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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과 그의 시대 그리고 그의 메시지

김희보


1. 하박국, 그 인물
하박국,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에 대해서 알려주는 정보는 하박국서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그의 정체를 알기란 쉽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하박국’(Habakkuk)이란 히브리어에 ‘안으리라’(embrace)는 뜻이 있음을 들어 열왕기하 4장 16절에 나타난 수넴여인의 아들일 것이라 했다. 그와는 달리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 제롬(Jerom)은 ‘하박국’이란 히브리어가 ‘씨름하다’(Abek, wrestle)란 말과 유사함을 들어, 그 이름의 뜻은 ‘씨름하는 자’(wrestler)라고 했다. 그는 하박국서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과 씨름하듯, 대질하며 고민하던 그것을 그 이름에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박국의 신분만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그는 아마도 성전에서 노래하던 찬양대의 대원으로, 레위의 후손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3장 19절에 보면, 이 노래는 ‘영장’(지휘자)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라(참고 3:1)고 말했는데, 이것은 찬양대의 대원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또 3장에 ‘셀라’라는 음악 술어가 자주 나타남을 보아(3:3,9,13), 이 노래는 성전에서 합창으로 부르던 노래임이 확실하다.
여기의 ‘셀라’라는 음악 용어는 성가대가 합창할 때, 음의 강조를 표시하는 기호인가, 혹은 음의 장단을 조절하는 휴지기호를 말하는 것이가?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그의 신분은 분명한 듯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그는 선지자 중에서도 특이한 선지자이다.

선지자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설교하는, 하나님의 대언자이다. 그러나 하박국은 이점에서 독특하다.

본래 선지자란 히브리어 ‘나비’(Nabi)는 ‘대언자’(spokesman)를 말한다.
출애굽기 7장 1절에도 보면, 모세가 말하기를 ‘나는 말할 줄 모르나이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형 아론이 네 대언자(Nabi)가 되리니...” 라고 했다. 많은 번역성경들도‘네 대언자’(your spokesman, NEB)라고 번역했다.
선지자란 미래를 말하는 예언자(豫言者)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를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대언하는 자를 말한다.
선지자를 예언자(豫言者)로만 오해하게 된 것은 ‘나비’(Nabi)의 칠십인역(LXX) 번역,‘ prophetes’를 옳게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여기에 사용된 접두사‘ pro-’는 ‘시간개념’(beforehand)이냐, 혹은 ‘장소개념’(local-sense)이냐, 하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Chrisostom)은 ‘pro-’를 오직 시간개념의 미래로만 생각하여 선지자는 ‘豫’언자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어거스틴(Augustine)은 어원적으로 그것을 바로 잡아 ‘pro-’를 장소개념으로 보아서 ‘하나님 앞’(before of God)으로 생각했다.
그는 선지자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거, 현재, 미래의 관계없이)을 맡은 자로 그 앞에서 그것을 대언하는 자로 보았다. 굳이 한문을 사용한다면 ‘預’(맡을 예)언자로 쓰면 좋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필자는 선지자를 ‘예언자’라고 말할 경우에는 굳이 豫도, 預도 아닌 약자를 써서 ‘予’言者라고 하기를 좋아한다. 어쨌든 선지자는 곧 하나님의 대언자요, 다시 말하면 ‘그의 입이다’(렘 15:19).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며 교훈하는 것이 그의 근본 큰 사명이다.
그러나 하박국은 다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대언하며 백성들에게 설교한 일이 없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대질하며 불평한 사람이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잠잠하시니이까?” 라는 불평 섞인 말을 거듭거듭한 사람이다(1:2,3,13,14).
이러한 하박국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했다. 그러므로 어떤 주석가들은 ‘의심에 찬 하박국’, 심지어 ‘믿음을 버린 회의주의자 하박국’이란 말을 서슴치 않은 이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알 것은, 하박국의 이러한 대질은 그의 애절한 기도요, 탄식이지, 신앙고백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탄식은 시편에도, 욥기에서도 예레미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기도였다. 그것은 그들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 물 쏟듯, 토한 것뿐이다. 어찌 남의 탄식의 기도를 듣고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시니이까’라고 기도했다고 해서, 그것을 불신앙자의 기도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너는 눈물을 강처럼 흘릴찌어다. 네 마음을(근심, 슬픔, 의심까지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찌어다’(애가 2:18,19)라고 권면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렇게 탄식한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소망의 기쁜 계시를 보여 주셨던 것이다(제2장).
그러한 큰 계시, 그것은 곧 앞으로 다시 말하겠거니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은 하박국은, 드디어 하나님과 대질하던 그런 사람의 위치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는 큰 신앙의 소유자가 되었다.

