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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

2004.06.01 01:19

폭우 조회 수:1814 추천:16

신들은 시지프에게 끊임없이 산꼭대기에까지 바위덩어리를 굴려 올리게 하는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돌덩이는 그 자신의 무게로 해서 그 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하였다.
그들이 무익하고도 희망 없는 일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일리가 있었다.

호머의 말에 의하면,
시지프는 인간 중에 가장 현명하고 또한 가장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른 설화에 의하면, 그는 강도의 직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모순이 없다고 본다.
그에게 지옥의 무익한 노동자가 되게 한 동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첫째로 그는 신들을 경시했다고 비난을 받는다. 그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아조프의 딸 에진은 주피터에게 납치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 실종에 놀라서 시지프에게 이를 호소하였다. 이 납치 사건을 알고 있던 그는 코린트 성에 물을 대준다는 조건으로 아조프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제의했다. 하늘의 노여움보다도 그는 물의 은총을 택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지옥에서 벌을 받게 되었다.
호머는 시지프가 사신을 쇠사슬에 얽어맸다는 것도 또한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다.
플루톤(지옥왕인 죽음의 신)은 황량하면서도 적요로운 자기 왕국의 모습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의 신을 급파하여 사신(死神)을 그의 정복자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또한 시지프가 죽음에 처해 있으면서도 자기 아내의 애정을 무모하게 시험해 보려 했다고도 한다. 그는 아내에게 자기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고 광장 한복판에 던질 것을 명령하였다.
시지프는 지옥에 떨어졌다.
인간적인 사랑과는 너무나도 어긋나는 아내의 이 복종에 화가 난 그는 아내를 벌하기 위해서 지상으로 되돌아갈 허락을 플루톤에게서 얻어냈다. 그러나 다시금 이 세상의 얼굴을 보고, 물과 태양, 뜨거운 돌과 바다의 맛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지옥의 그늘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소환, 분노, 경고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또 다시 여러 해 동안, 그는 하구의 연안, 찬란한 바다 그리고 대지의 미소 앞에서 살았다. 신들의 체포가 필요하게 되었다. 메르쿠리우스(주피터의 아들인 신들의 사자)가 이 담대한 자의 목덜미를 잡고 그의 기쁨을 빼앗고는, 바위가 이미 준비되어 있는 지옥으로 강제로 끌고 갔던 것이다.

시지프가 부조리의 영웅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이해하였다.
그는 그의 고통으로서만이 아니라 정열로서도 영웅인 것이다.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와 삶을 향한 정열은 온갖 존재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일에 전념해야 되는 이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것은 이 지상의 정열을 위하여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대가이다.

지옥에 있는 시지프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전해진 것이 없다.
신화란 상상력이 그 신화에게 생명감을 주도록 만들어져 있다.

신화에서는 단지 거대한 바위를 들어올리기 위하여 수백 번 되풀이하여 언덕으로 돌을 굴려 올리는 긴장된 육체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경련이 인 얼굴, 바우에 비벼 대는 뺨,
진흙으로 뒤덮인 바위 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
그 바위 덩어리를 고정시키려고 버틴 다리,
다시 돌을 받아 안은 팔,
흙투성이가 된 아주 인간적인 믿음직스런 두 손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 측량되는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적을 달성된다.
이때 시지프는 순식간에 이 돌이 하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꼭대기로 다시 끌어 올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벌판으로 다시 내려간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로 바위 곁에 있는 기진 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그 끝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그의 불행과도 같이 틀림없이  되돌아오는 이 시간,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로 차츰차츰 빠져 들어가는 순간마다, 그는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강하다.

만일, 이 신화가 비극적이라면, 그것은 그 영웅이 의식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성공한다는 희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를 지탱한다면 그의 고통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자기 생의 매일매일을 같은 일에 종사하며 그리고 그 운명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 운명은 의식을 갖게 되는 드문 순간에 있어서만 비극적일 뿐이다.
신들의 프롤레타리인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에 대해서이다.
그의 고뇌를 이루게 했을 명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성취시킨다. 멸시로써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시지프의 하산이 어떤 날에는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또한 기쁨 속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는 또한 기쁨 속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는 또한 바위를 향해 되돌아오는 시지프를 상상해 본다. 그런데 고통은 시초에 있었다. 대지의 영상들이 기억에 너무나 생생할 때, 행복의 부름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질 때, 슬픔은 인간의 마음 속에 싹트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위의 승리이며 바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엄청난 비탄은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다.
이것은 우리들의 겟세마네의 밤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진리는 인식됨으로써 소멸된다.
이와 같이 외디프스도 처음에는 그것을 모르면서 운명에 복종한다.
그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눈멀고 절망에 빠진 그는 자기를 세상에 연결시키는 유일한 끈은 한 젊은 처녀의 싱싱한 팔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터무니 없는말이 울려온다. "그처럼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 고령과 내 영혼의 위대성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은 좋다고 판단하게 한다."
이렇게 소포클레스의 외디프스는 도스토에프스키의 키리로프처럼 부조리의 승리의 방식을 제시한다.
고대의 예지가 현대의 영웅주의와 합치된다.

행복의 어떤 개요를 쓰려는 시도 없이는 부조리는 발견되지 않는다.
"뭐라고! 그렇게 좁은 길을 통해 ………?"
그러나 세계는 단 하나밖에 없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대지의 두 아들이다. 이들은 떼어놓을 수 없다.
행복은 부조리의 발견에서 필연적으로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부조리의 감정은 또한 행복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좋다고 나는 판단한다."고 외디프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은 신성하다.
이 말은 모든 것은 탕진되지도 않았고 탕진된 일도 없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탕진되지도 않았고 탕진된 일도 없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불만과 무용한 고통에 대한 감식안을 가지고 이 세계로 들어온 신을 여기에서 추방한다.
이 말은 인간의 문제, 인간 사이에서 해결되어야만 하는 인간의 문제를 운명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시지프의 말없는 온갖 기쁨은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의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주시할 때, 모은 우상을 침묵케 한다.
갑자기 침묵에 이른 우주 안에서 무수한 감탄의 작은 소리들이 대지로부터 솟아 오른다.
무의식적이고 비밀스런 부름, 모든 얼굴들의 초대는 승리의 필연적인 이면이요 대가이다.
그림자 없는 햇빛이란 없으며 따라서 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조리의 인간은 긍정으로 대답하며, 그의 노력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개인적인 운명은 있을지라도 초월적 운명이란 결코 없다.
혹 있다면 다만 숙명적이고 경멸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인간은 자기의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자기의 삶을 향해 돌아서는 그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로 되돌아가면서 연결 없는 이 행위의 연속,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기억의 눈길 밑에서 통일되고 또한 멀지 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는 이 행위의 연속을 바라본다.
인간적인 것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근원이 있음을 확신하는 그는, 보기를 원하고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그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간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남겨둔다!
우리는 언제나 그의 무거운 짐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올리는 고귀한 성실을 가르쳐 준다.
그도 또한 모든 것은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 주인이 없게 되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도 아니고 소용없는 것도 아닌 듯이 보인다. 이 바위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이 산의 광물의 빛 하나하나가 유독 그에게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족한 것이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카뮈/시지프의 신화Albert Camus ; Le mythe de sisyphe에서