 몰아넣은 것이 되었다. 순응주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 터이고 또한 예수 자신의 하나님 나라 도래의 선포와도 갈등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예수의 시대에는 강력한 정치 용어였음을 있지 말아야 한다. 이 용어는 외세의 지배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언하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31
이 구절은 자세하게 읽어보면, 예수의 대답이 '정말 하나님께 속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비유적인 분별력의 요청을 했기 때문에 그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교회의 정치적 소명에 대한 누가의 이해를 바로 평가하기 위해서 강구할 수 있는 더 적절한 길은 사도행전에서 실제적으로 교회가 정치 권력과 갖는 상호작용을 기술하고 있는 내러티브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 일은 여기서 수행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큰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요약적인 관찰을 할 수 있다. 우선, 콘뵉만의 주장을 지지하게 하는 중요한 증거가 있다. 일반적으로 로마 관리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취급하는데 있어 공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사도들은 확실하게 제국에 저항하여 반란을 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캐시디의 해석도 역시 사도행전의 본문에서 지지를 얻을만한 증거를 갖고 있다. 막 시작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반복하여 전통적 관행에 불편함을 야기시키고 기성 사회 질서와 긴장관계에 서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당국자들과 갈등에 빠진다. 정치 지도자와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대제사장과 및 대제사장 가족들과 함께 그들을 체포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 요구를 분명하게 거절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 나왔을 때 공동체가 모여서 보인 반응이다. 누가는, 외관상으로 볼 때 전체 공동체에 의해 한 목소리로 올려진, 긴 기도를 기록한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들]과32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행 4:24b-30, 시 2;1-2를 인용)
인상적인 점은,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적인 충돌을 일으킨 것이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공회였는데도 시편 2편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는 이 기도는 이 사건을 이방인과 유대인을 같이 포함하는 권력자들과의 광범위한 갈등의 일부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와 요한의 저항은, 주와 메시아에 반대하는 "세상의 군왕들"과 부딪히는 교회의 광범위한 갈등의 상징이다. 물론 누가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반대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한 지역의 신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조성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배자들의 손에 의해 죽은 예수의 사건도 단지 하나님이 예정했던 것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아무리 교회의 힘이 현재로서 미약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선포자들을 반대하는 저들은 "헛된 일"을 상상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결국 지배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현재 자신의 손을 펼쳐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는 것은 바로 교회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진행의 사건이 사도행전 5:17-42에서 되풀이된다. 이번에는 사도들이 다시 공회에 불려 들어가서 그리스도인의 시민 불복종 운동의 기초가 되는 개념을 말한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NRSV는 약간의 의역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본래의 의도를 잘 잡아준다. "우리는 다른 어떤 인간 권력 당국보다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됩니다"). 여기에, 권력 당국을 향한 길들여진 순응과 묵인의 암시는 일체 없다. 교회는 자신들의 일정과 계획이 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 계획에는 예수에 대한 전파뿐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입각한 공동체의 재조각도 포함되어 있다. 만일 어느 정권이든지 이 사명을 방해하려 한다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일어서서 그 정권 당국에 반대 증언을 하는 것뿐이다. 이때까지 살펴 본 이야기들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께서 종종 기적으로 개입하셔서 교회의 저항을 신원해 주실 것이다 - 예를 들자면, 천사들을 보내서 사도들을 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신 것(5:19-21).
한가지 마지막 예화는, 복음의 선포가 - 누가가 평가하기에 - 유대 당국에만 위협이 아니라 이방 사회의 보수적 현상유지에도 위협적이라는 것을 지적해 줄 것이다. 에베소의 은장색들은, 우상에 반대하는 바울의 설교가 아데미의 은감실을 파는 수익성 높은 사업에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주장에 동조하여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하는 열광적인 데모를 일으켰고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를 장시간에 걸쳐 외쳐댔다(행 19:23-41).
20세기 말을 살아가는 미국인들에는 종교적 감정을 그렇게 공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특이하게 보일 것이다. 이 이야기의 해석을 좀더 상황에 적합하게 하기 위해서, 은장색들을 오늘날의 방위산업체들로 바꾸어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들을 평화주의자로 바꾸어 놓아 자기네 사업을 망하게 한다고 염려하는 방위산업체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 경우 이 들의 구호는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대신에 아주 간단하게 "U-S-A! U-S-A!"가 될 것이다.

