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역사신학 종교개혁사 2

2006.11.25 23:00

폭우 조회 수:6411 추천:84

XIII. 1530년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 이후부터 1555년 종교 평화협약 이전까지의 종교개혁사
a) 슈말칼덴 동맹
-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1530) 이후 루터파 제후들은 황제와 카톨릭파 제후들이 바로 무력으로 그들을 대항하리라고 믿었다. 제국의회 결정의 이러한 무력적인 행사를 방어하기 위해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서명자들은 1531년 방어동맹인 슈말칼덴 동맹을 1531년 2월 결성하였다.
- 동맹의 과업: 공격을 당할 경우 루터파 제후들은 그들의 단합을 지키기로 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또한 무력으로 황제를 대항할 것을 결정하였다. 헷센의 방백(Landgraf)인 필립(Philipp)은 이 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명백히 反합스부르크적인 성향을 이 동맹에 부여하였다.
- 1531년 2월 작센선제후국의 국경인 슈말칼덴(Schmalkalden)에서 맺어졌다.  동기: 1530년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다시 유효하게된 보름스 칙령과 루터파 제후들에 대한 무력적인 격퇴를 방어하기 위함.
- 동맹의 임무: 방어를 해야할 때 서로 군사적인 도움을 줄 것, 동맹군의 창립과 종교개혁을 정지시키려는 제국의 대법원의 소송에 대항하는 공동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
- 동맹 가담국: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서명국(작센선제후국, 헷센 안스바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안할트); 북독일의 도시들 (뤼벡, 막데부르크, 브레멘)뿐만 아니라 남독일의 도시들, 특히 슈트라스부르크는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뉘른베르크는 동맹에 가담하지 않았다.
- 신학자들, 특히 루터는 황제를 반대하는 무력적인 행동에 동의하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했다.  마침내 이들은 실질적인 권위는 제후들이며 황제는 단지 제후들에 의해 선거조약에 따라 선출되어지고 임명되어진다는 법률가들의 견해를 듣게 되었다. 근세초기에 형성되어 가는 제후국의 구조들이 나타났다.  슈말칼덴 동맹은 종교개혁사에 있어서 15년을 장식하고 있다.
b) 프로테스탄티즘의 지역적인 확대
- 슈말칼덴 동맹의 체결과 계속적인 터어키의 위협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뉘른베르크 유예  (1532년)에서 최초의 기한부의 종교적인 평화를 보장하게 된다.
- 1534년 뷰르템베르크 제후국(Herzogtum)이 종교개혁 진영에 가담하였다. 제후 울리히(Ulich)는 3명의 종교개혁자들과 연합하여 종교개혁을 수행하였다: 암브로시우스 발라러 (스위스와 고지 독일지역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침), 에어하르트 슈넵(Erhard Schnepf)과 요한네스 브렌츠(Johannes Brenz, 1499-1570), 이 두 사람은 철저한 루터파이다.
- 1534년 종교개혁은 폼메른(Pommern) 제후국에 진입하였다. 요한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 1485-1558)은 교회법을 만들었다. 그 이전에 부겐하겐은 브라운슈바이크의 교회법(1528년), 함부르크(1529년) 그리고 뤼벡의 교회법(1531년)을 만들었다. 후에 그는 덴마크의 교회법(1537년), 홀슈타인(1542년)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교회법(1543년)을 만들었다.
- 1539년 제후 하인리히(Heinrich)는 제후 게옥이 죽은 다음, 작센 제후국에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 또한 1539년 선제후 요아힘 2세(Joachim II.) 치하 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도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이곳에서 종교개혁은 카톨릭의 예배의식과 구습을 지켜가므로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였다.
- 독일의 대부분 지역이 1540년대 초반에 루터파가 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자유도시들, 그리고 아욱스부르크도 루터파가 되었다.
- 이미 1520년대에 종교개혁 운동은 독일의 국경을 넘어섰다: 폴란드-리타우엔, 헝가리, 특히 지벤뷰르겐과 스칸디나비아.
  독일에서 종교개혁의 첫 번째 봄이 오는 동안 복음은 이미 독일의 국경을 넘어서고 있었다. 서구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복음은 개별적인 또는 집단적인 추종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로 북구라파와 동북부에서만 복음은 지속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단지 정부의 강권에 의해서 민족적인 재 각성과 연관되어 있었다. 1513년부터 스칸디나비아의 3개국에 대한 지배를 장악할 수 있었던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2세(Christian II.)는 그에게 연루되었던 귀족과 교권에 대항한 싸움에서 이미 왕권 강화를 시도했다. 그의 국가 개혁적인 조처는 교회 생활에 깊이 관여되었는데, 예를 들면 로마에 호소하는 모든 행위를 금하고 죽은 자의 재산을 가지고 축적하는 것을 제한하였으며 고위 성직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고 수도원들을 감독들의 감독 아래 두었다; 그는 교회를 자신의 조세제도에 종속시켰다. 물론 그는 폭동이 일어나기 전 1523년 나라를 포기해야만 했다.
  프리드리히 1세 아래 루터교 선교는 덴마크에서 받아들여졌다; 수상인 요한 폰 란트차우(Johann von Rantzau)의 권고로 왕은 루터교를 허용했다. 프리드리히 1세가 죽자 카톨릭 성직자들이 크리스티안 2세(Christian II.)를 위하여 변호했지만 프리드리히의 아들 크리스티안 3세의 승리는 구교의 등극에 대한 루터교의 승리였으며 동맹으로 이루어진 농민혁명에 대한 승리를 뜻했다. 1536년 코펜하겐의 제국의회는 국교로서 루터교 교리의 제정을 결의했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은 왕이 주교의 머리로 규정한 새 교회 헌법을 만들었다.
  스웨덴은 이와 반대로 종교개혁의 도움으로 덴마크의 지배를 벗어났다. 스웨덴에서는 대부분의 주교가 덴마크에 호의적이었는데 슈텐 슈투레(Sten Sture)가 1517년 스웨덴의 민족 왕정을 세우고자 했을 때도 이 태도를 고수하였다. 때문에 1517년 제국민족의회는 웁살라(Upsala)의 대감독을 체포한 뒤 파면시켰다. 교황은 이에 대해 스웨덴에 대한 파문을 결정했다. 이 파문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에게 임무로 주어졌다. 이렇게 스웨덴에서 구교에 대한 문제는 덴마크의 지배와 뗄 수 없이 연관을 맺었다. 덴마크로부터 분리를 이루고자 했던 구스타프 바사(Gustav Wasa) 왕의 치하에서 올라우스 페트리(Olaus Petri)는 1524년 점차적으로 종교개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결정적인 밤은 1527년 베스트라스(Westras) 제국의회에서 일어났다. 스웨덴에서도 국가교회가 세워졌지만 왕은 주교단의 머리가 되지 않았다. 감독들은 더 많은 독립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개교회들은 성직자 선택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핀란드는 그 당시 스웨덴에 속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종교개혁의 실시는 스웨덴의 역사의 흐름에 편승되었다. 구스타프 바사 왕 아래서 미카엘 아그리콜(Mikael Agricol)은 종교개혁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번역가요 저술가로서 활동하였으며 또한 핀란드 문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 1525년 프로이센의 알브레히트(Albrecht von Pre en)는 수도국(修道國)을 세속적인 제후국으로 바꾸고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1544년 쾨니히스베르크(K nigsberg) 대학교가 강력한 정신적인 빛과 더불어 세워졌다.
- 1527년 스웨덴의 제국의회는 종교개혁을 선포하였다. 최초로 하나의 온전한 국가가 로마로부터 분리하였다.
- 1530년대에는 두 나라가 종교개혁에 가세하였다: 1534년 헨리 8세 하의 영국과 1536년 크리스티안 왕 치하의 덴마크 왕국, 그리고 동시에 노르웨이.
c) 뮨스터의 재세례파 왕국의 파국
- 힘이 없는 재세례파는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 이후 카톨릭은 물론 신교파의 통치자들에 의해 잔인하게 핍박을 받았다.    
- 모피 제조인인 슈베비쉬-할(Schw bisch-Hall) 출신의 멜히호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 ca. 1500-1543)에 의해 묵시론적이고 열광적인 사상이 재세례파에 유입되었다. 이 사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폭력을 통한 멸절을 요구한데서 극점에 도달하였다. 호프만이 스웨덴, 오스트프리슬란드, 네덜란드와 슈트라스부르크에 있은 다음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으며(소위 말하는 멜히오르파) 베스트팔렌 지역의 뮨스터(M nster)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렸다. 여기에서 설교자 베른하르트 로트만(Bernhard Rothmann)은 1533년 이후부터 재세례파적인 사상을 널리 전했다. 홀란드로부터 멜히오르파의 무리들이 옴으로써 시의회 의석의 대다수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주민들을 통치할 수 있었다(레이덴 출신의 얀 보켈손과 할렘 출신의 얀 마티스). 이들은 소유공동체, 일부다처제 그리고 폭력적인 통치를 표방한 묵시론적인 왕국을 세웠다.
