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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원교수의 신약성경의 도덕적 비젼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서로 사랑하기

윤리의 주제를 찾는 독자들에게, 요한복음은 혼동을 주는 본문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서 발견되는 구체적인 도덕적 가르침 중 거의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다. 폭력, 소유, 또는 이혼에 대한 교훈도 없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선생으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비밀을 알려주는, 지칠 줄 모르는 유일한 계시자로 제시된다. 예수 자신이 생명을 가져다주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온 존재이다.1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의 공동체를 위해 최소한의 도덕적 교훈을 제공한다. 예수의 계명을 지키라는 지시가 반복해서 공동체에게 주어진다(14:15, 21; 15:10; 참고, 요일 2:3-6).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이 계명들의 실제 내용이 본문에 한번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우리가 만일 신약 정경에 네 번째 복음서만 갖고 있으면,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어질 것이다.
비슷하게, 모세의 율법도 요한의 도덕적 비전에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모세의 율법은 예수를 예시(豫示)하는 것으로 읽히고 그 의미는 예수의 '인격'(person, 位) 속으로 흡수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요 5:39-40, 46-47)
요한복음의 어디에서도 율법을 도덕적 행위의 규정으로 보아 그에 호소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 요한의 공동체에 있어서 토라가 암묵적으로라도 규범으로 남아있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2
또한 요한의 문헌들 어디에서도 초기 기독교의 논란이었던 할례와 음식물 규정에 대한 논쟁의 흔적도 없다. 유대교와의 갈등은 일체 기독론적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윤리나 실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은 - 비록 이 둘이 서로 같은 저자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양자는 공동의 흐름을 대변하는 전통이다3
- 세상으로부터 깊이 소외된 신자들의 공동체, 아마 존재론적으로도 세상과 분리가 되어있는 그런 공동체를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의 긴 고별 담화의 결론 부분에 위치한, 제자들을 위한 장문의 기도에서, 예수는 이렇게 아버지께 기도한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 17:14). 강하게 종파적인 요한계열의 비전은 신약성경 내에서 세계와 그 문화에 대한 누가의 낙관적 긍정과는 정 반대 쪽 극에 위치하고 있다. 리차드 니이버(H. Richard Niebuhr)가 그의 고전적인 연구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서 요한일서를 그리스도교 전통 내에서 "문화에 반대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의 정신을 지닌 전형적인 예로 선정한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4

분명히 고립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요한계열 전승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는 이 문헌들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랑의 계명이 신자들의 공동체 내에서만 적용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언스트 케제만이 제대로 관찰을 했듯이,
네 번째 복음서에 있는 사랑의 계명은 문제가 없지 않다… 요한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없다… 요한에게 있어서 형제를 향한 사랑이 신약 성경의 다른 책들에서 요청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라는 조짐은 전혀 없다.5

이렇게 공동체 내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때문에 어떤 해석가들은 요한계열의 글이 윤리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훌던(J. L. Houlden)은, "요한에게 있어서, 신자들은 '세상'을 향해 아무런 의무도 없고 오직 자신처럼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모종의 의무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라고6
불만의 단언을 한다. 특별히 강한 어조로 요한의 태도에 저항하는 표현은, "요한계열 윤리의 약점과 도덕적 파산"에 대해 논하는 잭 샌더스(Jack T. Sanders)에 의해서 발언된다.
여기에는,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거나(바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강도 만나 두들겨 맞아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해 멈춰서 응급조치를 하라는 요청을 대표한다(누가)는 것 등에 대해 고려하는 그리스도교가 없다. 요한계열의 그리스도교는 사람이 제대로 믿고 있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형제여, 당신은 구원 받았나요?" 이것이 요한계열의 그리스도인이 길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 가는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 죽어 가는 사람의 피가 땅에 얼룩을 만들어 가는 동안에, "당신은 당신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나요?" "만일 당신이 믿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약속을 하는 것이 요한계열의 그리스도인이다.7

샌더스의 공격이 정당한 것일까? 사실 기독론으로 만원이라 윤리가 밖으로 밀려난 것 같이 보인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요한일서는 이 점에 있어 다소간 요한복음을 교정하여 균형을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내가 반복해서 주장했듯이, 신약의 윤리적 함의는 신약의 직접적인 가르침의 내용에만 국한될 수가 없다. 요한의 경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을 조각하는 윤리적 함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복음서들보다 더욱 분명하게, 이야기 전체를 읽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글들이 지닌 종파적 특성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샌더스가 내린 이 글들의 윤리적 특질에 대한 심한 비난은 다소 성급한 바 없지 않다. 샌더스는 이 글들의 기원으로서의 특정 역사적 상황과, 이 이야기가 독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세계를 구성하는 복잡한 방식을 너무 소홀하게 취급했다.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문의 기독론으로 시작하여, 교회의 그림으로 이동하고, 마지막으로 요한의 이야기가 도덕적 분별을 위한 상징적 배경을 창조하는 방식에 대한 종합 판단의 요약으로 가고자 한다. 주로 요한복음에 초점을 맞출 것이지만 적절한 시점에서 요한서신이 제공하는 증언을 논의에 끌어들일 것이다. 우리의 주 관심은 신약 정경 내에서 제시되는 주요 도덕적 비전들을 추적하는데 있기 때문에, 요한의 서신서와 복음서 사이에 지나치게 민감한 구분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복음서 내에 있다고 주장하는 다양한 편집의 층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이어지는 논의의 지배적 전제는, 요한계열의 전승이 독특하면서도 신학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한 통합된 궤적(trajectory)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어떤 가능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애쓰는 방향으로 그 전승의 궤적을 상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 궤적의 전승에 더하고 있는 것은 우의(友誼)적인 수정이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그와 그의 공동체가 "태초부터"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의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정리하려는 것일 뿐이다(요일 1:1-5).

