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역사신학 종교개혁사 4

2006.11.25 23:03

폭우 조회 수:7469 추천:84

VI. 19세기의 신앙과 신학사
  
1. 슐라이에르마허
  19세기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역사에 적용되는 것은 또한 개신교의 신앙사와 신학사에 적용이 된다: 19세기는 우리에게 아주 복잡한 세계로서 만나진다. 이 세계 안에서 수많은 개별현상들과 사건들로 이루어진 소위 말하는 외적 역사는 아주 여러 모습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신앙과 신학의 역사이다.
  19세기의 초반에 "19세기의 교부"로 불리어지는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가 활동하다. 이 칭호에는 먼저 19세기 신학자들 가운데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논쟁의 여지없는 중대한 의미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또한 비판적인 견해도 이 많이 인용되었던 진술에 함께 울리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어떻게 19세기의 신학 주류에  서느냐에 따라, 이 위대한 발의자 슐라이에르마허가 평가되기 때문이다.
  - 슐라이에르마허는 1768.11.21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과 부친 모두 개혁교회 신학자 집안 출신이다. 그의 외조부는 베를린에서 궁정설교자요 감독이었고, 그의 외삼촌은 할레 대학교의 신학교수였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과격하고 경건주의적인 교회와 힘든 종교적인 싸움을 해야만 했다. 슐라이에르마허 아버지는 과격한 경건주의에서 계몽주의의 합리적인 신학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헤른후트의 확고 부동한 신봉자가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프로이센의 군목이었다.
  - 슐라이에르마허는 헤른후트의 형제교회의 정신 안에서 교육을 받았다. 1783년 오버라우지츠(Oberlausitz)지역의 니스키(Niesky)에 있는 학교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죽음. 자기 삼촌인 슈투벤라우흐(Stubenrauch)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1785년 막데부르크(Magdeburg) 부근의 바르비(Barby)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헤른후트의 설교자가 되어야 했다.
  - 니스키에서 완전히 헤른후트의 경건성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슐라이에르마허는 바르비에서 이 경건성으로부터 힘든 싸움 아래 빠지게 된다. 이 위기에 관한 문서들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편지에 주고받은 내용이다. 이 위기의 원인: 공부하는 것에 대한 심한 압박과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화목제물로서 죽은 것에 대한 의심. 내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할레 대학에서 신학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 헤른후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적인 유년기의 발전에 중요하였다: 종교적인 개인과 종교적인 공동체의 풍요로움에 있어서 지속적인 의미. 1802년 자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고백하고 있다: "내가 모든 것 이후 다시 헤른후트 사람이 됨으로써 나는 더 높은 차원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 1787-89년 할레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특히 에버하르트(J.A.Eberhard, 1739-1809)에게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2. 자유 신학(Die liberale Theologie)

- "자유 신학"이라는 개념은 젬믈러(Semler)의 책 "더욱 자유로운 신학 교수법의 시도(Versuch einer freieren theologischen Lehrart)" (1777년)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유 신학의 역사적 경향의 작업은 그 뿌리를 계몽주의에 두고 있으나 19세기에는 신앙과 역사의 문제 앞에 있는 첨예화한 형태에 있게 된다.
-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 , 1808-1874)는 헤겔의 영향을 받은 그의 책 '예수전'(Leben Jesu) (1835년)으로 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쟁의 원인: 복음서에 나온 예수에 대한 묘사는 역사적이 아니라 신화적이다. 첨가된 신화들이 예수의 역사적인 모습에 덧입혀졌을 것이다. 슈트라우스에게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치는 인간적인 교사였다.
슈트라우스는 神人間의 관념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에서 보았다. 이 관념이 초대 기독교에 현실화 되었으며 예수의 삶에 첨가되어 생산적인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이성적으로 밝혀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관념은 관념의 채움을 개체의 표본에 붓지 않고, 무한한 것은 유한한 형태로 이해되지 않는다.  신약 성서의 기독론적인 언급은 인류의 발전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 슈트라우스의 '예수전'은 모든 신학적인 경향으로부터 강한 반박을 받았다. 저자 또한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했다.
- 바우에르(B. Bauer, 1809-1882)는 극단적인 관점을 가졌다. 그는 신약 성서의 형성을 제2세기로 잡았고 예수의 역사성을 의심하였다.
- 19세기에 신약 성서와 교회사와 교리사의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의미는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르(Ferdinand Christian Baur, 1792-1860)에게 있다. 바우르는 슈트라우스의 선생이며 헤겔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1826년부터 튜빙엔 대학교의 교수였다.
- 바우르는 신약 성서를 초대 기독교의 역사적 정황에 배열하는 것을 시도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그는 새로운 역사 비평적인 신학의 창시자이다. 그가 세운 기본 명제: "기독교는 유일하게 기독교의 창시자의 인물을 통해 이것이다라는 모든 것이다(Das Christentum ist alles was es ist, einzig durch die Person seines Stifters)." 요한복음이 아닌 공관복음에서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예수의 모습이 탐구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참 의에 대한 설교가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 가르침은 그의 인격 안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 바우르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헤겔의 변증법적인 역사에 의거하여 설명한다: 正으로서 유대 기독교에서 사도 바울의 활동을 통하여 反으로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고 보편적인 이방 기독교로 이어진다. 영지주의적인 경향의 공동의 적과 마르시온에 대항하여 초기 카톨릭 교회는 合으로서 발전되었다. 신약 성서는 이 발전 과정에 따라 배열되어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바우르는 신약 성서에 대하여 "경향적인 비평"(Tendenzkritik)을 요청하였다.
