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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구조 - 하나님 나라

2008.04.04 13:05

폭우 조회 수:7153 추천:51

이 논문을 쓴 근광현교수는 수도침신대의 교수입니다.

그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논문은 복음주의 관점에서
개혁주의 입장에 쓰고 있지만 침신대의 입장 역시 견지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자의 신학적 성향을 고려하면서 그의 논문을 읽고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구조

                                                                                                                         근 광 현



     목 차

Ⅰ. 서  론
Ⅱ. 하나님의 나라 복음
  1. 복음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
  2. 신약성경에 나타난 복음
  3.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
Ⅲ. 하나님의 나라 설립
  1.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
  3.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
  4.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및 교회의 관계
Ⅳ. 그리스도의 나라와 교회 구조 세우기
  1.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통치 회복
  2. 하나님의 형상 본받기와 왕 같은 제사장직 회복
  3. 하나님의 형상 나누기와 하나님의 나라 복지
Ⅴ. 결  론
참고문헌



Ⅰ. 서  론

미국 레하이 대학(Lehigh University) 더글라스 휘버(Douglas Feaver) 교수는 오늘날 종교계 내에서 벌어지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첫째는 사람들은 전 세계 도처에서 교회를 버리고 있는데 이는 종교를 탈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를 찾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들은 너무 현명하여 교회가 종교를 찾으리라고 결코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길 오늘날 미국의 예수 운동에서 은사 중심적 가족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리스도를 교회 밖에서 추구하고 찾았다고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 안에서조차 사람들은 거룩함을 지니지 않았고, 또 공동체에 대한 올바른 관심도 없다고 한탄하였다. 그래서인지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다(Jesus Yes, Church No)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로이지(A. Loisy)에 의하면, 교회의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기능을 상실한데 있다.
그는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막상 그 후에 되어진 것은 교회였다"는 고전적 문구를 인용하여,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 의하여 왜곡 내지 변질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윌리암 바클레이(William Barclay)역시「왕과 나라」(The King and the Kingdom)에서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를 듣거나 예배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왕 되심에 관하여 생각한다 할지라도 오늘의 교회에서 왕은 없고 하나님만 있다"고 꼬집었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명백한 괴리현상이 있음에 틀림없다.
오늘날 지구촌화 된 세계 변화와 그 흐름들을 바라볼 때, 이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다시 한 번 재정립하고 이에 적합한 교회 구조를 세워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사실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A. Snyder)는 하나님의 나라를 취급하지 않고 교회의 선교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없으며, 전 지구가 하나의 촌으로 축소됨으로써 교회가 새로운 국제화에 직면하게 된 상황하에서 이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고조되고 있다고 했다.
이신건도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의 본질과 사명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활과 미래를 풀 수 있는 핵심 열쇠이지만, 교회에서 이 주제만큼 심하게 변질되고 푸대접을 받아온 것도 드물다 하였다.


Ⅱ. 하나님의 나라 복음

1. 복음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

일반적으로 복음에 대하여 묻는다면 각기 다른 대답을 듣게 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복음이란 "좋은 소식"(good news) 혹은 "좋은 복된 소식"이라고 대답한다.
단순히 복음에 관한 어의만 알 뿐, 그 진정한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역사적인 인간 예수가 복음이라고 말했고, 보수주의신학자들은 신으로서의 예수가 복음이라 가르쳤다.
그레엄 골즈워디(Graeme Goldsworthy)는 사람들이 복음의 정의에 대해서 혼돈하고 있기에 이런 현상을 빚게 되었다고 염려했다. 실제적으로 "성경이 선포하고 있는 복음"과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 명칭부터가 그러하다. 존 브라이트(John Bright)는 "교회는 교회의 복음을 말하고 선포한다. 그러나 그 복음이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그러기에 좋은 소식이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설교가 현대인의 귀에 생소한 것으로 들리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2. 신약성경에 나타난 복음

복음서는 단순히 복음이라 하지 않는다. 마태는 "천국 복음"이라 했고(마4:23, 9:35), 마가는 "하나님의 복음"이라 했으며(막1:14-15),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했다(눅16:16).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5절의 "좋은 소식"을 이사야서 52장 7절에서 인용하여 사용하였다. 여기서 "좋은 소식 혹은 복된 소식"이란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도 그러했음을 볼 수 있다. 예수 이전 침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선포하였다(마3:1-3).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함으로써 시작하셨다(마4:17).
마태는 예수께서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기록했다(마4:23).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입었다고 기록하였다(눅4:43).
예수님은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셨고, 열두 제자들도 그와 함께 했었다(눅8:1).
그리고 예수께서 12제자들을 선택하신 목적도 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때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케 하려고 세상에 보내셨다(마10:1; 막3:14; 눅9:1-2).
이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머물러 계셨을 때에도 "하나님의 나라 일"을 말씀하셨다(행1:3).
이처럼 예수님의 전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다.

3.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

누가복음 22장 28-30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고 전파하였다.
빌립은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였고(행8:12),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석 달을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였다(행19:8).
사도행전은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고 끝매듭을 짓고있다(행28:31).
이 밖에도 마가 복음 16장 16-17절이나 누가복음 10장 1-20절에 보면 일반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사도들과 같은 귀신 축사 능력과 질병 치유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소식"이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Ⅲ. 하나님의 나라 설립

1.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

제럴드 브라우어(Jerald C. Brauer)는 하나님 나라 개념은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풍성하면서도 가장 논란이 많은 개념 중 하나라 했다.
하나님 나라는 현 상태를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며, 사회의 구조와 관습을 깨뜨리기 위한 혁명적 이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관련하여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에는 하나님 나라 개념 자체가 시대 착오적이며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피터 쿠즈믹은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이해했고, 세대주의자들은 미래에 주어지는 종말로 이해하였다.
반면 카톨릭교회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여 교황 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양한 입장은 바로 그 나라를 영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육체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에서 파생되었다.
하지만 하늘 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것이었다.  