1. 요한의 기독론: 하늘에서 온 사람
네 번째 복음서에서 묘사된 예수는, 복음서의 첫줄부터 시작해서, 빛과 구원을 전해주기 위해 세상에 들어온 신적인 인물로서 계시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성한 기원과 운명을 완전하게 의식하여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신성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 그리고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게도 -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못하기는 했지만, 이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정체에 대해 일체 비밀이 없다. 자신이 체포된 후에 예수는 진실 되게 대제사장에게 선언하였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요 18:20).
예수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같이 있었던 선재(先在)의 로고스이다. 그를 통하여 세상이 만들어졌다. 비록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에서 '로고스'(말씀)란 호칭이 예수에게 다시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내러티브의 기타 다른 많은 특징들이 그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이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예수는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에서 자신의 선재를 단언한다("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 그의 아연케 하는 공적 선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우리는, 그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반복하여 듣게 된다(3:31, 6:51-58). 예수는 자신의 천상(天上)적 기원과 "유대인"의 기원을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8:23).8

요한계열의 다른 자세한 묘사들도 예수의 고양된 초자연적 지위에 대한 증거를 담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아는 초자연적인 지력(知力)이 있다(2:23-25). 그는 외관상 일반 물질로 만들어진 음식으로 배고파하지 않는다(4:31-34, 요한일서 저자가 대항하여 싸우는 후대의 가현설에 근거를 주었던 요소들이다). 또한 살벌한 군중들로부터 피해 신비스럽게 사라지기도 한다(7:30, 8:59). 예수는 자신의 친구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도 아랑곳하지 않는 기꺼움으로 맞는다. 그것이 자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유용한 교육 보조 자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11:14-15). 예수의 기적들은 "표적"(signs)으로 해석되어,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떡" 담화에서와 같이, 그 기적들 후에 예수 자신이 긴 묵상의 해석을 베풀어야만 된다. 공관복음서의 예수와는 달리, 요한복음의 예수는 반복해서 장황한 기독론적 담화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정체를 선포하고 하나님과 자신의 하나됨을 이야기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여기서 신의 영광이 시작부터 끝까지 밝히 드러나는 예수, 즉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을 본다.9
믿음의 공동체에 의해 증언을 받은 "영광"은(1:14) - 그 밝기로 인하여 - 말씀이 (정말로) 육신이 되었다는 고백을 지워버릴 것 같이 위협적이다. 그래서 케제만의 저 유명한 표현, '요한의 기독론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결국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게 되는 "순진한 가현설"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는10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요한일서가 꾸짖는 가현설 분파는 -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했던 사람들(요일 4:2-3) - 사실상 그들의 주장의 단서를 네 번째 복음서에 있는 이러한 요인들로부터 얻어냈다.11
그러한 해석에 반대하여, 요한일서는 - 그래서 요한일서의 저자는 생명의 말씀을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는(요일 1:1) 특징 있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 예수의 진정한 인성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네 번째 복음서의 유산을 해석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한 해석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요한의 내러티브 또한 성육신의 육체적 구체성과 인간적 실재성을 안고 있는 많은 특징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목이 마르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것을 부탁하는 예수를 우리에게 그려주고 있다(4:7; 참고, 19;28). 나사로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는 예수(11:35), 자신의 옷을 벗고 수건을 취하여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더러워진 발을 씻는 예수를 그려준다(13:3-5). 예수는 육신이 된 말씀이다(1:14). 그리고 그의 육신은 계시-연극을 위해 장식으로 입혀 놓은 옷가지만은 아니다. 그는 육체를 가진 존재의 고통과 기쁨과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다.
요한의 예수 그림 안에 있는 이 두 강조점 - 신성과 인성 - 사이의 역설적인 긴장의 연장 속에 요한계열 기독론의 핵이 놓여있다. 요한은 예수의 인물에 대하여 비상한 주장들을 폈다. 예수를, 스토아 철학의 보편적 로고스에 적절한 용어와 이미지로, 유대 지혜 전승의 선재(先在, "전능자의 영광의 순수한 방출"인[지혜서 7:25]) 소피아로, 그리고 이스라엘의 선지자 전승에 묘사된 하나님의 말씀(시 33:6, 사 55:1-11을 보라)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이며 또한 그 이상이고 그러면서 하나로 수렴되어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또한 다른 사람이 그에게 물리력을 가할 수도 있고 상처도 입을 수 있는 육신을 가진 역사 속의 특정 인물이기도 했다. 이것은, 요한이 그리고 있는 예수의 삶의 배경이 되는 환경으로서의 상징적 세계들을 초월하고 또 그것들을 산산이 부숴 버리고 말겠다는 위협의 주장이다. 성 어거스틴은 - 그는 회심 전에 플라톤주의자로 훈련을 받았다 - 요한 기독론의 세계-변형적 성격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어떤 플라톤주의자들의 책에서… 나는, 말 그대로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다양한 이유로 강화된 내용으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읽게 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사람들에게 왔으나 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를 영접하는 자들,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이것은 거기서 읽지 못한다. 다시 거기서 나는,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난 것도 아니며 혈통으로 난 것도 아니며 인간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며 육신의 의지로 인한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라는 것을 읽는다. 그러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읽지 못한다.12

언어는 균열을 일으킬 위험이 있고 이 마음 조이는 고백의 압력 아래 긴장한다. 오든(W. H. Auden)의 시구(詩句)가 그 역설의 진수를 붙잡는다.
어떻게 '영원'이 시간의 행위를,
'무한'이 유한한 사실이 될까?
가능한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13

그러나 요한복음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불가능한 일을 하셨다. 하늘로부터 온 인간 예수는 유한한 세상을 위하여 "유한한 사실"이 되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요한이 자신의 서언 말미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육신이 됨으로써 "아버지의 가슴에 가까운 독생자가… 그[하나님]를 주석(exegesato)했다"(1:18, 필자역). 예수는 인간의 형태를 지닌 하나님의 유한적인 해석이다 -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뜻이 된다.
요한의 성육신 기독론의 여러 결과들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천상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땅의 존재이기도 한 예수의 인물이,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강력한 이원론을 만드는 이야기를 해체시켜(deconstruct) 버린다. 후대의 영지주의 구속자 신화와는 달리, 제 4복음서의 하늘로부터 온 구속자(redeemer)는 세상의 창조자이기도 하며, 그 창조 세계 안에 온전하게 진입함으로써 그 창조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창조와 구속이 한데 묶인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윤리에 있어서 이 점의 중요성은 상당하다.