- 바우르는 교리사에 대한 새로운 과목을 창설하였다. 그는 교리의 형성을 포괄적 정신적인 발전 과정에 대입시켰다. 이 발전 과정은 고대 교회의 교리들의 진리를 이것들의 필요한 진보와 더불어 인식하게 한다.
바우르의 주요 저서들:
'화해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Vers hnung), 1838;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Dreieinigkeit und Menschwerdung Gottes), 1841-43; '교회사 편찬의 시대'(Die Epochen der kirchlichen Geschihtsschreibung)', 1852; '초기 제3세기까지의 기독교와 교회'(Das Christentum und die christliche Kirche der ersten drei Jahrhunderte), 1853.
-1870년부터 신학분야는 그의 죽음이 한참 지난 후 자유 신학으로 여겨졌던 사람인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에 의해 각인 되어졌다. 신학 발전에 있어서 칸트, 슐라이에르마허 그리고 바우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리츨은 기독교를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고 개인의 신앙 체험에 집중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신약 성서는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 계시를 증거한다. 리츨은 기독교를 두 개의 과열점의 한 생략(Ellipse)으로 묘사한다: 모든 인간의 도덕적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칭의와 화해"로서 구원. 윤리적인 행위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인간 의지의 변화와 방향 전환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각 사람의 구원의 핵심이다. 이리하여 리츨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세 가지 요소로 결정되어 진다: 윤리의 강조,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증거와 확실한 인식에 있는 신앙 체험. 신비주의, 경건주의, 사색 그리고 카톨릭의 제식신심(祭式信心)에 대한 그의 반박에서 리츨은 시대에 맞는 "문화프로테스탄티즘(Kuturprotestantismus)" 신학자이다. 1864년부터 그는 괴팅엔 대학교 신학부에서 가르쳤다.
주요저서: '칭의와 화해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und Vers hnung, 1870-1874), '기독교 강의'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1875).
- 리츨의 신학은 19세기가 저물어 가는 때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특히 1886년부터 라데(M. Rade)에 의해 편집된 학술지인 '기독교세계' (Die Christliche Welt)는 다양한 리츨 문하생들의 기관지(機關誌)이었다.
- 1879년부터 말부르크 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헤르만(Wilhelm Herrmann, 1846-1922)은 리츨보다 더 강력하게 예수 인격에 감격하여 개인 신앙체험을 강조했다. 이로부터 윤리적 진지함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주요저서: '윤리'(Ethik, 1901). 불트만(Rudolf Bultmann)처럼 바르트(Karl Barth)도 말부르크 대학교에서 헤르만에게서 배웠다.
- 자신의 시대에 가장 유명한 신학자인 교회사가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고대 교회사가요 교리사가로서 리츨의 역사 경향적인 작업을 계승하였다. 이것은 이미 1892년 하르낙이 신앙고백 내용들의 역사적인 뿌리에 대한 주위를 환기시켰던 사도신경에 관한 논쟁에서 나타나고 있다.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초기 기독교와 예수의 원래적인 가르침에 대한 인지는 하르낙을 비교리적인 기독교에 대한 요구로 이끌었다. 그는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복음의 토양 위에 있는 헬라 정신의 산물로 여겼다.
하르낙은 1888년부터 베를린대학교에서 활동하였다. 주요저서: '교리사'(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1885ff.).
3. 중재신학
- 신학적인 자유주의와 신앙고백주의 사이에 많은 신학자들이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허와 연결하여 중재를 시도했다.
- 헤겔로부터 두 명의 사색적인 신학자인 다우프(K. Daub, 1765-1836)와 마르하이네케(Ph. Marheineke, 1780-1846)가 유래하였다.
- 특히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와 근대 문화에 다리를 놓으려고 했던 사람들을 중재신학자라고 한다. 이들의 기관지는 1828년부터 발행된 '신학연구와 비판'(Theologischen Studien und Kritiken)이었다.
- 여러 가지 경향을 받아들이는 중재신학자들과 약간 동질 그룹에서 탁월한 사람은 로테(Richard Rothe, 1799-1867)이다. 로테는 부흥운동, 슐라이에르마허, 헤겔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근본 사상은 교회 안에서 예수로부터 온 공동체 생활의 윤리적 완전의 과정이 국가 안에서의 완성에 있다. 교회와 국가가 경험적인 단체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의 역사와 제도로서의 교회의 역사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한다. 기독교의 원칙은 모든 현세적인 상황을 그의 힘으로 달성하는 것이다.
주요저작: '신학적 윤리'(1845-48).
- 니취(C. I. Nitsch, 1787-1868)는 교회와 신앙고백의 연관을 절대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연합을 위하여 싸웠다.
주요저작: '기독교 교리의 체계'(System der christlichen Lehre, 1829)와 '실천신학'(Praktische Theologie, 1847-67).
4. 성서신학
- 모든 신학의 성서적인 기초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강조했던 인상 깊은 신학자들을 여기에 요약해본다.