마태 복음서에만 나오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서로 동일한 것이다(마3:2, 4:17, 12:28, 19:24, 21:31,43).
하늘 나라란 셈족어 형태이고,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문구의 헬라어 형태이다.
마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로 가능한 한 그 성호보다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였던 유대인 신자들에게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원래의 문구인 "하늘 나라", 즉 "천국"으로 표기한 것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에 의하면, 이 용어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언급하는 데 사용된 어휘이다(창19:24).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 나라로 해석된 히브리어와 아람어 표현을 세밀하게 연구한 달만(Gustaf Dalman)은 하늘이란 하나님에 대한 완곡 어법으로서 이 두 표현은 전적으로 일치하며, 또한 "나라" 곧 "말쿠트"로 번역된 이 어휘는 유대문학에서 하나님에게 적용될 경우 이는 "왕국"이 아니라 항상 "왕적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왕에 의해서 통치되는 영토가 아닌 왕의 주권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노먼 페린(Norman Perin)같은 이는 달만의 견해가 보다 진전된 정의라 할 수 없다고 비판했으나,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는 딜만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그에 의하면, 구약에서는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였다. 출애굽기 19장 6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로 명명되었다. 물론 여기에서는 그 말이 통치를 받는 백성들로도 사용되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란 일차적으로 그의 통치와 지배를 의미하며 결코 영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사52:7).
그리하여 보스는 하나님 나라 최고권을 세 가지, 즉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사역과 그 나라가 존재하는 도덕적 질서와 그 나라 안에서 누리는 영적 축복으로 나누었다.
조오지 래드(George Ladd)는 "바실레이아" 곧 나라는 "왕국"이나 "백성"의 의미보다는 우선 "통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즉, 바실레이아는 왕의 성격과 지위 등을 지칭하는 말이므로 이는 왕의 위엄과 그 권세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는 먼 나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한 귀인이 그의 부하들에게 새로운 왕권을 행사하는 사건을 통해 이를 증명해 보였다. 여기서 바실레이아란 영토나 백성이 아니라 그 백성에 대하여 주어진 왕으로서의 통치할 권세임을 명백히 보여준다는 것이다(눅19:11-27).
아울러 래드는 바실레이아의 의미를 그저 단순한 하나님의 통치 개념으로만 이해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했다.
때로 바실레이아 곧 왕적 권세는 그 백성을 포함하며 어떤 영역이나 영토로서도 표현된다는 것이다(마4:8; 막6:23). 따라서 그는 바실레이아에 대한 한정된 표현과 비종교적인 용례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는 전 우주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단순히 영적으로만 간주하는 내면화 경향이나 육체적으로 간주하는 세속화의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왕의 권세를 통하여 인간의 영적인 질서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

하나님의 통치인 그 나라가 현재적인 것인가 아니면 미래적인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종말론과 더불어 활발히 논의되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주의(Premillennial)는 점진적인 천국의 도래를 부정하고 급격한 도래를 기대한다.
세대주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지 않게 임하는(눅17:20) 영적, 내면적, 우주적 천국으로 간주하지 않고 외형적 조직을 가지며 민족적이고 모세가 이끌었던 이스라엘과 같은 천국을 대망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미래에 완성된 나라로서 간주함으로써 사회 현실의 문제에서 도피적인 경향을 띤다.
반면에 지금은 다소 변화가 있지만 후천년설주의(Postmillennial)는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세계정부 동맹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하며 정치적 정화와 성경의 모범을 따르는 변혁된 사회 그리고 물질적인 풍요상태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성서신학자 래드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 사이에 놓여 있다.
래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주관적인 영역으로 축소시키고 인간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안에서 파악하여 인간의 영혼을 붙들어 주는 능력 정도라고 주장한 하르낙(Adolf von Harnack)을 비판하고,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서 시공간에 들어온 절대성, 즉 전적인 타자로서 이해하는 다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도 비판했다.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동에 의해 개시되어지는 묵시문학적 성격을 가진 미래적 하나님 나라 이해도 비판하였다. 그런 다음 래드는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으로 파악하는데 지장을 초래한 세 가지, 즉 "하늘과 땅"의 개념과 "시간과 영원" 개념 그리고 "세상과 세대" 개념을 재정립하였다.
그에 의하면, 하늘과 땅은 현재의 생과 미래의 생을 대조시킨 나머지 우리 인간은 이 땅에서 육체적인 생명을 영위하지만 그 구원은 미래의 하늘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잘못 파악한다는 것이다.
시간과 영원을 철학적으로 서로 대조시킴으로써 우리의 현 생명은 시간 안에 살고 있지만 미래의 질서는 시간을 넘어선 영원 안에 있게 될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래드는 이 시간 개념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이 저술한「그리스도와 시간」(Christ and Time)을 소개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직선적 시간 개념이며, 영원이란 구속사에 속하는 시간으로서 미래가 아니라 단순히 끝없는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정 역(KJV)과 개정 역(RV)은 이를 애매 모호하게 번역했다고 한다.
그리고 헬라어 신약성경에는 단순히 세상(world)으로 번역된 두 단어, 즉 코스모스(kosmos)와 아이온(aion)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특히 흠정 역이 오역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던 아이온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었다. 그에 의하면, 원래 아이온은 질서나 구조를 내포하지 않고, 시기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당연히 "세대"(age)로 번역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흠정 역은 이를 "영원"(aeon)으로 오역했다. 그리하여 래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과정을 "이 세대"와 "오는 세대"로 파악하였다.
이 세대란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고, 오는 세대는 끝없이 영원히 지속된다. 이 세대는 흉악함과 사악함과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역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반면에, 오는 세대는 하나님 나라의 세대이다(갈1:4; 엡 2장).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대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에서 손을 떼셨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이 세대의 신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래드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성이란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구체화된 완성된 구속의 축복을 말하며, 이는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오는 세대에 일어나는 것이다.
래드는 마가복음 10장 30절 말씀 가운데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 및 하늘 나라 그리고 구원과 오는 세대는 모두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 이 세대와 오는 세대 사이를 서로 연결시켰다. 이처럼 래드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구별하되 분리하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가 현재 시작되어 미래의 완성된 나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이드 헌트(Boyd Hunt)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의미로 사용된다고 하였다.
첫째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로서 이는 창조와 모든 국가와 온 우주에 대한 통치이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통치이다.
셋째는 신약의 개념으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하나님의 통치이다.
넷째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그리스도 재림 후에 완성된다.
하나님의 통치로서의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창조물과 그의 세계 안에서 역동적으로 사역하고 지배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속 목적을 역사 안에서 성취해 나가신다. 그러기에 역사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오는 세대에도 지속되는 광의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종말의 징후와 "천국 복음" 전파를 말씀하시면서 노아의 때와 연결시키셨고, 또 이 하나님 나라는 창세부터 예비된 나라였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마24-25장).
물론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사역이 "하나님의 왕직," "왕으로서의 신분," 혹은 "왕으로서의 사역과 다스림"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장소를 가진 영토로서의 어떤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국가나 민족 등 인간론 중심의 개념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구원론적인 개념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로 역사화 되어지고 있다. 구원자이신 여호와는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셨다.
부버(Martin Buber)는 시내산 언약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감과 그 백성으로서 그의 소유가 되는 왕적인 언약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선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실존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즉 여호와 통치의 보편성과(사25:6-7; 렘3:17; 습3:8-9; 슥8:20-21, 14:9) 그 나라의 의와(사11:3-5; 렘23:5-6) 그 나라의 평화로서(사35장; 겔47장 등) 가르쳤다고 했다.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기독론적으로 파악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통치하셨다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마2:2),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언적이고 묵시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취를 의미한다.
존 브라이트는 구약의 "The Days are coming"에서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로, 이제는 "The Kingdom of God is here and now"로 전환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소개되었다고 말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행위는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라 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그 기적 속에 현존하며, 이 시대의 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이와는 달리 알버트 쉬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예수께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임박한 미래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함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마틴 베르너(Martin Werner)도 이는 실제로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곧 돌입할 것이라는 표지라고 주장했으나, 불트만(Rudolf Bultmann)이 마태복음 12장 28절은 양의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듯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돌입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가 다가오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거기에 존재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돌입해 오는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에 의하면, 알버트 쉬바이처와 마틴 베르너의 주장은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장된 바 있는 일반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과 말씀 가운데에는 그 나라가 점진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과 그 점진적인 완성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를 사회질서와 제도 속에서 실현해보려 했던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h)의 사회복음신학 운동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자신을 임금으로 삼으려 하는 것을 알아채시고 그 자리를 피하셨던 사건을 통해서, 메시아란 정치-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메시아 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말해주셨다(요6:1-15).
오히려 마태복음 12장 28절 귀신축출 사건은 단순한 능력의 현시가 아니라 마귀의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구원 사건으로서 사탄과 그의 세력과의 현재적인 영적 대결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행26:18; 엡2:1-3).
이처럼 귀신축출 사건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와 그 위임 사명에 대한 이행과 아주 잘 연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귀신축출을 통한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는 병든 자들에 대한 치유로 확대되어 간다.
래드는 이 같은 병든 자들에 대한 치유 사건을 구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확장으로 간주했다.
예수께서도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고,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 존재를 보여주셨다(마9:2; 막2:5; 눅5:20-23).
이와 같이 병자 치유사건이 보여주는 중요한 점은 하나님 나라란 단순히 영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육체적이고 도덕적인 면을 수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눅4:18-19).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이해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은 이 세상 정치-경제 질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영적인 내면에만 임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월터 라우쉔부쉬가 하나님 나라를 교회로부터 끄집어내어 이 세상 제도 속에서 실현해보려고 노력한 우를 범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재적인 통치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이 교회에서 실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예수께서도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17:21).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내면화시키는 영지주의와 이를 사회-정치 일반에 확대시켰던 급진주의신학을 극복하여 구원 공동체인 교회 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인 것이라면 이 세대 속에서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보편교회 개념을 주장하고, 교부들이 이단 영지주의와의 싸움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감독제도를 설립한 이래, 로마카톨릭교회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였다.
존 그레이(John Gray)에 의하면, 기독교가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공인되고 승리하게되자마자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했다.