2장 20절의 그 고백, “오직 여호와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 잠잠할찌니라”고 한 이 말씀이야말로 오고 오는 모든 성도들의 ‘신앙고백의 진수’라고 보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박국은 이처럼 변화 됐으나 그의 환경은 변함이 없었다. 그 시국은 더욱 어려워졌고, 더욱 험난해져 가기만 했다. 이제 다음으로 그 시대는 어떠한 때였는지 살펴보자.


2. 하박국, 그의 시대

그 시대는 벌써 갈대아의 세력이 크게 예견되었던 때였다(1:6~10).여기의 갈대아란 신흥세력으로 재편성 된 바벨론을 말한다. 그것을 흔히 ‘신 바벨론’(Neo-Babylonian)이라고도 한다. 본래 갈대아는 바벨론 남쪽 한 지역을 말했으나 신 바벨론 시대에는 바벨론 전체를 갈대아로 불렀다.
그 세력이 활발해지기는 요시아왕(BC 626~609)때부터이다. 그러나 그 때의 갈대아는 아직도 잠재 세력이었고, 계속 앗수르가 세계국가로 군림해 있었다.
그 때에 또 다른 강국 애굽은 앗수르와 동맹관계에 있으면서 신흥 바벨론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두 강국, 앗수르와 바벨론은 서로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일으켰다. 그 때의 애굽은 물론 친 앗수르적이었으나, 반대로 유다의 요시아 왕은 반 앗수르적이었다. 그는 앗수르의 패망이 유다의 독립을 위하여 유익하다고 판단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애굽이 앗수르를 ‘도우려고’1 지중해를 거쳐 북부 가나안, 므깃도로 진출했을 때 요시아 왕은 애굽을 대항하여 싸웠다. 그러나 요시아 왕은 슬프게도 므깃도에서 전사했다.
그 날에 유다와 예루살렘에는 왕의 전사로 인하여 큰 통곡이 있었다. 그 때에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백성들을 위로하며 한 말이,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말고 산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라고 했다(대하 35:25).
그러나 ‘그들의 슬픔은 이스라엘의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대하 35:25)고 했다.
그 ‘오늘날’이란 전통적인 학설을 따른다면 에스라 시대일 것이다. 그러므로 포로 후 선지자인 스가랴도 이스라엘의 큰 슬픔을 말할 때는 ‘므깃도 골짜기에 있던 애통 같을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슥 12:11).
이러한 슬픔은, 특별히 하박국 시대의 예루살렘과 유다의 민심을 크게 자극한 사회적인 분위기였을 것이다.