- 1535년 뮨스터의 주교는 1년 이상의 포위를 통해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잔인한 복수가 행해졌고 카톨릭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 뮨스터의 재세례파 왕국으로 말미암아 전체 재세례파는 엄청난 재앙을 겪었다; 뮨스터의 재세례파 왕국은 언제나 박해에 대한 구실이 되었다.
d) 1536년의 비텐베르크 신앙일치서
- 부처(Martin Bucer, 1491-1551)는 성찬 논쟁이후 비텐베르크(Wittenberg)와 고지 독일 사이를 중재하려는 시도를 했다
- 1536년 독일에서 성찬논쟁은 비텐베르크 신앙일치서로 막을 내렸다. CA를 인정하고, Apologie와 타협안 인정을 결정한다: 성례전적인 일치와 부적당한 사람의 먹음(unio sacramentalis; Manducatio indignorum). 성찬의 은혜는 받는 사람의 합당과 합당하지 않음에 좌우되지 않는다.
- 1540년 Melanchthon이 CA의 변형을 발표했다(CA-Variata). 여기에서 성찬에 관한 제10항은 CA의 항을 변형(Worms 종교회담).
- 취리히는 이 약정(합의)에 참석치 않았다. Zwingli의 후계자인 불링어(Heinrich Bullinger)는 1536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제1 스위스 신앙고백(Confessio Helvetica prior)"을 작성했다.
- 1549년 제네바와 취리히는 성찬론에 대해 "Consensus Tigurinus"에서 일치하다.
e) 공의회 계획들과 슈말칼덴 조항
- 1536년 교황 파울 3세(Paul Ⅲ.)는 만투아(Mantua)에 공의회를 소집한다. 1537년 2월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슈말칼덴 동맹회의에서 공의회 참석에 대해 논의한다. 그들은 공의회를 일방적인 것으로(als unfrei) 거절한다. 멜랑히톤의  교황의 권력과 수위권에 관한 논문 (Tractatus de potestate et primatu papae)이 받아들여졌다.
- 공의회를 위해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바램에 따라 고백서를 작성하였다: "슈말칼덴 조항"(die Schmalkaldischen Artikel). 1537년의 회의에 루터는 불참(심한 병 때문에): 멜랑히톤은 이 고백서가 정식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을 방해하였고 단지 신학자들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1580년 협정신조서(Konkordienbuch)에서야 슈말칼덴 신조가 신앙고백서로서 채택된다.
- 루터는 이 고백서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1. 고대 교회의 모든 인정받은 고백서들(삼위일체론, 기독론)에 있는 교리적인 내용들.
2. 실천할 수 있고 토의할 수 있는 교리적 내용들.
3. 포기할 수 없는 항목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음. 미사제사의 거부, 재단, 수도원, 교황의 신적인 권리에 대한 거부
f) 종교회담들
- 공의회는 열리지 못함: 다시 고개든 터키 전쟁으로 황제는 루터파 제후들을 의지하였다. 프랑크푸르트 유예(1539년)는 Protestant에게 시한부적인 종교 평화를 가져다준다.
- Karl 5세는 종교 회담의 수단을 통해 Protestant를 카톨릭 교회로 회귀시키려 시도한다. 이 회담은 하게나우(Hagenau, 1540년, 성과 없었음), 보름스(Worms, 1540/41년) 그리고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1541년)에서 열렸다.
- 보름스에서 멜랑히톤과 에크(Eck)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의거하여 원죄에 대하여 토의하였으며 몇가지 항에서 양해하였다("보름스의 기록장", Wormser Buch).
- Regensburg에서는 칭의론에 관한 항에서 서로 양해를 했지만 화체론, 고해, 사면 (Absolution), 교황의 권위(교회에서)는 이견이 확립되었다.  종교회담은 무산되었다.
g) 슈말칼덴 동맹의 무력화와 슈말칼덴 전쟁
- 황제 칼5세가 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황과 함께 트리엔트 공의회의 소집을 합의한 이후(1545년), 슈말칼덴 전쟁의 발발이 감돈다.
- 유리한 상황들이 칼5세를 도왔는데, 슈말칼덴 동맹의 두 명의 중요한 제후들을 고립시키게 된다: 헷센의 필립이 1540년 이중으로 결혼하여 제국법을 위반하게 되어서, 그는 황제의 눈감아줌에 빌미가 잡혀 루터파를 위한 정치에 괴리를 두어야만 했다.  또한 황제는 작센의 제후인 알베르트가와 선제후 에른스트가 사이의 과거부터 내려온 경쟁심을 이용하여 작센의 모리츠에게 선제후 직위를 주기로 약속하였다. 모리츠는 슈말칼덴 동맹에서 탈퇴하였다.
- 40년대 초기에 종교개혁이 다양한 지역들에 받아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남쪽에서는 레겐스부르크와 북쪽에서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칼5세는 크레베 공을 1543년에 이길 수 있었는데 슈말칼덴 동맹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필립과 황제의 협정).  이로 말미암아 대주교 헤르만 폰 비트(Hermann von Wied)하에 있는 쾰른 대주교구에서 개신교의 노력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 1546년 황제는 작센과 헷센이 제국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구실로 슈말칼덴 전쟁을 일으켰다.  슈말칼덴 전쟁은 황제와 교황이 루터파 제후들과 싸운 종교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남독일과 북독일에 걸쳐 일어났다.  작센의 모리츠가 황제의 편에 서서 싸웠기 때문에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가 로마우어 하이데 위의 뮬베르크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1547. 4.24).  1547년 5월 19일의 비텐베르크의 항복으로 요한 프리드리히의 선제후 직위가 작센의 모리츠에게 옮겨졌다.
h) 아욱스부르크 가협정(Interim)과 작센의 모리츠(Moritz von Sachsen) 하의 정치적 선회
- 1547년 교황은 공의회를 교회국에서 최남단에 위치한 트리엔트에서 볼료냐로 옮겨 열었다. 칼의 승리이후(슈말칼덴 전쟁) 교황은 황제의 세력을 두려워했다. 칼 5세는 공의회의 장소 변경에 대해 항의를 했고, 볼료냐에서의 회의는 보류가 되었다.
- 1548년의 아욱스부르크의 제국의회에서 "아욱스부르크 인테림"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공의회의 결정 때까지 효력을 지닌 황제의 성명이었다.  황제는 이제 다시 종교적인 문제를 손에 쥐게 되었다.
- "아욱스부르크 인테림"은 슈말칼덴 전쟁에서 루터파의 참패 이후 카톨릭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시도이다.  무엇보다도 카톨릭 신학자들이 이것을 작성하였다(Pflug, Helding). 이것을 작성한 유일한 개신교 신학자: 브란덴부르크의 궁정 설교자인 요한 아그리콜라.
- 공의회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루터파들에게는 단지 두 가지 형태의 성례와 성직자의 결혼이 인정되었다.
- 남독일에서는 인테림에 대해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지만, 북독일에서는 특히 도시들에서(막데부르크) 두드러진 저항이 있었다.
- 작센선제후국에서는 1548년 12월 "라이프치히 인테림"이 나왔는데, 이것은 주로 멜랑히톤이 작성하였다.  단지 "중요하지 않는 것들"(Adiaphora), 즉 예식들과 의식들에 있어서만 받아들이되 중요한 신앙고백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표명되었다.
- "라이프치히 인테림"은 엄격한 루터파에게 강한 비판을 일으켰다(마티아스 플라치우스와 니콜라우스 폰 암스돌프).
- 1552년 개신교도들에게 정치적 전환이 왔다: "마이센의 유다"라 불리우는 작센의 모리츠는 황제를 대항하다.  이유: 황제 칼5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음.  자기 장인인 헷센의 필립을 포로로 잡고 모욕을 함. 모리츠는 강한 군주적인 황제의 통치에 대항, 제후의 독립을 위한 방어의 대리인이 되었다.  근세 초기의 지역국가(Territorialstaat)가 나타난다.
- 1552년 2월 모리츠는 인스부르크에서 매우 놀랐지만 그래도 피신 할 수 있었던 황제를 기습한다.
- 파사우 조약으로 슈말칼덴전쟁 이전에 정해진 법이 다시 인정되어지고 "아욱스부르크 인테림"은 폐지되었다.
XIV. 칼빈주의
  
a) 칼빈의 생애(1509-1564)
- 칼빈(Jean Cauvin, Joh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북 프랑스 노용(Noyon)에서 주교의 재정고문인 G rard Cauvin과 그의 부인 Jeanne Lefranc의 아들로 태어났다.
- 노용에 있는 Coll ge des Cappettes에서 라틴어를 공부하고 1523년 (추측하건대) Coll ge de la Marche와 Coll ge Montaigu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 1528년 문학석사를 취득했다.
- 1528년 파리에서 오를레앙(Orl ans) 그리고 1529년 부르제(Burges) 대학교에서 법학과 인문주의를 공부했다.
- 1531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파리에 왔다.
- 1533년부터 파리대학교의 인문주의자들 모임의 회원이 되었다. 이 모임은 종교개혁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Faber Stapulensis). 이 때에 에라스무스, 루터, 멜랑히톤의 글을 읽었다.
- "갑작스런 회심"으로 종교개혁적인 인식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1527/28년 혹은 늦게는 1533/34년).
- 1534년 말 칼빈은 프랑스와 1세 때 프로테스탄트 박해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슈트라스부르크를 지나 1535년 바젤에 왔다. 여기에서 그의 처녀작이고 주요작이 나왔다: '기독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 1536). 종교개혁 신학의 고전적인 작품으로 루터의 교리문답을 본받은 복음적인 가르침의 교리문답. 이 책으로 프랑스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받고 있는 오해를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판이 나왔다: 1539, 1541 그리고 1559년판.