로마카톨릭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했던 것은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의 영향이 컸다. 이 책은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 나라 두 영역사이에 있는 거대한 투쟁을 구속사적으로 묘사한 책이다. 여기서 그는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현존하는 나라"라고 하였다. 덧붙여 그는 "그러므로 교회는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늘의 나라이다. 따라서 이후에 그들이 다스리게 될 것과는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현재에도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통치한다"고 말했다. 명백한 것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교회란 눈에 보이는 제도적인 표현 이상의 것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이상의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인 성질의 것으로 간주하였다. 노르만 페린에 의하면, 어거스틴이 말하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사람들은 두 가지 오해를 하였다. 즉, 언어적인 요인과 역사적인 요인이다. 어거스틴 시대에는 비유와 상징에 의해서 그 어떤 사물을 묘사하는 기법이 번창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 대하여 왕으로서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묘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 혹은 통치라는 상징과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교회라는 명상적인 이념을 산출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종말시에 도래하는 것으로 말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회는 1-3세기 로마황제 하에서는 지극히 적은 소수의 분파에 불과했으나, 어거스틴 시대에 기독교는 이미 공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로마가 멸망하자 황제도 더불어 몰락하게 되었고, 이에 교회는 문명을 위한 희망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는 동일시되었다. 그런데 로마카톨릭교회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식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국가 위에 교회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어거스틴의 사상에 대한 왜곡에서 비롯된 오류였다.
진작 그들이 인용했던 어거스틴의 사상에서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란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도리어 어거스틴은 앞서 인용했던 것처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의 나라" 두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 이후 수세기 동안 교황 지상주의가 발전해 감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형태로 지상에 임했다는 잘못된 사상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로마제국이 붕괴되어 교회가 주도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자 더욱 더 이러한 사상이 세력을 얻어 서기 500년경부터 종교개혁기에 이르기까지 서방 중세기독교의 주도적인 사상이 되었다.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Ⅷ)가 우남 상탐(Unam Sanctam, 1302년) 칙서를 통해 세속적 권력과 영적 권력이 모두 교회에 위임된 것이기에 세속권력은 교회의 지도하에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 1545-63)의 선언에서도 이를 확인했지만 1962년 제 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상당수의 로마카톨릭 신학자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으로 간주하기 시작하였다. 죠셉 슈넨스(Joseph Suenens) 추기경은 "제 2차 바티칸공의회는 세상에서 봉사를 하며 순례의 길을 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피라미드식의 교회 개념에 대한 개혁을 함축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현 로마카톨릭교회가 제도로서의 교회로부터 완전히 공동체와 백성으로서의 교회관으로 전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약성서 어디에도 가시적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한 곳은 없다.