2. 서로 사랑하기: 예수의 친구들
(가) 예수 안에 거하기
예수는 세상 속에 들어옴으로 해서 자신을 추종하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끌어 모은다 - 실로 그들은 그와의 연합 속에 들어간다. 요한은 교회와 예수와의 관계를 위해 메타포의 만화경을 돌린다. 신자들이 생명을 갖기 위해 자신의 피와 몸을 흡수해야 하기 때문에 예수는 생명의 떡이 된다(6:35-59). 또는 다시 그가 선한 목자가 되기도 한다. 신자들은 아버지가 그에게 준 양들이다. 그들은 예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누구도 그들을 그의 손에서 낚아채 빼앗아 갈 수 없다(10:1-3). 다시 또 예수는 포도나무가 되며 그들은 생명을 보전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 그의 안에 머물러야 하는 가지가 된다(15;1-8). 신자들과 예수와의 연대는 매우 강력하다. 그들은 예수의 사명을 수행할 과제를 부여받으며 그가 세상에서 겪어야 했던 것과 동일한 세상의 거절과 싸워야만 한다. 예수는 자신의 고별 담화에서 애정 어린 경고와 동시에 격려의 말을 그들에게 준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15:18-21)
비슷한 맥락에서 예수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들의 사명을 위해 기도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7:15-18)
그들을 위임하는 일은 부활의 날에 공식적으로 발생한다. 안에서 걸어 잠근 방에 함께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가 나타나서 말한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그래서 요한은 - 바울, 마가, 누가와 마찬가지로 - 신자들의 공동체가 예수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되어있다는 점을 확인한다. 그 공동체는 자신의 삶을 예수의 운명에 맞추고 그것을 공유해야만 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요한일서도 제자들이 예수와 연합하면서 생겨나는 윤리적 의미를 부각시키면서 동일한 메시지를 강조한다.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5b-6). 예수와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는 공동체의 윤리 규범을 위하여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그러나, 어려움은 어떻게 예수의 이러한 형식상의 단언이 윤리적 유형으로서 구체적인 행위의 차원에서 보따리를 풀 수 있느냐 하는 점에 있다. 네 번째 복음서의 예수는 실제적으로 화려한 계시의 말씀을 베푸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많은 것을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행동들은 주로 기적적인 성격의 것이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소경과 앉은뱅이를 치료하며,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린다. 이런 행동들이 공동체의 행위를 위한 윤리적 패턴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요한이 실제로 계속해서 기적적인 치유를 베푸는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주는 약속을 보면 그러한 행위가 계속되었을 가능성을 암시 받게 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12-13)
여기서 목적절은 -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 - 네 번째 복음서에 있는 모든 기적들의 바탕 논리를 가리킨다. 그 기적들은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처럼 하나님 나라의 강림을 예시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의 예가 되는 전능의 역사가 아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기적들이 주로 예수의 신적 권위를 보여주는 표적으로 구실한다. 각 기적들은 예수가 자기 자신을 가리켜 계시의 담화를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경우들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서 오 천명을 먹인 사건은(6:1-14) "생명의 떡" 담화를 위한 내러티브의 경우를 제공해 준다. 더구나 요한은 몇 기적 이야기들을 분명히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의 회복된 시력은 예수에 대한 믿음의 상징이 된다. 반면에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은 아이러니의 역전을 통해 거꾸로 소경이 된다. 따라서 요한계열의 공동체가 예수처럼 계속 치유의 기적적 "역사(役事)"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더 큰 복음전도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다.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예수에 대한 진리를 선포하여 듣는 이들 모두가 믿음을 통해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20:31을 보라).
(나) 공동체 내의 사랑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위해 내리는 분명한 하나의 명령은 그가 그들을 사랑한 것같이 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13:34). 이것 또한 세상을 향해 증언을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네 번째 복음서에서, 사랑의 성격은 마태의 산상수훈에서처럼 긴 가르침을 통해 구체화되지 않는다. 그대신 단 하나의 극화된 비유를 통해 사랑이 무엇인가가 설명된다. 바로 예수가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긴 사건이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3-5, 12-15)
이 내러티브는 13:34-35의 "새 계명"을 위한 장면을 설정한다. 예수는,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들도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사랑이란 타인을 겸손하게 섬기는 것이다. 요한의 이야기에서 수난 내러티브 직전에 위치한 이 세족의 장면이 예수의 죽음을 미리 형상화하고 예수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을 사랑과 종 됨의 행위로서 해석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이 감지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실로, 우리는 고별 강연을 계속 읽어가면서, 사랑의 계명과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 사이의 연계가 분명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15:12-13, 17)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바울의 생각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제자도를 위한 규범으로서 십자가의 삶을 규정하는 자기-희생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그 공동체 내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서로를 위해 글자 뜻 그대로 내어주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요한의 공동체 내부 사랑에 대한 강조가 종종 교회 내에서의 감상적인 자기만족의 면허증처럼 취급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오해는 요한 공동체의 극적으로 반문화적인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데서 오는 것이다(아래의 [다]를 보라). 그것은 상호간에 비용이 드는 공동체 내에서의 희생적인 섬김을 요청하는 요한의 부름의 심각성을 평가절하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요한이 분명하게 예수의 죽음을 온 세상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1:29,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주어 죽게 하셨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된 사명이 공동체 내에서의 사랑과 섬김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지라도, 세상에서 예수의 사명에 동참하는 제자들은 믿음의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채 남아있을 수가 없다. 자신의 생명을 버릴 것을 요구받는 그 소명은 "새 계명" 안에 공개적으로 상술된 것보다는 더 광범위한 함의를 갖고 있을 것이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재차 강조한 뒤 그 계명을 경제적 정의의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계명에 체계적인 확장을 가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1, 16-18)14