-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 잠시 머문 뒤 도중에 제네바에 들러 파렐(Wilhelm Farel)로부터 이 도시에서 종교개혁에 함께 동참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네바에 머물게 된다 (1536년). 칼빈은 1537년 제네바 교회법을 작성하여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시에서 시민들이 파렐과 칼빈이 제네바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  마틴 부처(Martin Bucer)의 간곡한 부탁으로 슈트라스부르크에 있는 프랑스 난민들의 교회를 맡았다. 고등학교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쳤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독일의 종교개혁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1540년대 초반 하게나우(Hagenau), 보름스(1540/41),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1541)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멜랑히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가졌다. 로마서 주해.
- 제네바에서 칼빈의 추종자들은 그의 귀환을 성취하다. 자신의 교회법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1541년부터 제네바에 다시 머물게되었다. 투쟁 하에서 그의 종교개혁적인 활동의 시작. 첫째 성과: 제네바의 교회법이 시의회에 받아들여짐, 'Ordonnances eccl siastiques'.
- 1553년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논쟁들은 반삼위일체론자인 세르베트(Michael Servet)를 반박하는 소송을 하였다. 이 소송은 세르베트를 화형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 1555년부터 칼빈은 자신의 적수들을 능가하였다. 그는 동서 유럽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종교개혁적인 지도자요 조언자가 되었다.
- 1559년 신학 아카데미가 제네바에 설립되었다.
- 1564년 칼빈은 제네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자(Theodor Beza, 1519-1605)가 칼빈의 후계자가 되어 제네바 교회를 지도하게 된다.
b)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관점들
- 루터의 가장 위대한 제자인 칼빈은 조직신학자로서, 성서주석가로서 그리고 설교가로서 의의가 있다. 그는 종교개혁적인 신학을 마침내 완성하였다. 루터 이후 그의 신학은 어거스틴, 에라스무스, 부처 그리고 멜랑히톤의 영향을 받았다.
- 루터와는 상대적으로 칼빈에 있어서 신학적인 강조가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성서를 보는 입장에서 축자적인 관점과 신관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의 절대성, 영광의 강조.
-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전체 성경의 증언에 대한 교리적인 개관에 대해 칼빈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서의 권위는 성령의 내적인 증거에서 싹이 튼다(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 칼빈은 바울로부터 해석된 루터의 성서관의 단면성을 피하기는 했지만,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 사이를 구별했던 자유를 잃었다.
- 칼빈은 완전히 자유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이 은혜는 말씀을 통한 부르심과 믿음에 선행한다. 또한 칼빈은 루터처럼 선택과 하나님의 의롭다하심과의 맥락에서 보지만, 1539년부터 멸망을 선택과 논리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중예정에 도달한다(praedestinatio gemina). 이것은 칼빈주의의 특이한 표식으로 내·외적으로 심한 논쟁을 일으킨다. 17세기의 칼빈주의에서 선택은 신앙의 순종에 대한 보이는 열매로 볼 수 있다는 관념을 세우게 된다(Syllogismus practicus).
- 칼빈신학의 윤리적인 강조는 신중심적인 특색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신앙의 순종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에 속해야 한다. 그리하여 칼빈은 율법의 3중 사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triplex usus legis). 율법은 의롭다함을 받은 인간의 새로운 삶에 있어서 유효성을 가진다.
- 성찬론: 칼빈은 그리스도의 실존성을 주장한다. 이 실존은 성령을 통해 나타난다(영적인 실존). 칼빈은  믿음없이 먹음 (maducatio impiorum)을 부인한다.
c) 칼빈의 제네바에서의 활동
- 칼빈의 교회관은 이미 1541년의 제네바 교회규정( Ordonnances eccl siastiques )에 나와 있다. 교회에 관한 조직 형태는 신약성서를 모범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네 개의 직무로 구성되어 있다: 목사, 교사, 장로와 집사. 특히 칼빈의 교회에서는 권징을 하고 평신도들에게 주어지는 장로직이 특색을 이루고 있다. 칼빈의 엄한 교회권징은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을 지키기 위함이다. 또한 가르침과 사회사업은 교회의 직접적인 실천영역이다.
- 칼빈 교회에 있어서 특색은 시민과 교회 공동체의 상호간의 침투이다. 칼빈은 대다수 교인들과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를 구별짓지 않고 민족교회적인 구조를 고수하였다.
- 수많은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논쟁 이후 칼빈은 마침내 제네바 교회를 서유럽에 있는 수 많은 교회들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d) 기독교 강요의 형성
- 칼빈은 자기 친구들과 믿음의 동지들에게 복음적 신앙을 변호하기 위하여 '강요'(Institutio)를 썼다. 그는 강요를 1534년 앙굴렘(Angoul me)에서 쓰기 시작하여 1535년 바젤에서 완성하였다. 제1판은 1536년 3월 라틴어로 바젤에서 발행되었다.
- 머리글은 프랑스왕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 종교개혁을 변호하고 재세례파를 공격하기 위함이다. 종교개혁의 날카로운 적수들이 이미 프란시스 1세에게 그들의 책들을 헌정하였다. 그 가운데서 사돌레(Sadolet)는 자신의 로마서 강해의 서문을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로 썼다. 사돌레는 이단척결을 프란시스 1세에게 요청하였다. 종교개혁의 다른 적수인 부데(Bud )는 그의 책 '헬레니즘으로부터 기독교로의 과도기'(Transitus Hellenismi ad Christianum)에서 왕을 칭송하였다. 여기에서 부데는 "매우 혐오스러운 섹트의 가르침"에 대해 비판하였다. 사돌레와 부데는 복음적인 가르침을 비난하였다. 이런 일 때문에 칼빈은 강요를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했고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하고 있다.
- '강요'는 교리를 가르치는 책으로 루터의 '소교리문답'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율법(Dekalog), 사도신경(Apostolikum), 기도(주기도문), 성례전(세례와 성만찬), 거짓 성례전들과 기독교의 자유.
- 라틴어판 제2판은 1539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발행되었다. 불어판 제1판은 1541년 제네바에서 발행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교리 문답서가 아닌 교리서, 교의학책이다.
- 칼빈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재세례파를 알았다. 재세례파와의 대화에서, 세르베트의 글에 나온 사상을 반대하기 위하여 칼빈은 삼위일체론을 부가하였다. 재세례파를 공격하기 위해 칼빈은 全章을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에 대해 보충하였다. 이와 같은 목적에서 그는 유아세례에 대한 변증을 보충한다(구약과 신약의 관련 속에서).
- 라틴어 제3판은 1543년에 출판되었다. 이에 대한 불어판은 1545년에 나왔다. 새로운 장들은 직무에 대하여 쓴 것인데 신학적인 근거를 처음으로 제시한다.
- 라틴어 제4판은 1550년에 나왔다. 이에 대한 불어판은 1551년에 나왔다. 여기에는 성서의 권위, 성인 숭배와 성상 숭배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보충하였다.
- 라틴어 최종판은 1559년에 나왔다. 이에 대한 불어판은 1560년에 나왔다. 4권 80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 신론(하나님, 창조주요 세상의 전능하신 주관자, 18장). 제2권 구원론(그리스도, 구원자, 17장). 제3권 성령론(성령, 인간 안에서 성령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 25장). 제4권 교회론(교회와 성레전, 20장).
e) 서유럽에서 칼빈주의의 확산
- 서유럽의 종파 싸움과 카톨릭의 재강화의 시대에 칼빈주의가 확산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루터주의와 비교해볼 때 더 강한 공동체 정치적인 활동을 보여준다.
  1) 프랑스
- 갈리아 신앙고백(Confessio Galicana, 1559)은 프랑스 개신교회의 근간이 되었다.
-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대립은 8 번에 걸친 위그노파 전쟁을 낳게한다(1526-1598년).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의 극점은 소위 말하는 바르톨로메우스밤에 일어났다(1572년). 앙리 4세는 낭트(Nantes)칙령(1598년)에서 위그노파에게 양심과 종교의 자유와 함께 시민계급의 평등권을 승인한다.
- 낭트 칙령 이후 프랑스에서 칼빈주의는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루이 14세 치하에 새롭게 고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1685년 폐지하였다. 수많은 위그노파 사람들이 프랑스를 떠나야 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85년 포츠담 칙령을 통해 신앙의 난민들을 자기 나라에 불러들였다. 이 난민들은 이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문화와 정신적인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네덜란드
- 스페인의 지배(1566-1609년)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과의 관계에서 칼빈주의는 -프랑스와는 달리-북부 지역들에서 국교의 지위를 획득하다.
- 칼빈주의 교회의 기본적인 고백은  벨기에 신앙고백서 (Confessio Belgica, 1561년)이다.
- 종파의 시대에 네덜란드는 종교의 자유를 가장 광범위하게 인정한 나라이다. 경제적이고 정신적 문화적인 비약이 17세기에 있었다.
- 정통 칼빈 신학에 있어서 주된 논쟁은 예정론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소위 말하는 "아르미니우스 논쟁"(Jakob Arminius, 예정론을 가장 강력히 반대한 사람)은 도르트레히트 종교회의(1618/19년)에서 예정론의 확증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종교회의의 결정은 전체 칼빈주의와 연관을 가졌다.
- 새로 설립된 라이덴(Leiden), 그로닌엥(Groningen) 그리고 우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중요한 칼빈신학이 전개되었다. 주요한 신학자들:
푸치우스(Giesbert Voetius, 1588-1676): 네덜란드의 "정확주의"(Pr zismus)의 창시자(살아있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경건에 대한 증명).