반면에, 전천년설주의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한다. 교회란 하나님 나라 계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선지자일 뿐, 교회의 선지자는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복음서에는 바실레이아가 거의 매 장마다 등장하는 반면, 교회는 세 복음서를 통틀어 두 번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반면, 교회는 사회적인 현상이기에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내적 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천년설은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과 교회를 구분한다. 이들은 천년왕국 신봉자들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전 우주, 특히 모든 시대, 모든 곳, 모든 도덕적 존재들에 대한 전 포괄적인 통치권으로 이해한다.
천국은 지상적인 천년왕국으로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것이다. 전천년설주의는 교회를 구약의 이스라엘과 연결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무조건적인 것이며 장차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결코 파기되지 않았고, 이는 결코 교회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다. 단지 교회는 이 시대에 약속을 받고 있는 개별적인 지체일 뿐,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운명을 지닌 별개의 존재라는 것이다.
전천년설 가운데 역사적 전천년설은 천년왕국을 가리켜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시기로 간주하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왕권을 세우시기 위하여 교회에 다시 돌아오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반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dispensationalist)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휴거시키고,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을 통하여 통치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서로 다른 것으로 파악하는 세대주의자들에게서 철저한 유대적인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천년왕국과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명료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 나라 연구에서 업적을 남긴 래드는 카톨릭교회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하게 보아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대주의 전천년설주의처럼 양자를 분리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교회는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의 통치이며, 교회는 그의 통치의 축복이 경험되는 영역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그 축복을 누리는 자들의 교제이다. 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창출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하여 일하며, 교회에 의해 그 나라가 세상에 전파된다, 교회 없이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 없이 교회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두 개의 구별된 개념이지만 분리되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와 사람들의 교제이다.

리델보스(Herman N. Ridderbos)는 언어적으로 교회와 이스라엘백성간에는 상호 연관된다는 사실을 들어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를 분리하는 세대주의를 비판하고 래드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에 관한 신약성경의 개념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유출될 때에만 적절하게 접근될 수 있다. 신약에서 "에클레시아"(ekklesia)는 전혀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구약의 "카할"(kahal)이란 히브리어를 당대의 70인 역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전에 에클레시아가 지칭했던 선택의 백성과 언약의 백성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승화되어 신약에서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교회에 대한 신령한 의미가 명확해지지만 넓은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새로운 몫과 새로운 관계를 요구한다. 교회는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다. 이것이야말로 바실레이아와 에클레시아로 연결하는 거대한 줄기라고 한다.

쿠즈믹(P. Kuzmic)도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이란 책에서 교회는 왕국(천국)의 결과이며, 교회는 왕국에 참여하고, 교회는 왕(국)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는 교회와 천국의 틀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으로 나누어 이를 설명하였다. 과거 그리스도의 사건으로서 교회는 왕국의 결과였고, 현재 그리스도의 통치로서 교회는 왕국에 참여하며, 미래의 그리스도 강림 시에 있을 왕을 교회는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세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의 통치를 받을 대상, 즉 그의 나라 백성들을 구속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삼아왔으며, 그 구속받은 백성들이 바로 교회이기에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구별되지만 상호 분리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갖게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결정적인 말씀은 마태복음 16장 13-19절이다.
물론 로마카톨릭교회에서 오역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의 동일성 근거로 삼아 악용된 말씀이기도 하지만, 개신교 학자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결정적인 말씀으로 인식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최초로 천국과 교회라는 두 개념을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하신 곳이다.
래드 역시 마태복음 16장 13-19절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을 형성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가지신 의도는 이를 교회와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는 행위는 바로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다윗 왕의 정치적이고 국가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을 수반하는 천국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면,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교회의 머리로 현존하시면서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다.

4.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및 교회의 관계

성경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때로다"고 말한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완성된 국가형태의 통치 시대가 아니라 아직은 미완의 구속적 통치 시기임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나라란 왕으로서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속 사역,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영적 사역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천국이라는 용어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곧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교회와 그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권한과 사역이외의 불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교회의 본질을 논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와의 관계 및 교회와의 관계에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나라" 개념에 관한 연구는 폭넓게 시도되지 못하였다. 다만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관계 속에서 늘 시행착오를 해 왔을 뿐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강조될 때마다 세속화의 길을 걸어 스스로 한계성을 노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우리의 신앙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간과해 왔던 "그리스도의 나라" 개념을 부각시켜 진작 교회는 현실세계에서 이 그리스도의 나라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 교회 구조를 세워보고자 한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복음서와 사도 바울 서신과 베드로 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문자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마20:21; 눅22:28-30, 23:42; 요18:36-37; 고전15:24; 엡5:5; 골1:12-14; 히1:8; 벧후1:11; 계11:15).

주로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나라를 직접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와 분리하지 않고 양자 사이를 밀접하게 연관짓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것이라고 하였고(고전15:24), 우상 숭배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 말했으며(엡5:5),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했다(골1:12-13).
이와 같이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를 서로 구별된 것으로 말하면서도 서로 분리되지는 않음을 보여주고 있고, 또 이 그리스도의 나라는 교회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 역시 성도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벧후1:11).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도 종말 시에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라고 되어있다(계11:15; 12:10).