바울이 은장색들과 그들의 사업에 직접적으로 반대 의사를 취했다는 언급은 없다. 단지 회개를 설교하고 사람들을 교회 공동체로 불러모아 통합해 나가는 것이 그의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공동체 건설의 노력이 사사건건 사회-정치적 질서에 대해 폭발적인 새 촉매제를 도입하는 것 같이 보인다. 사도행전은, 다수의 사람들을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행 26:18) 돌리고 그들을 상당히 다른 종류의 규범에 따라 -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의해 정의되는 규범 - 사는 공동체 속으로 재사회화하는 운동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운동은 - 인격적 고결함이 동반되는 삶으로 뒷받침 될 때 - 불가피하게 주변 문화에 폭발적 효과를 가져온다. 그것이 바로 누가가 보는 교회의 변형력의 비전이다. 그것은, 무장 혁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성에 도전하는 반문화로서의 교회, 즉 대안을 증언하는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세계를 전복시킨다.33

3. 누가의 종말론: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누가 종말론의 취급은 다소 축약될 수 있다. 누가는 마태와 같은 시간대에 복음서를 쓰고 있기 때문에 몇 가지 같은 이슈에 직면하여 초기 교회의 묵시적 종말론에 비슷한 적용상의 변형을 가하기 때문이다.34
마태와 마찬가지로 누가도 늦춰진 파루시아를 고려하며 그래서 종말론적 긴장을 완화시킨다. 마태와 같이 누가 또한 종말론적 심판의 주제를 현재의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 하는데 더 강조를 둔다. 그러나 누가는, 역사 속에서 교회가 계속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장기적이고 건설적인 전망을 열어줌으로써, 그리고 교회의 현존에 종말론적 성령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종말론의 그림에 다소 특징이 있는 엑센트를 찍는다.
(가) 역사 속의 교회
누가는 여러 가지 미묘한 방법으로 마가복음의 페이지마다 울리는 묵시적 나팔 소리를 잠재운다. 누가의 전승 조정은 그가 물려받은 자료들을 편집하는 모습을 관찰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다음에 정리한 누가의 편집 행위의 결과들은 공관복음 대조(synopsis)의 도움을 받으면 검토하기에 좋을 것이다.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여행 내러티브에서 베푸는 마지막 가르침의 단위는 므나의 비유이다(눅 19:11-27). 이것은 마태의 달란트 비유의 누가 판이라 할 수 있다. 누가가 이 비유에 더하는 도입부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기(눅 19:11) 때문에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여행의 정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가 성으로 행진해 들어가 즉시 하나님 나라를 출범시킬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누가의 내러티브에서, 이어지는 비유는 제자들의 종말론적 열정을 식히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는 귀족의 알레고리를 뽑아 낸다. 이 귀인은 자기의 종들에게 각각 10 므나씩을 맡긴다(19:12). 이 귀인은 분명히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는 하나님의 우편으로 "갈"터이고(행 2:33) 나중에 권능을 가지고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이 비유는 그 길이를 알 수 없는 중간기 동안의 믿을만한 청지기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예수가 광야에서의 시험을 마치고 갈릴리에 돌아왔을 때(누가는 여기에 "성령의 권능으로"라는 말을 더한다), 누가는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선포의 내용을 생략한다. 마가에서 예수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했다(막 1:15). 누가는 단지,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눅 4:15)고 쓰고 있다.
▶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결말에서 누가는 좋은 씨가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그것을 굳게 붙잡고' '인내로서'(hypomone)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누가의 해석은 추수의 풍성함이 아니라, 선한 믿음 안에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지속적 능력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부름조차 누가에 의해 독특한 편집의 손길이 주어진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참고, 막 8:34). 간단한 kata hemeran(날마다)을 추가함으로써 누가는 일생에 한번 있는 극적인 선택의 소명을 일상적인 것, 즉 매일 매일 제자도의 삶을 사는 것으로 변형시킨다.
▶ 수난 내러티브에 있는 재판 장면의 극적인 대화에서, 누가는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에 대한 언급을 생략함으로써 (아니면 모든 미래의 강림에 대한 언급을 아예 생략함으로써) 다니엘 7:13-14에 대한 암시를 약화시킨다. 누가의 예수는,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말한다(눅 22:69).