코케우스(Johannes Coccejus, 1603-1669): 성서의 계약(foedere)에 근거하여 구속사적인 신학을 세운 "계약신학"으로 유명하다.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는 국민들의 협동적인 삶에 관습과 법의 보편적인 기초들을 세웠다. 이러한 기초들로 그는 유럽 계몽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3) 스코틀란드
- 스코틀란드 왕국은 종교개혁자 낙스(John Knox, 1505-1572)에 의해 칼빈주의가 특히 엄격한 형태로 승리하였다. 스코틀란드 칼빈파 교회는 "스코틀란드 신앙고백"(Confessio Scotica, 1560)에 그들의 신앙고백의 기초를 두었다.
4) 독일
- 서유럽에 비해 독일에서 칼빈주의는 비교적 상당히 약하다. 칼빈주의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과 군주의 교회지배 아래에 있어야 했다.
- 1560년 이전에 루터교 지역인 팔츠(Pfalz)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치하에서 칼빈주의를 받아들인다. 1563년 선제후국 팔츠의 교회헌법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포함하고 있는- (연합 교리문답으로 간주되어진다: 이중예정론이 없는 약화된 칼빈의 교리).
- 1613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요한 지기스문트(Johann Sigismund)가 정치적인 이유에서 칼빈주의 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는 유스 레포르만디(ius reformandi)를 버리고 국민들은 루터교 교인으로 남아있었다.
- 그외의 칼빈주의 지역: 브레멘, 안할트, 헷센-카셀 그리고 리펜-데트몰트.
- 니더라인 지역에만 있는 원래 칼빈주의 지역: 클레베(Cleve), 윌리히(J lich)와 베르크(Berg). 여기에서 형성되어진 노회적(老會的)인 교회헌법은 19세기 독일 지역교회들(Landeskirchen)에 있어서 최초의 노회적인 구조들에 영향을 끼쳤다.
XV. 영국 성공회의 성립
a) 영국성공회의 시작
- 영국 국교회(성공회, Anglican Church)는 그 기원이 신학적인 새로운 인식이나 신앙의 새로운 형태에 있지 않고 영국이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이탈하는 교회정치에 있다. 이 분리는 헨리 8세(1509-1547)에 의해 1534년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교황이 그의 이혼 청원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원래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21년에 발표된 루터를 반박하는 그의 글 "7성사에 대한 주장"(Assertio septem sacramentorum)은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defensor fidei)라는 칭호를 가져다 주었다. 정치적 사안과 그의 결혼문제로 헨리는 교황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는 아라곤의 카타리나(Katharina von Aragon)와의 결혼에 혐오를 느끼고 궁녀인 안나 볼레인(Anna Boleyn)과 결혼하기 위해서 교황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이 결혼의 취소를 허락받기 원했다. 사실 카타리나와의 결혼은 교회법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카타리나는 헨리의 큰형인 아더(Arthur)의 미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교황의 특례로 이 결혼을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 영국의 수상이자 추기경인 올시(Thomas Wolsey)는 동시에 교황의 사절이기도 했다. 교황청에서는 독일 황제 칼(Karl) 5세의 압력을 받아 헨리와 카타리나의 결혼이 유효임을 주장하였지만(카타리나는 칼 5세의 백모), 올시는 이를 관철할 수 없었다. 1529년 올시는 면직되고 영국의 성직제도는 왕을 영국교회의 머리로 인정하였다(1531년). 이 무력적인 행위로 헨리는 1533년 카타리나와의 결혼에 대한 교회적인 분리와 안나 볼레인과의 결혼에 성공하였다(1536년 볼레인을 단두대에 보내고 결혼을 한다). 1534년 국회는 수장령(suprematakte)에서 왕을 영국교회의 머리(supreme head in earth of the Church of England)로 공포했다.
- 교회개혁에 있어서 헨리의 권위있는 조언자는 무자비한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이었다. 이 새로운 법안에 반대하는 자들은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1534-1539년 동안 수도원이 폐지되었다.
- 위클리프(1384년 사망)에게 있었던 지배세력적인 교회에 대한 예리한 신학적인 반대는 "롤라덴파"(Lollarden)의 사상에 의해 계승되었다. 롤라덴파 외에 영국에서는 인문주의가 교회의 개혁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틴달의 번역성서는 번역에 수정을 가하여 오늘날까지 영국에서 읽혀지고 있으며 이것은 영국 종교개혁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또한 루터의 사상도 종교개혁의 도(道)를 영국에 전했다.
- 이러한 정신적인 운동들은 영국에서 단순히 분열로 머물러 있지 않고 종교개혁적인 사상이 일어나도록 했다. 이미 왕국 섭정관인 소머셋(Somerset)은 미성년자인 국왕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47-1553) 아래서 헨리 8세가 세웠던 영국의 "카톨릭적인" 국교회로부터 교리에서 명백히 복음적인 교회를 만들었다; 이것은 대륙의 개혁교회적이면서 또한 루터교적인 기초 위에 선 42개 신조가 증명하고 있다. 물론 루터교적인 견해가 때에 따라서 칼빈적인 것에 억지로 맞춰진 것도 있다. 성찬론과 기독론을 예로 들 수 있다. 오늘날 공적으로 인정받은 1562년의 39개 신조(1571년 승인됨)는 아주 적게 개정된 단지 42개 신조의 수정본이다. 이와는 반대로 예배 형식에서 에드워드 6세 때에 영국 국교회는 매우 보수적이며 매우 카톨릭적으로 남아 있었다.
b) 영국에서 새로운 정신적인 사조
- 엘리자베드(Elisabeth, 1558-1603) 여왕 치세 때 영국국교회는 교리에서 중도적인 칼빈주의를 취했다(1562년 39개조). 의식과 헌법은 카톨릭의 형태로 남아있었다.
- 16세기 중반부터 청교도주의 운동은 칼빈적인 사상을 택하였다. 특히 시민계급에서 엄격한 성결의 생활에 대한 원칙들이 전체주의적인 왕정정치와 영국국교회(성공회)에 대하여 반대 입장에 있다.
- 로마 교황편인 스페인 무적함대(armada cat lica: 5만 8천톤, 3만명과 포 2천 4백문을 수송할 수 있는 130척의 선박으로 구성됨)가 1588년 영국 해군에게 패배하였다. 이로써 영국내 로마 카톨릭은 침체하였다.
- 1603년 엘리자베드 1세가 사망하고 엘리자베드 부왕(父王)인 헨리 8세의 혈연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James VI)는 1603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또한 즉위하였다. 제임스 1세는 모친 스코트랜드의 메리(친로마파)가 엘리자베드 1세에 의해 사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성공회의 입장에 섰다. 그는 로마 카톨릭을 박해하지 않고 오히려 교황청과 성공회의 화해를 원했다.
-16세기 말 영국에서 성공회의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사용과 사도적 계승의 주교직을 외면하고, 개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왕권을 대항하고 의회를 존중하는 청교도들의 열의가 상승하고 있었다. 제임스 1세는 본래 장로교 중심의 스코틀랜드 왕이었으나 잉글랜드 왕이 됨으로 청교도들은 왕의 교회 정책에 큰 기대를 걸고 왕에게 "일천명의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여기에서 청교도들은 영국 성공회의 기도서 사용에 반대하며 여러 가지 점을 제거해주도록 요구했다. 제임스 1세는 이 탄원과 간청을 1604년 Hampton 궁정회의에서 토의하도록 했다. 이 회의는 제임스 1세 자신과 주교, 청교도 지도자 사이에 열려 기도서와 교리부분에서 약간의 수정을 했고 성서의 새 영어 번역판(Authorized Version)을 내놓았다. 이 회의에서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에게 특별한 요청을 했다. 그것은 "안식일 엄수주의", 즉 주일에 모든 운동과 오락 등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제임스 1세는 "스포츠에 관한 담화문"(Decleation of Sports)을 1618년 발표하여 주일에 적절한 오락을 승낙하였다.
- 제임스 1세는 친(親)로마주의인 그의 어머니 스코틀랜드의 메리와는 달리 로마 카톨릭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제임스 1세는 성공회를 지원하였다. 그는 왕직과 주교직은 일치되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왕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고 교회는 왕권을 지원하며 왕은 교회를 도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 청교도들에 대한 국가의 압력은 마침내 많은 사람들을 네덜란드로 이주하게 했고 그곳에서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과 합세하여 약 100여명이 같은 해 11월 11일 신대륙 미국의 Plymouth Rock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후로 청교도들은 미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
- 1625년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를 통치했다. 찰스 1세는 독재를 했다. 1629년부터 1640년까지 의회가 휴회되었다.
- 1642년 국가와 교회의 지도자 그리고 청교도들 사이의 대립으로 야기된 시민전쟁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청교도 그리고 의회가 한파가 되었으며 청교도가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청교도인 올리버 크롬웰의 등장으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군을 차례로 패배시킬 수 있었고 찰스 1세를 처형하였다.
- 1642년 영국의 시민전쟁은 교회 권력층과 민병, 정계, 성공회와 개신교, 주교와 청교도 사이의 대립과 혼란상태를 야기 시켰다. 이 때 많은 교파가 생기게 되었다.