이러한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신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에게로 맡겨졌고, 또 이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의 제자들에 맡겨졌을 뿐만 아니라, 이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버지께 다시 바칠 때까지 교회에 의해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와 아주 밀접하게 상호 관련시킴으로써 양태론에 빠지지 않고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존재 양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나라와 연관짓고, 또 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그의 제자들과 교회에 연관지음으로써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제도적인 교회를 세우려는 유혹과 과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도 권고하였다(엡5:23; 골1:18).
일찍이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천국 복음을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으로부터 떼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바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은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에 의해 거부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복음의 핵심이고 천국과 교통하며 천국의 본질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새로운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사이에 명백한 "시간적 차이"가 있음을 들어 이 두 나라 사이를 서로 구별하였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24절을 예로 들었다. 쿨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왕국은 예수의 부활에 근거하며, 승천과 더불어 효과 있게 시작된다.
현재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잠정적으로 이 세대와 혼합되어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대한 적대적인 세력들이 결정적으로 멸절되려면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러한 양태로 그 마지막 행위와 더불어 다가올 세대의 처음 행위에 도달한다.
쿨만의 이런 주장은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나오는 천년을 왕국과 동일시한다는 말이다. 이 천년이 지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아버지께 넘겨주게 될 것이며, 그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헤르만 리델보스는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성자를 성부에게서 분리시킬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나라 역시 그 내용 면에서 성부의 나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쿨만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승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 것과는 달리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그의 나라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헤르만 리델보스는 래드와 동일하게 "바실레이아"와 "에클레시아"라는 어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거대한 줄기를 통해 양자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는 무엇보다 메시아께서 자기 자신을 교회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연결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설립자이신 메시아가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복음서에서는 이에 대하여 이중 개념, 즉 인자와 여호와의 종 개념을 제시한다. 이 두 개념의 중심 사상은 메시아가 자신의 인격 속에 교회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세 개념들, 곧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아와 교회는 원 복음 내에서 통일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종말론과 기독론과 그리고 교회론의 관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설교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메시아가 받은 저주와 그의 승귀와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가 대표하는 교회가 없이는 메시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교회를 가리켜 "나의 교회"라고 말씀하신 본래의 뜻이다(마16:18). 이러한 까닭에 예수께서는 마치 성부가 하나님의 나라를 성자에게 맡기신 것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교회에게 또한 맡길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쉬미트(K. L. Schmidt)는 공관복음서의 말씀을 예로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리스도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기 때문에 이 양자 사이를 구별했던 쿨만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마16:28, 19:29; 막9:1, 10:29; 눅10:29).
다시 말해 예수의 오심과 사역은 현재적인 메시아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천국이 임하였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쿨만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서 시작된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나라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쿨만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강조하다보니 승천에 중점을 두었고, 쉬미트는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다보니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중점을 두었다.
게할더스 보스 역시 고린도전서 12장 25절 말씀을 예로 들어 분명히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앞서 있다고 말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원수를 하나 하나 차례로 정복해 가는 과정과 같은 것이며,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정복한 후에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한 설명이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복의 과정인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히 정착된 최종적인 하나님의 나라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부와 성자의 인격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는 둘 다 현존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사이를 시간적으로 구별하는 쿨만의 견해는 양태론과 세대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서 수용하지 않는다.  

래드는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는 서로 구별되어져야 한다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나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를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서로 연결하여 사용하는 에베소서 5장 5절과 장차 세상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이라는 요한 계시록11장 15절을 근거로 내세웠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개념이 서로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은 게할더스 보스가 말했듯이, 아직은 위임받은 그 나라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바칠 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점은 래드도 인정한다.
하나님의 구속 통치란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 바 되었고,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다스릴 분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래드는 다소 양보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구태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를 서로 구별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주께서 육체로 임하실 때부터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인, 그 분의 천년 통치기간이 끝나는 그 때까지의 기간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사이의 관계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와의 관련성에서 이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본다.
래드는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활동과 통치로서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세상에서 이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며, 예수께서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 속에 현재화하셨던 것처럼, 교회는 선교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병자를 치유하며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사탄의 권세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나라의 표적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교회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기 때문에 한 나라이며, 교회는 제사장인 동시에 나라라고 말했다.
그는 요한 계시록 1장 6절 말씀을 들여 구속받은 사람들, 즉 교회는 그들의 주시며 왕이신 분의 특권을 공유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권리를 부여받은 왕의 나라요 왕국이라고 말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맡아 세워 가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로 실존하면서 현재도 그의 교회를 통해 자신의 사역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적인 통치 사역이 예수를 통하여 직접 수행된다는 사실은 신약의 전 주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될 수 있다(계11:15). 여기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란 사회 가운데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구체화된다는 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그의 백성이며 그의 나라이다.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맡은 하나님의 나라 전위대로서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세상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는 유일한 신적 기관이다(마16:18-19, 28:18; 눅22:28 엡5:5, 23).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했듯이 이런 방식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의 백성이지만 천국의 열쇠를 가진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출7:1; 요10:33-35). 여기에 교회의 소중함과 영적 비밀이 담겨있는 것이다(엡3:9-10, 5:32).

어거스틴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했던 사람이다. 그는「하나님의 도성」제 20권 9장에서 천국의 두 의미를 설명하는 가운데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다.
그는 천국을 두 가지, 즉 자기가 가르치는 것을 행하지 않는 지극히 작은 자와 행하는 자가 서로 공존하는 천국과 자기가 가르친 것을 행하는 큰 자만이 들어 갈 수 있는 천국으로 나누었다. 그는 전자의 천국을 현 교회로, 후자의 천국을 악인이 없기로 예정된 미래의 교회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현재의 교회란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교회는 가라지와 좋은 곡식이 같이 자라고 있는 곳이기에 사도들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된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있되 자신이 그의 나라인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그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였다. 물론 그가 말한 그리스도의 나라란 제도화된 체제가 아니라 알곡이나 가라지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적인 삶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요한 계시록 20장 천년의 기간을 가리켜 이는 천년왕국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죽음에서 일으켜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부여하고 그와 함께 통치하도록 하실 때 주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축복 경험이라고 말했다.
어거스틴은 지상에서의 천년 통치보다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현존하고 있는 교회를 동일시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나름대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통치와 그리스도의 미래적인 통치를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다른 한편, 12세기 요아킴 피오레(Joachim von Fiore)는 하나님 나라를 삼위일체론적으로 적용하여 일신론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극복하고자 했던 사람이다.
그는 나름대로 요한 계시록에서 역사의 세 연속적인 상승 단계 유형을 발견하였다.
그 세 단계란 삼위 중의 각 위격이 각각 통치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첫 번째 시대는 성부의 시대 및 율법의 시대이고, 두 번째 시대는 성자의 시대 및 복음의 시대이며, 세 번째 시대는 성령의 시대라는 것이다.
제 1시대가 공포와 예속의 시대이고, 제 2시대가 신앙과 자녀의 복종의 시대라면, 제 3시대는 만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식이 직접 계시되는 사랑과 기쁨과 자유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시대란 인류의 안식이요 휴식시간으로서 이 새로운 성도들의 나라는 최후 심판의 날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티코니우스(Tyconius)에 의해 유래하여 어거스틴에 의해 주장된 창조의 일곱 시대 종말론과 카파도기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창조의 일곱 시대란 수고와 노동의 여섯 시대가 지나면 휴식의 일곱 시대가 도래하고 이 일곱째 시대가 지나가면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종말론이다.
카파도기아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성부의 나라와 성자의 나라 그리고 성령의 나라로 구분하고 하나님의 통치는 이 순서에 따라 역사를 주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일곱째 날이 바로 성령의 시대라고 했다. 그러나 요아킴 피오레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몰트만(J. Moltmann)마저 양태론이라고 비판하였다. 성경 어느 곳에도 문자적으로 성령의 나라라는 말은 없다.