- 1843부터 튜빙엔 대학교에서 가르쳤던 베크(J. T. Beck, 1804-1878)는 성서축자주의(Biblizismus)와 벵엘의 구속사적 신학으로부터 왔다. 성서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단계를 전개한 하나님의 계시가 근본적으로 드러나 있다.
주요저서: '성서에 나타난 기독교의 교의학'(Die christliche Lehrwissenschaft nach den biblischen Urkunden, 1847).
- 1860년부터 할레 대학교에서 활동한 캘러(Martin K hler, 1835-1921)는 신앙과 역사의 관계의 근본문제를 선구적으로 파악하였다. 1892년 "소위 말하는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이고 성서적인 그리스도"(Der sog. historische Jesus und der geschichtliche biblische Christus)라는 강연을 했다. 이 제목은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역사적 예수가 아닌 교회에 의해 설교되고 증거된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시도들은 잘못되었다. 복음서를 "교회에 기초를 둔 설교의 문서들"로서 이해해야만 한다. 확실히 캘러에게 있어서 설교되어진 그리스도는 바로 역사적인 예수였다.
- 이미 20세기까지 영향을 끼친 슐라터(Adolf Schlatter, 1852-1938)는 1898년부터 튜빙엔 대학교의 교수로 일했다. 그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신학과 고대 유대교의 종교와 역사 연구 영역에 있다. 그의 주석 연구에서 그는 소위 말하는 "목격행위"(Sehakt)와 "삶의 행위"(Lebensakt)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단순히 인간적인 학문으로부터 주석을 지키고 주석을 전적으로 사실, 즉 "그리스도의 역사"와 연관시키려고 했다.
수많은 저작이 있으며 특히 그 가운데서도 신약성서 주석이 있다.
5. 종교사학파
- 1892년 봐이스(Johannes Wei )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교' (Die Predigt Jesu vom Reiche Gottes)라는 작은 책이 출판되었다. 순수하게 주석적으로 그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는 종말론적 성격을 가졌다고 확신하였다. 이것은 리츨의 윤리적인 발전 사상을 극단적으로 반박한 것이다.
- 이것은 괴팅엔 대학교의 일련의 젊은 주석 신학자들의 서막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초대 기독교의 관계를 고대 종교사와 더불어 문서비평과 양식사(Formgeschichte)에 기초하여 연구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군켈(H. Gunkel), 부세(W. Bousset), 그레스만(H. Gre mann), 다이스만(A. Dei mann), 브레데(W. Wrede).
- 성서적이고 성서 밖의 종교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유사성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과정 가운데 성서적인 종교의 특별한 종류를 드러냈다. 근대적인 관념에 대한 성서적 선포의 낯설음이 명백해졌다. 이와 함께 성서적인 선포로부터 직접적인 다리를 현재에 놓으려는 자유 신학의 시도들은 의문시되었다.
- 이것은 특히 종교사학파의 한 조직신학자를 반사하고 있다: 트뢸취(E. Trorltsch, 1865-1923)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후에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 역사가이며 또한 종교철학가요 종교사회학자로서 트뢸취는 자신의 문제제기로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는 학자이다. 근대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관계에 관한 문제, 계시와 역사 그리고 개인의 결정의 자유와 특히 근대의 역사에서 공동체의 조건과 같은 것들은 트뢸취가 문제를 삼은 연구 영역이었다.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한 점: 그의 위대한 연구 결과인 저작, '기독교 교회와 단체들에 대한 사회학'(Die Soziallehren der christlichen Kirchen und Gruppen, 1912).
-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필연적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이라는 명제로 활발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고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서술의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이것은 특히 그의 저작에 나타나 있다: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 까지'(Von Reimarus zu Wrede, 1906), 이 책은 1913년의 제2판부터 '예수 생애 연구의 역사'(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6. 독일의 부흥운동과 루터교의 교파주의
  1) 부흥운동의 일반적 성격
- 부흥운동이란 19세기 초반에 있었던 교파를 초월하는 종교적인 출발을 의미한다. 시간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은 독일의 부흥운동보다 앞섰다.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스위스의 개신교에서는 부흥운동을 "레베위"(R veil)라고 한다. 나라와 언어를 초월하여 광범위한 연합의 감정이 형성되어 있다.
- 이 운동은 여러 가지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계몽주의의 이성적인 종교에 대한 강력한 반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심각성, 이 죄로부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 중생에 대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체험; 개인의 중생은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정신으로부터 사회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적이고 세상을 향한 활동과 이방인들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는 선교의 열정이 있다. 프랑스 혁명 정신에 대한 비판.
- 목회자뿐만 아니라 특히 평신도들이 성경을 새롭게 발견했으며 자유로운 협회와 단체의 형태로 공동 활동을 하였다. 경건이 이 협회에서 생동하게 되고 경험되었다.
  2) 부흥운동의 뿌리
- 개신교에서 초기의 경건주의는 부흥운동의 역사적인 뿌리이다. 무엇보다도 헤른후트의 형제교회의 디아스포라 설교자들로부터 결정적인 자극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 부흥운동의 첫 번째 국면에서 "더 높은 차원의 헤른후트 사람"으로서의 슐라이에르마허 또한 중요하게 자극을 준 사람이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로 예를 들면 키일의 감독교구장인 하름스(Claus Harms)와 베를린 대학교의 교회사가인 네안더(August Neander)가 있다. 물론 후에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경계와 투쟁이 있었다. 이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다음과 같은 하름스의 언급이 있다: "나를 낳은 그(슐라이에르마허)는 나에게 전혀 빵을 주지 않았다."