- 브라운주의자(the Brownists): 회중교회의 초기 호칭이다. 브라운(R. Browne, 1550-1633)이 청교도에서 분리하여 회중교회주의(congregationalism) 창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 회중교회: 각 개체교회가 자립적으로 영국 국교회에서 독립한 교회이다. 네덜란드와 미국에 퍼졌고 현재는 영국에서 장로교회와 연합되어 있다.
- 영국 침례교회: 브라운주의로부터 나왔다. 성공회의 성직자인 John Smith에 의하여 청교도들로부터 분리되어 네덜란드에서 무리를 거느리고 건너와 신자 집합과 상통하는 뜻에서 침례제도를 세웠다.
- 영국혁명으로 특히 퀘이커 교도들이 중요하다(진리의 공동체). 퀘이커는 구두공인 폭스(George Fox, 1624-1691)에 의해서 세워졌다. 폭스는 인간의 영혼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음성을 발견하는 것을 진리로 주장하는 신비주의자였다. 퀘이커들은 관용에 대한 넓은 원칙을 통하여 근대의 사회사에 영향을 끼쳤다(여성 평등권, 감옥의 개선, 후에는 노예해방).
- 청교도적인 경건문학은 수많은 번역을 통하여 독일의 신학과 교회사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독일 경건주의의 중요한 뿌리 가운데 하나다. 가장 유명한 청교도의 문학은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의 '경건의 실천'(Practice of Piety)이다.
c)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 시민전쟁 시의 장군으로 청교도의 지도자요 영국의 통치자인 크롬웰은 1653년 12월 16일부터 1658년 9월 3일까지 호민관(Lord Protector)로 있었다. 크롬웰은 1599년 4월 25일 헌팅돈(Huntingdon)에서 시민계급으로 태어났다. 1616년 캠브리지에 있는 Sidney Sussex College에서 청교도인 Thomas Beard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나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 헌팅돈에서 1628/29년에 의회에 진출하였다. 1630년 회심을 체험하고 장기(長期) 의회(1640년 11월-1653년 4월)에서 청교도의 당원이 되었다. 1642년 10월 대위, 1643년 2월 대령, 1644년 준장이 되었다. 1644년 7월 3일 Marston Moor에서 의회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승리의 열쇠는 청교도적인 훈련을 받은 병사들에게 있었다. 그의 군대는 숫자는 적었으나 강력한 기병대가 있었다. 그의 군대는 성전(聖戰)에 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편을 노래하며 전쟁터로 달려가곤 했다.
- 1640-60년의 영국혁명에 청교도들은 또한 정치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비중있는 정치지도자로서 "거룩한 사람들"의 의회 무리들을 규합하였다. 크롬웰의 지도 아래 종교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이루었다.
- 1645년 6월 14일 Naseby에서 왕군(王軍)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승리 이후 의회와 군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전쟁에서 이긴 의회는 청교도적인 정책을 채택하였다. 주일에는 반드시 종교적 행사만 시행하도록 하고 일절의 방탕한 오락을 금지시켰다. 의회의 대다수는 장로교 조직에 따른 정부형태를 주장했다. 즉 감독없는 국교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부에서는 독립파들이 득세하였다. 1646년 의회는 군대를 해산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 장로교인(Presbyterianer)은 엄격한 청교도들(회중교회자들 혹은 독립교회자들)에 대립되어 있었다. 이 두 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1646)을 통해 교리에서 일치를 보았으나 교회관에 있어서 상이하였다. 회중교회 신자들은 개교회들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으나 장로교인들은 시민공동체와 교회와의 연합을 주장했으며 노회로 된 교회창립을 요구했었다.
- 크롬웰은 찰스 1세가 참수형을 당한 뒤 영국의 호민관(Lord Protector)이 되었다.
d) 영국국교회의 공고화
- 크롬웰이 죽고 나자 감독제의 국가교회가 재건되었다. Monck 장군은 구(舊)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통해 새 국회를 구성하여 찰스 2세를 1660년 왕위에 복귀시켰다. 1649년 찰스 2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이었으나 내전으로 네덜란드에 피신해 있다가 1660년 귀국하였다.  
- 찰스 2세는 1662년과 1672년 사면령을 내려 이교신앙에 대한 묵인을 발표했다.
- 1661년 사보이 회의(성공회 주교 12명, 장로회 12명 그리고 기타 관계자들이 사보이에 모여 기도서 개정을 시도한 회의)가 열려 청교도와 성공회 사이의 기도서 개정을 기도했지만 장로교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끝이 났다.
- 찰스 2세는 1662년 기도서 사용의 통일령을 내려 당시 의회에서 장로교가 주도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회로 국교를 복귀시켰다. 이 성사의 배후에는 Hyde와 Clarendon의 역할이 있었다. 이에 반대한 장로교 성직자들은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고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때에 청교도 성직자 700여명이 성직에서 면직되었다.
- 스튜어드 왕가의 재카톨릭화 시도는 무산되었다. 1689년 관용령에서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들에게도 종교와 양심의 자유가 허락되었지만 시민권은 제한되었다. 카톨릭과 소지니안은 이 관용령 밖에 있었다.
XV. 종교개혁 이후의 로마 카톨릭 교회
1. 카톨릭의 개혁과 반종교개혁
- 종교개혁 이후의 카톨릭교회는 카톨릭의 개혁과 반종교개혁이라는 이 두 개의 개념들로 함축성있게 나타난다.  반종교개혁 이라는 개념은 종교개혁과 루터의 등장이 16세기에 로마 카톨릭에 대한 중요한 사건임을 알게 한다. 로마 카톨릭은 이 세기의 후반기에는 전반기와는 전혀 다르다.
- 루터교와 칼빈적인 개혁교회의 종파형성의 관련 속에서 "카톨릭의 종파형성"이라는 개념은 카톨릭 자체의 고유한 권리를 가진데도 불구하고, "반종교개혁"이라는 개념이 불가피하다.
- 카톨릭 교회를 개혁시킨 힘의 근원이 어디 있었느냐에 대한 질문에 관해 여러 가지 답변을 들을 수 있다. 반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물론 한 가지 확실한 견해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을 반대함을 목적으로 일어난 활동일 뿐만 아니라 카톨릭 교회에 대한 위협을 대항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한데 모으는 본질적으로 종교개혁의 반대 입장을 지지하는 힘이다.
- 이러한 관점에 반대하면서 카톨릭의 역사학자인 얀센(Johannes Janssen)은 '중세 독일 민족사'(Geschichte des deutschen Volkes seit dem Ausgang des Mittelalters, 1876ff.)에서 카톨릭 교회는 이미 15세기에 개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루터의 등장은 이 힘의 성취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고 한다; 16세기 후반에야 이 힘은 관철이 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얀센은 이것은 반종교개혁이 아니고 카톨릭의 독특한 종교개혁이라고 주장하였다.
- 루터의 등장 이전에 개혁의 힘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힘의 진원지가 어딘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수십년 동안 사람들은 이 힘을 스페인에서 찾았다. 사실 15세기 후반 그곳에서는 페르디난드왕(카톨릭)과 추기경 시메네스(Ximenes) 사이에 개혁된 카톨릭 교회가 세워졌다. 예수회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것도 반종교개혁을 카톨릭 교회의 스페인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도 단편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회의 이념은 사실 스페인에서 원래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메네스 추기경이 실행했던 개혁에 대한 정신적인 힘도 스페인에서 온 것은 아니다. 브란디(Karl Brandi)는 이탈리아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또한 네덜란드라 볼 수 있다. 네덜란드는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의 고향이다. 카톨릭 교회의 내면적인 갱신을 일으켰던 일반적이 아닌 구체적인 힘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갱신의 세력: 3개의 정신적 뿌리를 들 수 있다.
  ① 수도회의 규칙: 수도원 자체의 세력
  ② 근대의 경건(devotio moderna), 독일 신비주의의 후기 형태.
  ③ 인문주의
- 이 개혁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이 개혁을 일으키게한 원천은 교회와 밀접한 연관을 맺은 스페인에서 일어난 신비적인 경건이다: 성 아빌라의 테레사(Theresa von Avila, 1515-1582). 그녀는 "맨발의 카멜수녀원"의 창설자이다. 카톨릭의 개혁은 특히 수도원의 창설 운동과 이미 있던 수도원의 갱신운동이다: 카프친 교단, 테아틴 교단, 하나님의 사랑회.
- 수도원 이외에 살라만카(Salamanca) 학교에서 신학의 갱신이 일어났다.
- 트렌트 공의회와 예수회의 활동은 카톨릭의 개혁과 반종교개혁의 관심사를 특히 나타낸 것이다.
2. 트렌트 공의회(1545-1563)
- 트렌트 공의회에서 카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의 도전에 대하여 교리와 개혁법령으로 답변했다. 개혁법령들은 근대 카톨릭주의의 역사를 열었다. 카톨릭 교리는 종교개혁 신학에서 제기되었던(칭의론과 성서론) 주된 문제에 대하여 비로소 개념이 세워졌다. 중세 신학에서 이 문제들은 최종적으로 결정이 되지 않았다.
- 트렌트 공의회의 칭의론은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를 반대하며 또한 후기 스콜라 신학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적인 경향을 반대한다(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공로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공로로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앙과 칭의보다 앞선다. 그러나 칭의는 본질적으로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은혜를 부어주심은 성례전에 나타난다. 인간은 성결에서, 그가 의지적으로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트렌트 공의회의 칭의론은 신앙과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의 중도이다.