루터는 두 왕국, 즉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복음과 성령의 사역과 함께 활동한다. 그리고 인간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한다. 이 왕국 안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을 통하여 살며, 그들의 활동은 사랑의 계명에 따라 규정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지상통치와 관련하여 중세시대의 정교한 하나님의 나라 교리를 단호히 거부했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과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영적인 것들을 통치하시며 의, 진리, 지혜, 평화, 그리고 구원과 같은 것들을 성별하신다. 이와 같이 루터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를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단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형태가 세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를 세우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반대하였다.

칼뱅은「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을 논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나라는 지상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부패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나라란 영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 이는 우리가 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을 향유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그 나라가 지금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며 미래의 삶에서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 차게 하자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치-경제적으로 제네바 시를 기독교화 시키고자 했던 일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칼뱅의 제네바 시 성시화 작업은 루터와 칼뱅 사이에 교량 역할을 했던 부처(Martin Bucher)의 영향이 컸다.
부처는 1550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6세에게 헌정 한 논문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하여"를 통하여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건설되거나 회복되도록 해야 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의 정치로 간주했다. 하나님의 나라란 영적인 면과 경제를 포함하는 모든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통치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의 나라라고 했다. 나아가 그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의 정치이며 보살핌이라 말하고, 주님과 하늘의 왕께서는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관리들을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르침과 규율을 집행하도록 했다고 주장하였다.
판넨베르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였다. 하나는 하나님의 왕국 개념에 관하여 익숙하지 못한 교회 직무자들이 종종 자신들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왕국과 교회를 동일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자체를 왕국의 현존하는 형태로 오해한 나머지 교회가 세속 사회에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의 통치는 교회의 통치로 왜곡되었고, 그리스도 중심의 통치가 교회 중심의 통치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올바른 지적이라 생각한다. 교회는 그를 다스리시는 그의 머리인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취하고 사역하셨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겸손하게 세상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백성의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신약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 말한다(벧전2:9).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나라를 위탁받은(눅22:29) 하나님 나라의 전위대원들이다(고전15:22-24; 엡5:5; 골1:13; 계1:6, 11:15).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행20:28; 고전1:2; 엡1:23, 5:23-32). 그
리고 교회는 교회 자체의 목적(church for church herself)과 대 세상과의 관계(church for world)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차적으로 그의 몸인 교회를 직접 통치하시며, 그의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원하신다(엡1:22-23).
교회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세상에 대하여 통치의 주체가 되려했을 때, 그런 교회는 언제나 세속화되어 타락했었다.
원시교회는 달랐다. 사도들은 통치의 주체가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그의 일차적인 통치 영역이 바로 교회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직접 다스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는 언제나 진정한 사귐과 교제와 나눔이 있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행2:41-47).
신약교회의 참다운 모습은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서 거듭난 자들에 대한 "사랑의 통치"가 있었고, 이로 인하여 회복된 "다스림의 능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역하며 미래 천년기에 주어질 축복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 복지"가 있었다(행2:42-47; 고전4:20; 딤전 5장; 엡1-2장; 골1:13). 따라서 그리스도의 그 직접적인 통치 대상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원리를 회복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사역하며 맡겨진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러기에 나는 사도 바울이 그러하였듯이 "다스림의 원리와 그 능력"을 그 본질로 하는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교회 구조를 세워보고자 한다(창1:26-27; 골1:13-15).
사도 바울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와 "교회"가 가지고 있는 "통치," "다스림"의 문제를 풀어나갔다(창1:26-27; 롬1:23, 8:29; 고전15:49; 엡4:13-16; 골3:10).  


Ⅳ. 그리스도의 나라와 교회 구조 세우기

1.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통치 회복

앞서 살펴보았듯이 "바실레이아"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반적인 통치이자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적 공동체인 자신의 교회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것이었다.
래드는 교회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 없이 교회도 있을 수 없다하여 교회의 소중함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일방적인 신적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표출되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통하여 설명된다. 그러기에 그 활동의 대상이자 능동적 참여자인 인격체를 배제한 채, 하나님의 사역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가 아니다"거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라는 식의 논의는 그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출발점이자 그 목적지이다.
성경에는 교회를 가리키는 표상들이 매우 많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표상은 그리스의 몸으로서의 교회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화 시킨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통치 영역인 지체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구조는 "생명"과 "하나됨"과 "상호유기체적인 공동체" 개념을 그 핵심으로 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나라로서 교회는 "생명 공동체"요 "하나됨의 공동체"이자 "상호유기체적인 가족 공동체"이다.
생명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회복과 그 통치권 회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하기에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3:1-8).
예수께서는 거듭난 자들이 모인 교회에 "천국 열쇠"를 맡기셨다(마16:18-19). 사도 바울은 거듭난 자들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했다(골1:13-14). 그는 성경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의 틀 안에서 교회 구조를 세웠다.
그는 교회를 구원받은 영적 이스라엘 공동체로 간주했다(롬9장; 갈3장; 엡2장). 이는 교회란 구속 사의 구조 위에 세워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다(엡1:4-23, 3:9-14).
교회는 구원받은 영적 이스라엘 공동체로서(엡2:11-19)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어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가고 있는 중이다(엡2:20-22). 더더군다나 교회는 영원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진 비밀의 경륜을 알게 하는 일을 담당하도록 부름 받은 유일한 신적 기관이다(엡3:9-11).