- 부흥운동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1780년 아욱스부르크 출신의 울스페르거(J.A. Urlsperger)에 의해 바젤에서 설립된 "독일 기독교 협회"(Deutsche Christentums- gesellschaft)이다. 이 협회의 회원: 융 슈틸링(H. Jung-Stilling, 1740-1817), 오벌린(J.F. Oberlin, 1740-1826), 라파터(J.C. Lavater, 1741-1801). 또한 계몽주의의 비판자인 헤르더(J.G. Herder)와 하만(J.G. Hamann)은 부흥운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계몽주의와 부흥운동은 상반적으로만 나타날 수 없었다. 계몽주의와 부흥운동에서 자연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은 이미 이성으로 체험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체험은 기독교의 계시에서 비로소 완전해진다. 이 관점은 독일의 계몽주의를 부흥운동, 또한 단체의 신앙형태를 결합시켰다.
3) 부흥운동의 역사적 발전
- 19세기 전반에 세 개의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면 (대략 1800-1815):
낭만주의, 이상주의 그리고 민족적인 성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정신적인 넓은 영역 안에서 종파를 초월하는 체험적인 기독교가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국면 (대략 1815-1830):
부흥설교, 정기 간행물과 논문, 성서공회와 선교회를 통해 국민과 교회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퍼졌다. 교파들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경계 설정 그리고 독일의 이상주의의 철학과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경계설정으로 다시 중요하게 되었다.
셋째 국면 (대략 1830-1848):
교파주의로의 발전. 제도로서의 교회와 교회의 신앙고백이 중심에 오게 되었다. 부흥운동의 넓은 영향의 감소, 합리주의와 교파주의 사이의 교회적인 당파 싸움.
4) 부흥운동의 중심과 주대표자
- 초교파적으로 종교적인 출발은 알고이의 가톨릭 부흥에 있다. 이 부흥운동은 레겐스부르크의 감독인 자일러(J.M. Sailer)의 제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다양한 영향들이 독일의 개신교에 미쳤다: 특히 프랑켄, 뷰르템베르크, 니더라인, 베스트팔렌의 일부분, 베를린, 함부르크, 브레멘, 하노버, 슐레지엔과 폼메른.
- 프랑켄의 부흥은 뉘른베르크와 에어랑엔 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개혁교회 신학교수인 크라프트(Christian Krafft, 1784-1845)와 교육학자인 칼 폰 라우머(Karl von Raumer, 1783-1865)가 중심적인 인물이다. 루터교의 한 지역에서 시작된 에어랑엔의 부흥은 계속 하나의 교파적인 루터교의 경향으로 발전하였다.
- 폼메른 지역의 부흥의 중심은 코트비츠(Hans Ernst Kottwitz) 남작이다. 헤른후트 형제교회 출신으로 프로이센의 귀족과의 관계, 사회적인 활동, 베를린에 각성한 모임의 주역이었다. 에어랑엔의 부흥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의 부흥도 루터교적인 교파주의로 나아갔다. 부흥운동의 주요 기관지는 헹스텐베르크(E.W. Hengstenberg, 1802-1869)에 의해 창간된 "복음 교회 신문"(Evangelische Kirchenzeitung, 1827)이었다. 이 신문에는 부흥운동과 합리주의의 치열한 공방이 수록되어 있다.
- 뷰르템베르크에서 부흥운동은 경건주의, 그 중에서도 벵엘(Johann Albert Bengel, 1687-1752)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다. 벵엘은 1000년 왕국이 1836년에 시작된다고 확신하였다. 종말론적이고 묵시론적 정서는 그 시대의 정치적인 불안정과 연관을 맺었다. 또한 한(J.M. Hahn, 1758-1819)으로부터 기인한 한파 공동체들도 천년왕국설의 영향을 받았다. 불름하르트(J.Chr. Blumhardt, 1805-1880)에 의해 바트 볼(Bad Ball)은 1852년부터 슈바벤 지방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뷰르템베르크의 탁월한 부흥설교가는 호프아커(L. Hofacker, 1798-1828)이었다.
- 니더라인의 부흥운동은 이 지역의 개혁교회 경건주의와 연관을 맺고있다. 지거란트(Siegerland)의 초기 부흥운동에서 융 슈틸링(H. Jung-Stilling, 1740-1817)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후에 부페탈에서 부흥설교가들이 활동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콜브뤼게(H. F. Kohlbr gge, 1802-1875)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니더라인에서는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업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심각한 사회적인 곤경과 은둔적인 종교적 경건 사이의 갈등이 여기에서는 특별히 많았다.
- 브레멘에서는 멘케(Gottfried Menke, 1768-1831)가 경건한 설교들로 영향을 미쳤다. 이 설교들에서 그는 세속의 정치사와 구속사를 직접 비교하였다. 그는 1789년을 악마의 권세들로부터 승리하는 해로 여겼다.
- 니더작센 지역의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페트리(L.A. Petri, 1803-1873) 그리고 '시와 하프'(Psalter und Harfe, 1833)라는 찬송시집을 낸 찬송가 작사자인 슈피타(C.J.Ph. Spitta, 1801-1859)가 있다. 함부르크에서는 함스(L.Harms, 1808-1865)가 활동하였다.