▶ 묵시론적인 담화에서 신실한 자들을 미혹하려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고할 때, 예수는 그들이 "내가 그로라"고 말할 뿐 아니라, "때가 가까웠다![ho kairos eggiken, 이것은 마가 1:15에서 마가의 예수가 한 말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할 것이라고 주의를 준다(눅 21:8). 뒤이어 지는 구절에서, 누가는 마가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막 13:7)를 "끝은 곧 되지 아니 하리라"(21:9)로 바꾼다. 마지막으로 21:19에서 누가는 마가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막 13:13)를 "너희의 인내[hyppmone]로 너희의 영혼을 얻으리라"로 바꾼다.35

▶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과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는 말을 추가함으로써(21:20, 25), 누가는 효과적으로 담화의 강조점을 묵시적인 미래 환란에서 얼마 전의 역사적 과거에 정박되어 자신과 자신의 독자들에게 해당되는 사건으로 옮겨 버린다. 물론 그 역사적 사건은 기원 70년에 발생한 로마의 예루살렘 정복이다.
위에 열거한 전승의 변경 중 그저 한가지만 취하여 생각한다면 편집상의 의도가 많이 약해질 것이지만, 누적된 모든 증거를 감안하면, 누가가 임박한 묵시적 사건에 대한 기대를 완화시키려 했다는 점이 강력하게 부각된다. 확실히 누가는 그의 묵시론적 담화(21:34-36)의 말미에서 분명히 밝히듯이, 미래의 심판을 계속 확인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급박하게 종말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결코 장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사도행전 시작 부분에서 예수가 승천을 하기 전에 사도들과 예수 사이에 진행되는 대화는 누가가 종말론을 다루는 방향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사도들은 - 아주 합리적으로 - 예수의 부활이 있었으므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가 마침내 왔는가 물어본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7-8)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는 공동체를 위한 예수의 마지막 말씀이 이것이다. 종말론의 진행 시간표는 잊어버려라.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은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도들이 떠나는 모습을 본 그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천사의 뒤이어지는 확언에도 불구하고, 강조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부터 이탈되어("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급박한 선교의 사명으로 이행된다(행 1:10-11).
존 캐럴(John Carroll)의 누가 종말론 연구는, 누가의 이야기의 세계와 누가 공동체의 역사적 상황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캐럴의 견해에 따르면, 누가는 급박한 종말론적 기대를 누가 자신의 시대로 끌어 당겨 교회 내에서 그 긴박한 기대가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수를 급박한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기대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든다. "[내러티브 속에서의] 지체는 누가 자신의 상황에서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탱해주고 있다."36
캐럴의 누가 본래 의도의 분석이 설득력이 있기는 하지만, 누가복음-사도행전의 텍스트가 오랜 시간에 걸쳐 교회에서 계속 읽혀질 때 누가의 적용을 위한 조정의 최종 결과는 다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의 종말에 대한 기대의 긴박성을 축소시키고 심판의 때를 무한정 미루어진 미래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누가는 무한정 팽창하는 역사적 "중간기"를 창조해 낸다. 이 중간기에는 실제적으로 교회가 중요성에 있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조셉 피츠마이어(Joseph Fitzmyer)가 언급하듯이, 누가는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임박함에 대한 배타적 초점으로부터, 현재의 교회 시대 또한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서 자기 위치를 갖는다는 점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동시키려" 애를 썼다.37
이렇게 역사 속에 교회를 위한 여지를 만들어준 것이 누가가 신약의 신학과 윤리를 위해 이룩한 가장 중요한 공헌들 중의 하나이다.
(나) 교회 안에 있는 종말론적 영
계속 진행되는 역사 내에 있는 공동체의 삶은 - 다시 또 마가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면서 - 약속된 구출만 기다리도록 침침하게 예정된 시간이 결코 아니다. 공동체는 이미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았다. 위대한 능력, 기쁨과 확신의 원천인 성령이 그것이다. 누가가 묘사하고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는 단지 구약 언약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 "만유를 회복[apokatastasis]할 때"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행 3:21). 누가가 성령을 종말론적 사인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은, 그가 사도행전 2:17의 요엘 인용문의 시작부분을 변경시켜 원래의 "그 후에"를 "말세에"로 만들어 놓은 데서 잘 보여진다. 성령의 부어주심은 말세의 전조(前兆)이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고 행동하는 공동체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며,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 미래를 공동의 삶 속으로 이행시키고, 그래서 세상을 향해 부활의 능력에 대해 증거한다. 그러한 확신은 사도행전에 엄청난 에너지와 전진력을 부여한다.