비록 이 훈계의 권면이 장황하게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요한의 사랑 이야기가 실용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는 점을 명약관화하게 보여준다. 공동체 내에서의 사랑은 그저 따뜻한 느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행동의 문제이다. "세상 재물"을 나누는 것은 "서로 사랑함"의 실천이 의미하는 것들 중의 한 예일 뿐이다. 그렇다면 요한일서 3:23과 같은 일반화된 형식의 계명은 실제로 명세화 하지 않은 상당히 광범위한 영역의 행동들을 포함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공동체 내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권고를, 누가에서 정의된 것 같이 이웃을, 또는 마태에서와 같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좀더 보편적인 소명으로부터 종파적인 후퇴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의 유행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교회 내의 갈등과 투쟁의 실질적 강도를 고려할 때, 사랑의 교제로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비전은 사소하게 취급하여 무시할 종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 공동체 내의 사랑 사이에 존재하는 용해 불가한 연계는 반복을 거듭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20-21)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한 마지막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출발점으로는 나쁘지 않다.
(다) 역사적 상황
요한의 교회관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문헌에 의해 다루어지는 특정 목회 이슈들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지난 세대에 이루어진 요한계열 문헌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네 번째 복음서와 요한서신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의 이해에 혁명적인 기여를 했다.15
독특한 요한계열의 전승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긴밀하게 짜여진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형성되었다. 공동체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에베소와 같이 특별한 도시 상황 내에서 지역화된 한 공동체를 상정해야 될 것 같다. 이 공동체는 (요한이서와 삼서의 증거들이 암시하듯이) 주변의 다른 마을에 위성 공동체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16
이 공동체의 초기 단계에, 추종자들은 계속 유대교의 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활동했었다. 그때는 유대교 회당의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보전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의 절기에 참여하면서 동료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예수 주장을 거절하면서 유대교 공동체와의 관계는 점차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공동체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는 사건으로서 - 주후 70년 성전의 파괴 이후 어느 시점에서 - 그들은 회당에 참여할 수 없게끔 추방을 당했다.17
복음서에서 세 번에 걸쳐 언급되는 이 추방은(9:22, 12:42, 16:2)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겼고 공동체의 전승에 그 흔적이 있다. "유대인"이란 표현은 불명예스러운 말이 되었고 (17장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보게 될 것이다) 요한 공동체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데이빗 렌스버거(David Rensberger)는 '아포쉬나고고스'(aposynagogos, 회당에서 쫓겨난)라고 선언되는 충격적 경험 이후 이루어진 작은 그룹의 요한계열 그리스도인들의 이동을 잘 묘사해 준다.
추방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동안 그들에게 삶의 구조와 정체감을 주었던 많은 것들로부터 잘려져 나가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추방은 사회적인 배척을 의미하고 그로 말미암은 가족, 친구들과의 관계의 상실을 뜻했다. 아마 경제 관계의 박탈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종교적 혼란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제 회당의 모임들, 공적인 예전, 절기 축제와 그 의례들이 모두 그들을 부인했다. 거룩한 경전 해석의 권위 자체가 그들의 적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그래서 사실상, 공유된 인식, 전제, 신념, 이상, 그리고 유대교 내에 있을 때 그들의 세계에 의미를 주었던 소망 등 이 모든 것들로 구성된 전체 우주 존재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18

이러한 상황 아래서, 공동체는 어쩔 수 없이 회당 및 "세상"에 반대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정의해야만 했다. 이 세상은 자연히 적대적이고 믿을 수 없는 장소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요한의 공동체는 자신들의 위치를 정하고 고백이 만들어내는 경계선을 더한층 강화시켰다. 그리고, 예수가 자신의 위(位, person)로서 - 보충을 한 것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가서 - 자신들을 잘라 낸 유대교의 모든 것을 대체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논쟁의 깃발을 올렸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태도로 예수를 하나님의 진리의 담지자로 영접하기를 거절하게 되자(요 1:10-11), 믿음의 공동체는 생명과 사랑이 발견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요한일서에서 강력하게 상술되어 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요일 3:13-14, 19)
세상이 악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요한일서의 독자들은 이렇게 경고를 듣는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공동체를 혼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6). 이런 상황 아래서는 공동체 내에서의 형제와 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공동체의 자기 보전 행위일 뿐 아니라 예언자적인 저항이기도 하다. 미움과 부로 인한 오만, 그리고 악한 자의 권세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 속에서, 서로를 향한 신앙 공동체의 사랑은 아직 꺼지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비취는 빛으로 서있게 된다.
네 번째 복음서가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기초하여 읽힐 때, 즉 공동체 정체감의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읽힐 때, 그것이 권하는 공동체 내의 상호간의 사랑은 상대적으로 덜 배타주의로 들리며, 오히려 압제를 당하는 소수 공동체 내의 일치와 단결의 긴급한 호소처럼 들린다. 이러한 호소의 긴박함은 서신서들이 쓰일 때 즈음에 더욱 강화되었다. 이 소수 공동체가 내부의 분열을 겪기 시작했다(요일 2:18-27; 4:1-6; 요이 7-11; 요삼 9-10을 보라). 이런 상황에서 교회 내의 사랑에 대한 독특한 요한계열의 호소는 외우내환에 싸인 교회 내에서의 단합을 부르짖는 통렬한 외침이 된다.
(라) 사회적 위치의 재정립: "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데이빗 렌스버거(David Rensberger)는 그의 중요한 책 「요한의 믿음과 해방의 공동체」(Johannine Faith and Liberating Community)에서, 요한의 비전은 개인적인 회심이나 일련의 교의를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그보다 오히려, 네 번째 복음서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운명의 선을 넘어 새로운 공동체 속으로 발을 들여놓을 것을 요청 받는다. 이 단계는 "위험한 사회적 이동"을 가져온다.19
그의 니고데모 이야기(요 3장) 분석은, 네 번째 복음서가 유대교의 비밀스러운 동조자에게 예수에 대한 "공적인 충성 서약"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네 번째 복음서 기자는 높은 위치에 있는 비밀 그리스도인에게 공개적인 고백을 하고 억압받는 공동체와 운명을 같이 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가 감수해야 하는 위험을 과소평가해서는 아니 된다… 그들은 사실상 박해자 쪽에서 박해를 받는 쪽으로 편을 바꾸라는 요청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가입하라고 요청을 받은 그룹은 세상에서 볼 때, 지위도, 권력도 자리도 없는 장소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사회적으로 자리 이동을 하라고, 그것도 뻔히 알면서 하향 이동을 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는 셈이다. 사실상 생각해 보면 그들의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20

결과적으로, 요한 공동체가 유대인의 문화적 배경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네 번째 복음서의 윤리로 볼 때는 근본적으로 결단을 요하는 성격의 일이었다. 이 복음서의 내러티브 세계에서, 자신의 특권의 위치를 포기함 없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될 수 없다. 예수 자신의 십자가 죽음의 운명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회 경험의 강력한 선례(先例)와 상징이 된다.
더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유대교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로마 권력과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반문화적인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 이것은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 장면에서 가장 생생하게 극화되어 드러난다. 여기서 예수의 왕위(王位)는 아이러니컬한 모습으로 로마의 권력에 대항하는 위치에 놓여진다. 빌라도의 심문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는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선언한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인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가 그들의 손에 넘겨지는 것을 막으려고 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18:36). 예수를 못박을 권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빌라도의 주장에 대응하여 예수는, 사실상 빌라도가 예수 자신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다는 점을 명백하게 단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십자가로 예수를 "높이 들어올리는 일") 이루시기 위해 임시로 제한된 권한을 빌라도에게 부여했을 뿐이다(19:10-11). 이 대화는 로마의 주권 주장을 전복하며 로마 권력을 하나님의 권한 아래 복속시킨다. 그래서, 자신들의 정체를 예수 안에서 발견하는 공동체 내의 독자들은 자신들이 세상과 갖는 관계를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격려 받는다. 렌스버그의 말을 다시 들어본다.
예수가 가이사에 반대하여 단언하는 주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그 주권은 하나님의 주권 그 자체이지 폭력으로 얻어지는 세상의 주권이 아니다… 여기에 관련된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의식의 혁명, 우상 숭배적이고 억압적인 세계 질서로부터, 자유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진리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왕 되신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충성하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전복하는 것이고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들을 전복시킨다.21