- 헤센에서는 특별히 엄격한 루터파인 필마르(A.F.Chr. Vilmar, 1800-1868)가 있다. 그는 부흥운동의 개인주의를 멀리하였다.
- 부흥운동으로부터 성서공회와 선교회가 나타났다.
뷰르템베르크 성서공회, 1804;
프로이센 대 성서공회, 1814;
바젤 선교회, 1815;
베를린 선교회, 1824;
라인 선교회, 1828;
북독일 선교회와 라이프치히 선교회, 1836;
헤르만부르크 선교회, 1849;
노이엔데텔스아우 선교회, 1853.
7. 유럽과 북미의 부흥운동
1) 영국
  
- 독일보다 약 100년 전 영국과 북미에서 부흥운동의 수많은 물결이 일어났다. 영국의 계몽주의가 교회와 국민 사이에 야기 시켰던 위기는 영국에서 처음 종교적인 각성을 일으키게 되었다. 영국의 이신론은 단지 보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만을 지켰고, 바로 이것은 종교적인 공백과 무관심을 가져왔다. 성경에 기초한 개인의 삶의 모습은 심하게 동요되었다.
- 국가 교회 안에 경건의 실천을 요청하는 종교적인 모임들("religious societies")이 형성되었다. 개인의 신앙은 칼빈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입증되어야만 했다.
- 감리교 운동에서 영국에서의 부흥운동은 최고점에 도달했다. 감리교 운동은 교회사에서 최종적인 위대한 교회 형성(E. Beyreuther)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감리교의 창시자는 성공회의 신부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이다. 그 외에 중요한 인물로는 화이트필드(G. Whitefield, 1714-1770)와 존 웨슬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이다.
- 웨슬리 형제는 1729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생 클럽을 조직하였다.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거룩한 생활로 "규칙쟁이"(Methodisten)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 헤른후트 형제교회의 말씀 선포에 대한 터득과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통한 감명 아래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에 회심하였다. 이 회심은 그로 하여금 그의 동생과 화이트필드와 함께 전 영국,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를 순회하게 한 그의 독창적인 부흥 설교들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노천에서 수 천명에게 설교하였다. 원시 기독교적인 순회 사도직의 갱신.
- 감리교적인 말씀 선포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촉구했으며 회개의 투쟁과 은혜 체험 아래 회심을 목적으로 삼아 확고한 공동체 형식을 이끌어 냈다.
- 감리교 운동의 특징은 웨슬리에 의해 만들어진 평신도 설교자직에 있다. 이것으로부터 자극은 19세기에 노동조합운동과 노동당에 원동력을 주었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유럽 대륙 보다는 더 활발한 기독교적인 경향을 지닌 사회정책이 있게 되었다.
- 웨슬리가 죽은 다음 1795년 감리교는 영국 성공회로부터 분리하였다. 물론 이것은 엄격한 교파구별의 필요를 느끼지 않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지녔다.
- 19세기 초반에 영국 성공회는 새로운 부흥운동인 "저 교회 운동"(Low-Church- Bewegung)을 경험하였다.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자극은 이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났다. 고 교회적인 성공회주의는 비국교 교회를 간섭하였다. 1804년 비국교도들과 영국성공회 교도들에 의해 "영국과 해외 성서공회"가 설립되었다.
- 대륙의 교파주의와 병행하여 옥스퍼드 운동이 일어났다. 주요인물: 뉴만(J.H. Newman, 1801-1890). 예배의식과 성례전, 제도와 교회의 직무에 대한 강조. 성직 계승권의 갱신. 이 고 교회적인 경향은 오늘까지 영국 성공회의 신학과 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북 아메리카
- 영국의 부흥운동과 거의 동시대에 북미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중심인물: 에드워즈(J. Edwards, 1703-1758). 칼빈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기초에 근거하여 그는 복음 전도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설교의 주제: 개인의 회심에 대한 요청. 특징: 종말론적 정서를 강하게 띤 선교에 대한 열정. 미국에서 복음 전도에 대한 요청과 전 세계를 향한 이방인 선교.
-  에드워즈의 제자는 홉킨스(S. Hopkins, 1721-1803)이다. 선교 활동에 열성적인 그는 노예해방을 위해 정열적으로 투쟁하였다.
- 급속하게 퍼진 감리교회는 동부 해안으로부터 서부로 이어지는 주민들의 대 이동을 말을 탄 순회 설교자들의 도움을 받아 인도하였고 수많은 이주민들에게 성경에 확고히 선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했다.
- 19세기 초반에 소위 말하는 천막집회들이라고 불리는 부흥운동의 다양한 조류가 있었다. 동부 해안에 있는 대학들에서 시작하여 부흥은 계속 퍼져 나갔다. 부흥운동은 미국의 개신교를 자유교회들로 오늘날까지 지탱하게 했다: 자각적인 선교열,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종교와 사회의 다양한 접촉은 오늘날까지 특징을 이루고 있다.
3) 스코틀랜드
- 스코틀랜드의 부흥운동은 촬머스(Chalmers, 1780-1847)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의 부흥설교는 1845년 에딘버러에서 사회적인 빈곤에 대한 책임있는 구제를 호소했다. 그는 고대교회의 집사직을 갱신했다.
- 1843년 스코트랜드에서 국가교회와의 분열이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가 설립되었다.