성령은 선교를 위한 능력과 아주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베푼다. 무작위로 선택하여 예를 하나 들자면, 빌립이 이디오피아 내시와 대화를 주도하게 된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이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행 8:29; 또한 11;12; 13:2; 16:6-7; 20:23; 20:28; 21:11 등을 보라). 마찬가지로,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할례와 토라의 준수를 부과하지 말 것을 결정한 중요한 예루살렘 공의회도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으로 기록된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행 15:28). 이 책이 사도행전이 아니라 성령행전이라고 불리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 교회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서는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없다. 성령께서 새 백성을 모으고 조각하면서 옛 장애물과 관습들은 무너진다.
(다) 종말론적 역전
성령의 종말론적 부어주심은 강한 자와 눌린 자의 운명 속에 침투하여 그 위치를 뒤바꿔 놓는다. 이는 마리아가 누가 복음의 도입부에 있는 그녀의 노래에서 예견한 것이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2-53)
우리는 이미 이 전도(顚倒) 모티브의 여러 예들을 관찰한 바 있다. 누가의 지복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세리와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에 받아들이는 이야기 등이 그것들이다. 누가의 돌아온 탕자 비유도 비슷한 요점을 갖고 있다(눅 15:32). 부랑아 아들이 넉넉한 잔치로 환영을 받는 반면 의무에 충실하던 아들은 불평하면서 외곽으로 밀려난다. 여러 가지 다른 차원의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 비유는 사도행전에서의 역전을 예고하는 이야기로 읽어야 할 것이다. 많은 이방인들이 기쁨으로 복음의 전도를 수용하는 곳에서 율법을 준수하는 많은 유대인들은 이러한 선교의 발전에 대해 뒤로 주춤 물러나 꺼림직한 상태를 야기시킨다.38

이 제목 하에 이곳에서 우리는 - 시간과 지면이 충분하게 주어졌다면 좋을텐데 - 여성에 대한 누가의 인상적인 묘사를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누가에게 있어서 여성은 구원사를 전개시키는데 꼭 필요한 완성된 인물들로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인격적 반응이 모든 것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들로서 묘사된다. 마리아가 노래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고," 그녀를 위하여 그리고 그녀를 통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누가 복음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여인들의 명단은 다른 어떤 신약의 책들에서보다 길다. 이것은 누가가 의식적인 페미니스트였기 때문은 아니다. 이 용어를 일세기 저자에게 적용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오산이다. 그것은 성령의 종말론적 역전의 능력이 누가가 알고 있는 전승 속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능력이 여성들을 자신들이 이전까지 누리지 못했던 지위로 세워 일으켜 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7-18, 밑줄 강조는 필자의 것)
그래서, 누가가 여성에게 주고 있는 중요한 역할은 내재한 성평등에 대한 선험적 확신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또 하나의 종말론적 역전의 사인, 즉 하나님께서 강자를 무너뜨리고 낮은 자를 들어올리심으로서 잘못된 세계를 바로잡는 역사의 표징 중의 하나이다.
누가의 긴 이야기에서 언급된 이와 유사한 역전의 전체 목록을 만들어 보는 것도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깨달음을 주는 작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대되었던 것들을 뒤집는 일은 누가의 좋은 소식 구성의 심층 구조에 놓여진 물밑 운동이기 때문이다.39
이점에 있어서 누가의 도덕적 비전은, 십자가의 복음이 지혜와 권력에 대한 세상의 생각을 전복시킨다는 바울과 신학적으로 일치한다. 누가의 이야기에서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일들은 계속 발생한다. 이것은 단지 저자의 문학적 기발함의 사인만은 아니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주의 은혜의 해"가 드디어 왔다는 누가의 확신의 산물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며 그로 말미암아 포로가 풀려나며 눌린 자가 자유를 얻는다. 그러한 이적과 기사가 터져 흘러나오는 곳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는, 마지막 심판의 날이 언제 올 것인가를 과도하게 염려하지 않고 기쁨을 가지고 현재 속에서 살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누가의 종말론적 전승 취급이 누가 자신으로 하여금 참을성 있고 상상력이 넘치는 방식으로 파루시아의 지체에 의해 창조된 신학적, 목회상의 문제들을 처리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열렬하게 기다렸던 그리스도의 승리의 재림에 대한 꿈이 무한정 연기되었을 때 교회는 그 현실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까? 누가의 시대에 제기되었던 문제는 천 구 백년이 지난 뒤 랭스턴 휴스(Langston Hughes)가 그의 시 "지체된 꿈"(Dream Deferred)을 통해 전달해준 실망의 문제와 비슷했다.40

지체된 꿈에 무슨 일이 있었나?
말라버렸나?
햇볕 속의 건포도처럼
아니면 헌데처럼 곪아서 -
그리고는 달려가?