바울은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비밀을 창세기 1장 26-27절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았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최초의 아담에게 준 "하나님의 다스림의 원리와 그 능력", 즉 "위임된 통치"와 "하나됨"과 "인격적인 관계성"이었다(창1:26-27, 2:15-25).
바울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인간의 죄를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것이라 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다스림의 원리와 그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롬1:23-32). 그리하여 바울은 인간의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 닮아 가는 것과 연결시켰다(롬8:29). 나아가 그는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이 예수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할 수 있다고 했다(고전15:49; 고후3:18, 4:4; 갈4:19; 골1:15, 3:9-10; 빌2:6; 히1:3).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하나님이 나라 사이에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오늘날 인간들이 범죄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스림의 원리와 그 능력"인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오늘날 교회가 타락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이 "다스림의 원리와 그 능력"을 상실했거나 오용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다스림의 원리와 그 능력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를 화목케 하는 능력이라 하였다(창2:18-25, 3:7-19; 롬1:23-32, 8:19-23; 고후4:4, 5:18-21). 그러므로 하워드 스나이더가 오늘날 생태학적 모순, 즉 여성차별과 경제적인 빈곤과 생태계 위기 문제를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 모델로서의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2. 하나님의 형상 본받기와 왕 같은 제사장직 회복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됨의 공동체이다. 이 하나됨은 인간이 세운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 침례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고전12:12-13).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하나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 된 그의 나라 백성이 되었다(엡4:3-6).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하나를 이룬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며 주어진 천국 열쇠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 그 나라를 세워나간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는 지나치게 설교 의존형의 교회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본래 신약교회는 예수님의 사역 구조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전도 중심의 교회였다.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그의 저서 「초기교회 복음 전도」(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에서 신약시대는 설교보다는 증거와 복음 전도가 커다란 특징이었다고 말했다.  
오늘날 제 2의 종교개혁 차원에서 평신도 사역자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그레그 옥덴(Greg Ogden)이나 셀 목회 주창자들의 외침은 지극히 타당하다.
논자 역시 하나님의 나라 구조에 걸맞게 그리스도인들의 나라됨과 왕 같은 복음의 제사장직을 회복케 하는 교회 구조를 세움으로써 이를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루터는 종교개혁안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의 사역과 소명의 관점에서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였지만 구호에 그쳤을 뿐,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가 제시한 만인제사정설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엄격한 분리와 성직 권력의 남용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성직자들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성도 개인 차원의 사역을 강조하였고, 이는 침례를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이 사제로서 성별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루터가 말한 만인제자장직이란 고작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서 주어지는 직분 상의 평등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근거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만인제사장직이란 단순히 직제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역, 즉 하나님의 나라 복음 전파 사역과 직접 관련된 것이었다.
바울은 제사장이란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롬15:16).
제사장이란 직분상의 평등이나 교회제도를 의미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만인제사장설이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누구나 다 빠짐없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도하는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베드로 역시 왕 같은 제사장이란 우리들로 하여금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이라 하였다(벧전2:9).

하나님의 형상 곧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과 하나됨을 이룬 교회는 "중생과 예수 증인으로의 삶"을 그 강령으로 삼고 복음의 제사장직을 수행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가치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이를 몸소 실천케 할 수 있는 교회 구조로 전환하여 신앙훈련을 강화해 나가야 하겠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임하게 되었다고 한다(마12:28).
래드는 이 귀신 축사 자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 역사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을 전하면서 행하신 이적들을 통하여 그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다.
하나님의 나라 전파와 귀신 축출 및 치유 사역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귀신 축사 사역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이며, 이들을 향하여 결코 죄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셨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들과(마3:2, 10:1; 막3:14; 눅9:1-2) 전도인 70명과(눅10:1-20) 모든 그리스도인들(막16:15-18;행1:5-8)에게 동일한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도록 훈련시키셨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과 전도인 70인 그리고 신약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 전파와 귀신 축출 및 치유 사역을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늘날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교회 구조를 세우는 일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베리 둘레스(Avery Dulles)는 「교회의 모델」(Models of the Church)에서 많은 타당한 교회 형태들이 있었지만 각 시대마다 지배적인 모형이나 형태가 서로 상이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우리는 기존의 여러 모델들을 활용하여 오직 하나님의 나라 복음 전도 중심의 교회 구조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17세기의 경건주의 모델이나 존 웨슬리의 모델에 대한 재발견도 좋을 것이며, 근래에 한국교계에 소개된 바 있는 존 윔버의 하나님의 나라와 치유사역에 의한 교회 성장 모델도 좋을 것이다.
윔버의 모델은 현재 제3세계 권에서 커다란 영적 부흥을 가져다주고 있다. 그는 목회사역 초기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순전히 미래적인 것으로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죠지 래드의 저작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란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치유 기능에 관하여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 특히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쫓는 것으로 인하여 역사 속에 현재화되었다"고 말한 래드의 신학 이론이야말로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 전도와 성령의 능력과 교회 성장에 관한 관심과 아주 흡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래드의 신학을 적극 수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표적과 기사" 그리고 "능력 전도"라는 틀 가운데에서 인식하였다.
윔버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경험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효과적인 복음전도의 열쇠란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수행하는 복음 선포와 그 복음의 증명을 결합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물론 윔버의 능력 전도 사역의 원리로 제시한 신학적 내용 가운데 일부는 비판받아야 할 내용도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닮기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 전위대로서 사역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교회 구조 세우기에  비판적 수용이 가능하다고 본다.


3. 하나님의 형상 나누기와 하나님의 나라 복지

피터 세비지(Peter Savage)는 현대교회의 일반적인 형태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진단하였다.
첫째, 많은 신자들은 교회를 성경말씀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찾아가는 "강의실"과 같다고 생각한다.
둘째,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믿음 있는 회중이 그들 앞에서 시행되는 성례라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참석하는 "극장"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어떤 이에게는 교회가 대중들에게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전임 목사들로 효율성 있게 잘 계획된 "회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넷째, 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 어떤 단체에 가입하듯이 참석하는 "사교 단체"로 생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현대교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비판한 후, 교회란 종말론적이며 성례를 위한 제자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그의 비판은 문화적 차이가 있는 한국교회와는 거리가 먼 지적이라 할 수 있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의 교회는 생명력 있는 신약교회의 모습과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의 나라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생명과 하나됨 이외에도 유기체적 가족 공동체의 특성을 갖는다.

현대신학자들 가운데 삼위일체론 교리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찾는 학자들은 하나님의 사회성과 공동체성을 말한다.
일링워쓰(J. R. Illingworth)는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사회 모델을 제시했다.
프랜시스 홀(Francis Holl)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공동체 모델을 제시했다.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역시 요아킴 피오레의 견해를 받아들여 아버지의 창조와 유지의 나라--아들의 해방과 자유의 나라--성령의 새 창조의 나라--영광의 나라 순으로 전개하고 "고난-사귐-교제-참여"가 있는 교회 공동체의 구조를 구상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교회 구조는 사회-정치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 교회의 모델로 채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신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양태를 하나님의 사회주의로 해석하였다. 그는 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역시 사회주의자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파괴된 인간의 사회적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 구조를 세우려 하였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나라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이라는 말씀이 있듯이(롬14:17), 사회주의라는 말은 정치적인 용어로서 교회 구조에는 부적합한 어휘라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이를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로 파악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회복된 하나님의 다스림의 원리와 그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메시아적 가족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롬8:19-23; 벧전2:9).  