4) 서부유럽의 프로테스탄티즘에 있어서 부흥운동
- 스위스에서 제네바의 부흥운동은 국가와 교회에 있는 이성주의와 투쟁했던 젊은 신학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독일, 영국 그리고 스코틀랜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본래의 칼빈주의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1831년부터 제네바 교회와 프랑스에서 복음 전도 활동이 있었다.
- 바트란드(Waadtland)에서 비네(Alexandre Vinet, 1797-1847)는 중심적인 신학자이다. 그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교회를 그의 양심과 복음과 일치시켰다.
- 바젤에서 독일 기독교연합에 의해 중요한 자극들이 남부 독일로 전해졌다. 1815년 바젤 선교회가 창립되었다.
-프랑스 부흥운동에서 모노드(Adolphe Monod, 1802-1856)는 중요한 설교자였다. 홀랜드에서 빌더다이크(Bilderdijk, 1759-1831)는 넓게 교육을 받은 부흥운동의 지도자이다.
- 또한 루터교적인 스칸디나비아에는 다양한 부흥운동이 있었다. 덴마크 교회에는 특히 그룬트비히(N.F.S. Grundtvig, 1783-1872)가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목적은 사도신경에 기초한 순수한 국민교회였다. 덴마크 시민대학의 창설자. 노르웨이에서는 하우게(Hans Nielsen Hauge, 1771-1824)가 중요한 부흥설교가 이었다.  노르웨이에서 부흥운동은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교회를 중심으로 경건한 사람들의 결합이다.
스웨덴에서 부흥운동은 헤른후트와 스코틀랜드의 영향을 받았다. 경건문학의 광범위한 유포:  성화의 강력한 강조에 비해 루터의 칭의론이 두드러졌다. 1815년 스웨덴 성서공회, 1835년 선교회가 창설되었다.
8. 제1차 대전 이후의 신학사
1) 개신교 신학의 새로운 모색
- 리츨의 신학, 특히 그의 제자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rmann)의 신학은 공유의 기초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에  리츨의 신학으로부터 개신교 신학의 모든 조류들이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신학의 중심 개념은 "윤리"와 "문화"였다. 기독교 신앙은  자유로운 문화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의 세계에서 아주 분명하게 공동체 생활에서처럼 개인 생활에서 윤리의 요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힘이었다.
- 1917년 처음으로 오토(Rudolf Otto, 1869-1937)의 작품인 '거룩한 것(Das Heilige)'이 나왔다. 1930년까지 이 책은 22판이 나왔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하나님 이해에 대한 서곡이다. 이미 이것으로부터 인간이 "놀람과 떨림의 신비"(my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 안에서 만나는 "절대 타자(ganz Andere)"로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성적이고, 윤리적 종교적인 기독교 이해에 대한 신학의 시대정신과의 거리가 완전히 확실하게 되었다.
- 1917년 베를린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홀(Karl Holl, 1866-1926)은 루터의 95개 논제 400주년을 기념하는 '루터는 종교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Was verstand Luther unter Religion?)' 라는 유명한 강연을 했다. 여기에서 이 새로운 루터상이 확실하게 제시되었다. 이것은 꼼꼼한 역사적인 작업과 체계적인 연구로부터 특히 초기 루터의 신학, 그의 십자가 신학과 칭의신학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홀은 영웅과 민족 해방투사의 진보적인 루터 모습을 뒤에 남겨 두었다. 그의 연구와 더불어 소위 말하는 루터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루터 르네상스는 다가오는 시대의 변증법적 신학에 또한 큰 의미를 가졌다. 루터의 신앙의 중심은 "양심의 종교"이며 이것은 당위의 인식을 근거한다는 홀의 논제는 전체 종교개혁적인 신학의 이해에 있어서 의미 심장한 새로운 시작에 확실히 시대 정신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변증법적 신학은 성과 있는 신학적인 새로운 의식을 이끌었다. 이 신학은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발전 과정과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바르트가 1911년 아르가우(Aargau)州에 있는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교회에서 목회자로 일했을 때 먼저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대의 新改新敎-자유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적인 문제와의 대치, 종교사회학으로의 방향전환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의 신학선생의 전쟁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와 종교사회주의의 거부를 통하여 바르트를 흔들리게 했다.  친구인 투르나이젠(E. Thurneysen, 1888-1974)과 함께 바르트는 자유신학을 버리고 오직 성서에서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 자신의 설교 사명을 위한 심도있는 성서연구를 통해 1919년 로마서 주석이 나왔다(1919년 제1판).  
2. 변증법적 신학의 신학적 출발
- 변증법적 신학의 출발은 특히 바르트의 강연에서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1919년 9월 25일탐바흐(Tambach)에서 행한 강연 "사회 안에 있는 기독교인 (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 여기에서 중요한 방향전환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기독교인과 기독교적인 문화재들로부터의 전향과 그리스도로의 방향전환, 인간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타나셨던 하나님께로 전향을 의미했으며 이로써 소위 말하는 기독교적인 세계에 대해 극단적이고 생소하게 대립하였다. 소위 말하는 모든 기독교적인 운동들을 통과해 "위에서부터 수직적인" 운동이 지나가며, "이 운동의 힘과 의미는 죽은 사람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
- 이 운동은 모든 현존하는 것에 대한 전면적 부정, 소위 말하는 기독교-사회적인, 기독교-민족적인, 기독교-윤리적인 것과 같은 "이음표 기독교"(Bindestrich-Christentum)에 대한 종말을 뜻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이 종교의 방식들, 예를 들면 기독교적인 윤리의 종교와 같은 것으로 "위에서부터 수직적인" 운동에 저항하는데 있다.