하박국의 슬픈 질문,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고 하나님 앞에 대질하던, 그의 고민도 그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사실 하박국의 그러한 질문은 이스라엘의 전체 분위기를 대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의 ‘므깃도의 슬픔’은 이스라엘의 자기들의 군왕을 잃어버린 단순한 슬픔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게 되는 신앙적 고민이, 그들을 더욱 당황케 했고, 슬프게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어찌하여 요시아 왕과 같은 의인이 원수의 칼에 죽어야 하느냐? 하나님은 왜 저를 버렸을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기를 “요시아 같이 마음을 다 하고 성품을 다 하며, 힘을 다 하여...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더라”고(왕하23:25) 하지 않으셨던가?
사실 이 때야말로 이스라엘의 군중들은 슬픈 눈물이 앞을 가리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먹구름이 그들을 절망케 한 때였다. 하박국은 바로 그러한 때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요시아 왕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은, 몇몇 선지자들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요시아 왕에게는 하나님께서, 일찍이 알려주신 말씀이 있었다(대하 34:27, 28). 또한 이사야 선지자도 이 사실을 예언 한 바가 있다(사 57:1, 2).
예레미야 선지도 그것을 알았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앞에서 말함같이 ‘죽은 자를 위하여 슬퍼말고 산자를 위하여 슬퍼하라’ 했을 것이다. 여기서 산 자들이란 말은 특별히 요시아 왕의 아들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요시아 왕이 죽은 후에 유다의 장로들은 요시아의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으나, 요시아를 죽인 바로왕이 그를 폐위시키고, 그는 애굽으로 끌려 가서 죽었다(왕하 23:34).
바로왕 느고는 장남 엘리야김을 대신 왕으로 세웠다. 유다의 장로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그 동생을 세운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본래 포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왕위를 동생에게 빼앗긴, 그 불편한 심기를 바로왕에게 연락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생각한다. 애굽왕 바로는 오히려 그것을 이용했다고 본다.
애굽왕은 엘리야김이란 그 이름을 바꾸어 ‘여호야김’이란 새 이름을 주었다. 이것은 그가 애굽왕의 괴뢰임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애굽왕의 힘을 의지하고, 자기 백성들을 억압했다. 유다 왕국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때에 많은 군중들은 다시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에 큰 부흥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 부흥은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부흥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요시아 왕은 전사했고, 예루살렘과 유다는 바벨론에 점령 될 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이 부흥의 댓가인가. 그들은 의심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당하는 고통은, 요시아 왕이 모든 우상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라고 믿게까지 된 것이, 그 때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하던 것... 우리 선조들이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았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그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렘 44:17f.)고 했음을 본다.
이 말은 후일 애굽으로 피난간 자들이 요시아왕 부흥 이후의 일을 회상한 말이지만, 그것은 어찌 그들만의 생각이었겠는가. 그것은 당시의 유다 백성들에게 침투했던 불신앙, 즉 다시 말하면 요시아 왕의 부흥의 참 뜻을 의심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심정을 표출한 말 일 것이다.
신앙의 부흥과 또 하나님만을 전심 전력으로 섬기기로 결심한 것이, 달리 말하면 모든 우상을 제거한 것이, 큰 화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그 때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이것이 유다 멸망 직전, 하박국 시대의 유다왕국의 신앙적 타락상이기도 했다.
여호와김과 시드기야의 학정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 통치자들은 많은 성도를 죽일 뿐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 선지까지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요시아 왕의 부흥! 그것은 그들의 큰 파멸을 이기고, 또 오래 계속 될 포로 생활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이었음을 그들은 알 수가 없었다.
다니엘, 에스겔, 에스라, 느혜미야,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요시야 왕의 부흥의 첫 열매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은 다시 회복 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 시대는 그것을 몰랐다.

요시아 왕의 부흥 이후, 그 왕이 죽자 유다의 통치자들은 더욱 악하여졌다. 여호야김 같은 왕은 그 대표자였다. 율법책은 불태워졌고, 의인들은 오히려 큰 박해를 받았다.
이러한 악한 시대에 보내진 하박국 선지의 탄식의 기도, 하박국 1장 3절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음... 이니이다. ”
이러한 하박국의 질문은, 통치자의 학정과 그것을 편드는 관료들과 많은 제사장들을 슬퍼하는 선지자의 탄식이었다.
이 때에 물론 하나님의 답변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이 하박국을 더욱 괴롭게 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곧 갈대아인을 일으켜 악한 유다를 징벌하리라는 것이었다(1:5~11).
여기에서 하박국은 더 큰 고민을 호소했다. 그것은 곧, ‘악인을 멸하기 위하여 더 큰 악인을 보내는 것이 옳으니이까?’(1:6~17)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슬픈 환경과 고민 속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계시, 즉 그의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제 2장).


3. 그의 메시지

우리는 이제 그 메시지 이전에, 그가 그것을 받게 된 동기와, 그 과정을 살펴봄이 좋을 것이다.
2장 1절에 보면 선지자는 자기의 질문에 대한(1장) 하나님의 답변을 듣기 위하여,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했다. 본래 파수대란 파수군이 사방을 두루 살필 수 있는 높은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의 ‘파수대’란, 많은 학자들의 견해같이 상징적인 말일 것이다. 마치 선지자를 파수군이라고 상징적으로 말함과 같이.
그러므로 여기에서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는 그 뜻은, 선지자가 ‘자기의 본 임무로 돌아 가는 것’을 말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선지자는 고민하며 질문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이제는 선지자로서 자기의 본분을 다 하기 위하여, 고요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기다리는, 제 위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자기의 분량을 알고 ‘제 위치를 찾아 선다’는 것은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첫 계단일지 모른다.