썩은 고기처럼 악취를 내는가?
아니면 말라비틀어진 껍질 위에 뿌려진 설탕 -
시?처럼 달아?
아마 그냥 늘어졌겠지
무거운 짐을 지고서
아니면 터져 버렸나?
어떤 무감각한 누가복음-사도행전 해석자들은 이것을 발흥하는 "초기 카톨릭주의"를 위한, 향수에 젖은 승전의 선전문 조각으로 본다. 이들은 실제로 이 문서 안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은 "시?처럼 달아서 설탕 얹어진 껍질"이 되었다고 주장한다.41
그러나 이제까지 진행된 논의는, 대신, 누가가 믿음의 공동체에 시간과 역사 속에 설 굳건한 발판을 제공하는 "질서정연한 설명"을 이루어냈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 그것은 누가에게 있어서, 공동체가 길고도 즐거운 순례의 길을 출발하는데 필요한 자기 버팀목의 비전이 된다.
4. 행동을 위한 배경이 되는 누가의 내러티브 세계
누가복음-사도행전의 긴 내러티브는 교회의 도덕적 분별과 행동이 자리 잡을 수 있는 널찍한 구조물을 세워준다. 다음의 주안점들은 필자가 이 2부작의 내러티브 세계에 대해 관찰해 온 것의 요약이 될 것이다.
첫째로, 누가는 독자들에게 시간과 역사 내에서의 방향 감각을 제공해 준다. 누가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분리된 개인의 일시적인 하나님 대면의 사안으로 이해될 수 없다. 엘리어트의 구절을 원용하자면 그것은 "치열한 순간이 아니다/격리되어 전도 후도 없는."42
누가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크게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속적 신실하심의 이야기 내에 서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섭리에 의해 지도된 과거로부터 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 내에 안전하게 약속이 된 끝을 향하여 움직여 나아가고 있다. 이 시간 속의 위치지어짐은 누가가 복음서의 서론에서 그의 독자들에게 약속한 안전(asphaleia)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누가복음-사도행전과 교회의 관계는 애네이드(Aeneid)와 로마와의 관계와 같다.
둘째로, 시간 속에서 교회의 방향의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갖는 이스라엘과의 직접적인 연속성이다. 공동체의 정체는 특수한 구원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교회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과거에 백성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구원해 내셨던 그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교회의 현재 경험은 성경 속의 하나님의 약속들 안에서 예시되고 또 그 약속들과 일관성을 가져야만 한다.
셋째로, 바로 공동체가 이스라엘로 확인되고, 구약의 내러티브들과의 모형적 연계 안에 서 있기 때문에, 공동체는 자신을, 약속된 종착지로 출애굽을 했으나 아직 그곳에 도달하지 않은 여행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된다. 그러한 여행은 고난, 위험, 희생을 동반한다. 예기치 못했던 운명의 전환이 있을 것이며 공동체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고자 열린 자세를 보전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의 삶의 이 비전은 마태의 것보다 훨씬 더 신축성과 혁신성을 향해 잘 순응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여행이 목적이 없거나 계획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적 지도자인 예수가 길을 인도해 왔고, 공동체는 그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야만 된다 - 그래서 누가가 그리스도인의 움직임을 "도"(The Way)로 묘사한다(행 9:2; 18:25; 19:9, 23; 22:4; 24;14, 22).
넷째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누가의 깊은 확신은 이야기에 긍정적이고, 견고한, 세계-긍정적인 성격을 부여한다.43
요한 공동체와는 달리(6장을 보라) 누가복음-사도행전에 있는 교회는 악한 세계로부터 물러나는 방어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대신 누가의 공동체는 담대하게 공적인 사안의 무대에서 활동하며, 복음을 합리적인 용어로 모든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권면하며 개방적인 반응을 기대한다. 교회의 정치적 상황의 이러한 긍정적 평가와 밀접하게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누가의 차라리 우아하고 심미적인 감각, 즉 누가가 취하는 미와 질서에 있어서의 명백한 기쁨이다. 누가의 이야기하기는 인간의 문학적 기술과 예술 및 문화의 미묘한 감상을 숨쉬듯 내어 뿜는다.