- 하나님의 부정은 그러나 동시에 긍정이다. 초기의 루터와 비슷하게 바르트는 하나님이 파괴하시면서 재건하시고, 확신을 박탈하시면서 새로운 확신을 선물로 주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변증법적 사고구조는 변증법적 신학에 이름을 붙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을 의미하는 부정은 긍정적이다. 한편 하나님 위에 세워지지 않은 모든 긍정들은 부정적이다." 기독교적인 문화 작업에 협력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에 대해 기독교적인 책임에 대한 긍정이 대립하였다. 바르트는 그리하여 사회민주주의와의 협력을 요청할 수 있었다.
- 그러나 이성과 계시, 문화와 기독교 사이의 전통적인 조화가 이처럼 근원적으로 깨뜨려진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언급이 전적으로 가능하겠는가? 바르트는 이 문제에 대하여 1920년 4월 17일 아라우(Aarau)에서 행한 강연에서 해답을 주었다: "성서적인 질문, 이해 그리고 전망". 바르트는 성서에서 "놀랄 만한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감동에 대한 증언. 계몽주의이래 시작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서와 역사적 문서 사이의 갈등을 바르트는 성서의 증인들의 감동으로 답하였다. 이와 함께 성서는 역사적 비평에 열려 있었다. 물론 이 비평은 감동의 기초에 도달할 수 있을 수 없었다. 바르트는 성서를 근원적으로 종교의 세계와 대치 시킨다; 무신론의 세계가 아닌 종교적인 세계가 먼저 성서에 의해 도전되었다.
- 1922년 완전히 개정된 로마서 주석 제2판이 나왔다. 그는 이제까지의 새로운 출발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주석서로부터 20년대이래 놀라운 반응이 나왔다. 특히 키엘케가르드(S. Kierkegaard, 1813-1855)의 사상, 니체(F. Nietsches)의 친구인 오버벡(F. Overbeck)에 의한 시민적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 그리고 러시아의 작가인 도스토옙스키(Dostojewskij)는 이 신학적인 새로운 출발에 함께 관여하게 되었다.
- 바르트와 투르나이젠 외에 변증법적 신학의 그룹에 속한 신학자들: 루터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로 유사한 이해에 도달한 고가르텐(F. Gogarten, 1887-1969);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신학의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했던 브루너(E. Brunner, 1889-1966): 불트만(R. Bultmann, 1884-1976)은 1924년 '신화와 말씀'이라는 저서를 냈다. 그는 신약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부터 그리고 종교개혁적인 신학, 특히 루터 신학의 재발견을 통하여 변증법적 신학을 발견했다.
-  "시간들의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라는 제목을 단 고가르텐의 논문이 '기독교 세계'(Christliche Welt)에 실렸다. 새로운 신학에 대한 이 비평적인 위치의 결정은 1923년부터 1933년까지 널리 영향을 끼치며 유포된 학술지의 이름이 되었다. 이 학술지의 편집자: 메르츠(Georg Merz, 1892-1959).
-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그룹은 1933년 이미 오랫동안 감지할 수 있었던 차이점들로 분열되었다: 독일 기독교에 대한 고가르텐의 애착 때문에 바르트와 거리가 멀어졌다. 1934년 바르트와 브루너 사이에 신학에 있어서 인간론적인 "접촉점"에 대한 논쟁으로 결별하였다. 바르트와 불트만 사이에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에 대한 프로그램 때문에 문제가 되었고 불트만의 하이덱거(M. Heidegger) 철학의 개념적인 차용으로 20세기의 두 거장 신학자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3. 바이마르 공화국의 교회들
- 왕정의 종말과 공화정이 선언된 1918년 11월 9일은 또한 교회들에 있어서 심오한 역사적 분기점을 뜻했다. 교회들은 이제 막대한 정치적, 정신적 그리고 법적-조직적인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독일의 개신교회는 1918년 11월 9일로 수 백년간의 법 구조인, 통치자의 교회지배를 떨쳐버렸다.
- 루터교회들에 대한 중요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국가 교회적인 구조가 사라지고 난 다음 어떻게 독자적인 교회지배를 만들어야 하는가? 새로운 시작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개신교와 가톨릭 국민들의 국가와 황제에 충성적인 성향;
VII. 에큐메니칼 운동
1. 19세기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선교협력을 요구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보와 의견의 공유이다. 이러한 필요 아래 선교대회들이 네 가지 분야에서 개최되었다. 첫째, 지역적인 선교대회이다.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는 지역들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대회들이 개최되었는데 여기에서 선교협력의 이론과 실제 그리고 조직의 문제들이 직접 탐구되었다. 이 대회는 1900년 개최된 마드라스 대회가 경계표가 되었다. 둘째, 복음주의 연맹의 대회들이다. 이것은 1854년 뉴욕에서 시작된 미국대회 그리고 1900년 뉴욕에서의 미국 대회 절정, 1910년 에딘버러 대회를 촉구할 수 있었던 일련의 사례들을 내포하고 있다. 셋째는 대륙선교대회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며 1866년 이래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기독학생연맹의 형성이라 할 수 있다. 학생운동은 1910년 에딘버러 대회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실제적으로 학생을 대표하는 회의이다. 이것에 의하여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진로가 설정되었다.