- 교회의 교리의 원천으로서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오직 성서로"(sola scriptura)를 반박하는 것이다. 성서와 전통에 "동일한 경외"를 표한다.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는 성서의 권위적인 해석을 한다. 표준적인 성서는 라틴어역이다(Vulgata). 카톨릭의 세 가지 권위에 대하여 종교개혁의 "오직 성서"는 상반되는 것이다: 성서, 전통과 성직.
- 그외에도 원죄, 연옥 그리고 성례전에 대하여 말한다(7성사: 세례, 견진, 고해, 성찬, 혼인, 서품, 종부).
- 개혁법령들은 특히 주교직의 개혁에 있었다. 교황권에 대한 개혁은 전혀 없었다. 주교들에게는 교구에 거주해야 할 의무, 신부양성을 위하여 신학교를 설립하는 일, 종교회의의 개최 그리고 로마 탐방이 규정되었다. 그리고 오류들이 제거되었는데 특히 돈으로 살 수 있었던 사면부다.
- 공의회의 폐회 이후 개혁조치들: 트렌트 신앙고백은 사제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금서목록, 개선된 성무 경본과 통일된 미사책(Missale Romanum, 1570).
- 교회개혁으로 개방된 교황주의는 공의회 결정들의 실행을 감독하였다.
- 공의회 정신의 주요 감독들: 칼 보로매우스(Karl Borrom us, 1538-1584), 밀라노의 대주교인 메스펠브룬(Julius Echter Mespelbrunn), 뷰르츠부르크의 대주교.
3. 로욜라와 예수회
-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von Loyola, 1491-1556)는 바스크족의 귀족출신이다. 그는 장교였다. 부상을 통하여 그의 생애에 일대전환이 왔다: 그는 자신의 과거 세상적인 것을 청산하고 영적인 책들을 읽고 방랑에 올랐다.
- 이 방랑의 경험들은 '영적훈련'(Exercitia spiritualia)에 나와 있다. 이것은 자기극복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완전한 복종을 목적으로한 영적인 훈련이다.
- 바로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따르는 동지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팔레스틴 선교에 대한 의무를 가졌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은 교황에 대해 무조건 복종하기로 했다.
- 파울 3세는 1540년 예수회(societas Jesu)를 인가했다. 예수회는 엄격한 계급조직의 헌법을 가졌다. 수도회 제복의 사양과 수도원 밀실에서 공동기도, 교황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서약. 이로써 예수회는 반종교개혁의 실행에 있어서 주요도구가 되었다.
- 예수회의 주요활동으로는 중국과 일본에서의 선교활동, 자체학교, 대학, 대학교 내에서 교육사업, 목회, 국민들에게 고해성사를 집행하는 것과 제후들의 궁궐에서 고해성사 신부로 활동하는 일이다. 이것을 통해 예수회는 종종 교황청의 심부름 꾼으로서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 트렌트 공의회 이후 카톨릭 주의는 외부에 대해서는 종교재판의 도움을 빌어 자연과학적인 세계상과 투쟁하였다(Giordano Bruno와 Galileo Galilei). 내부에 대해서 예수회는 얀센파의 개혁추진과 싸웠다. 얀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은 어거스틴의 죄와 은총론을 근거로 자기 시대의 교회와 신학에 있어서 개혁을 시도하였다.
- 예수회적 카톨릭주의는 빈민과 환자구제, 교회건축, 음악, 학문과 시의 영역에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근대교회사
I. 서론
근대의 의미: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방법론적이 아닌 실제적인 점에서 나눈다. 두 가지 원칙은 실제적인 것과 연대적인 것
1559년 이후 'Magdeburger Zenturien': 고대, 중세, 근대 이렇게 시대구분을 하였다. 개신교 최초의 교회사이다.
1588년 이후 카톨릭 측에서 Baronius의 'Annales ecclesiastici'가 발행되었다.
근대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
Ernst Troltsch: 18세기. 루터는 그의 삶과 사상에 있어서 아직도 중세기 인물이다. 계몽주의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18세기를 근대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사가 루터로부터 근대가 시작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Karl Heussi: 16세기와 18세기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카톨릭 측의 Jedin은 17세기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았다.
K. D. Schmidt, B. Moeller: 근대의 시작은 17세기이다.
1555년은 결정적인 중간휴지: 종교개혁과 근대초기이며 종파의 시대이다. 이것은 결국 1648년 30년 전쟁의 종결을 가져왔다.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를 야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부터 근대라고 한다.
II. 종파의 시대에 대한 개괄
1.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 (1555년)
- 1555년 아욱스부르크 제국국회(칼 5세가 참석지 않고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왕에 의해 진행)는 카톨릭파와 루터파 사이에 신앙고백이 다시 일치할 때까지 이 두 파간의 무기한의 종교평화협정을 결정하였다(1555. 9.25의 제국국회 의결).
결정된 내용들
- 종교의 자유는 이 두 파간의 선택에만 해당된다: 카톨릭과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과 이와 관련된 신앙고백.  재세례파, 반삼위일체론자들, 영성주의자들 같은 종교개혁의 측면 운동들과 츠빙글리파는 이 협약에서 제외되었다.
- 이 협약에는 보편적인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cuius regio - eius religio(한 나라에 한 종파: 제후의 종파에 따라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종파가 결정됨)라는 원칙이 성립되다.  제후들은 두 종파 가운데 하나만 고를 수 있으며, 국민은 이곳에서 제후의 종파를 따라야만 한다(ius reformandi).
- 과거의 이단정죄법이 무효화되었다: 타종파의 국민은 이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ius emigrandi). 자신의 종파에 속한 지역으로의 이주에 있어서 자신의 재산과 가족의 재산은 소유물 보호법 하에 있게 되었다.
- 성직자인 제후가 다스리는 제후국인 경우 예외가 적용되다: 소위 말하는 "Reservatum ecclesiasticum"(종교상의 예외).  성직자인 제후는 종파의 개종에 의해 사인이 된다.  그는 성직을 잃고 세속의 통치권도 잃게 된다.
- 두 개의 종파가 공존하는 자유도시들에 대해서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존속된다.
- 종교적인 제후국들 안에 있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속한 도시들과 마을은 루터교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이 규정은 종교평화협약에 들어있지 않았지만 프로테스탄트파를 인정한 소위 "Declaratio Ferdinandea"라고 불리우는 페르디난트 왕의 개인적인 성명에 들어 있었다.
- 칼5세는 1557년 자신의 직위에서 물러나고 황제대관을 포기하였다: 그는 1558년 스페인에서 세상을 떴다.
-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으로 독일 제국에서는 통일된 기독교의 신앙고백이 종말을 고하고 종파의 시대가 시작된다.
2. 이 시대의 일반적인 성격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부터 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조약까지에 걸친 시대를 일컫는 "종파의 시대"라는 개념은 이 세기의 종교사회학자인 트렐취(Ernst Troeltsch, 1865-1923)와 역사학자 브루너(Otto Brunner, 1898-1982)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종교개혁시대부터 1555년까지 그리고 이와 연결되는 반종교개혁 시대를 내포하였던 전통적인 시대구분에 있어서 1555년이 중간휴지(休止)성격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을 때, 일반사와 교회사의 서술에서는 이 개념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독일 제국의 상황에서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이 체결된 1555년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을 아주 확실하게 만든 한 중요한 분기점이다.
  중세후기와 종교개혁시대와는 달리 1555년부터 실제적으로 변화된 것은 모든 삶이 종파의 표시 아래 즉 종파적인 대립 아래 있게된 것이다. 중세후기의 종교적인 운동들과 종교개혁의 초창기는 이 종파적인 극화(極化)를 알지 못한다. 상반되게 구별되고 상이한 종파들과 교회들, 국가들과 정치적인 복안들 가운데서 중세 기독교적인 단일문화의 분열은 이 시대를 본래적으로 결정하는 요소이다. 이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은 정치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일어났던 큰 전쟁에 나타나지만 기독교 선교와 타 대륙에 유럽 세력의 식민지 팽창에서도 보여진다.
  이 시대의 교회사에 루터파, 칼빈파 그리고 카톨릭파의 종파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은 표면적으로 상반되는 과정, 즉 이 시대에 점점 확실시 되어가고 있는 세속화, 다시 말해서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세속화와 연관되어 있다. 종파화와 세속화는 서로 변증법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종파들과 이것들 상호간의 경계가 모든 삶의 영역을 강하게 결정하면 할수록 종교적인 동기를 가진 갈등들로부터 순수히 정치적인 논쟁들이 되었다. 30년전쟁은 독일제국에서 정치와 종교의 겹침을 보인 것이다. 이 전쟁이 오래가면 갈수록 순수히 권력의 이해관계가 더욱 확실히 나타났었다.
종파적인 논쟁에 넌더리가 난 신학과 교회의 경건에 실제 삶에서 신앙의 사수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경건주의는 독일 제국에서 현저하게 기독교의 탈 종파화에 공헌하였다.
종파의 시대에 근대초기의 제후국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중요한 사건은 종파화와 세속화의 관련을 확실히 하였다.
  종파적인 시대는 종파적인 경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정신적인 활성화와 영적인 깊이가 있었다.