다섯째로, 내러티브의 효과적인 어조는 기쁨과 찬양으로 특징지어진다. 탄생 이야기에 있는 찬송시들은 실질적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노래하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에 - 세대와 세대를 거치면서 독자들이 해 왔던 것처럼 - 동참하게 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사도행전에서 교회의 사명이 전개되면서, 공동체는 "즐겁고 관대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것은 투옥과 어려움 속에서조차 가능한 일이다. 즐거워함은 그날의 질서이다. 예를 들자면, 사도들이 심문을 받고 매를 맞았을 때, 누가는 우리에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이야기해 준다(행 5:41). 사도행전 13:52는 누가가 묘사하는 교회의 간단한 스케치가 될 수 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여섯째로, 성령이 교회의 사역과 증거를 위한 능력을 준다. 마태와 마찬가지로 누가도 (그러나 다른 이유로 해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저력에 대해 전혀 어두운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종교 심리학의 복잡한 이슈와 씨름을 하지도 않는다. 확실히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행 2:38). 그러나 성령이 교회에 쏟아 부어지는 곳에서, 성령은 마치 순종, 찬양, 기사의 큰 강물 속에 있는 것 같이 신자들을 휩쓸고 내려간다. 성령의 능력을 입어, 공동체는 담대하게 위대한 일들을 소망할 수 있고, 비전을 볼 수도 있으며, 꿈을 꾸기도 하고 세상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사도행전이 창백하고 무능한 "초기 카톨릭주의"를 공인한다는 생각은, 성령의 능력의 매혹을 완전히 망각한 학자들에 의해서만 주창될 수 있다. 만일 사도행전의 본문이 주창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초기 카톨릭주의"라기 보다는 "초기 오순절주의"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차라리 옳을 것이다.)44
무엇보다 명백한 것은, 성령이 공동체로 하여금 부활의 능력을 말과 행실로 증거할 수 있게끔 만든다는 점이다.
일곱째로, 성령이 일하는 곳에서는 해방이 진행 중이다. 좋은 소식이 가난한 자에게 전파되고, 포로가 풀려나며, 소경의 시력이 회복되며, 눌린 자에게 구원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목적은 언약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 안에서 정의가 선포, 실천되게 하기 위함이다. 해방의 언어가 다양한 정치적 이유로 유발된 관심 안에서 광범위하게 전용되었기 때문에, 누가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저항이나 권력의 획득을 통해 교회 밖의 정치적 구조를 개혁하려 했다는 증거를 일체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누가는 새로운 인간 공동체 - 교회 - 형성의 이야기를 해 준다. 그 공동체 안에서 물건들이 공유되고 잘못된 것들이 바로 잡힌다. 이런 방식으로 사도들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효과를 얻는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이 교회에 던지는 질문은 - 그때와 지금에 걸쳐 - "당신이 사회를 개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부활의 능력이 당신들 속에서 일하고 있는가?"이다. 그들 중에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물질적 자원을 공동체가 공유하는 것은 성령의 해방 역사의 가장 강력한 표식이다.


1. 놀랍게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주제가 쉬라게의 누가복음-사도행전 취급에서 생략이 되어있다(Schrage 1988, 152-161).
2.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길은 없으나 전통적인 관행을 좇아 저자를 '누가'로 부르기로 한다.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Fitzmyer 1981, 35-53을 보라. 피츠마이어가 올바로 결론을 내리듯이, "이 글의 저자가, 바울의 선교 동행인이었고, 의사이기까지 하다는 전통적인 누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 일은 누가복음을 해석하는데 사실상 별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53쪽).
3. Schneider 1977. 누가복음-사도행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는 Squires 1993을 보라.
4.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현재의 맥락으로 볼 때, 이 이름은 관심 있는 어느 독자에게라도 해당될 수 있는 가공의 대상일 수 있다.
5. Dahl 1976, 88.
6. 이러한 일치의 유형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위해서는, R. E. Brown 1979?, 233-499를 보라. 이 점에 대한 최근의 글로는 Green 1995가 있다.
7. 누가가 구약을 사용하는 기법에 대해서는, Holtz 1968; Rese 1969; Craddock 1985; Bock 1987; Barrett 1988; Evans and Sanders 1993; Kimball 1995를 보라.
8. 누가가 장면을 배치시키는데 있어서 인위적이라는 점은 누가 4:23에서 설명이 미리 되지 않은 언급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누가의 편집상의 작은 실수이다. 누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는 아직 가버나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9. 이 인용문은 이사야 61:1-2와 이사야 58:6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러한 혼합 구절이 담겨진 본문이 실제로 갈리리 회당에서 사용되었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다. 누가는 예수의 정체와 소명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표현하기 위해 이 혼합 구절을 만들어냈다.
10. Susan Garrett(1990)는,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예수가 사단의 굴레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해내는 것이 모세-출애굽기 모형론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여기서 적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