  이러한 네 가지 선교대회의 절정은 1910년 6월 14일에서 23일까지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세계선교대회(W.M.C.)이다. 이 대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계적이고 국가적인 기구들이 조직되었다. 이 대회의 목표는 비기독교 세계를 연구하는데 있었으며 효과적인 복음화를 이루기 위한 상호협력적인 전략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에 나타난 에딘버러의 독특성은
1) 아시아인들과 아시아 세계로부터 온 100여명의 특파원이 참가하였다. 이들이 가지고 온 자료들은 토의를 위한 자료로 제공되어졌고 상호협력을 고무하고 보편적인 전략 개발에 공헌하게 되었다.
2) 각국의 선교부들과 협의회에서 파송한 1200여명의 공식 대표들이 모였으며 재정적인 부담금은 참가자들이 맡았다.
3) 비기독교세계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제한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부를 배제시켰다.
4) 자체에 부여된 신학적인 제한성들을 신앙의 확신 안에서 설정하였다.
5) 신앙과 질서운동에 알 맞는 신학적인 논쟁을 배제하였다.
6) 앵글로-카톨릭 선교부, 퀘이커 교도들,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의 루터란 선교부들, 중국의 내륙 선교부가 참가한 총괄적인 대회였다.
7) 17개 나라의 아시아 제국을 제외한 선교 기관들의 대표자들은 서구인들이었다. 의장인 Mott는 아시아, 태평양 연안, 아프리카에서 온 대표들이 한정적인 사실에 대하여 분명히 언잖은 태도를 취하였다.
8) 서구에서 모였던 대회였다.
9) 비상한 힘을 생성하였다. 영적으로 그것은 기도의 힘에 뿌리를 가지는 것이었다. 기도는 대회전과 기간 중에 전 대륙에서 행해졌다. 대회 기간 중 매일 아침마다 기도로 시작하였고 정오에는 30분 동안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에딘버러 대회의 성과로는 선교부에 관심을 갱신하는 것이었으며 교회의 독특한 비젼을 얻게 되었고 세계 선교의 실재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속위원회를 창안하였다.
   1)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필리핀의 선교사 주교인 브렌트(Charles H. Brent)의 신앙과 직제 운동은 1910년 에딘버러에 기인한 것이다. 브랜트는 신앙과 직제의 문제들이 교회일치를 위한 프로그램에서 배제될 수 없는 중요한 사항들임을 직시하였다. 에딘버러 대회가 끝나기 전 브랜트는 그의 뜻을 친구들에게 전했는데, 신앙과 직제의 문제를 다루는 세계대회를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모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가질 수 없었으며 1927년에야 로잔에서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 모임은 에딘버러에서 제기된 신앙과 직제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두 번째 세계대회였다. 이 운동은 일치의식의 증가를 겨냥하였으며 대표자들은 성공회, 개신교, 로마 카톨릭, 희랍 정교회가 함께 그들의 공통적인 기독교 일치를 주장할 것을 이구동성으로 희망하였다. 희랍정교회는 1919년에, 로마 카톨릭은 1965년 바티칸 II 대회의 마지막에 일치를 위한 모임에 가담할 것을 다루었다. 1948년 암스텔담 대회에서 W.C.C.가 형성되었을 때, 에딘버러에서 구성된 상임위원회는 W.C.C.의 신앙과 직제를 위한 위원회가 되었다. 이 위원회는 비회원 교회들에 소속되어 있는 신학자들과 유대관계를 갖는 특수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여기에는 9명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위원으로 소속되어 있다. 이들은 1968년 W.C.C. 웁살라 대회에서 위원들로 지명되었다.
     2) 생활과 사업(life and work)
   신앙과 직제와 더불어 생활과 사업은 에큐메니칼 조직의 영향력을 대변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실제적인 행동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생활과 사업의 저명한 지도자인 스웨덴의 죄더블롬 주교(Archbishop Nathan S derblom)는 신앙 안에서 일치를 위한 길은 교회들의 연합적인 활동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생활과 사업을 위한 중요한 국제대회는 1925년에 열린 스톡홀름 대회, 1937년 옥스포드 대회이다.
   생활과 사업 운동은 신앙과 직제는 세계대회에서 각기 다른 시대에 출항하였다. 신앙과 직제는 국제선교대회(I.M.C.)와 생활과 사업이 시작하고 난 후 13년 뒤에 시작되었다.
2. 1948년 이후의 에큐메니칼 운동
   1937년 옥스포드에서 제2차 생활과 사업 대회와 에딘버러에서 제2차 신앙과 직제 대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이 두 개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협력과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창설이 결정되었다. 1948년 암스텔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설립되었다. 이 대회주제: "세상의 혼란과 하나님의 구원계획". 두 개의 에큐메니칼 운동들이 이제 통합되었다. 196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세계대회에 정교회들이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하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20세기에 수많은 대회와 더불어 교파들의 접근에 근본적인 자극들을 가져다주었다. 20세기의 교회사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그 이전의 세기들과 비교해볼 때 교파들 간에 근본적으로 변화된 분위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