가브리엘 바하니안(Gabriel Vahanian)은 오늘날의 사회를 테크닉 사회로 규정하고 이에 적합한 교회 구조를 세웠다.
그는 테크닉 사회에서는 개인주의적 인간관을 공동체적 인간관과 서로 대치시키기 때문에 이런 사회의 구조에 적합한 교회 구조를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입각한 교회 구조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교회 구조를 세우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세상의 희망이며 하나님 나라의 예시로서의 교회 이 세 가지가 필수 조건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하루하루의 교회"로서 오늘날 교회공동체, 기초공동체, 교회세포 같은 공동체적인 개념으로써 빵과 포도주처럼 갈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교회를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오늘의 교회"로서 늘 현재적인 교회, 곧 세상의 전위대로서 존재하는 교회를 말한다.
이런 교회는 자연과 은총, 목회자와 평신도, 교회와 세속 사이의 구분 등의 이분법적인 구조를 극복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예시로서의 교회는 "모든 날들을 위한 교회"로서 예배를 통해 사람들을 공동체 형태로 드러내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에 참여한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 존재이유를 세상의 미래로서 교회당이 아닌 예배 공동체적인 인간 존재 전체에 관여하는 참여에 있다고 규정하였다.

1900년에 시작된 오순절 성령운동과 1960년대 신 오순절 성령운동이 가르쳤던 성령 침례관과 교회 분열의 특성을 비판하고, 1980년대부터 새롭게 시작한 제 3의 오순절 성령운동은 하나님의 통치 모델로서의 교회 구조를 에덴 동산에서 삼았다.
에덴 동산에는 죄와 질병과 사망이 없었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태평세대였다. 그러므로 이 에덴의 상태를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덴 동산은 현 교회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에덴 동산의 축복을 현 교회에서 미리 맛볼 수 있도록 메시지로 희망하는 차원을 넘어 직접적으로 이 모델을 교회 구조로 채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토니 캠폴로(Tony Campolo)는 하나님의 나라란 일종의 "파티"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한 몸 공동체 개념을 강조하여 다스림의 원리이자 그 능력인 하나님의 형상 나누기를 통하여 구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복지"로서의 교회 구조를 제안하고 싶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복지"로서의 교회 구조를 세우는데 활용할 수 있는 말씀으로는 마태복음 16장13-20절에 나오는 "천국 열쇠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요한 복음 10장 1-18절에 나오는 "양의 문" 개념과 고린도전서 12장 1-31절에 나오는 "은사 중심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그리스도-교회-세상 통치 구조이다.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먼저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사실과 그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 다음 교회는 구원의 문을 통하여 새 생명을 얻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 모여 사는 구원 공동체이므로 최소한 기초 생활공동체의 교회 구조를 갖추도록 해야한다.
기초 생활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 단순히 영적인 양식에만 국한되지 아니하고 인간의 몸이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는 나눔의 삶으로까지 확대된다(행2:43-47; 딤전5:1-16; 요일3:17-19).
본래 구원이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영적인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몸이 필요로 하는 재난이나 질병 등의 고난으로부터의 구원까지도 포함하는 전인적인 개념이다(사53:4-6; 마8:14-17; 롬8:10-11). 이와 같이 교회가 양의 문으로서의 교회 구조를 갖추게된다면 이곳에서 "하나님의 나라 복지"를 맛볼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토대로 하여 교회는 이 세상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굳건히 세워나갈 수 있는 천국 열쇠를 능력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교회 구조를 갖추려면 먼저 이 "양의 문으로서의 교회 구조"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Ⅴ. 결  론

지금까지 성경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구조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 개념과 하나님의 나라의 설립과 그리스도의 나라 및 교회와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았다.
대다수 학자들이 의견일치를 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그 통치는 "이미"와 "아직 아니"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와 교회 관계는 서로 구별되면서 분리되지 않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미 교회사 내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관계를 가지고 세속 권력을 장악했던 적도 있었고 이 양자간의 관계를 왜곡하여 어느 지역을 법제화함으로써 성시화를 기도하거나 혁명적으로 사회를 변혁하려고 시도했던 적도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 같은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교회의 관심이 더욱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만일에 오늘날 우리가 지구촌 정치(geopolitics)의 시대가 아닌 지구촌 경제(geoeconomics)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하여 전 지구적으로 다시 사고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다"고 말했듯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다변화된 오늘날 이에 걸 맞는 교회 구조를 세워 교회 갱신을 꾀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할 때라고 판단된다.
수년 전만 해도 한국교회는 선호도 1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99년 말 종교 컨센서스 결과 카톨릭교회와 불교 다음으로 선호 종교 제3위에 머물렀다는 심각한 보고가 있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 개신교의 역사의식 결여와 경제적인 사회환원 미흡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사이를 직접적으로 연관시켰던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나라와 교회 사이의 현존재적 관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통치가 머무는 곳은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먼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 복지를 시행하는 구조로 전환해야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나라 복지로서의 교회 구조를 "다스림의 원리와 그 능력 회복"을 통해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그 도구로 삼았다.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통하여 다스림의 원리와 그 능력을 확보한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본받아 복음의 제사장직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키는 교회 구조로 전환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를 이룬 가운데 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나라 복지를 맛볼 수 있는 기초 생활 공동체적인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여기에 적합한 교회 구조를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양의 문으로서의 교회 구조"와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그리스도---교회---세상 통치 구조"를 제안하였다.

가브리엘 바하니안(Gabriel Vahanian)이 앞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를 내세울 때, 교회로서 의미를 갖게 되며, 이는 "교회 혁명"을 통하여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말했듯이, 지구촌시대에 걸 맞는 제3의 교회(the third Church) 출현은 시대적 요청인 것 같다. 따라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 교회 공동체 내에 하나님의 나라 복지 구조를 갖추기 위한 목회비전과 이에 따른 메시지의 투명성 확보가 필요한 때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