로마서 12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는데, 우리가 자기의 분량을 알고 제 위치를 찾아 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라의 일꾼이나 교회의 일꾼이나 그것은 같다. 국방을 지키는 군대는 그 위치를 굳게 지켜야지 정치에 간섭해서도 안되고, 학생이 교사의 위치에 있어도 안된다. 장로가 목사의 위치에 있어도 안된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하고, 자기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
하박국의 성공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이제 비로소 제 위치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그 결심이란 곧,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보기 위하여 내가 기다리리라’(2:1 하반)는, 그것이었다.
여기에서 특별히 ‘기다리리라’(and I will keep watch, NASB)는 히브리 원문은 문법적으로도 매우 강조된 형태(piel형)이다. 이러한 문법 형태는 ‘기다리라’는 그 말이 얼마나 중요하게 강조 된 것임을 보여준다.
2장 3절에서도 계속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고 하셨다. 기다림! 이것은 신앙의 중요한 기본 요소이다. 여기의 ‘기다림’이란 히브리 원문(Zaphe, 짜폐)은 그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기대와 소망을 갖고 하나님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고 ‘살펴 보는것’(watch)을 말한다.
그 말의 어원에는 ‘소망’(hope)이란 뜻이 깔려있다(BDB, p. 859).

소망이 없는 기다림이란 무의미하다. 기다림이란 우리의 소망과 직결되어 있고, 우리의 신앙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선지자가 말한 바, ‘내가 기다리고 바라며’란 그 결심은 매우 중요했다. 이것이 그가 이제 큰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좋은 준비였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며 바라보리라’는 말과 같이 그는 말하기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 하실런지...’라고 했다. 그 말 중에, ‘그가 내게... 말씀하시리라’는 그 원문을 영문으로 직역한다면 ‘He will speak in me’라고 되어야 한다.
‘내게’란 말은 ‘to me’가 아니라 ‘in me’이다. 이것이 영문법에는 맞지 않지만 선지자들의 글에서는 자주 보는 말이다(삼하 23:2, 민 12:6, 8, 슥 1:9, 13, 14 등).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육체의 청각(to me)으로 듣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심령에 들려지는(in me) ‘마음의 소리’(영음)를 듣고자 함이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것은 ‘영음’이지, ‘청음’이 아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2장 1절 하반절에 보면, 선지자는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했는데, 그것은 한국 개역성경의 번역이고, 히브리 원문을 직역한다면, ‘나의 질문에 대하여 내가(나로, 한국개역 성경 각주)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고 될 것이다.(NIV. “and what answer I am to give in this complaint”)
여기에서 우리는 선지자가 말 한대로 ‘나의 질문’과 ‘나의 대답’은 그 차원을 전혀 달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의 귀로 듣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들었다면,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게 됨은 당연하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을 때, 우리는 그 대답을 육신의 청각으로 듣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 심령에 받아야하고, 마침내 입의 말로, 나 자신이 그것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그 묵시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하나님께서 계속 이렇게 말씀하셨다.
“...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2:2 하반).
우리 번역대로라면, 본문의 뜻은 ‘비록 바쁘게 뛰어 가는 자라도 그 계시만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우리 한국역 같이 번역한 번역들도 없지는 않다(Berkley, JB).
그러나 원문의 직역은, ‘그것을 읽는자는 뛰어 달려 가도록 하라’(NIV, NASB, KJV등)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뜻은 곧, ‘그것을 읽는 자는 뛰어가면서 그것을 전파하도록 하라!’는 말이 될 것이다.
많은 현대역들은 이것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주어질 계시는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2장 3절에서 보는 대로 다음 몇 가지로, 그 묵시의 성격을 강조하셨다.


1. 그것은 ‘정한 때’가 있다.

2.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다.

3. 결코 거짓 되지 아니하다.

4.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5. 지체치 않고 정녕 응하리라.