3. 종파로서의 루터교의 형성
1) 루터교 내부의 교리논쟁들
- 독자적인 루터파 교회로의 발전은 17세기가 지나는 사이에 긴 과정을 거쳐서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발전에 대한 길은 맹렬한 신학적인 논쟁을 가져온다. 이러한 논쟁이 어느 정도 해명이 되고 난 후에야 루터교의 공통적인 기초가 발견되어질 수 있었다.
- 이 논쟁들은 정치적인 대립(예를 들면 작센 선제후국과 팔츠 선제후국 사이)과 신학적인 논쟁과 확실히 연관되어 있다. 루터와 멜랑히톤(인문주의적인 사상) 사이에 있어서 신학적인 시작의 차이들은 루터가 죽고난 다음 타인의 눈을 끌도록 한다.
- 논쟁은 멜랑히톤의 제자들(마요르: G. Major, 페핑어: J. Pfeffinger)인 필립파(Philippisten)와  원래 루터의 제자들(플라치우스: M. Flacius, 암스도르프: N. v. Amsdorf)인 순수 루터파 (Gnesioluthraner) 사이에 일어난다.
- 다음의 문제들을 가지고 이 양派가 싸우고 논쟁을 벌였다.
①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논쟁(아디아포라 논쟁, Adiaphoristischer Streit,    1548-1552): 작센 선제후국에서는 1548년 12월 "라이프치히 가협정"(Leipziger Interim)이 나왔는데, 이것은 주로 멜랑히톤이 작성하였다. 라이프치히 가협정은 카톨릭 교회의 법과 예배 의식을 "중요하지 않는 것들"(Adiaphora)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라이프치히 가협정 이후 많은 지역에서 라틴어로 미사가 다시 드려졌으며 성화와 카톨릭의 축일(祝日)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멜랑히톤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라이프치히 인테림은 교회의 교권주의와 7성사를 주변적인 것들로 인정하고 오직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적인 주요 교리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루터의 제자이며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인 마티아스 플라티우스(Matthias Flacius, 1520-1575)는 멜랑히톤과 이 가협정에 대해 승인하는 사람들에 대해 "신앙고백이나 악의 유혹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중간물도 있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플라티우스는 비텐베르크에서 막데부르크로 가서 암스도르프(Nikolaus von Amsdorf)와 루터의 제자들과 연합하여 가협정에 대한 어떠한 타협도 없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디아포라 논쟁이다.
② 마요르의 논쟁(Majoristischer Streit, 1552-1558): 아디아포라 논쟁 이후 종교개혁적인 칭의 교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멜랑히톤의 제자인 게오르크 마요르(Georg Major)는 순수루터파인 암스도르프를 반박하였다. 마요르는 구원을 받는데 선행(善行)을 필수적으로 보았고 이와는 반대로 암스도르프는 선행은 구원에 해가 된다고 보았다.
③ 神人協同說 논쟁(Synergistischer Streit, 1556-1560):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가 어느 정도 작용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멜랑히톤은 "하나님은 인간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하여 인간을 의롭게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은 목재와 같은 인간과 협동하지 않고 그가 깨달을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그의 의지가 협력하도록 그를 끌어당긴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에 철저했던 제자인 플라티우스(Matthias Flacius)는 이와 반대로 인간은 회심에 있어서 목재(truncus)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수동적이며 하나님의 사역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플라티우스는 자연적인 인간은 죄에 근거를 둔 악에 대한 의지에 의하여 사탄의 형상을 바꾸어 쓴 것임(ad imaginem Satanae transformatus)을 결론지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비례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과거부터 있어 온 논쟁이었다.
④ 오지안더의 논쟁 (1550-1556): 안드레아스 오지안더(Andreas Osiander, 1488-1552)는 뉘른베르크(N rnberg)의 宗敎改革史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1549년부터 쾨니히스베르크(K nigsberg)에서 가르쳤다. 그는 의롭게 됨을 信者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의의 본질적인 내재로서 이해했다. 그리스도의 神的인 본성이 신자의 내면에 들어오며 신자는 이 내면을 따르게 된다. 이것은 의롭게 됨의 과정에 대한 신비적인 견해이며 멜랑히톤의 의미에 있어서 의롭게 됨의 견해와 정반대 되는 것이었다. 멜랑히톤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게 됨은 그리스도의 義의 공로에 있다. 이것은 "法廷의 칭의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배당하는 의롭다함의 사건이 법정 앞에 열린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법정에서 고소받는 죄인들 앞에 나타났으며 하나님은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의를 인정한 것이다.
⑤ 성찬의 이해에 대한 논쟁들: 칼빈주의에 대한 은밀한 호의는 멜랑히톤의 제자들에 대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 크립토칼빈니스텐 Kyrptocalvinisten, 숨겨진 칼빈주의자들). 기독론 논쟁은 그리스도의 음부행과 높임을 받은 주님이 언제나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편재설).
2) 협정신조(1577)와 협정신조서(Konkordienbuch 1580)
-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는 이미 교리의 조직적인 확정에 있어서 발전을 이루었다(트리엔트 종교회의와 칼빈의 "기독교 강요").
- 루터교에서 교리적인 일치에 대해서 주축이 된 것은 제후들이었다.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는 소위 토르크의 교리서를 만들도록 하였다. 가장 주동적인 신학자는 야콥 안드레애(Jakob Andreae. 1528-1590)이다.
- 이 문서는 루터적인 지역교회들에게는 교리적 근간이 되었고 조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Solida Declaratio", "확고한 선언"(SD).
짧은 개요가 이 선언 앞에 수록되어 있다.  짧은 개요와 SD와 함께 협정 신조(Formula Concordiae, FC)를 구성하고 있다.
- 협정신조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CA)에 대한 최종적이고 포괄적인 해설서이다.  이것은 독창적인 고백서는 아니다
- 이것의 내적인 목적: 상이한 입장을 통일함
외적 목적: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에 대한 교리적인 확실한 경계
- 협정신조(Formula Concordiae: FC)의 중요 결정: 성경은 모든 교리들과 선생들을 판단하는 유일한 규범이요 표준이다.  고대 교회의 세개의 고백서(사도신경Apostolicum,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와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교의 신조들은 진리의 증거(testes veritatis)이다.  성서는 신앙 진리의 근본이요, 신앙고백들은 이 신앙진리에 대한 길을 열어준다.  루터 신학의 도움으로 FC는 인간의 회심과 중생에서 자유의지를 거부한다.  FC는 멜랑히톤의 의미에서 칭의의 법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 화체론, 미사의 제사와 평신도에 대한 배잔금지는 영적이고 상징적인 성찬론과 함께 거절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요소에 있다는 현존론(Realpr senz)이 루터교의 성찬론이 된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과 믿음 없이 먹고 마시는 것(manducatio indignorum, manducatio impiorum)이 성찬의 효력에 예속되지 않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의 예정론이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gratia universalis)로 표현된다.
- CA의 50주년 되는 해에 Dresden에서 협정서가 나왔다. 이 책은 루터교 지역을 위해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서들을 한데 묶은 것이다:
고대 교회의 3가지 고백서(사도신경,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
CA 와 Apologie;
루터의 슈말칼덴 고백서;
멜랑히톤의 논문 "De potestate et primatu papae" 교황의 힘과 수위권에 대하여, 루터의 대·소교리 문답; 협정신조.
- 모든 루터교가 FC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터교의 지역 교회이면서 FC를 받아들이지 않은 교회: Pommern, Holstein, Branschweig-Wolfenb ttel 과 뉘른베르크, 헷센 카셀과 안할트에서는 칼빈주의가 밀고 들어 오려고 하였다.
3) 루터교 정통주의
- 루터교 정통주의는 16세기후반과 17세기 구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의 한 부분이다. 주된 표식은 순수 교리에 대한 몰두와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의 공격에 대한 방어이다.  교리와 논쟁이 이 신학의 주된 원칙이다.
- 진리의 가르침을 위해 싸운 루터로부터 루터교 정통주의의 길이 시작된다.  칭의론은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의 중심에 서 있다.
- 루터교 정통주의의 중요한 안내자는 멜랑히톤이다.
그의 "Loci theologici"(1521)는 초기 정통주의의 중요한 서적들의 제목과 방법론의 모범이다.
Martin Chemnitz(1522-1586): Loci theoloigici
Leonhard Hutter(1563-1616): Compendium locorum theologicorum
Johann Gerhard(1582-1637): Loci theologici(1610-1625), 루터교 정통주의의 주된 교리서들이다.
- 이 교리서들은 멜랑히톤이 신학적인 교리의 체계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사용한 것을 따르고 있다. 신학적인 주요 개념들에 논리적인 규칙을 도입하였다(Loci- Methode).
루터교 정통주의의 주 표식은 루터교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도입이다.  이것은 후기 인문주의의 정신과 반대자들의 공격을 정확한 개념화로 방어해야 하는 필연성과 관계가 있다.
- 정통주의의 주요학자들:
Johann Andreas Quenstedt(1610-1688)
Abraham Calov(1612-1688)
David Hollaz(1648-1713)
이들은 소위 말하는 분석적인 방법에 열심이다.  신학은 구원의 길의 질적인 학문으로 이해되었다. 조직적인 짜임으로 교리적인 내용이 조직적으로 창조에서 완성까지, 구원의 목적인 영원한 복락까지 실려 있다.