이 세상 왕국의 선택과 예수의 왕국의 선택 사이에 확연한 선이 그어져 있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의 반응은 아이러니컬하다. 빌라도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고 물을 때, 그들은 - 사실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셈이 된다 -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한다(19:15). 이렇게 조소적인 선언을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운명을 세상의 권력에 맡겨버렸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그 반대의 선택을 하도록 권면을 받는다. 그들은 "우리에게는 예수 이외의 다른 왕이 없습니다"라고 선언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비타협적 충성의 사회적 결과를 짊어지고 살아나가야 한다.

3. 요한의 종말론: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안다"
신약 성경 내에 있는 모든 텍스트들 중에서 요한복음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기대를 가장 급격하게 재정립한다. 복음서는, 첫 세대 사도적 증인들의 죽음이 공동체의 믿음에 위기를 초래했을 때의 시간을 추적하는 자동 기록기와 같다.22
예를 들어, 복음서의 저자는 - 아니면 최소한 요한복음 21장의 후기 저자 - 예수가, 이 복음서의 뒤에 있는 특별한 전승의 원천인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파루시아 전에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는 소문을 눌러 잠재워야만 했다(21:20-23). 이것은, 그 사랑하는 제자가 실제로 죽은 다음에만 공동체의 문제로서 이슈가 될 수 있는 성격의 사안이었다. 공동체의 상황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지표 하나는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예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발견된다. 예수는 차례로, 자신을 위해서(17;1-5), 자신의 원 제자들을 위해서("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17:6-19), 그리고 제 2세대 신자들을 위하여("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 17:20-26) 기도한다. 그 기도가 안고 있는 큰 부담은, 저희가 시간상으로 분리가 되어 있지만 예수 안에서 연합하여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었다(17:23). 이러한 기도는 차세대 신자들에 대한 관심을 담고 있다. 그들이, 사랑하시는 제자와 다른 첫 세대 신자들이 제공해 주던 연계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예수와의 관계를 확신할 수 있도록 하려는 관심이다. 그러한 독자들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 하시는 말씀이 위로의 축복이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이런 상황에서 예수 재림의 지체는 교회에 의심과 어려움을 초래했을 수 있다. 그러나 요한계열의 전승은, 공동체가 파루시아의 지연을 신학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구비시키는 방식으로 그들의 믿음을 조성했다. 요한 신학의 두 가지 특수한 요인이 네 번 째 복음서를 통해 이 상황을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예수가 이 세상을 대면할 때 심판이 이미 임했다는 확신과 보혜사 성령이 믿음의 공동체 내에 활동적으로 임재해 있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주제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나서, 여전히 미래의 종말론적 기대를 계속 이야기하는 요한계열의 텍스트들에 주목할 것이다.
(가) '크리시스'(KRISIS)
네 번째 복음서는 종말론에 대해 비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예수와 연계되는 장래의 완성을 기다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이, 예수가 세상 속에 오신 결과로 이미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krisis]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7-19)
루돌프 불트만이 관찰했듯이, "예수와의 대면이 발생하는 순간 믿음과 불신, 보는 것과 소경된 것 사이의 구분이 이미 달성되었다는 사실 속에 심판은 발생하는 것이다."23
그것은 마치 예수가 이 세상에 옴으로 말미암아 거대한 자기장(磁氣場)을 들여온 것과 같다. 모든 인류가 음극이던 양극이던 필연적으로 양자택일하여 갈라서게 된다. 음극 쪽에는 예수를 하나님의 메신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서는데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양극 쪽에는, 믿어서 이미 결정적 순간을 지나쳐 영생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래서,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에게 영생은 바로 현재이다. 종말론적인 사건은 이미 발생을 했다. 신자들은 더 이상 영광 속에 있는 어떤 하나님 나라의 미래 현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예수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판은 종말 때에 "저기 있는" 미래의 사건이 아니다. 심판은 현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의해 우리는 심판 아래 놓이거나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의 종말론적 비전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다시 살리라는 믿음의 표현을 한 마르다에게, 심오하게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더 넉넉한 약속을 주고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예수를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아는 사람은 이미 온전하게 종말론적인 생명을 소유한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육체적 죽음은 사소한 일이 된다. 예수가 나사로를 일으킨 것은(11:38-44) 예수가 죽음보다 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죽음이 그가 사랑하는 자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다는 영적 진리를 보여주는 외적인 표적이 된다.
이러한 신학적 견해는, 만일 온전하고 일관성 있게 실행만 된다면, "죽음"과 "삶"을 현재의 실존 양식과 질을 위한 상징들로 변형시킨다. 이것이 네 번째 복음에서 일어났던 것만큼이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묵시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은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으로 변형된다. 미래의 심판은 마태에서처럼 공동체 위에 걸려 있어서 현재의 순종에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가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우주적 정의를 이룩하게 되어 있는 상태에서, 교회의 계속되는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키는 인내의 선교를 수행하고 있는 시간으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마가에서와 같이 현재가 믿음을 지키면서 긴박하게 인자의 강림을 갈망하는 침침한 어둠의 시간이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요한의 공동체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와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종말론적 생명의 풍성함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확신 속에서 요한일서의 저자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요일 3:14) 말할 수 있다. 공동체 내의 사랑은, 예수께 속한 자들이 죽음의 손아귀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의 사인이요 보증이 된다. 따라서, 사랑의 실패와 공동체 내의 균열은 - 요한서신에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는 종류의 그러한 분열 - 이런 종류의 실현된 종말론에 심각한 위협을 구성한다.
(나) 보혜사
요한의 독특한 보혜사 교의 또한 파루시아의 지연과 첫 세대 증인들의 죽음으로 생겨난 필요에 대한 답변이 되고 있다. 네 번째 복음서의 고별 담화는 예수의 떠나심이 공동체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반복해서 심어주고 있다(14:18).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parakletos]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너희들 가운데]24
계시겠음이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15-17, 25-26)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있고자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떠나야만 하지만, 대신 그는 공동체 한가운데 "거할"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다. (성령이 각 개인 안에 거할 것이라는 생각은 - 비록 그리스도교 경건주의의 감상주의적 형태로 선호되는 믿음이지만 - 이 텍스트의 바른 해석이 아니다.) 그 보혜사의 기능은 공동체를 가르치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예수가 가르쳤던 것들을 상기시키며, 세상 앞에서 예수에 대해 증거하는 일이다(15:26, 16:7-11).25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가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까지도 보혜사가 계속적인 인도를 해 주실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6:12-14)
간단하게 말해서, 보혜사는 공동체 내에 하나님의 계속적인 임재를 제공해 줄 뿐 아니라 계속적인 계시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네 번째 복음서가 어떻게 이 계속적인 인도의 가능성을 생각할까?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의 사고 경향은, 개별 신자들의 가슴속에 있는 일종의 직관적 지식을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무디 스미스(D. Moody Smith)와 기타의 학자들이 제안했듯이, 예배를 위한 모임에서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루어지는 예언적 발언을 통해 공동체를 인도하는 보혜사를 생각해야 될 것 같다.26