이러한 조목들을 보기만 해도 이것들은 곧, 이 예언은 메시야의 강림과 연결되는 말세론적 계시임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마지막 다섯번째, ‘지체치 않고 정녕 응하리라’는 말의 원문을 직역한다면, ‘Sure-ly it[He] will come, it[He] will not tarry’라고 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현대역들은 대명사 ‘it’을 앞서 보여 주신 ‘묵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으나 신약성경의 히브리서의 기자는 본문을 인용하면서(히 10:37), 그것을 ‘오실 이’(;o; ercojmenoz,The One who is coming)라고 했다. (NIV, NASB. He who is coming will come and will not delay.)
여기에서 히브리의 기자가 ‘오실 이’(The One [He] who is coming)라고 번역한 말은 LXX의 번역과 같으나 꼭 같지는 않다.
히브리서 기록에는 ‘오실 이’(o; ercojmenoz)라고 정관사(The One who is coming)가 있으나 LXX에는 정관사가 없다. 그렇다면 히브리의 기자는 ‘그 오실 이’는 분명히 약속 된 그 분이심을 확실히 선포한 것임이 분명하다(마 3:11, 요 1:15,27,30, 3:31).
그러나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하박국이 본 그 위대한 계시 즉,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문장을, 사도 바울은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말로 이해했고, 히브리서 기자는 ‘의롭게 된자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다. 2

사도 바울은 이 중요한 계시의 말씀에서 그의 신학의 기초가 되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고’(以信得義),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以信得救)는 진리를 찾게 되었고(롬 1:17, 갈 3:11),
히브리서의 기자는 ‘의인된 자’는 계속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서 이겨야 된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됐던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의인된 자는 뒤로 물러가지 않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히 11:35~39).

하박국 선지는 이처럼 한 문장에서 두 가지 뜻을 함축한 표현을 사용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오늘날 많은 성경학자들이 말하기를, 성경 본문의 한 문장은 오직 한 뜻만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그것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임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쨌든 하박국의 메시지는, 그의 기도라고도 하고(3:1), 그의 노래라고도 하는(3:19), 예언적인 기도요 예언적인 노래로 끝난다.
이것들은 분명히 공중의 예배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노래의 시작과 끝은 악기(시기오놋, 수금)에 맞춘 것이라 했고, 중간에 ‘셀라’는 음악 술어가 삽입되어 있음을 보아 더욱 그렇다. 그랬다면 하박국서는 많은 성도들에게 크게 암송되었던 것으로 본다.

마지막 3장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온 천하에 미치고(3:3~6), 그의 영광이 어떻게 충만하며(3:3), 그의 심판이 어떻게 철저하며(3:4~15), 그의 구원이 어떻게 확실할 것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마침내 주의 강림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였는데(3:3), 그가 강림하시되 초림 때 같이 베들레헴 객사의 구유가 아니요, 또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심도 아니라, 병거를 거느리시고(3:8,15)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며(3:6,10), 강림하실 것을 보여준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명했고, 칼빈(Calvin)은 마지막 그날에 성도들의 구원의 확실성을 말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진 선지자는 비록 지금은 환란을 당하고, 그 몸이 떨리며(3:16), 먹을 양식이 없어도(3:17),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는 신앙의 승리를 선포했다.
끝장의 첫머리에서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수 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라고 간절한 기도로 시작되는 것(3:2)도 매우 돋보인다.
특별히 그 마지막 결론(3:19)에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하신 말씀은 선지자의 차원 높은 역사관을 보여주는 듯 하다.
여기에서 그는 “나의 높은 곳”이란 말을 했다. 그는 이제 현실에 울고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높은 곳’에서 현실세계를 하감하는 차원 높은 위치에 선 사람이었다.
역사를 하감하는, ‘나의 높은 곳’을 가진 사람! 하박국의 이러한 모습을 보는 우리는 기쁘다.


주(註)

1.열왕기하 23장 29절에 보면, 우리 개역성경에는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 가므로 요시아왕이 나가서 방비 하더니...” 라고 했으나, 여기의 ‘치고자 하여’란 말은, ‘돕고자 하여’란 말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히브리어 전치사 l[을 ‘대하여’(against)가 아니라 ‘위하여’(for, on behalf of)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고고학 자료에서도 이미 그것은 확인되었다. 영어 성경들에서도 보면 본래 KJV는 우리 개역성경 같이 되었으나, 그 수정된 New KJV은 ‘King of Egypt went to aid of the king of Assyria’로 정정했다. 현대의 많은 번역들도 그렇다.

2. 이러한 차이는 ‘믿음으로’(by his faith)란 말이 의인을 수식하느냐(믿음으로 의로워진 자) 혹은 그 말(by his faith)이, 살리라는 말을 수식 하느냐(의로와 진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에 따라서, 전자는 사도 바울의 입장이요, 후자는 히브리기자의 입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