- 신학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재등장 이후에 성서에 대한 정통주의 교리는 루터교 정통주의의 기초이다.  성서 원칙에 대한 가르침은 성서에 대한 원칙의 아리스토텔레스 범주의 상용에 있다: 성서는 그 자체가 참이며 더 이상의 논증(Beglaubigung)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서는 권위(auctoritas), 완전한 진리(perfectio), 만족(sufficientia)과 명료함(perspicuitas)을 가지고 있다. 성경전체는 낱말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영으로 영감 받은 것으로 이해되었다(口頭靈感設, Vebalinspirationslehre).
- 논리적으로 짜여진 정통주의 성서관은 성서의 역사적인 비평에 대한 문을 열어 주었다. 왜냐하면 정통주의의 성서관의 시작 자체가 성서에 대한 이성적인 비판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4) 게옥 칼릭스트(Georg Calixt)와 소위 말하는 혼합주의 논쟁
- 게옥 칼릭스트(1586-1656)는 당시 중요한 헬름슈테트대학교(헬름슈테트 신학)에서 가르쳤다. 루터교 정통주의의 아성(牙城)인 비텐베르크대학교와는 대조적으로 이곳에서는 후기 인문주의의 정신이 명백하게 나타났다.
- 물론 칼릭스트는 정통 루터교 신학자였지만 멜랑히톤에 기인하여 기독교 종파 싸움의 극복에 관심을 가졌다. 30년전쟁이 가져다 준 황폐의 흔적을 보고 그는 모든 종파들이 공동의 근본으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그는 사도신경과 제5세기까지의 교리적인 결정에 근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소위 말하는 5세기 동안의 일치(Consensus quinquesaecularis)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정통주의 신학자 칼로프(Abraham Calrov)로부터 종교적인 혼합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 1654년 토른(Thorn) 종교회담 이후 혼합주의 논쟁은 격렬해졌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자들은 칼릭스트가 루터와 종교개혁을 상대화시켰다고 비난하였다. 이 논쟁들과의 연관 가운데  루터교 의 개념이 세워졌다.
- 칼릭스트는 자신의 신학에서 특히 윤리를 강조하였다. 물론 교의학과 윤리학이 분리되어져서는 안되지만 두 개의 신학과목으로서 나누이게 된 것은 그에게 기인하고 있다. 또한 그가 종교개혁자의 신학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던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고백의 항목과 덜 기본적인 항목들 사이의 구분으로 칼릭스트는 이미 새시대의 과도기에 서있다.
5) 루터교 정통주의 시대의 경건과 개혁의 노력
- 루터교 정통주의의 시대는 경건문학, 신앙 그리고 영적인 시의 전형적인 시대이다. 1600년경 이 경건문헌의 全盛은  경건의 위기 와  경건의 전환 (W. Zeller)과 연관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이상학의 도움으로 점점 이성적으로 되어가는 신학은 살아있는 신앙, 경건의 욕구에 어떠한 자극도 주지 않았다. 신학과 경건은 종교개혁 이후 3대째의 세대에 특히 논쟁을 하게 되었다. 1600년경을 중심으로 경건운동의 발단에 있어서 엄청난 반대자들(적그리스도로서 교황청)에 대한 두려움과 종말에 대한 위협적인 징조에 대한 공포가 밀려올 수 있게 된다. 그 위에 죄인에게 돌려진 의로 새롭고 거룩한 생활을 체험할 수 있게 되리라는 멜랑히톤적인 틀에 있는 칭의론은 얼마 안되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신앙의 내면화, 구체화 그리고 개인화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 고대교회, 중세 전성기와 중세 후기의 신비 또한 자연철학적인 사조에 있는 모방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음이 납득되어 진다.
①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
루터와 아른트를 객관적으로 동일시하는 견해는, 스스로를 진리증언의 대열에 선 마지막 사람들이라고 했던 경건주의의 지도자들인 슈페너, 프랑케, 친첸도르프와 벵엘의 역사적인 자기이해(Selbstverst ndnis)와 상응한 것이다. 쾨텐(C then) 부근의 에드다이츠(Eddeitz) 출신인 요한 아른트는 발렌슈테트(Ballenst dt) 부근의 바데보른(Badeborn)에서 안할트(Anhalt) 지역의 목사로서 직무를 시작했고(1583년), 그곳에서 1585년의 루터교의 성찬고백서의 철저한 고백자로서 서명하였으며, 그곳 지역교회(Landeskirche)의 세례의식에 마귀를 쫓아내는 의식과 성호를 긋는 의식(루터는 세례의식에 마귀를 쫓아내고 성호를 긋는 의식을 넣음: M. Luther, Das Taufb chlein verdeutscht 1523, in: WA 12, S. 38-48)이 없는 칼빈주의의 도입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그곳에서 목사직을 잃게 되었고, 1611년 첼레(Celle)에서 총감독(Generalsuperintendent)이 될 때까지, 쿠베들린부르크(Quedlinburg, 1590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 1599년부터), 그리고 루터의 출생지인 아이스레벤(Eisleben, 1608년부터)에서 일했다. 묵상과 명상에 몰두했던 아른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1606년부터 수많은 판을 거듭했고, 설교에 그 근원을 둔 경건서적(Andachtsbuch)인 '참기독교에 관한 네 권의 책들'(Vier B cher vom wahren Christentum, 1605-1610)에 서술되어 있다. 이 책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이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최초로 제기되었고 얼마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루터교 지역에서는 그의 모든 작품 중 첨단의 위치에 있었다. 이 책은 1600년경의 경건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19세기까지 널리 읽혀졌다. 아른트는 루터의 칭의론의 토대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화하려고 하였다 . 이로써 아른트는 오늘날 경건역사적인 관점에서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된다(J. Wallmann).
젊은 시절에는 정통 루터교의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그 일 때문에 희생이 되기도 했던 아른트는 여기에서 주저하지 않고 신비주의의 넓은 경향 뿐 아니라,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베르나르의 클레르보(Clairvaux von Bernhard) 이후 실로 유일하게 아가서를 애정적인 방법으로 주석하는 법을 루터교 안에 도입하였다. 그와 나란히 위대한 찬송작시자 필립 니콜라이(Philipp Nicolai, 1556-1608)가 베스트팔렌(Westfalen) 지역의 우나(Unna)와 함부르크(Hamburg)에서 같은 영향을 끼쳤다.
아른트의 `참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죄로 인하여 이 형상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이제 다시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 창조주에 의하여 피조물에 새겨진 고귀한 성품은 잃어버릴 수 없는 지참금을 뜻했다: 신적인 성품에 동참하는 것, 이것이 인간존재의 목적이었다. 이것은 플라톤적인 유비사상(Analogiegedanke)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 명백했다. 즉 이것은 죄가 초래하였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보다는 유사성을 더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분명히 변해야 됨을 깨달았다. 인간은 회심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부인을 통하여, 옛 피조물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피조물로의 부활을 통하여 신적인 영역으로 올라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완전한 변화로서의 거듭남이 여기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거듭남은 사랑 안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세상을 멀리하고 내면의 깊은 곳으로, 자기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밖으로 눈을 돌려 이웃과 사귀면서 겸손, 사랑, 온유 그리고 온전한 화평을 행하면, 그는 거듭남에 충분히 도달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하나님과 영, 영과 하나님 - 이 주제가 `참 기독교`의 실제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 아른트 외에 경건운동의 중요한 대표자들과 그들의 저술이 있다:
프레토리우스(Stephan Pr torius, 1536-1603): '영적인 보고'(Geistliche Schatzkammer, 1636).
니콜라이(Philipp Nicolai, 1556-1608): '영원한 생명의 기쁜 거울'(Freudenspiegel des ewigen Lebens, 1599).
헤르베르거(Valerius Herberger, 1562-1627): '심령의 설교'(Herz-Postillen).
요한 게하르트(Johann Gerhard, 1582-1637): '거룩한 명상'(Meditationes sacrae, 1606).
특히 게하르트에게 있어서 경건과 학문적인 신학은 결합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 이 경건은 수 많은 개혁경향과 관련을 맺고 있다: 아른트의 문하생 안드레애(J.V. Andreae, 1586-1654)와 코메니우스(J.A. Comenius, 1592-1670). 교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들이 자주 날카롭게 비판되었다(고발문). 여기에 슙(J.B. Schupp, 1610-1661), 그로스게바우어(Th. Gro gebauer, 1627-1661: 황폐된 시온에서 온 파수꾼의 소리), 자우베르트(J. Saubert, 1592-1646), 딜헤르(J.M. Dilherr, 1604-1669), 요한 슈미트(Johann Schmidt, 1594-1658).
- 루터교의 경건서적은 파울 게하르트(Paul Gerhardt, 1607-1676)의 영적인 시에 또한 감화를 끼쳤다. 이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찬송시 작가에게 17세기 전체를 표시하는 정통주의와 동시에 진심어린 경건의 긴밀한 맺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게하르트의 많은 찬송시들은 아른트의 경건, 특히 그의 '낙원의 정원'(Paradiesg rtlein, 1612)에 새겨져 있다. 요한 아른트의 신비적으로 채색된 경건의 언어는 바하(J.S. Bach)의 칸타타와 수난곡의 가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 루터교의 경건서적에 신비적 영성주의의 글들도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사람들: 발렌틴 바이겔(Valentin Weigel, 1533-1588); 베트케(Joachim Betke, 1601-1663); 호부르크(Christian Hoburg, 1607-1675). 사색적이고 신비적인 사상의 세계와 더불어 괴어리츠(G rlitz)의 야콥 뵈메(Jakob B hme, 1575-1624)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