사실, 네 번째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형태의 예수의 말씀인 '에고 에이미'(ego eimi, 나는, 내가) 담화는 이런 종류의 카리스마적 예언 활동의 결과인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한 설명이다.
따라서, 요한의 윤리에 대한 어떤 성찰이라도 공동체가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는 그 기대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된다. 사실, 이러한 기대감이야말로 요한계열의 텍스트에 구체적인 도덕적 교훈이 거의 없는 것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이 될 수 있기도 하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en hymin, "너희 가운데"]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요일 2:21, 27a). 물론, 이 편지를 이끌어낸 실제 상황은, 이점에 대한 저자의 확인이 수사학적 제스처나 희원(希願)의 사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사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요일 4:1, 5). 공동체는 분명히 분열을 경험했는데, 그것은 경쟁관계에 있는 성령의 영감을 받은 지도자들이 서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진리와 오류를 구분하는 간단한 테스트 방법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어쨌든, 신자 공동체 내에 있는 보혜사의 적극적 임재는 위로의 근원이기도 하고, 공동체가 이미 예수 안에 거함으로써 알고 있는 영생의 단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래 구원에 대한 소망의 긴박성은 요한계열의 비전, 특히 네 번째 복음서의 비전에서 극적으로 감소되었다.
(다) 마지막 날의 부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또한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 문헌들에 장래의 소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죽음, 갈등, 그리고 분열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한, 창조와 구속을 같이 추구하는 어떤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도 구원을 완전히 현재 차원으로만 붕괴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네 번째 복음서에서조차 영적으로 실현된 종말론과 더불어 우리는 전통적인 초기 그리스도교의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을 다시 확인하는 몇몇 본문들을 보게 된다. 확실히 이것은 이 복음서에서 부차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이것들의 존재는 이 복음서가 영지주의의 가장자리를 넘어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게 해 주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8-29)
이 확언은 좀더 요한계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단언인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강조는 필자의 것)는 말씀 바로 뒤이어 나오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 이 확언에서 "죽은 자"는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된다. 그러나 복음의 미래 묵시적 지평을 재확인하는 28-29절의 첨가는, 네 번째 복음서가 부활을 순전히 비유적인 의미에만 용해시키기를 꺼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트만은, 5:28-29와 같은 구절들은 요한의 급진적인 신학적 비전을 좀더 전통적인 초기 그리스도인의 사고 구조에 짜 맞추려는 후대 "교회의 편집자"에 의한 삽입이라고 주장한다.27
다른 학자들은 좀더 복잡한 가설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Brown)은 5:28-29가 처음에는 네 번째 복음서에 포함되지 않았었으나 나중 단계에서 실현된 종말론에 대한 네 번째 복음서의 비유적 언어의 오역(誤譯, 불트만의 것 같은!)을 방지하려는 편집자에 의해서 - 아마도 요한일서의 저자? - 첨가되었다고 본다.28
그러나 그러한 구절들이(또한 6:39-40, 44, 54; 12:48을 보라) 복음서의 처음 기록 때가 아닌 그 이후 누군가에 의해 첨가되었다는 것은 오직 추정상의 문제일 뿐이다. 그 가설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텍스트는 현재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텍스트에는 상호간에 외관상 역설적인 관계 속에서 현재와 미래의 종말론이 병존한다. (이 긴장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서 6:54를 보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브라운이 바로 관찰을 했듯이, 만일 "예수 자신의 메시지 내에 실현된 종말론과 최종적인 종말론의 긴장이 내재해 있었다"면,29
왜 우리가 네 번 째 복음서의 메시지에 비슷한 긴장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굳이 부인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환언하자면, 이러한 긴장에 대한 최선의 해답은 자료-비평에 의해서 보다는 신학적 설명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른 어떤 복음서들보다도 요한은 현재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심판과 생명-부여의 능력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현재의 "영생" 경험이 기대되게도 하는 부활의 미래 소망이 동시에 있지 않았다면 중대한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요한은 현재의 영광으로 미래의 소망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가 믿는 이들에게 현재 제공하는 생명의 충만함을 강조하려 했을 뿐이다. 이러한 신학적 비전이 제시하는 윤리적 함의는 네 번째 복음서에서 완전하게 상술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경향의 작업이 취하게 될 방향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를 위한 근거와 규범이 모두 거의 배타적일 정도로 예수의 인격(位, person)에의 순응에 위치하게 된다. 장래의 보상과 형벌은 윤리적 행위의 동기를 자극하는데 거의 최소한의 구실만을 할뿐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정통으로 현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예수와의 연합으로부터 나오는 구체적 행위는 세목화 하여 상술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직관적으로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일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는(요일 3:9) 비상한 주장까지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단언들 간에 생겨나는 첨예한 긴장관계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나머지 신약의 다른 책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열의 문헌에 있어서도, 직설법과 명령법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적 갈등의 유일한 해소책은 장래의 종말론적 소망에서 발견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2-3)
4. 행동의 배경으로서 요한의 내러티브 세계
요한의 상징 세계의 윤곽을 따라 추적을 마쳤으므로, 우리는 이제 그 세계가 도덕적 분별과 행동을 위해 구조틀을 설정하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 결론을 그려낼까 한다.
첫째, 요한의 내러티브 세계에서는, 시간이 흐려져서 배경 속으로 퇴행한다. 예수가 영원한 로고스이기 때문에 그는 과거의 사건과 전통에 매이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 속에서 아무 때나 공동체에게 말할 수 있다. 공동체와 예수의 영적인 연합이 워낙 심오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경험은 예수의 생애의 사건들과 날카롭게 구별될 필요가 없다. 과거와 현재는 "양층 구조의 드라마"(two-level drama)로서 서로를 향해 겹쳐져 있어서 예수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이야기가 되고 공동체의 이야기가 예수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30
예수와 저자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극은 용해된다. 그래서 요한의 시간관은 마태의 것과 유사하며 반대의 극에는 연대기적 진행과 질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누가의 시간관이 있다. 종말론적 희망의 미래 차원은 부분적으로 요한이 현재 예수와 하나됨을 축하하는 시점 속으로 매몰된다. 그렇다고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둘째, 요한에 따른 세계는 빛과 어둠, 위와 아래,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생명과 죽음 등의 양극성(binary polarities)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대립의 명제들은 애매모호함이나 중간치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만 한다. 그리고 이 결정적인 선택 안에서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다. 이 형태가 보이는 강력한 이원론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세계관을 우주론적 이원론(cosmic dualism)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빛의 권세와 어둠의 권세가 동등한 입장에서 대치상황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주권과 승리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어둠의 능력은 일시적이며 환각적이다. 그래서 예수는 수난 전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셋째, 이러한 양극화된 세계관이 지닌 사회적 함의는 요한계열의 전승을 형성하는데 있어 깊이 침투해 있는 요인이 된다. 네 번째 복음서는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유대인 공동체와의 신랄한 논쟁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요한 공동체는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뛰쳐나왔다. 타협과 순응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과는, 자신의 문화적 뿌리와 직접적 사회 환경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요한계열의 교회이다. 그래서 요한은 믿음의 공동체를 필연적으로 반(反)문화적이게 하고 세상을 경계한다.
그러나 넷째로, 믿는 자들의 공동체 내에서는, 요한계열의 전승이 연대와 교제의 찬란한 비전을 제시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자신들 상호간의 강력한 사랑을 특징으로 한다. (인기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노래 - 사실은 지나치게 강조되었다 - "저들은 우리의 사랑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안다"는 오래 묵은 요한계열의 신학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사랑은 단순한 개인적 애정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을 위한 종 됨의 정신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예수의 발을 씻기신 행위가 그 모델이 되어야 한다.
요한계열의 문헌으로 볼 때, 공동체 내에는 위계적 구조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사랑하시는 제자 및 요한이서와 삼서를 쓴 장로 같은 인물들이 존경을 받는 지도자들이기는 하지만, 요한의 비전은 현저하게 평등주의적이다. 그룹의 모든 구성원들이 다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아 진리를 안다고 한다(요일 2:18-27). 더 인상적인 것은, 예수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더 이상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명하는 점이다(요 15:13-15). (이 본문의 주목할 만한 성격은, 우리가 대조를 위해 마태의 예수가 비슷한 용어들로 제자들을 부르는 방법을 상상해 보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로, 우정은 요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그림에서 공공연하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예수는 이야기 속에서 선택된 인물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하는 모범의 예가 되고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11:5), 나사로(11:36) 그리고 물론 '사랑하시는 제자'가 그 특별한 사랑을 받는 대상들이다. 그래서, 광범위한 그리스도인 교제의 사랑 내에서,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특별한 관계의 사랑과 우정을 허용하고 장려하기까지 한다.
요한 공동체의 평등주의적 성격은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요한계열의 문헌은 여성이 교회의 삶 속에서 종속적인 역할을 한다고 느껴지게 하는 힌트를 전혀 주지 않고 있다. 네 번째 복음서에서 여성은 예수와 상호관계를 가지며 진정성이 있는 믿음을 보여 완전히 제 구실을 하는 인물들로 나타난다. 마르다는 마태의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예수에 대해 결정적으로 계시적인 고백을 발한다(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27).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드러내고, 여인은 효과적으로 그에 대한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선포한다(4:28-30, 39).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고 제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복음의 첫 담지자가 된다(20:1-18).31
그래서 요한의 여성은 예수를 세상에 고백하고 선포하는 공동체의 사명을 완전하게 공유하고 구체화한다.
다섯째, 요한계열의 전승이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구별하는 방법의 문제와 씨름을 한 증거는 거의 없지만, 죄를 분명하게 거부하며 의롭게 살 것을 요청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 태도가 분명하다. 이것은, "그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요일 3:6)는 내용이 있는 요한일서 3:4-10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 단언은 표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편지의 시작 부분에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실제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갖는 특징은 무죄함에 있기보다는 자신들의 죄를 기꺼이 빛 가운데로 가져와 그것을 고백하고 예수의 피로 용서를 받고 깨끗하게 되는 데에 있다(요일 1:5-9). 만일 예수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면(요 1:29), 교회는 자신들이 용서를 받은 죄인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어야만 한다. 사실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들이다(요일 1:10). 따라서, 3:4-10의 곤혹스러운 구절은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주장은 하면서도 파렴치한 죄를 짓는32
분리주의적인 적대자에 대한 논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본 단원의 결론에 의해 확인된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0)
죄의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요한의 입장은 요일 2:1에 잘 요약이 되어 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섯째, 신자들의 공동체를 인도하는 보혜사의 존재는 공동체에 위로와 도덕적 확신을 제공한다. 세상이 거부하고 박해를 가하는 현실에서, 성령은 - 공동체 내에서 예언자적 발언을 통해 현현된다 - 어려운 시대에 교회를 지탱해 주고 인도한다. 성령이 생명을 공급하는 예수의 능력을 계속 재확인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요한의 비전에는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기쁨이 넘친다.
일곱째,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권력관을 전복시킨다.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관리들은 똑 같이 사실상 자신들의 통제권 밖에 있는 사건들에 대해 통제를 가하려는 권력 사칭자들로 등장한다. 게일 오데이(Gail O'Day)가 빌라도 앞에 선 예수의 재판을 적절하게 묘사한다. "이 내러티브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권력의 모든 도구들을 갖고 있고 생명을 제거할 권한도 갖고 있으나, 참된 능력과 권위와 생명의 면전에서 무력하게 서있는 세속 통치자의 모습이다."33
십자가야말로 예수가 들림을 받아 영광을 입는 사건이기 때문에, 권력의 성격이 영구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재정의 된다. 이점에 있어서 요한은 다른 모든 신약의 증인들과 연합된 위치에 서 있다. 이점은 권력 행사에 대한 모든 윤리적 성찰을 위해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여덟째, 권력의 전복은 특징적이라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아이러니칼한 비전의 현현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요한은 극적인 아이러니(irony)를 즐긴다. 예수의 대화자로부터는 숨겨진 이중의 의미가 있으나 읽으면서 내용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 독자에게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종류의 대화를 즐겨 사용한다.34
그러한 아이러니는 복음서 저자의 고개짓과 눈짓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해석자들의 공동체 내에 집단 연대감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대제사장 가야바가,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요 11:49b-50)라고 선언할 때, 자신이 뜻했던 바는, "오믈릿을 만들려면 계란 몇 개는 깨질 수밖에 없어"와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요한과 요한의 독자들에게는 발언자가 의도했던 바와는 다르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들려온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러니가 영리한 문학적 기법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세상이 자기의 근원이 되는 분을 알지 못했다는 신학적 확신을 표현하는 필수적인 방법이기도 하다(참고, 요 1:1-11).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계시한 아이러니의 방식을 통해서만 예수가 참으로 누구인가를 알게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복음서에서 성육신은 이원론을 해체시킨다. 세상에 대한 요한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적 비전은 궁극적으로 가현설이 아니며 창조에 대해 적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더 깊은 차원의 신학적 확신에서 볼 때, 육신이 된 '말씀'은 창조의 선함과 중요성을 긍정적으로 확인한다. 모든 피조물은 로고스의 생명으로 숨을 쉰다. 그것을 떠나서는 아무런 생명도 없다(요 1:1-4). 이러한 확신은 요한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기술적으로 사용하는 피조 세계의 구성요소들인 세상의 상징들에서 잠재적으로 표출된다. 물, 포도주, 떡, 빛, 문, 양, 씨, 포도나무, 피, 물고기 등이 그러한 상징들이다. 로고스의 진리는 오직 이러한 상징들의 매개 안에서 그리고 매개를 통해서만 밝히 드러난다. 신약성경의 다른 어떤 문헌들도 요한만큼 일상적인 것들 안에, 또 그것들을 가지고 '영원한 것'을 생생하게 시각화하지 못했다. 그와 같은 원형적 상상력의 효과는 일상적인 것이 변형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 복음서가 사용하는 언어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예수를 심미적으로 풍성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예수의 초상화를 채색한다. 이러한 초상화에 상상의 공감을 갖고 반응하는 독자라면 - 샌더스가 희화화 했던 것처럼35
- 죽어가는 사람의 피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의 영혼만을 생각하는 윤리적 소경 됨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네 번째 복음서의 예수를 - 더러운 발을 씻겨주고 나사로의 무덤 가에서 눈물을 흘리는 예수 말이다 - 따르는 사람들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요일 3;18) 사랑하는 윤리를 배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몸을 주시는 주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요 6:51).


1. "그는 아무 것도 전해주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부를 뿐이다…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계시자인 예수는 자신이 계시자라는 사실 외에 아무 것도 계시하지 않는다"(Bultmann 1955 [vol2], 41, 66).
2. 반대 입장에 대해서는 Verhey 1984, 142-143을 보라.
3. 저자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Brown 1982, 14-35를 보라. Schrage는 이 문헌들을 한 단위로 취급하여 윤리적 내용과 그 함의를 다룬다(1988, 297). 나도 여기서 그와 같은 절차를 따르고자 한다.
4. H. R. Niebuhr 1951, 46-49.
5. K?semann 1968, 59.
6. Houlden 1973, 36.
7. J. T. Sanders 1975, 100.
8. "유대인"을 향한 요한의 태도에 대해서는 17장을 보라.
9. K?semann 1968, 8-9.
10. K?semann 1968, 26.
11. 이러한 관찰과 이어지는 상황 분석에 있어서 나는 R. E. Brown 1979b에 많이 의존했다.
12. Augustine 398, 130-131.
13. Mack, Dean and Frost 1961, 215에 있는 "For the Time Being."
14. NRSV의 단락 구분은 18절을 다음 단락의 시작 부분에 놓는 것이 묘하다. 필자는 Nestle-Aland를 따라서 18절을 선행 자료들의 결론으로 취급한다.
15. 이어지는 설명은, Martyn 1979; Meeks 1972; R. E. Brown 1979b; R. E. Brown 1982; Wengst 1983; Smith 1984; Rensberger 1988 등의 연구에 기초한 것이다.
16. R. E. Brown 1982, 101-102.
17. 네 번째 복음서의 배경에 대한 루이 마틴(J. Louis Martyn)의 개척자적인 연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배제된 것은, 얌니아의 랍비 아카데미에서 '비르카트 하 미님'(Birkat-ha-Minim, "이단자들에 반대하는 축도")을 재구성한 시기로서 주후 85년 경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Martyn 1979). 이 견해에 반대하는 입장으로는, Kimelman 1981; Katz 1984를 보라.
18. Rensberger 1988, 26-27.
19. Rensberger 1988, 113.
20. Rensberger 1988, 114.
21. Rensberger 1988, 116-117.
22. Minear 1984; R. E. Brown 1984, 84-123.
23. Bultmann 1955 (vol 2), 38.
24. 헬라 원문 en hymin을 "너희들 가운데"(among you)로 번역하는 것이 "너희 속에"(in you)로 번역하는 것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NRSV의 각주도 이렇게 하고 있다.
25. 나는 여기서도 NRSV의 번역에 이의를 제기한다. 요한복음 15:26의 peri mou는 "나 대신에"(on my behalf) 보다는 "나에 대하여"(about me)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26. Smith 1984, 15-17, 30-31; Boring 1979; 참고, Johnston 1970, 119-148.
27. Bultmann 1955 (vol 2), 39.
28. R. E. Brown 1966, cxxi.
29. R. E. Brown 1966, cxix.
30. Martyn 1979.
31. 이점은 케제만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 K?semann 1968, 29-31을 보라. 이 논제에 대해 자세하게 발전시킨 내용들을 위해서는 R. E. Brown 1979a, 183-198; R. E. Brown 1984, 94-95; Schneiders 1982; Sch?ssler Fiorenza 1983, 323-334를 보라.
32. Smith 1991, 82-88.
33. O'Day 1986, 112.
34. 요한의 아이러니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Meeks 1972; Culpepper 1983; Duke 1985, 특히 O'Day 1986을 보라.
35. 이 장의 첫 단락에 있는 Sanders의 인용문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